■신격호와 롯데
롯데그룹 신격호 총괄회장의 장남인 신동주 일본롯데홀딩스 부회장이 일본 롯데그룹의 모든 임원직에서 해임됐다. 이에 따라 신동주 부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롯데그룹의 지주회사인 일본롯데홀딩스는 “지난 8일 열린 임시 주총에서 신동주 부회장의 이사 해임이 승인됐다”고 9일 홈페이지를 통해 밝혔다. 앞서 신 부회장은 지난달 26일 일본 롯데그룹의 주력 자(子)회사인 롯데상사·롯데·롯데아이스 3곳의 이사직에서 해임됐다. 신 부회장의 전격 퇴진에는 신격호 총괄회장의 의중(意中)이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과 한국 롯데그룹은 신 부회장의 해임 이유에 대해 함구(緘口)하고 있지만 ‘문책(問責)성 인사’라는 게 롯데 안팎의 중론이다. <조선일보 2015년 1월 10일>

▲ 신격호

신격호(1922~ ) 롯데그룹 회장은 외국 국적을 갖고 일본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번 기업인이다. 한국인으로 외국에 나가 가장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신격호는 경남 울산에서 태어나 1939년 울산농고를 졸업했다. 가난이 지겨워 1941년 달랑 83원을 갖고 무작정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국 땅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했기에 닥치는 대로 신문?우유 배달, 잡역 등을 하며 와세다중학에 편입?졸업했다. 작가가 꿈이었으나 문학으로는 밥을 먹을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닫고 와세다고등공업학교 화학과에 입학했다.
1944년 졸업한 신격호의 첫 사업은 군수용 커팅오일(선반용 기름) 제조 공장이었다. 평소 신격호를 눈여겨보던 한 일본인 노인이 빌려준 6만 엔이 종잣돈이었다. 설립 초기 잘 돌아가던 공장은 1년 반쯤 지나 미군의 공습으로 잿더미가 되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했을 때 신격호가 손에 쥔 것이라고는 6만 원짜리 차용증서뿐이었다. 좌절할 신격호가 아니었다. 1946년 5월 도쿄에 숙소 겸 공장 ‘히카리(光)특수화학연구소’를 세워 포마드, 비누, 크림을 생산했다. 조잡하긴 했으나 물자가 부족한 시절이라 무섭게 팔려 나갔다. 신격호는 1년 반 만에 6만 엔을 모두 갚고 노인에게 보은하는 뜻으로 집 한 채를 선물했다.
당시 일본에는 껌을 씹으며 거리를 활보하는 점령군 미군이 많았다. 이를 지켜보던 일본인들 사이에도 껌을 씹는 것이 유행했다. 이 통에 껌 제조업체가 수백 군데나 난립했지만 대부분이 저질품이었다. 그래도 설탕이 오랫동안 통제 식품이고 이로 인해 사람들이 단맛에 굶주려 있었기 때문에 단맛을 내는 껌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신격호는 1947년 4월부터 껌을 생산했다. 다른 업체들의 껌이 초산비닐에 송진을 섞어서 사카린을 묻힌 것과 달리 신격호의 껌은 소량 유통되던 멕시코산 천연 치클로 만들어져 품질경쟁에서 앞섰다. 제품을 기다리며 줄을 서는 소동이 벌어질 정도로 신격호의 껌은 큰 인기를 끌었다. 주식회사 설립을 앞두고 새로운 상호를 짓는 데 골몰하던 어느 날, 한 아이디어가 신격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샬로테’였다. 신격호는 훗날 “롯데를 선택한 것이야말로 내 일생일대의 수확이자 걸작의 아이디어”라고 술회했다.
‘주식회사 롯데’는 신격호가 26세이던 1948년 6월 28일 창립되었다. 창립 당시 가장 인기를 끌었던 껌은 삼각형 풍선껌이었다. 껌마다 대나무 파이프를 붙였기 때문에 껌을 씹은 후 파이프 끝에 껌을 달아서 불면 비눗방울처럼 부풀었다. 제대로 된 장난감이 없던 시절, 삼각형 풍선껌은 히트 시리즈 제1탄이 되었다. 창업 5년 만에 풍선껌 시장 점유율 제1위를 차지하며 기염을 토한 신격호의 다음 목표는 풍선껌보다 시장이 훨씬 큰 ‘판(板)껌’이었다.
당시 판껌 시장의 점유율 1위는 하리스였다. 롯데와 하리스는 치열하게 10년 ‘상전’을 벌였다. 신격호는 타고난 광고 감각을 무기로 하리스를 쫓아갔다. 미국의 서부영화가 극장가를 휩쓸 때는 ‘카우보이 껌’을, 1951년 미일 강화조약 체결 때는 ‘강화 껌’을 내놓았다. 1950년대 말 일본에서 남극탐험대가 출발할 때는 ‘남극 껌’을 선보였다. ‘크리스마스 껌’, ‘설날 껌’은 물론 심지어 조종사를 위한 ‘파일럿 껌’도 내놓았다.
컬러TV 방송이 시작된 1957년 5월, 롯데는 당시 가장 인기 있는 가요 프로그램의 광고를 모두 확보해 프로그램 이름을 ‘롯데 가요 앨범’이라고 바꿀 정도로 홍보전에도 적극적이었다. 신문, 잡지, 라디오, TV 등 모든 매체를 총동원해 ‘롯데 껌은 입 속의 연인’이라는 캐치프레이즈도 유행시켰다. 또한 껌 포장지 안에 ‘1,000만 엔 현상’ 추첨권을 붙여 하리스를 바짝 추격했다. 결국 하리스는 롯데와 벌인 10년 전쟁에서 패하고 1960년대 중반 다른 회사에 흡수 합병되어 사라졌다.

“사명(社名)으로 롯데를 선택한 것이야말로 내 일생일대의 수확”
1960년대 들어 롯데는 일본 껌 시장의 70%를 석권하기에 이르렀다. 신격호는 초콜릿·캔디·청량음료·아이스크림 시장에도 진출, 1960년대 말 일본 과자업계의 명문인 ‘메이지’와 ‘모리나가’를 추월해 일본 제1의 종합 과자 메이커로 우뚝 섰다.
신격호는 껌과 과자를 팔아 모은 돈으로 기회가 닿을 때마다 도쿄 변두리 땅, 황무지, 저습지 등을 꾸준히 매입했다. 1960년대에 들어 일본이 고도성장기에 진입했을 때 이 변두리땅은 신시가지의 중심부로 바뀌어 금싸라기 땅이 되었다. 신격호는 1963년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를 만나 투자를 제안받고 1967년 4월 서울역 앞에 롯데제과 설립을 계기로 모국 투자를 본격화했다. 호텔롯데, 롯데쇼핑, 호남석유화학 등도 창업?인수해 롯데그룹의 발판을 마련했다.
오늘날 신격호는 현대적인 유통업(롯데백화점), 한국식의 호텔업(호텔롯데)을 한국에 정착시킨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신격호가 호텔에 투자하게 된 것도 “반도호텔과 워커힐의 적자가 크다”며 인수를 요청한 박정희 대통령의 권유에서 비롯되었다. 신격호는 반도호텔만을 인수해 그곳에 지금의 38층짜리 롯데호텔을 세웠다. 1960년대 말에는 ‘셔틀 경영’이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졌다. 짝수 달은 일본에서 ‘시게미쓰 다케오’란 이름으로, 홀수 달에는 한국에서 ‘신격호’란 이름으로 경영 활동에 나서고 있는 신격호를 가리킨 말이다. 물론 신격호는 일본인으로 귀화하지 않았다.
신격호는 일본의 역대 총리들과도 친분이 깊었다. 1985년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의 중매로 신격호의 차남 신동빈이 결혼했을 때 두 사람의 결혼식에 나카소네 야스히로 당시 총리와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 등 전·현직 3대 총리가 참석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내실 위주의 경영 철학으로 탄탄하던 롯데의 재무구조는 1997년 11월 IMF 경제위기 때 진가가 발휘되었다. 국가 부도 위기 상황에서도 롯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1억 달러의 외자를 도입하고 신격호의 개인 사재 2,000만 달러를 출연해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격호의 성취는 한일 관계사에 기록된 양국인의 협력사업 중 최고의 성공 사례로 꼽히고 있다.
신격호는 1971년부터 2013년 현재까지 한 해도 빠짐없이 고향인 울산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에서 마을 잔치를 열고 있다. 댐 건설 때문에 마을이 수몰된 고향 마을 주민을 위로하기 위해 마을 잔치를 연 것이 연례행사로 굳어진 것이다.
신격호는 3명의 아내에게서 4명의 자식을 뒀다. 작고한 첫 부인에게서 딸 신영자를 봤고 일본인 시게미쓰 하츠코에게서는 신동주와 신동빈 두 아들을 낳았다. 이후 미스롯데 출신인 서미경에게서는 막내 신유미씨를 낳았다. 신영자는 롯데쇼핑 사장을 지내고 지금은 롯데재단 이사장으로 있다. 장남 신동주는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으로 있다가 최근 해임되고 차남 신동빈은 한국롯데 회장으로 있다.

■프랑스와 알제리
프랑스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샤를리 에브도’ 테러의 범인들이 대부분 알제리계 무슬림 젊은이들로 확인되면서 프랑스와 알제리의 오랜 악연에 새삼 관심이 쏠리고 있다. 언론인과 경찰 등 12명을 살해하고 사살된 사이드 쿠아시(34)와 셰리프(32) 쿠아시 형제, 그리고 여성 공범으로 도피 중인 하야트 부메디엔(24)은 모두 알제리 출신 이민자 2세들이다.… 프랑스는 전체 인구 6600만 명 중 거의 10%인 650만여명이 무슬림이다. 이 중 약 500만 명이 알제리계 주민이다. 영국 일간 ‘인디펜던트’의 중동 전문기자인 로버트 피스크는 지난 9일 “테러의 뿌리는 1954년 알제리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번 사태의 근본적 배경은 프랑스가 애써 무시하려는 알제리 독립전쟁(1954~1962)이라는 게 피스크의 시각이다. 1954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는 민족해방전선(FLN)의 주도로 독립전쟁을 시작했다. 이후 독립때까지 150만 명의 알제리인이 희생됐다. <한겨레 2015년 1월 13일>

▲ 알제리를 방문한 드골(1958.6.4)

100년이 넘도록 알제리를 식민지로 삼아온 프랑스의 식민정책이 한계에 봉착한 것은 1954년이었다. 그해 5월 프랑스는 56일간의 사투 끝에 베트남 디엔비엔푸를 빼앗겨 100년에 걸친 인도차이나 지배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 비틀거리는 늙은 맹수를 상대로 북아프리카 알제리에서 민족해방운동의 불길이 치솟아 오른 것은 1954년 11월 1일이었다. 그해 3월에 결성된 민족해방전선(FLN)의 주도로 일어난 봉기로 유럽인과 친 프랑스 이슬람교도 7명이 사망하고 14명이 부상한 것은 8년에 걸친 알제리 독립전쟁의 신호탄이었다.
알제리를 식민지로 보지 않고 지중해 다민족 공동체로 여겨온 프랑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오랫동안 알제리에서 살아온 2세대, 3세대 프랑스계 주민들에게 알제리는 고향이었고 프랑스의 일부였으나, 알제리 원주민들에게 프랑스는 점령자일 뿐이었다.
프랑스군을 직접 상대하는 것이 결코 간단치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FLN은 프랑스를 비롯 유럽 각지에서 이주해온 온건파 입식자(入殖者)와 친 프랑스 이슬람교도들을 제거함으로써 동화와 다민족주의 개념을 파괴하는 것을 1차 목표로 삼았다. 자신들의 잔학 행위에 자극받아 프랑스가 잔인하게 보복공격을 가해오거나 또는 잔학 행위에 겁먹은 친 프랑스계 이슬람 교도들이 자신들 진영으로 가담하게 한다는 계산이었다.
2년 반 동안 FLN은 1000여 명의 유럽인과 6300여 명의 아랍인을 살해했다. 1955년 여름부터는 남녀노소를 막론한 모든 프랑스인의 대량학살 방식으로 대상을 넓혔다. 역시 목적은 프랑스군의 보복 유도에 있었다. 예상대로 프랑스군은 강경책으로 선회해 1000여 명 이상의 FLN 대원을 살해했다. FLN은 "대원 한 명이 처형될 때마다 100명의 프랑스인을 살해하라"는 명령으로 대응했다. 이처럼 FLN의 폭력이 끊이질 않자 1957년 1월 프랑스 정부가 알제리 주둔 프랑스군에게 FLN을 소탕하는데 절대적인 작전권을 주고 고문 금지도 폐지했다.
프랑스군이 초기 5만 명에서 50만 명으로 늘어나고 이들의 대대적인 소탕작전으로 점차 알제리에서 테러가 자취를 감추자 이번에는 프랑스군의 과도한 진압에 프랑스인들이 불만을 터뜨렸다. 군에 주어진 과도한 권한과 이들에 의한 야만적인 전투방식으로 자유주의자와 중도파가 전쟁 반대쪽으로 기운 것이다.
게다가 알제리 주둔 프랑스군이 사실상 사유화된 것도 여론을 악화시켰다. “알제리의 독립이 프랑스 국가 양심의 총체적인 부패보다 오히려 낫다”고 생각한 프랑스인이 많아지면서 전쟁에 대한 정치적 통제를 회복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끝없는 전쟁에 지쳐버린 프랑스인들도 지지자와 반대자로 갈려 대립이 심화되었다.

독립 투쟁으로 이슬람교도 100만여 명 목숨 잃어
화해할 수 없는 양 세력의 충돌은 1958년 5월의 폭발을 불렀다. 알제리 주둔 프랑스군이 반란을 일으켜 식민정부 청사를 점거하고 공공치안위원회를 설치해 통치권을 장악한 것이다. 50만 명의 병사를 거느린 알제리 주둔 프랑스군과 본국의 군대 사이에 내전의 위험성이 고조되었다.
코르시카가 알제리 반군 편으로 넘어가고 알제리 반군이 본국을 습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면서 알제리 사태는 혼미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반군이 사태 해결의 적임자로 드골을 선택했다는 점이었다. 드골은 반란군의 본토 침략 저지를 위해 정부 명령에 의한 통치와 신헌법 제정을 조건으로 총리직을 받아들였다.
드골은 6월 1일 총리에 취임하고 6월 4일 알제리로 날아가 반군 세력에 동조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당신들의 말을 알겠다”고 안심시키고는 “프랑스령 알제리 만세”를 외쳤다. 그렇다고 드골은 식민지주의자가 아니었다. 겉으로만 그랬을 뿐 내심으로는 알제리를 포기하고 있었다.
드골은 알제리 사태 해결을 늦추는 대신 견고하게 권력을 장악해나갔다. 1958년 9월 28일 대통령 권한을 집중시키는 제5공화국 헌법을 채택하도록 하고 12월 21일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FLN과는 비밀회담을 통해 문제를 풀었다. 1961년 1월에는 드골이 알제리 민족자결정책을 국민투표에 부친 결과 72%의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투표 결과는 프랑스령 알제리의 종식을 의미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과격파 지지자들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 그들의 손에 자폭용 폭탄을 쥐어준 결과를 낳았다. 반란군은 1961년 4월에 드골의 속임수를 알아채고 그를 타도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미 실기한 뒤였다. 시기와 명분을 놓친 반란이 성공할 리 없었다.
반란은 실패했고 지도자들은 대부분 항복하거나 체포되었다. 다민족 공동체로서의 알제리가 사실상 끝나는 순간이었지만 마지막으로 무자비한 살육전이 전개되었다. 백색 테러리즘 단체인 OAS가 1년 이상 폭력을 휘두르며 폭탄, 기관총 등으로 알제리인들을 무참히 살해한 것이다.
프랑스 정부와 알제리 임시정부 간의 ‘에비앙 협정’(1962년 3월 18일)으로 사태가 일단락되었지만 폭격기, 탱크와 군대를 동원한 OAS의 테러와 폭력은 끊이질 않았다. OAS는 프랑스·알제리 곳곳에 폭탄을 설치하고 드골의 암살을 기도했으며 수천명의 이슬람계 민간인을 학살했다.
‘에비앙 협정’은 프랑스(4월 8일)와 알제리(7월 1일) 양국 국민의 국민투표를 거쳐 승인되었다. 7월 3일, 드골이 특별 메시지를 통해 알제리의 독립을 공식 선포함으로써 마침내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통치가 132년 만에 종지부를 찍었다. 지난 8년 동안 프랑스 군인 1만7000명과 이슬람교도 100만여명이 목숨을 잃은 뒤였다.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   
스웨덴 최대 기업집단인 발렌베리 그룹을 이끌었던 피터 발렌베리 전 회장이 1월 19일 사망했다. 향년 88세.… 발렌베리 그룹은 1856년 발렌베리 전 회장의 증조부인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가 설립한 은행(오늘날의 SEB 은행)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후 금융에서 건설, 기계, 전자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150년 전통의 재벌 가문이 됐다. 4대 후계자인 피터 발렌베리 전 회장은 3대 후계자인 마르쿠스 발렌베리 전 회장의 차남이지만 장남인 마르크 발렌베리가 자살하면서 기업을 이어받았다. 현재 발렌베리 그룹은 마르크의 아들인 마르쿠스 발렌베리가 SEB 은행 회장을 맡고 피터의 아들 야콥 발렌베리가 인베스터AB 회장을 맡는 투톱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중 헝가리의 유대인 2만명 이상을 홀로코스트(대학살)에서 구한 스웨덴 외교관 라울 발렌베리도 발렌베리 가문의 일원이다. <연합뉴스 2015년 1월 21일>

▲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

발렌베리 가문이 오늘날 스웨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2014년 기준 스웨덴 GDP의 30%, 스웨덴 상장 기업 전체 시가총액의 3분의 1이 발렌베리 가문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스웨덴의 대표은행 SEB, 유럽 최대 가전업체 일렉트로룩스, 세계최대 통신장비업체 에릭슨, 항공방위산업체 SAAB, 중전기?산업장비 업체 ABB, 세계 3대 트럭회사 스카니아 등 20여개나 되는 세계 수준의 알짜기업들이 직?간접적으로 발렌베리 가문에 속해 있다. 그런데 이들 계열 기업들은 발렌베리 그룹 소속이면서도 계열사라는 동질감은 갖고 있지 않다. 기업 이름에 ‘발렌베리’라고 쓰지도 않고 로고도 각기 다르다. 현안이 있을 때만 주요 경영자들이 모여 정보를 나누며 유대감을 갖는 정도다.
발렌베리 가문의 주식 소유 구조는 독특하다. 개별 기업의 주식은 ‘인베스터AB’라는 지주회사에 속해 있는데 인베스터AB는 발렌베리 가문이 직접 소유하지 않고 발렌베리 가문이 설립한 공익재단 소유로 되어 있다. 따라서 개별 기업의 이익은 배당 형태로 인베스터AB를 경유해 공익재단으로 귀속된다. 이렇게 벌어들인 재단의 돈은 주로 대학교육이나 연구개발비 등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곳에 기부된다. 공익재단들이 발렌베리 가문의 영향력 아래에 있긴 하지만 재단은 독자적인 재단법의 규정대로 운용되기 때문에 발렌베리 사람들이라고 재단을 어쩌지 못한다. 이런 제도는 기업 소유권을 사회에 돌려준 대신 경영권 세습을 인정받은 스웨덴식 타협의 산물이다.
발렌베리 가문의 신화는 앙드레 오스카 발렌베리(1816~1886)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856년 스톡홀름 엔스킬다은행(SEB)을 설립함으로써 발렌베리 가문의 초석이 되었다. 1대 발렌베리가 그룹의 주춧돌을 놓았다면 2·3세대는 그룹의 기둥과 대들보를 세워 골격을 갖췄다. 기업의 흥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훌륭한 리더라는 의미로 “선장이 우선, 그 다음이 배”라는 가문의 원칙이 확립된 것도, 그룹 운영의 책무를 두 사람에게 맡기는 ‘투 톱 경영의 룰’이 정착된 것도 2세대 때부터였다. 3세대는 그룹의 확장을 주도하고 4세대는 발렌베리 가문의 가치를 정착시켰다.
발렌베리 가문의 후계자가 되려면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해야 하고 세계 명문대에서 MBA 코스를 거쳐야 한다. 뉴욕이나 런던, 파리 등지의 국제금융회사에서도 근무한 경험이 있어야 하며 리더십, 애국심, 도덕성도 갖춰야 한다.
발렌베리 그룹에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 준 것은 1911년 개정된 스웨덴 은행법이었다. 은행들로 하여금 일반 기업에 대한 주식 소유와 경영 참여를 허용한 개정 은행법 덕에 스톡홀름 엔스킬다은행(SEB)도 휘하에 여러 제조기업들을 거느렸다. 그러나 1916년 은행이 제조업체 주식을 장기간 보유하는 것을 억제하는 기업법이 채택됨에 따라 SEB은행은 투자회사 ‘인베스터AB’를 설립해 지주회사의 기능을 맡도록 했다.
그런 가운데 1932년 좌파 정당인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장악했다. 사회민주당은 대기업을 국유화하는 대신 그들의 기득권을 인정해주고 국민경제를 위한 상호공존을 택했다. 사회민주당이 1936년에도 좌우연정을 통해 재집권하자 대기업은 정부 정책에 적극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극심한 노사분규가 시작되자 사민당 정부는 노사정 3자 협약을 중재했다. 그래서 수년간의 산통 끝에 체결된 것이 독점자본과 복지국가의 공존을 가능케 한 ‘살트셰바덴 협약’이다.

스웨덴을 고도경제성장?복지국가로 재탄생시킨 기폭제
오늘날 ‘상생 정신’으로 상징되는 살트셰바덴 협약은 1938년 12월 20일 스웨덴경영자연합회(SAF)와 스웨덴 중앙노동조합(LO) 간에 체결되었다. 협상이 진행된 휴양지 지명을 따서 살트셰바덴 협약으로 명명된 협약의 핵심은 오너 일가가 지배권을 인정받는 대신 회사 이익금의 85%를 법인세로 납부하는 것이다.
또한 일자리를 제공하고 기업의 사회공헌 등을 의무화했다. 노조는 파업을 자제하고 노조 차원에서 임금상승을 막아 기득권을 포기했다. 정부는 노조에는 무료에 가까운 의료와 교육 서비스 지원을 약속하고, 기업에는 지주회사를 통한 피라미드 소유 구조와 차등의결권을 허용함으로써 발렌베리 같은 대기업들이 지배주주 체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왔다.
차등의결권이란 안정적인 경영활동을 보장하기 위해 기업의 주식을 100% 의결권이 있는 주식과 의결권이 일부만 보장된 주식으로 구분해 기업이 의결권이 있는 주식을 통해 지배주주 체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소위 ‘황금주’로 불리는 이 차등의결권 보장으로 오늘날 발렌베리 오너 일가는 지주회사의 지분을 5.3%만 갖고 있으면서도 21.5%의 의결권을 행사하고 있다.
살트셰바덴 협약은 이후 사용자와 노동자 관계를 신뢰 관계로 발전시키고 산업화를 가속화함으로써 스웨덴 국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켰다. 스웨덴을 갈등사회에서 고도경제성장?복지국가로 재탄생시킨 기폭제 역할을 했다. 또한 노동조합을 지지기반으로 장기집권해온 사민당과, 대를 물리며 전략산업에서 기업활동을 해온 발렌베리 가문이 안정된 공조체제를 이루도록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살트셰바덴 협약은 북유럽 전체로 확산되어 오늘날 북유럽에는 발렌베리 그룹과 유사하게 기업을 경영하는 회사들이 많다. 2011년 현재 스웨덴 상장기업의 55%, 핀란드 상장회사의 36%, 덴마크 상장 주식회사의 33%가 이런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다.
발렌베리 가문은 2차대전의 격랑에서 스웨덴이 중립을 지켜 전화를 피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쟁 중 가문의 3세대인 야콥 발렌베리 1세는 영국을 맡고, 그의 동생인 마르크스 발렌베리 2세는 나치 독일을 맡아 사업관계로 맺어진 커넥션을 이용해 스웨덴을 전쟁에 휘말리지 않게 한 것이다. 발렌베리 가문은 독일과의 커넥션을 이용해 중요한 정보를 연합군에 제공하기도 했지만 독일의 자동차부품업체 보쉬의 미국 내 자산 동결을 편법으로 막아주어 종전 후 나치 독일에 협조했다는 오명을 피하지 못했다. 중립을 위한 스웨덴의 이런 이중성으로 주변 스칸딘나비아 국가들로부터 맹공을 받기도 했다.
승승장구하던 발렌베리 가문에 위기가 찾아온 것은 1960년대 후반이었다. 이른바 68혁명으로 대표되는 급진적 좌파운동이 전 유럽을 휩쓸면서 발렌베리 가문에도 집중포화를 가한 것이다. 젊은이들이 날마다 SEB 은행 본사 앞에 모여들어 반발렌베리 시위를 벌였으나 발렌베리는 기업 본분에 집중하고 가문의 사회적 기여도를 확대하는 방법으로 위기를 돌파했다. 이때 ‘존재하지만 드러나지 않는다’는 발렌베리 가문의 또 다른 원칙이 뿌리를 내렸다. 발렌베리 가문은 현재 5대째 내려오는 세습 경영을 하고 있는데도 스웨덴 국민의 폭넓은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국가경제에 기여하고 사회에 봉사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