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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칼럼] 뮤지컬 배우 겸 가수, 윤복희의 삶과 노래[2]
‘무대는 나의 제2고향, 세상에서 가장 편한 곳’
2020년 02월 06일 (목) 16:18:34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말보다 노래를 먼저 배웠고 걸음마를 채 떼기 전부터 무대에서 춤추는 것을 보았다고 회고하는 윤복희씨. 부모님을 따라다니며 극장에서 젖을 먹고 말을 배우고 걸음마를 익혔다.

뮤지컬 배우이자 영화배우 그리고 싱어송라이터 윤복희씨.
그가 스크린에 처음 등장한 것은 영화 ‘안개 낀 서귀포(1958년, 임한림 감독)’다. 이어 김승호 주연의 ‘곰(1959년, 정창화 감독)’,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년, 정창화 감독)’ 등 여러 편에 출연했다. 영화에서도 어김없이 ‘천재소녀’라는 별칭이 따라 붙었다.

지금까지도 미8군쇼 스타의 전설로 불리는 그는 처음 오산비행장 부근의 미8군클럽 '제트 스트립밴드'를 통해 '10분간의 무대'에 서기 시작해 '에이원쇼'의 간판스타가 되었다. 1963년, 불과 열일곱의 나이에 워커힐 개관기념무대에서 재즈의 거장 루이 암스트롱과 함께 공연을 펼쳐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이후 세계무대로 진출한 ‘코리언 키튼즈’의 리더로, 그리고 ‘대한민국 미니스커트 1호’로 숱한 화제를 몰고 다녔던 이슈메이커 윤복희씨는 현재까지도 열정적으로 뮤지컬 무대에 선다. 그의 무대 철학은 남다르다. 태어날 때부터 보고 자란 무대였기에 세상에서 가장 편한 곳이 무대라고 강조한다. 뮤지컬 배우 겸 가수 윤복희의 삶과 노래, 그 두 번 째.

글 l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부친 따라다니며 ‘뽀-기(福姬)’라는 이름으로도 무대에 올라

▲ ‘윤부길과 그 악단’의 ‘코미디 크루(Comedy Clue)' 공연(화신영화관, 1957년) 광고와 ‘부길부길쇼’ 공연 장면. 가운데 인물이 윤부길.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많은 것이 바뀌었다. 무엇보다 일인다역의 코미디를 구사하며 ‘못하는 게 없었던’ 천재, 부친 윤부길은 아편을 끊고 국립요양소에서 나와 다시 유랑극단에 들어간다. 대신 복희와 오빠 항기는 충청도의 ‘안골’에 맡겨졌다. 안골은 두 남매가 ‘할머니’라 부르던, 그러나 부친의 본부인인 ‘큰엄마’가 사는 곳이었다.

어쩔 수 없이 눈칫밥을 먹어야하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두 남매에게 부친이 다시 데리러 온 것은 1년 쯤 뒤였다. 1956년 5월, 우리나라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 ‘HLKZ-TV’가 생기면서 부친이 쇼를 맡게 된 것. 악극단 공연도 계속 이어갔다.

부친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면서 모처럼 세 식구가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오빠 항기는 학교에 다시 들어가고 돌봐줄 사람 없는 어린 복희는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이따금씩 무대에 섰다. ‘뽀-기(福姬)’라는 이름으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윤부길과 그 악단’의 ‘코미디 크루(Comedy Clue)' 공연에서다. 6.25 전쟁으로 파괴되었다가 1957년에 재개관한 화신영화관 무대에서였다.

가수 백난아씨가 운영하던 ‘부우케 가극단’ 무대에도 섰다. 1957년 8월, 시공관에서 펼쳐진 부우케 공연은 1부 악극, 그리고 2부는 버라이어티쇼로 구성되었다.

“30분짜리 연극이었어요. 나는 전쟁고아로 구두 통을 메고 엄마를 찾아다니는 구두닦이 소녀 역할을 맡았지요. 얼굴에 시커먼 구두약을 칠하고 헐렁한 군복을 입은 채 ‘보고 싶은 엄마’라는 노래를 불러요. 그러면 객석 여기저기서 흐느끼기 시작하지요.”

‘보고 싶은 엄마’는 무대 음악을 맡은 안드레(작곡가 손목인 선생의 또 다른 예명) 작곡의 노래다. 윤복희씨는 이 노래를 지금까지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별을 보고 울었어요/달을 보고 울었어요/어디 갔나 내 어머니 불러도 대답이 없네/비가 오고 눈이 오면 엄마 품이 그리워요/어디 갔나 내 어머니 불쌍한 내 어머니... 노래가 끝난 뒤 ‘엄마!’하고 울부짖으면 객석도 따라서 함께 눈물바다가 돼요. 관객들은 제가 얼마 전에 엄마를 잃었다는 걸 알거든요.”

점차 노래에 대한 반응이 높아지자 극단 측에서는 음반을 출시하기로 하고 윤복희를 녹음실에 데려갔다. 그러나 정작 취입에는 실패했다.

“나는 연극을 하면서 무대에서만 노랠 해봤지, 벽을 보고 부르자니 도저히 못하겠는 거야. 열 몇 번인가 계속 불렀는데도 안 되는 거야. 결국 손목인 선생님이 “복희야, 안되겠다. 너는 천상 무대에서 그냥 살아라.” 그러시더군요.”

부친 윤부길씨 마저 타계, ‘어른 아닌 어른’이 되다

▲ 영화 첫 데뷔작 ‘안개 낀 서귀포’ 포스터와 전단지, 1958년.

부친의 말년은 쓸쓸했다. 부친 윤부길씨의 별세 소식이 1959년 12일 14일 자, 동아일보 3면 ‘휴지통’ 란에 짧게 실린다.

‘한때 코미디언으로 이름을 날렸던 윤부길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부길부길쇼’로 뭇 팬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윤씨는 한 때 ‘마약중독자’로 전락(轉落)의 생활까지 해오다가... 재생의 길을 찾아 연예계 생활을 이어오던 중 불행히도 병의 재발로 지난달 중순경 온양에서 그만 운명을 했다는 것. 이 사실은 그의 딸 尹福姬(윤복희) 양을 통해 전해졌다.’라는 것이 기사의 전부. ‘세기의 천재’라 불리던 인물의 마지막 모습치고는 너무도 초라했다.

기자에게 이 소식을 전할 당시 윤복희는 아역스타로 주목을 받고 있었다. ‘스크린을 장식하는 베이비 스타의 세계(동아일보 1959년 5일 10일 자)’, ‘내일의 성좌(星座)를 좌우할 꼬마별들(동아일보, 1961년 6일 25일 자)’ 같은 기사들을 통해 안성기, 전영선 등과 함께 조명 받고 있었다.

▲ 김승호 주연의 영화 ‘곰’ 포스터(1959년)와 윤복희의 유년시절.

부친의 타계하던 1959년, 윤복희는 김승호 주연의 영화 ‘곰(정창화 감독)’에 출연하고 있었다. 영화에서도 ‘천재소녀’라는 별칭은 어김없이 붙어 다녔다.

윤복희가 처음으로 출연했던 영화는 ‘안개 낀 서귀포(임한림 감독)’다. 부친 윤부길과 함께 출연했다. 타계 1년 전인 1958년에 개봉되었는데 윤복희씨는 이 영화를 어렴풋이 뮤지컬 성격의 영화였다고 기억한다.

“제주도 서귀포에 있는 목장에서 3개월 동안 촬영했어요. 출연진들이 모두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출연했던 게 유독 기억이 나요.”

부친 윤부길을 비롯해서 황해, 성나미, 윤왕국 등이 출연한 이 영화의 포스터에 적힌 문구는 ‘국산영화 공전 최대의 構想(구상)과 스케일! 코리안 텍사스!’다. ‘가축 천두 동원(家畜 千頭 動員)’이라는 이색 문구도 눈에 띈다. 1천 마리의 말이 등장한다는 뜻이다. KK 스틴슨이라는 인물도 특별 출연했다.

어린 시절 윤복희가 출연했던 또 다른 영화는 1960년에 개봉된 ‘햇빛 쏟아지는 벌판’이다. 이서구 극본의 HLKA 연속극을 영화화했다. 정창화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에서 윤복희는 주인공 점례(김지미 분)의 어린 시절 역을 맡았다.

“아역이었지만 역할 비중도 컸고 출연료도 괜찮았어요. 여기저기 따라다니며 심부름도 하고 열심히 촬영도 했지요. 무척 재미있었어요.” 윤복희씨의 회고다.

‘유년시절, 나를 키운 것의 8할은 배고픔과 무대’

▲ 영화 ‘햇빛 쏟아지는 벌판’ 전단지와 영화포스터, 1960년.

이 무렵 윤복희는 동갑내기 가수 송영란과 ‘투 스쿼럴스(Two Squirrels, 두 다람쥐)’라는 듀엣을 결성한다. 송영란은 가요1세대 가수 송달협씨의 딸.

“공연 중에 우연히 영란이 엄마를 만나게 됐어요. 영란이 엄마도 아버지와 같은 연예계 1세대였죠. 송영란 엄마는 나와 영란이를 묶어 ‘투 스쿼럴스’라는 듀엣을 만들어 춤과 노래를 하도록 했어요. 우리 둘이 무대에 오르면 환호성이 대단했죠. 유엔센터에서도 공연하고 미군 트럭을 타고 전국 미군기지 순회공연까지 했었죠. 가는 곳마다 인기가 대단했어요.”

그러나 무대 바깥의 생활은 매우 비참했다고 털어놓는다.
“아무리 힘들게 춤을 추고 노래해봤자 내게 돌아오는 건 아무 것도 없었어요. 영란이네 집 마룻바닥에서 자고 빨래까지 해야 했죠. 옷도 늘 영란이가 입다 버린 것을 입어야 했고...”

얼마 뒤 투 스쿼럴스가 해체되고 윤복희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럴수록 더욱 이를 악물었다. 누구에게 기댈 데도 없고 여기서 밀리면 안 된다는 위기의식이 더욱 그를 혹독하게 단련시켰다. 그 스스로 ‘어려울 때일수록 더 높이 점프하는 성격 그대로’ 미8군 쇼 무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피나는 노력을 했다.

돌이켜보면 외갓집에서 지내던 시절, 근처 오산비행장에서 일하고 있던 외삼촌이 연결고리가 되어 첫 발을 내디딘 미8군쇼 무대였다. 오산비행장 근처 '제트 스트립밴드' 마스터에게 겨우 사정해 '10분간의 무대'에 서기 시작한 열세 살의 복희. 그녀는 결국 미8군쇼 단체인 '에이원쇼'의 간판스타로 부상한다.

지금까지도 ‘윤복희’라는 이름과 그가 소속된 '에이원쇼'는 미8군쇼의 전설로 회자된다. 오디션에서 늘 A등급, 혹은 스페셜A 등급을 받았을 만큼 실력이 대단했다.

참고로 미8군쇼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미군부대에서 파견된 쇼 관계자들의 직접 심사로 실시되던 오디션을 반드시 거쳐야 했다. 전체 쇼의 흐름과 구성, 그리고 편곡은 물론 영어까지 심사 대상이었던 이 결과에 따라 스페셜A(AA), A, B, C클래스로 등급이 매겨졌다. D는 탈락. 3개월마다 한 번 씩 엄격하게 실시되던 이 분기별 오디션 결과에 따라 지급되는 출연료는 물론 서는 무대도 달랐다.

당시 '에이원쇼'의 밴드마스터였던 작곡가 겸 기타리스트 김희갑씨에게 윤복희에 대한 기억은 각별하다.

"복희가 아주 어릴 때였죠. 영어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냥 소리 나는 대로 우리말 발음을 적어 연습하곤 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복희는 발음이 아주 정확해 오디션에서 늘 더블 A를 받곤 했지요. 또 내가 기타를 가르쳐주면 이내 무대에 올라 독주를 해낼 정도로 놀라운 음악적 감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 송영란과의 듀엣 ‘투 스쿼럴스’ 시절, 그리고 미8군쇼 무대에서 기타치고 있는 윤복희. 자서전 ‘딴따라(1997년, 문예당)’ 중에서.

재즈 트럼펫의 거장, 루이 암스트롱과 함께 무대에 서다

1963년 4월, 미8군쇼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 사건이 벌어진다. 당시 ‘동양 최대’라는 워커힐 호텔 개관기념 차 내한한 루이 암스트롱의 공연에 윤복희가 함께 올랐기 때문이다.

“열일곱 살이 되던 1963년 봄이었어요. 당시 세계 최고의 아티스트, 루이 암스트롱을 워커힐 호텔 개관 기념공연에 초대했지요. 근데 희한한 일이 생겼어요. 그가 한국에 오자마자 나를 찾는 겁니다. 주한 미군으로 근무하다 귀국한 이들로부터 ‘한국에 루이 암스트롱 노래를 기차게 잘 부르는 어린 여가수가 있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미국에서 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고 해요. 실제로 나는 열세 살 때부터 미8군 무대에서 암스트롱의 노래를 유독 많이 불렀었죠. 걸쭉한 목소리를 흉내 내 오디션에도 합격했고, 미8군 무대에도 설 수 있었고 또 어떤 무대든지 그의 노래 한두 곡씩은 꼭 불렀으니까요.”
루이 암스트롱과 처음 만나던 순간은 지금까지도 기억에 생생하다. 윤복희씨는 자서전 ‘딴따라(1997년, 문예당 발행)’에서 이 부분을 상세히 밝히고 있다. 그 부분을 보자면, “소속사인 에이원쇼 박인순 사장을 비롯한 몇 명의 스태프와 함께 그가 묵고 있는 호텔에서 만났습니다. 나는 이미 미8군을 출입하면서 어지간한 영어는 익힌 상태였죠.
“내가 노래할 테니 미스 윤이 따라와 봐요.” 암스트롱은 자신의 오리지날 레퍼토리인 ‘성자의 행진(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폭포수가 쏟아지는 것 같은 음성이 쩌렁쩌렁 호텔 방을 울렸습니다. 나는 침착하게 그의 노래에 맞장구를 쳤습니다. 재즈의 싱커페이션 엇박자처럼 서로 주고받으며 노래했죠.
“어메이징! 뷰티풀! 나와 함께 공연합시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나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 모두 깜짝 놀랐습니다. 나는 아예 얼이 빠졌습니다. 박사장은 내게 다른 스케줄을 모두 취소하고 암스트롱 공연에만 집중하도록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워커힐 개관 기념 무대에 암스트롱과 함께 설 수 있었죠. 게스트가 아니라 시작부터 끝까지 그와 한 곡씩 주고받으며 공연을 이끌었습니다. 암스트롱은 피날레로 나를 번쩍 들어 무동을 태우면서 ‘브라보’를 외쳤습니다.
말 그대로 꿈의 무대였습니다. 나는 신데렐라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아니, 신데렐라가 됐습니다. ‘세계적인 가수 루이 암스트롱과 공동 무대를 갖다니…’ 그날 밤 흥분에 휩싸여 한숨도 못 잤습니다.”라고.

‘TV는 사랑을 싣고’, 35년 만에 은사님과 눈물의 재회

미8군쇼 생활이 점차 안정되면서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그러자 마음속 깊은 곳에 잠재돼 있던 욕구가 고개를 쳐들었다. 교복을 입고 학교에 다니고 싶다는 것.
“며칠을 고민하다 당시 경복고에 다니는 사촌오빠를 찾아갔어요. 그때부터 3개월 동안 검정고시를 위한 특별과외를 받으며 죽어라고 공부했죠. 헌데 막상 시험 응시 서류를 챙기는데, 그때까지 내가 출생신고조차 되어 있지 않은 거예요. 엄마는 여전히 미혼으로 돼있었고... 그래서 부랴부랴 엄마의 성씨를 따라 ‘성복희’라는 이름으로 호적을 만들었죠.”

검정고시를 보고 한양여고 2학년에 입학한 성복희. 하지만 이미 미8군에서 유망한 가수로 활동하고 있었던 만큼 학교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잦은 공연으로 인해 결석이 잦았던 만큼 학교에서 문제학생으로 낙인찍혔다. 결국 출석일수가 모자란다는 이유로 퇴학당할 위기에 처했다. 이때 교장성생님을 찾아가 눈물로 선처를 호소한 분이 바로 담임을 맡고 있던 오영원 선생님이다.

혹 기억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1996년 11월에 방영된 KBS ‘TV는 사랑을 싣고’ 프로그램을 통해 옛 은사를 찾아 눈물로 재회하는 장면을. 난생 처음 학교를 다니게 된 복희를 따듯이 감싸주고 그 재능을 아껴주시던 은사님과 35년만의 재회는 보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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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윤복희 자서전 ‘딴따라(1997년, 문예당 발행)’,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윤복희 편[2]’(서울신문 2006년3월9일자), ‘옛 노래의 재발견(KTV, 2011년)’ 당시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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