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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칼럼]‘삼천포 아가씨’,‘영산강 처녀’의 작곡가, 송운선의 삶과 노래[1]
88세의 인생찬가, ‘나는 여전히 현역’
2019년 07월 04일 (목) 00:13:34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 작곡가 송운선

‘삼천포아가씨’, ‘영산강 처녀’, ‘채석강의 절경’, ‘지는 해가 아름다워’... 등등. 전국 각지에 세워진 노래비가 그렇듯 노래는 물론 작곡가로써도 이름이 잘 알려져 있음에도 개인 활동은 비교적 일반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 송운선 선생(88).

그는 음악 생활 60년 동안 가요계 현장에서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다. 가요계를 떠나서 외도한 적 또한 없다.

때문에 우리나라 방송작가 1호이자 작사가 유호 선생은 그를 ‘평생 놀지 못하도록 타고난 작곡가’라고 했을 정도다.

실제로 그의 활동 기록을 살펴보면 얼마나 열정적이고 적극적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1960년대 파라마운트와 크라운 레코드사의 기획과 문예부 일을 도맡았으며 원로작가들의 모임인 한국가요작가동지회 회장, 한국음악저작권협회 부회장, 한국연예협회 부이사장까지 역임했다.

어느덧 88세로 우리나라 가요계에서 최고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현역이다. 최근에도 부지런히 관계자들을 만나고 가수를 키우고 곡을 쓴다.

평소 목소리 톤은 높지 않지만, 저력이 느껴지는 인물. 그 일관성과 부지런함….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결코 평범치 않은 작곡가 송운선 선생의 삶과 노래. 그 기록 속으로 들어가 본다.

글ㅣ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 작곡가 송운선씨가 발표한 기타와 아코디언 연주 음반들

현재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659곡의 작품이 등록되어 있는 원로작곡가

‘삼천포 아가씨’, ‘영산강 처녀’의 작곡가 송운선(宋雲鮮), 올해로 88세를 맞이하는 그는 어느덧 우리 가요계 최고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작곡하랴, 녹음하랴 하루가 짧다.

그의 하루 일과는 규칙적이고 반듯하다. 그것이 지금까지 건강을 유지해온 비결이리라.

지난 60년 음악인생을 돌아보면 공백기가 거의 없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현역’이다.

▲ 판문점에서. 작곡가 손목인, 백영호. 이명희, 황문평, 이재현, 김성근. 김병환, 감희진, 신대성, 작사가 반야월, 유호 선생 등의 모습이 보인다. 뒤에서 둘째 줄, 모자 쓴 인물이 바로 작곡가 송운선 선생

현재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등록되어 있는 작품 수는 편곡을 포함해 659곡. 물론 실제 발표한 노래는 이보다 훨씬 많다. 음반 등 근거자료를 찾기 어렵고 일일이 모두 기억하지 못해서 등록하지 못했다.

6년 전 서울 면목동에서 휘경동으로 이사했다. 며칠 전, 전북 부안에 세워진 노래비 ‘채석강의 절경’의 주인공인 작사가 신현택 선생(75)과 함께 집을 찾았다. 둘은 지난 30여 년 간 형 동생으로 지내는 지기이자 콤비다.

45평 정도의 크기의 집 1층은 가정집으로, 2층은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는데 평소 흐트러짐 없는 성격 그대로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작업실에 들어서니 먼저 두 대의 피아노가 눈에 들어온다. 손때가 묻은 이 피아노 건반을 통해 최근에도 수시로 작곡을 한다. 피아노에 놓인 작업 중인 악보를 보니 제목이 ‘내가 나를 몰라요’다. 노왕금 작사, 송운선 작곡으로 악보에 적혀있는 리듬은 ‘펑크스타일(Funkstyle)’이다.
“빨리 완성시켜 녹음 들어가야 할 텐데….” 스케줄에 쫓기는 듯 했다.

12살 때 이미 ‘라 쿰파르시타’를 마스터한 ‘기타 신동’

본명 송성덕(宋成德), 1932년 3월 14일 부산 동대신동에서 태어났다. (호적은 1934년 생으로 되어있다.)

예명 송운선(宋雲鮮)은 직접 지었다. 가요계에 입문한 뒤 첫 2,3년 간 사용한 이름은 송성운(宋成雲)이다.

가요1세대 작사가 반야월 선생은 그를 가리켜 ‘이름 그대로 구름 위에서 노니는 신선 같은 성품’이라고도 했지만 그는 그저 ‘구름처럼 유랑하듯 자유롭고 싶다는 의지’로 직접 지은 이름이라고 밝힌다.

부산 영민국민학교(초등학교) 3학년 무렵, 처음 기타를 잡으면서 음악에 대한 꿈을 키웠다.

“당시 큰 누나와 작은 누나가 학교 교사로 근무했는데 그런 인연으로 학교 담임 선생님이 우리 집에서 하숙을 하셨지요. 기타연주 실력이 대단한 분이었는데 그 선생으로부터 당시 유행하던 ‘술은 눈물일까 한숨이랄까(酒は涙か溜息か, 고가 마사오 작곡)’를 배우기 시작해 며칠 만에 마스터했지요.”

그는 기타를 잡은 지 3개월 만에 ‘라 쿰파르시타’를 연주할 정도로 소문난 ‘신동’이었다.
 
기타 연주에 대한 집념은 결국 음악에 대한 꿈으로 이어졌다. 경남상업학교(지금의 경남상고) 시절에는 밴드부에 들어가 트럼펫을 불었다. 그러나 이때 숨찬 트럼펫을 너무 열심히 분 탓에 기침이 심해지며 기관지가 나빠져 요양까지 해야 했다. 결국 트럼펫을 접은 그는 다시 기타와 피아노, 그리고 아코디언으로 전환한다.

6.25전쟁 중 부산에서 음악으로 꽃피운 삶
 
6.25 전쟁 중 부산은 전쟁통에 내려온 피난민들로 넘쳐났다. 당시 임시수도의 역할까지 맡았던 부산은 피난민들의 제2의 삶의 터전이었다.

아울러 부산방송국은 전쟁터에 나간 군인들의 사기를 올려줄 군가를 대대적으로 모집했다. 또한 전쟁으로 많은 것을 잃은 국민들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울 노래 또한 절실했던 시기였기에 신인가수 모집 또한 적극적이었다. 1951년 8월, 부산극장에서 개최된 전국남녀가수 신인 콩쿠르를 비롯해 52년 4월, 상이장병을 위한 남녀신인가수 모집, 그리고 1953년 11월 은영극장에서 개최된 신태평레코드 문예부 주최로 한 전속가수 모집에는, 입상자들에게 부산KBS와 신태평레코드 전속가수로 활동할 기회를 주어졌다.

기타 연주 솜씨가 뛰어났던 그도 HLKB(현 KBS부산)에서 모집하던 연예 위문단에 지원했다. 1953년도의 일이다.

“몸이 약한 편이었던 나는 그 무렵 부산방송국(현 KBS부산)에서 실시한 연예 위문단 모집에 참가했어요. 당시 영주동 40계단 부근에 있던 KBS 건물에서 연주 심사를 받은 끝에 발탁되었지요. 함께 뽑힌 6,7명의 연주인들과 KBS악단으로 활동하며 3년 동안 위문공연을 다녔어요. 당시 가수 남강수, 차은희씨 등도 함께 공연을 다녔던 기억이 생생한데, 저는 처음 기타리스트로 들어가서 후에 밴드마스터로도 활동했지요.” 선생의 회고다.

이 무렵 작곡을 시작하는데 처음으로 발표한 노래 제목이 ‘백마강 달밤’이다. 그의 나이 28살 때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음반과 악보를 보관하고 있지 않아 지금은 가수 이름도, 음반사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SP시대엔 송성운, LP시대엔 송운선으로 활동

그가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한 시기가 바로 이 무렵이다. SP, 즉 축음기 음반 시대였던 50년대 말이다. ‘가야금 열두줄(이철수 작사, 황금심 노래)’, ‘한 많은 첫사랑(이철수 작사, 황금심 노래)’, ‘피고 지는 사랑(이철수 작사, 남성봉 노래)’ 등을 발표했다. 이 초기작들은 부산에 있던 흥아레코드를 통해 출반되었다.

“흥아레코드는 부산에서 개인이 제작을 하던 음반사였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PD메이커였던 셈인데 국제시장에서 음반장사를 하던 재력가, 이희도씨가 개인적으로 제작했죠. 그는 당시 철도국에서 홍익회 간부로 근무했는데 사고로 다리 하나가 잃었던 것이 기억나네요. 이 음반은 몇 년 뒤 제가 대구로 옮긴 뒤 그곳에 있던 파라마운트레코드사에서 다시 재발매 했는데 당시는 2채널 시대로 내가 밴드스코어(band score, 총 악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었죠.”

회고에서처럼 이 무렵 그는 활동무대를 대구로 옮긴다. 대구는 전쟁 중에도 많은 음반을 발매하던 오리엔트레코드사가 있었고 많은 연예인들 또한 피난 내려와 활동하고 있었다. 박시춘, 강사랑, 이재호, 이인권, 백년설, 반야월 등등...

▲ SP시대에 발매된 노래들을 재발매한 10인치 LP들

그는 이곳에서 가수 이다향씨가 설립한 파라마운트에서 기획과 문예부 일을 맡았다. 이때 이다향씨를 통해 당시 대구에서 군예대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가수 박재란씨를 소개받았다. 당시 박재란은 대구방송국 경음악단장으로 활동하던 작곡가 김학송씨로부터 ‘코스모스 사랑’라는 곡을 받아 막 취입을 마친 무명가수였다. 이때 송선생과 손잡고 새롭게 발표한 노래가 ‘Southern Blues’라는 영문 제목이 붙은 ‘남국의 부르스’다. 서울을 오가며 녹음작업을 했다.

남국의 호놀룰루 비가 나린다/쓸쓸한 야자수에 비가 나린다/떠나간 그 옛님이 마냥 그리워/이 밤도 울며 새는 하와이안 아가씨/전설도 궂은비에 얼룩이 지는/남국의 밤이여.

연락선 난간머리 비가 나린다/외로운 가슴에도 비가 나린다/행여나 님이신가 기다리면서/그날 밤 잊지 못해 헤매도는 아가씨/애달픈 추억 속에 깊어만 가는/남국의 밤이여. -‘남국의 부르스(이철수 작사, 송성운 작곡, 박재란 노래. 1958년)’

“한창 젊었을 때지요. ‘남국의 부르스’가 나온 지 3개월 뒤에 발표한 ‘리라꽃 비련(손로원 작사, 박재란 노래)’이라는 노래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메디움 샤플 리듬을 시도했어요. 당시 앞서가는 새로운 리듬이라 하면 룸바, 탱고 정도였었죠. 이 ‘셔플’이라는 단어도 영어사전까지 찾아가며 알아낸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1958년, 이 해에 많은 노래들을 발표한다. ‘정처 없이 가거라(손로원 작사, 황금심 노래)’, ‘낙동강 칠백리(최랑 작사, 박재란 노래)’, ‘정열의 폴카(이철수 작사, 이다향 노래)’, ‘비오는 나루터(최랑 작사, 박재홍 노래)’ 등이 모두 ‘송성운’이라는 이름을 쓰던 시기에 발표된 노래들이다. 이 노래들이 그렇듯 그가 단기간에 매우 열정적으로 작곡에 몰두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음반들은 모두 50년대 당시 물자 부족과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만들어진 노래들이라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1958년 상경. 작곡가 김교성과의 만남, ‘만리포 사랑’, ‘삼등인생’ 등 편곡 맡아

▲ 단기 4294년(1961년) 11월에 출간된 ‘송운선 작곡집(세광출판사)

그는 더 큰 꿈을 이루기 위해 아예 무대를 서울로 옮긴다. 이름도 ‘송운선’으로 바꾸었다. 1958년, 이 무렵의 우리나라 음반시장은 SP에서 LP로 바뀌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가요계도 많은 것들이 변하고 있었다.

상경 후 ‘콩쿨대왕’이라 불리는 대선배인 작곡가 김교성 선생와의 교류가 이루어진다. ‘불효자는 웁니다’, ‘찔레꽃’, ‘울고 넘는 박달재’ 등의 명곡을 남긴 거목, 김선생은 큰 몸집만큼이나 카리스마가 넘치는 분이었다.

을지로 스카라 다방에서 만난 선생은 이 젊은 음악도를 소개받자마자 자신의 악보를 건네며 빠른 시간 내에 편곡해줄 것을 요청해왔다. 엉겁결에 악보를 받아 쥔 송선생은 그것을 그날 밤에 끝낸다. 그렇게 넘겨준 노래 중에는 히트한 곡들이 많다. ‘삼등인생(김용만)’, ‘만리포 사랑(박경원)’ 등등... 그렇게 편곡 생활이 시작되었다.

점차 송선생의 숨은 실력을 확인한 김교성 선생은 아예 거처를 자신의 집으로 옮기라고 했다. 집은 무악재 고개 부근에 있었다. 그를 처음 소개해준 박시춘, 반야월 선생도 옆에서 적극 가세했다. 심지어 술 마신 날 택시타면 택시비도 적게 든다며 부추겼다.

“김교성 선생은 제 편곡에 매우 만족해했어요. 마음에 들지 않을 수가 없는 게 작곡자의 이미지를 잘 파악하고, 또 사전에 어떤 느낌으로 편곡할지 미리 상의하기 때문이죠. 시간이 거듭될수록 ‘그냥 네 맘대로 해봐라’라는 요청이 많아지기 시작하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선생이 갑자기 ‘너는 내 아들이다, 또한 나는 네 아버지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처음엔 깜짝 놀랐습니다.”

김교성 선생이 수양아들로 삼은 것이다. 한편 고맙고 기뻤다. 무엇보다 거장에게 인정받으며 함께 작업하고, 그러면서 음악적 실력도 다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때 가요계에서는 김교성 선생의 편곡을 서로 맡지 않으려고 피하는 형편이었어요. 편곡료도 제대로 주지 않았거든요, 어쩌다 편곡료 이야기를 할라치면 “정 그렇게 나오면 앞으로 네게 편곡 안 맡긴다!”라며 되레 적반하장 격인 으름장을 놓기 일쑤였었죠. 오죽하면 전오승, 나화랑 같은 선배 작곡가들이 ‘호랑이 김교성 선배의 편곡 공세로부터 해방되었다’며 오히려 제게 고맙다는 인사까지 했을까요? 심지어 김교성 선생이 빈 담뱃갑이라도 구겨서 내던지면 그걸 본 사람은 누가 됐든 간에 재빨리 새 담배를 사다놓아야 했어요. 그냥 바라보고만 있다가는 무슨 핑계로든 불호령이 떨어질 게 뻔했으니까...”

이러한 일화들만큼이나 김교성 선생은 카리스마가 강했다. 그러나 그토록 호통을 맞으면서도 싫어하는 후배가 없었다. 지금도 많은 원로들이 ‘김교성 선생은 매우 인간적이자 훌륭한 작곡가였다.’고 회고한다.

“‘선배는 왕이다’라는 말을 호기 있게 외치며 후배들을 리드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만한 실력도 뒷받침되어야지요. 선배 노릇도, 후배 노릇도 점차 안 되는, 갈수록 선후배 관계가 모호해져가는 요즘 세태를 볼 때마다 오히려 김교성 선생 같이 우직하고 듬직한 선배가 정말 그립습니다.” 그의 말이다. 이것은 비단 송선생의 생각만은 아닐 것이다.

3년 후 송운선 선생은 돈암동 셋방을 얻어 독립한다. 작곡과 함께 그의 편곡작업은 계속 되었다. 그 무렵 가장 바쁜 시기를 보내던 작곡가 나화랑, 전오승, 김성근 선배의 곡들도 대부분 선생에게 편곡이 맡겨졌다. 날짜를 맞추기 위해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점도 있었다. 당시 한 곡 당 편곡료는 쌀 한가마 값 정도였다고 했다.

1960년대 초, 이른바 ‘10인치 LP시대’에도 그의 창작열은 멈추지 않는다, 이 시기를 풍미한 그의 작품들을 살펴보자면, ‘고향서름 타향서름(손로원 작사, 남백송 노래)’, ‘신의주 편지(월견초 작사, 박애경 노래)’, ‘낙동강 육백년(손로원 작사, 황정자 노래)’, ‘눈 뜨고 속은 사랑(최치수 작사, 윤일로 노래)’, ‘문풍지 하소연(천지엽 작사, 지화자 노래)’, ‘보일 듯이 잡힐 듯이(예문호 작사, 박흑란 노래)’,  ‘불효자의 하소연(장남재 작사, 이천년 노래)’ 등이다. 모두 10인치 음반시대의 노래들로 그는 점차 가요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송운선의 시대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시민회관에서 은방울자매와의 만남

그에게 최고의 전성기를 가져다준 것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듀엣, 은방울 자매와 콤비를 이루면서부터다. 크라운레코드 문예부장 겸 기획실장으로 근무하던 1963년, 서울시민회관에서의 ‘프린스쇼 공연 무대를 통해 듣게 된 은방울자매의 화음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이들이 부르는 ‘아리랑 낭랑’을 듣는 순간. 그는 ’바로 이거다’ 싶어, 무릎을 쳤다. 무엇보다 맑고 밝았으며, 명랑한 듯 청아했다.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박애경과 김향미가 ‘은방을자매’라는 이름으로 함께 듀엣으로 선 무대였지요. 얼마나 화음이 잘 맞던지 눈감고 들으면 분명 한사람의 목소리인데 실제로 보면 두 사람이 내는 화음이었던 거예요. 관객들 반응도 뜨거웠죠. 재창에 이어 삼창까지 나왔을 정도였으니까.”

그는 곧장 무대감독 배영달씨를 찾아가 신인 작곡가임을 밝히며 ‘방금 노래한 두 사람에게 새로운 곡을 만들어 취입시키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의외로 쉽게 배감독도 좋다고 했다. 이렇게 은방울자매와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되었다.

멤버 중 ‘큰 방울’로 불리는 박애경(본명 박세말)씨는 밀양 출신으로 부산여상 재학 중이던 1956년, 국제신문사가 주최한 콩쿠르에 출전해 2등을 차지했던 재원. 당일 콩쿠르 심사를 본 작곡가 이재호 선생에게 발탁되어 '한 많은 아리랑(무적인 작사, 이재호 작곡)'으로 데뷔했다. 이미 송운선 선생과는 ‘신의주 편지(월견초 작사)’와 ‘어머님 부르스(최치수 작사)’를 취입하기도 했다.

‘작은 방울’ 김향미(본명 김영희) 역시 밀양 출신으로 작곡가 백영호씨에게 픽업돼 1959년, 백영호 작곡의 '기타의 슬픔과 영화주제가 ‘스타탄생’ 등을 발표하며 부산에서 활동하던 신인가수. 특히 1962년 12월12일, 서울시민회관에서 열린 ‘KBS 아마츄어 톱싱거경연대회’에서 부산 대표로 출전, 대상인 ‘톱싱거’로 뽑힌. 그야말로 ‘스타 탄생’의 주인공이었다.

송운선 선생은 이들에게 데뷔곡, ‘쌍고동 우는 항구’를 취입시킨다. 음반엔 ‘은방울씨스터’라는 이름으로 표기되었는데, 이 노래는 발표되자마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쌍고동이 울어대면 갈매기도 울었다네/마도로스 사랑이란 이별도 많더란다/파이프 입에 물고 잘있거라 손짓하던/정든 님도 울었다네 갈매기도 울었다네

뱃머리에 뿌려놓은 눈물자국 얼룩 젖네/마도로스 뜬 사랑에 눈물도 많더란다/찾아 올 그날까지 잘있거라 인사하던/정든 님도 울었다네 쌍고동도 울었다네. -‘쌍고동 우는 항구(불로초 작사, 송운선 작곡, 은발울자매 노래, 1963년)’

“음반이 엄청나게 팔려나갔죠. 지금으로 치면 약 80만장 이상, 거의 100만장 정도 나간 셈일 겁니다. 그야말로 밀리언셀러였죠. 한꺼번에 판매된 게 아니라 거의 10여 년에 걸쳐 꾸준히 판매되었죠. 그만큼 오랫동안 사랑받은 곡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듀엣 ‘은방울자매’는 이를 시작으로 송운선 선생과 콤비를 이뤄 ‘삼천포아가씨’, ‘무정한 그 사람’, ‘삭발의 모정’ 등 히트행진을 계속한다.

“지금까지도 은방울자매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운 목소리의 대명사인 동시에 유려한 창법으로 ‘유니송(Unisong) 효과’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던 장본인이죠. 선율을 달리하는 이중창, 삼중창 등은 차라리 지도하기가 한결 수월합니다. 한사람이 ‘미’음을 낼 때 다른 사람은 ‘솔’로, ‘라’를 낼 때 ‘도’나 ‘미’로 내는 등 어차피 음정을 달리하기 때문에 약간 실수를 해도 경과음처럼 그냥 지나치게 되죠. 그러나 은방울자매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음을 내는 경우는 감정, 음색, 음 길이, 강약조절 등 신경 써야 될 부분이 참으로 많습니다. 누구나 쉽게 구사하기 힘든, 정말 까다로운 창법이지요.” (다음호에 계속) NM

▲ 은방울자매의 대표곡 ‘삼천포아가씨’와 데뷔곡 ‘쌍고동 우는 항구’ 음반 재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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