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 1호 작곡가 ‘손석우 특별전’을 가다

광복 이후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새로운 전형을 제시하며 현 대한민국 대중음악, 즉 K-POP의 원형을 구축했다고 평가받고 있는 작곡가 손석우(孫夕友).
1941년 조선연예주식회사 기타리스트로써 시작된 그 긴 음악 여정을 따라 가다보면 우리 대중음악사에서 그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시대마다의 변화 요구에 따른 새로운 대안을 제시, 대중음악의 거대한 흐름을 리드, 시대를 이끌었다. 우리나라 드라마주제가 제1호인 ‘청실홍실’을 비롯해, 60년대 이후 우리 대중음악의 흐름을 바꾼 동시에 진정한 의미에서 ‘한류 1호’라고 평가받고 있는 ‘노오란 셔쓰의 사나이’ 등의 작곡가 ‘손석우 노래 70 여년의 기록’을 담은 ‘손석우 특별전’이 남이섬에 위치한 노래박물관에서 지난 9월 부터 오는 12월 31일까지 열리고 있다.

▲ 남이섬 노래박물관에서의 손석우 음악의 재발견 & 재평가, ‘박성서의 토크콘서트-최양숙 가을음악회’ 무대.

현재 우리나라 대중음악계 최고 원로인 95세의 주인공을 직접 모시고 갖는 이 ‘손석우 특별전’은 개인의 기록을 넘어 광복 이후 우리나라 대중음악사를 돌아보는 소중한 전시이기도 하다.
이 특별전에는 친필악보와 음반, 그리고 손석우 노래 50선을 들어볼 수 있는 감상 코너와 노래 인생 70년을 담은 다큐멘터리도 함께 상영되고 있다. 또한 지난 10월 11일, ‘나 하나의 사랑’ 노래비 제막과 더불어 ‘손석우 헌정음악회’도 개최, 손석우 선생과 함께 음악활동을 해온 가수 금사향, 김상희, 안다성, 한명숙, 한상일 등 ‘손석우 사단’을 비롯해 권성희, 박강수 등이 무대에 올라 감동을 더했다. 작곡가 손석우 재발견 & 재평가, 그 세 번 째.

글 l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사진 l 장성하 (사진작가)

스타 탄생의 보고(寶庫) ‘뷔너스 레코드’ 자주(自主) 제작
상업적인 면보다 음악적 완성도를 먼저 추구했던 손석우 선생은 1961년부터 ‘뷔너스(VENUS) 레코드’ 레이블로 LP를 자주 제작하기 시작한다. 음반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기 위한 선택이기도 했다.
“기존 레코드사와는 음반을 내는 기준에서 차이가 벌어지다보니 나를 불러주는 데도 없고 그래서 자력으로라도 음반을 내야겠기에 뷔너스 레코드사를 생각했던 거죠. 돈이 없으니 빚을 내서 시작했어요. 돈을 벌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작품을 발표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뷔너스를 했던 거예요. 자작을 했던 거죠.”

▲ 학사가수 최양숙과 미8군쇼 출신 가수 한명숙

뷔너스레코드 첫 음반(VL-1)의 타이틀은 ‘손석우 멜로디’다. 모두 손석우 작사, 작곡의 노래들로만 채워져 있다. 계수남, 김성옥, 블루벨즈, 오사라, 최희준, 한명숙 등 여러 가수의 노래가 들어있는 옴니버스 음반으로 커버가 일러스트로 구성돼 있는 점 등 당시 음반들과는 재킷부터 달랐다. 앞면 첫 곡은 ‘그것은 비밀(김성옥)’, 뒷면 첫 곡은 ‘목동의 노래(최희준)’, 그리고 앞면 두 번 째 수록곡이 ‘노오란 셔쓰의 사나이(한명숙)’였다.

 “한 가수의 독집음반이 아니라 여러 가수가 함께 부른 옴니버스 음반이었죠. 때문에 그 중 누구 하나만을 재킷에 내놓기엔 미안한 생각이 들었고 또 그렇게 한다면 결국 다른 음반들과 다를 게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느 한 가수를 선택하지 못하고 무난하게 내 얼굴을 스케치해서 일러스트로 구성했죠. 뷔너스는 뷔너스답게 뭔가 다르게 하고 싶었죠. 뷔너스만의 독특한 일러스트 재킷은 한동안 계속 됐지요.”
일반적으로 익숙하지 않은, 낯선 시도였던 만큼 시장의 반응도 냉담했다.
“음반을 처음 100장 쯤 만들어 음반도매상인 명음사에 갔어요. 대표가 음반을 대충 훑어보더니 차나 한 잔 하자며 다방으로 끌고 갔어요. 그러면서 충고를 하는 거예요. 레코드 재킷은 이렇게 만드는 게 아니다, 작곡도 이렇게 하면 안된다... 등. 결국 남들처럼 하지 않았다는 얘기죠. 가수 사진을 화려하게 드러내지도 않았고 곡조도 일반 대중이 좋아할만한 요소는 하나도 안 섞인, 이상한 곡들만 있다며 이렇게 해서는 한 장도 안 팔린다며 충고를 했죠. 결국 혼자서 다시 들고 올 수도 없어 한 귀퉁이에라도 놓아달라고 사정하다시피하곤 한동안 잊어버렸어요. 빚만 진 거죠. 그리고 몇 달 뒤 5.16이 터졌어요. 동시에 방송에서는 한동안 대중가요를 틀지 못하게 했죠.”

▲ 프랑스 3대 샹송가수인 이베뜨 지로가 우리말로 취입한 ‘노오란 셔쓰의 사나이’ 음반과 손석우.

5·16 이후 대중가요, 즉 속칭 유행가는 '저속' '왜색'이라는 이유로 무더기로 금지시켰고 그나마 금지의 화살을 피한 노래들도 '퇴폐'라는 이유를 들어 모두 2절까지만 방송케 했다. ‘재건’이라는 이름으로 사회 변혁이 시작되었고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도 대체로 밝고 경쾌한 멜로디가 주를 이루었다. 이때 ‘노오란 셔쓰의 사나이’가 갑자기 부상하기 시작했다.
“노래하는 사람도 별 기대를 안 한 채 잊어버렸고 몇 백 장정도 찍었던 음반들은 그냥 찬장 안에 수북이 먼지 쌓인 채 넣어두고 있었죠. 그 후 몇 달이 지난 뒤, 가을바람이 불기 시작했던 때던가? 명음사에서 전화가 왔어요. 이상하게 사람들이 몰려 와서 그 음반을 찾는다고요. 심지어 여학생들이 부모와 함께 와서 사달라고 조른다고. 그래서 찬장에 있던 음반들을 먼지만 털어서 보내줬죠. 그 후 매일 전화가 오는 거예요. 음반을 더 찍어서 빨리 보내달라고... 그런데 내가 공장이 있습니까, 결국 남의 공장 빌려서 찍기 시작했죠.”
자본이 아니라 의욕만으로 시작한 뷔너스는 음반을 겨우 한 장 만들고 나면 여력이 없어 PR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따라서 탄생은 했어도 빛을 못보고 시들어 버리는 노래가 허다했다고 회고한다. 그렇게 시작한 뷔너스였지만 이 레이블을 통해 많은 노래와 새로운 목소리들이 탄생했다.

▲ 60년대 들어 남성4중창단 블루벨즈의 등장은 소리변화의 또 다른 상징이었다.

‘노오란 셔쓰의 사나이’,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우리 마을’, ‘눈이 내리는데’, ‘센티멘탈 기타’, ‘내사랑 쥬리안’, ‘삼오야 밝은 달’, ‘즐거운 잔칫날’, ‘목동의 노래’, ‘그림자’, ‘검은 스타킹’, ‘시름의 꼬리별이’, ‘열두 냥짜리 인생’ 등... 이 노래들과 함께 많은 가수들이 뷔너스를 통해 첫 음반을 발표하며 데뷔, 가요계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김계자, 김상희, 김성옥, 김치켓, 박형준, 블루벨즈, 이춘희, 차도균, 최수진, 최양숙, 최희준, 한명숙, 현미 등등이 그들이다.
 

또한 60년대 다양한 리듬으로 대중음악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작곡가 길옥윤, 이봉조가 처음 작곡 발표한 곳도 뷔너스였다. 샹송 가수 이베뜨 지로, 홍콩여배우 석연(石燕) 등이 우리말로 음반을 취입했고 또한 당시 최고의 음악성으로 주목을 받았던 엄토미와 리듬에이스, 그리고 미8군 쇼에서 활동하던 신예 연주인 겸 작곡가 이봉조가 이끌던 이봉조 캄보가 처음으로 연주음반을 선보인 곳도 뷔너스였다. 음악에 뜻을 둔 이들에게 ‘못자리’가 되어주었던 뷔너스는 1965년까지 ‘스타 탄생의 보고’로 존재했다.

한류 1호 ‘노오란 셔쓰의 사나이’붐, 한국 넘어 세계를 강타하다
60년대 우리 대중음악의 흐름을 바꾼 노래 ‘노오란 셔쓰의 사나이’는 전국을 노랗게 물들인데 이어 일본을 비롯해 동남아를 강타했다. 프랑스 샹송가수 이베뜨 지로가 우리말로 취입해 더욱 화제가 되었던 이 노래는 우리나라에서 우리 가수에 의해 우리말로 된 취입된, 진정한 의미에서의 ‘한류 1호’다.
당시 외국 관광객들의 한국 방문 기념품으로도 큰 인기를 누렸을 만큼 우리나라 대중음악을 대표했던 이 노래의 주인공 한명숙은 동남아에서 출연 요청이 쇄도, ‘이제 막 동남아 순회공연을 막 마치고 돌아온 누구...’라는 식의 당시 유행하던 멘트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했다.
‘한류’의 진원지인 한류 1호 ‘노오란 셔쓰의 사나이’. 우리 노래와 문화를 해외에 알리는 민간 외교의 주역이자 전령사였다.
손석우 선생은 당시 ‘노오란 셔쓰 붐’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다.

▲ ‘미8군 쇼 출신 가수’들이 대거 가요계로 진입하는 기폭제가 되었던‘노오란 셔쓰의 사나이(한명숙)’

“당시 이 노래를 불러 화려한 각광을 받은 한명숙을 비롯해 국내외의 많은 가수들이 저마다의 목소리와 언어로 이 노래를 불러주어 작자로서 매우 고맙게 그리고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1963년에 듣게 된 샹송가수 이베뜨 지로의 가창은 정말 감동적이었죠. 또한 ‘Oh that boy in the yellow shirt’로 시작되는 영어가사와 나에 관한 기사를 영자지에 실어주었던 Richard Rutt씨도 그 중의 한 분이죠. 당시 나라밖에서도 통용될 수 있는 노래를... 하고 염원하고 있던 내 꿈을 한층 부풀게 해 주었습니다.” 라고. 특히 이베뜨 지로가 부르는 ‘노오란 셔쓰의 사나이’를 처음 들었을 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베뜨 지로가 시민회관에서 하는 콘서트에서 ‘노오란 셔쓰의 사나이’를 부르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별다른 기대감은 없었어요. 내한공연 인사로 의례적으로 한 곡 부르는 거겠지, 하고 가볍게 여겼죠. 그러나 막상 시민회관에서 그녀의 샹송을 들으면서 점점 그녀의 노래에 빠져 들어갔어요. 정말 매혹적이었죠. 1부 끝에서 ‘노오란 셔쓰’를 부르더군요. 지로가 부르니까 이것도 샹송이야. 아주 뜨겁게 감격을 했어요. 우리가 책을 읽어도 행간을 읽는다는 얘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보통 악보대로 정확하게 부르는 걸로 끝나잖아요. 그런데 지로는 악보의 행간을 찾아 부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단 말이야.

네 박자라고 해서 꼭 네 박자로 하는 게 아니고 ‘노오란~’, 하며 딱 끊기도 하고. 마치 이야기하는 것처럼 전달할 건 모두 전달하면서 말이죠. 그저 단순한, 동요에 털이 좀 난 것... 그렇게 밖에 여기지 않은 가수도 있는 이 노래를... 노래는 표현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준 그녀의 가창력은 매우 감동적이었죠. 지로가 이 노래를 레코딩하고 싶어 한다고 해서 그녀의 뜻에 따랐어요. 취입할 때 하이힐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마이크 앞에 서서 집중하던 그녀의 모습, 따뜻하고 율동감 있는 목소리, 그리고 마치 우리말을 잘 알기라도 하는 듯 섬세하고 역동적인 표현력... 5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녀의 노래는 생생히 내 가슴에 남아있어요.”라며 이베뜨 지로가 올 3월에 타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며 매우 아쉬워했다.

▲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는 음악인들이 손석우 선생의 일본방문

1970년대, 국내 활동 접고 일본으로 무대 옮겨...
60년대 중반, 상업성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던 뷔너스레코드사를 접은 이후 '사랑했는데(이미자)'를 비롯해 '검은 나비(배호)', '내 마음의 왈츠(한상일)', '무등산의 달(오기택)' 등 60년대 말까지 활발한 창작 활동을 펼치던 손석우 선생은 당시 국내 여건에서의 갖가지 한계로 인해 일본행을 결심한다. 1969년, 일본 이스턴 뮤직(EASTERN MUSIC)의 초청으로 도일, 3개월간의 동경 체류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스턴 뮤직이라는 음악 출판사, 즉 저작권 관리하는 곳에서 초청을 받았어요. 그래서 처음 일본으로 건너가 석 달 동안 체류했죠. 각 레코드사, 공연 등을 보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느꼈어요. 가장 부러운 것은 모든 음악 산업이 시스템화 돼있고 음악 시장이 넓으면서도 모두 보장받고 있다는 점이었죠.”
이를 시작으로 그는 양국을 왕래하며 일본에 우리 문화를 알리는 등 메신저 역할을 했다.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전성기 때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 90년대 중반까지, 무려 30년간 한국을 떠나 있던 만큼 그동안의 활동기록이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측면도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동시에 그만큼 새롭게 재조명할 부분이 많은 음악인이기도 한 셈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