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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18년 10월 07일 (일) 03:25:25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가수 남인수 탄생 100주년
남인수(1918~1962)는 타고난 미성, 세 옥타브를 거침없이 넘나드는 발성, 폭발적이고 정열적인 창법으로 당대를 풍미한 ‘서정가요의 황제’이자 ‘가요계의 거성’이었다. ‘일본 엔카의 대부’ 고가 마사오가 남인수를 가리켜 “일본에서는 이런 가수가 왜 나오지 않는지 통한할 노릇”이라고 자조할 정도로 그는 일제 하 한국인의 자랑이었다.

남인수는 일제 하에서는 유랑과 향수, 청춘의 애틋한 사랑을 노래하고 해방 후에는 전쟁과 분단의 고통 속에 신음하는 서민들의 상처를 노래로 위무했다. 이렇게 부른 노래가 어림잡아 1,000곡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남인수가 이런 목소리를 갖게 된 것은 어려서 혹독한 가난을 겪고 타국 땅에서 소년 노동자로 갖은 천대와 멸시를 겪은 체험이 삶과 노래에 육화되었기 때문이다.
남인수를 들으며 자란 고은은 시집 ‘만인보’에서 남인수를 ‘반도(半島)의 목소리’라고 헌사하고, 시인 이동순은 ‘단단하지만 딱딱하지 않고, 카랑카랑하지만 애수와 정감으로 둘러싸인 목소리가 핵심’이라고 했다. 소설가 김훈은 남인수 노래에서 영감을 얻어 단편 ‘고향의 그림자’를 썼다.
남인수가 1918년 10월18일 경남 진주에서 태어날 때의 이름은 최창수였다. 하지만 어려서 부친을 잃고 모친이 강씨 성을 가진 남자에게 재가하면서 강문수가 되었다. 지독한 가난과 구박이 싫어 무작정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전구공장과 제철공장 등을 전전했다. 중노동을 하는 중에도 일본 가수들의 노래를 멋들어지게 따라 불러 주변 노동자들로부터 ‘가수’로 불렸다. 그는 노래도 잘했지만 하모니카를 불고 장구와 북을 치는 솜씨도 걸출했다.
강문수가 진짜 가수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와 시에론레코드사의 문을 두드린 것은 17살이던 1935년 5월이었다. 당시 시에론레코드사의 문예부장은 극작가 겸 작사가 박영호였다. 그는 강문수의 자질을 금세 알아보고 작곡가 박시춘에게 소개했다. 박시춘은 강문수가 10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가수라는 것을 알고 자신이 작곡한 ‘눈물의 해협’을 가르쳐 1936년 7월 음반을 취입하게 했다. 그러나 대중은 망향의 한을 담은 강문수의 데뷔곡에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노래 덕에 작사가 강사랑의 눈에 든 것은 생각치 못한 수확이었다. 강문수는 강사랑의 후원을 받아 메이저 레코드사인 OK레코드로 소속을 바꾸고 남인수라는 예명으로 1936년 10월 ‘돈도 싫소 사랑도 싫소’(손목인 작곡) 등을 취입했다. 하지만 이 노래 역시 참패했다.

“일본에서는 이런 가수가 왜 나오지 않는지 통한할 노릇“

박시춘은 ‘눈물의 해협’이 실패한 후 작곡에서 손을 떼고 악극단 ‘낭랑좌’의 밴드 마스터로 전국을 유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OK레코드로부터 연락이 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 박시춘은 ‘눈물의 해협’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곡은 그대로 살리되 가사는 이부풍에게 구슬픈 내용으로 다시 쓰게 해 ‘애수의 소야곡’을 완성했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만은…’으로 시작하는 ‘애수의 소야곡’은 1937년 12월 남인수의 목소리에 실려 발표되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음반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음반 판매점에서는 가게 앞에 유성기를 내다 놓고 남인수의 노래를 틀고 또 틀었다. 이렇게 폭발적인 인기 덕에 남인수는 같은 OK레코드사 소속 이난영과 함께 가요계 최고 스타로 급부상하고 이후 30년 동안 전성기를 구가할 박시춘·남인수 콤비의 문을 열었다. ‘애수의 소야곡’은 ‘애수의 세레나데’라는 제목의 일본어로도 출반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남인수는 일제 하에서 ‘꼬집힌 풋사랑’, ‘낙화유수’ 등 800여 곡을 부른 뒤 해방을 맞았다. 해방 직전에 앓기 시작한 폐병은 평생 동안 그를 괴롭혔다. 폐병은 그를 ‘돈인수’로 불리도록 했다. 폐병으로 쓰러질 때를 대비해 인색하게 살다보니 붙은 별명이었다. 해방 후 38선이 굳어질 무렵인 1947년 9월, 남인수는 ‘아~ 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로 시작하는 ‘가거라 삼팔선’(작사 이부풍, 작곡 박시춘)을 취입해 또다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노래는 분단의 아픔을 겪고 있는 대중에게 처절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서민의 애환을 노래하다 요절

▲ 남인수
휴전 후 남인수는 피란지 수도의 고단함을 뒤로 하고 부산역을 떠나는 심정을 노래한, ‘보슬비가 소리도 없이…’로 시작하는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발표해 명불허전 가수임을 증명해 보였다. 호동아가 작사하고 박시춘이 작곡한 ‘이별의 부산정거장’은 유니버셜레코드를 통해 1954년 8월 발표되었다. 전후 어수선한 분위기와 피폐한 사회적 여건 속에서 노래는 놀랍게도 10만 장이 넘게 팔려 남인수에게 제2기 전성기를 안겨주었다. 또한 1980년대까지 이미자, 남진, 나훈아, 조영남, 심수봉, 김연자, 은방울자매, 윤수일, 들고양이들, 박일남, 손인호 등 무수한 가수에 의해 무수하게 리메이크되었다.
남인수는 폐병을 앓으면서도 ‘추억의 소야곡’(1955), ‘무너진 사랑탑’(1960) 등의 히트곡을 부르며 인기를 이어갔다. 당시 가요계는 또 다른 스타 현인이 있었다. 두 사람이 가요계의 양대산맥을 이루자 두 가수를 한 무대에 올리라는 주문이 쇄도했다. 빗발치는 팬들의 요구에 밀려 1959년 두 사람은 한 무대에 섰다. 서울을 비롯해 부산, 대구, 대전, 광주, 인천 등지에서 화려한 경연이 펼쳐졌다.
그 무렵 남인수는, 전쟁 중에 남편을 잃고 전쟁 후엔 세 딸로 구성된 ‘김시스터즈’를 미국으로 떠나보내 외롭고 힘든 나날을 보내는 가수 이난영을 물심양면으로 돕다가 연인이 되었다. 폐병을 앓고 있는 그를 위해 이난영이 헌신적으로 간호했으나 1962년 6월 26일 결국 4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장례는 가요계 최초의 연예협회장으로 엄수되었다.
남인수는 이처럼 서민의 애환을 노래하다 요절했으나 수십 년 후 불거진 친일가요 논란에 휩싸여 명예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일제시대 말기 발표한 ‘감격시대’(1939), ‘강남의 나팔수’(1942), ‘남쪽의 달밤’(1942), ‘혈서지원’(1943) 등이 친일가요라는 사실이 밝혀져 2008년 친일인명사전에 그의 이름이 오른 것이다. 경남 진주의 ‘남인수 가요제’ 명칭도 일부 단체의 압력에 밀려 ‘진주가요제’로 바뀌었다.
박시춘이 작곡하고 남인수가 부른 ‘거리는 부른다. 환희에 빛나는…’으로 시작하는 ‘감격시대’는 친일가요인 데도 한동안 광복의 기쁨을 노래한 것으로 잘못 알려져 광복절 때마다 방송국이 ‘감격시대’를 방송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폴크스바겐 ‘비틀’
일명 ‘딱정벌레차’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독일 폴크스바겐의 소형차 비틀(Beetle)이 내년 중으로 단종된다고 로이터·블룸버그통신이 9월 13일 보도했다. 폴크스바겐 미주본부는 “내년 7월 멕시코 푸에블라 공장에서 생산되는 모델이 마지막 비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비틀은 1930년대 나치의 아돌프 히틀러가 국민차 생산을 지시하면서 창립된 폴크스바겐의 대표작이다.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아오며 전후 독일 경제부흥의 견인차 노릇을 했지만, 줄곧 배기가스 문제 등에 발목이 잡혔다. 유럽에서는 1978년 비틀 생산이 중단됐고, 1997년부터는 멕시코공장에서 딱정벌레 형 외관을 유지하면서도 내부를 새롭게 바꾼 ‘뉴비틀’로 변신해 미국 시장에서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서면서 판매가 감소했고 최근엔 배기가스 조작 의혹인 이른바 ‘디젤 게이트’로 직격탄을 맞았다. <연합뉴스 2018년 9월 14일>

히틀러는 1933년 1월 집권하자 대공황의 여파로 심각해진 독일의 실업 문제를 타개할 묘책에 골몰했다. 그 결과가 국민차 개발과 아우토반(독일제국 자동차 도로) 건설이었다. 1933년 9월 프랑크푸르트~다름슈타트 간 아우토반 공사를 먼저 착공하고 그 다음 단계로 아우토반 위를 달릴 국민차 개발을 추진했다.
나치 정부가 국민차 개발을 의뢰한 사람은 벤츠와 포르셰를 설계한 당대 최고의 자동차 설계가 페르디난트 포르셰였다. 기본 컨셉은 누구나 부담 없는 가격으로 살 수 있는 튼튼하고 안전한 차였다. 구체적으로는 성인 2명과 어린아이 2~3명이 충분히 탈 수 있을 것, 시속 100㎞의 속도로 달릴 수 있을 것, 연비가 뛰어날 것, 가격이 1,000마르크 이내일 것 등이었다.
1934년 6월 나치 정부 대신 독일자동차공업협회(RDA)가 포르셰와 국민차 개발 계약을 체결하고 1935년 10월 독일어로 국민차란 뜻의 폴크스바겐 시작차(試作車)가 히틀러에게 전달되었다. 폴크스바겐 시작차는 1936년 10월부터 2개월 동안 5만km 주행 테스트를 거쳐 성능을 보완했다.
나치가 각종 노동조합을 통합해 설립한 독일노동전선이 주체가 되어 폴크스바겐사를 설립한 것은 1937년 5월이었고, 최종 시작차가 히틀러에게 전달된 것은 1938년 4월이었다. 철제 차체에 5인용 공간, 만족스러운 디자인을 갖춘 국민차는 이후 현대 소형차 구조의 표본이 되었다.
히틀러는 1938년 5월 26일 국민차 공장 기공식에서 국민차 이름을 ‘카데프(KdF-wagen)’ 즉 ‘기쁨의 힘 자동차’로 명명했다. 자동차를 만든 포르셰는 국민차라는 뜻의 독일어로 ‘폴크스바겐’으로 불렀다. 그러나 1938년 7월 뉴욕타임스가 ‘비틀(딱정벌레)’이라는 별명을 붙여주면서 이후 비틀로 더 유명해졌다.
히틀러는 아직 차를 생산하기 전인데도 1주일에 5마르크씩 총 900마르크를 저축하면 앞으로 생산될 폴크스바겐 1대를 소유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이 선전을 믿고 33여만 명의 예금계좌가 1938년 8월부터 1939년 9월까지 개설되었다. 하지만 이 돈은 고스란히 제2차 대전의 전쟁 비용으로 들어갔다.
나치 정부는 1939년 4월 준공을 목표로 공장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공장은 히틀러의 2차대전 야욕에 밀려 완공을 보지 못한 채 중단되었다. 결국 폴크스바겐은 공장에서 단 1대도 생산되지 못하고 1939년 9월 발발한 2차대전에 휘말렸다. 공장은 미완성 상태였지만 2차대전 중 군용 지프차 ‘퀴벨바겐’ 5만여 대와 수륙 양용 군용차 ‘쉬빔바겐’ 1만 4,000여 대를 생산했다. 폴크스바겐은 고작 630대만 생산되었다. 공장은 1944년 연합군의 폭격으로 공장 건물의 3분의 2가 파괴되었고, 73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23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비틀의 총 생산 대수 2,152만 9,464대

1945년 종전 후 폴크스바겐 공장은 영국군이 관리했다. 영국은 1945년 5월, 폴크스바겐 공장이 있는 마을 이름을 ‘볼프스부르크’로 바꾸고 파괴된 공장과 기계를 수리해 영국의 군용 지프차를 수리하고 엔진을 만드는 공장으로 활용했다. 히틀러의 지시로 폴크스바겐을 설계한 포르셰는 전범으로 2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폴크스바겐은 수작업으로 생산되다가 1946년부터 본격 생산을 시작해 1947년 네덜란드에 처음 수출되었다. 1948년 영국으로부터 공장을 넘겨받은 뒤에는 덴마크, 룩셈부르크, 스웨덴, 벨기에, 스위스 등으로도 수출되어 패전 후 독일 경제 부흥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특히 미국은 비틀의 주력 시장이 되었다.
이후 비틀은 5만 번째(1949.5), 10만 번째(1950.3)를 생산하고, 1955년 100만 번째, 1965년 1,000만 번째를 돌파했다. 1972년 2월 12일에는 1,500만 7,034번째 비틀을 생산해 포드자동차 ‘모델T’의 총생산 기록을 경신했다. 1978년 1월 19일에는 유럽 생산을 종료하고 멕시코의 푸에블라 공장만 가동했으며 1981년 그곳에서 2,000만 번째 비틀을 생산했다. 그러나 이 공장도 2003년 7월 10일 2,152만 9,464번째 비틀을 생산하고 완전히 문을 닫았다. 이후 비틀의 변형모델인 뉴비틀 컨버터블은 2010년에, 듄 컨버터블은 2016년에 단종되었다. 2019년 7월에 단종될 비틀의 마지막 차종은 2019년형 비틀 파이널 에디션이다. 마지막 버전인 2019년형 비틀은 쿠페와 컨버터블 두 가지 버전으로 제공하며 색상은 5가지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차는 무엇일까? 영국의 일간지 ‘데일리메일’이 2012년 2월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차 톱 10’에 따르면 도요타의 ‘코롤라’ 세단이 전 세계 최다 판매 차량의 영예를 차지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코롤라는 1966년 출시된 이래 3,750만 대가 팔렸다. 연비 절감형 차량인 코롤라는 10세대 모델까지 출시된 상태다.
두 번째 차는 포드의 ‘F시리즈’가 차지했다. 1948년 출시된 이후 3,500만 대가 판매된 포드의 대표적인 픽업트럭이다. 폴크스바겐의 ‘골프’는 2,750만 대가 팔려 3위에 오르고 4위는 ‘비틀’, 5위는 2,000만 대가 팔린 포드의 ‘에스코트’가 차지했다. 후륜구동의 소형 패밀리카 에스코트는 4 도어 세단, 3.5 도어 해치백, 2 도어 쿠페와 컨버터블, 밴 등 다양한 모델이 나와 있다. 에스코트는 전 세계 포드 자회사들이 생산한 부품을 조립해 만든 포드의 첫 번째 월드카이기도 하다.
6, 7위는 혼다가 차지했다. 1,850만 대가 팔린 시빅이 6위, 1,750만 대가 판매된 어코드가 7위를 기록했다. 8위는 포드의 ‘모델 T’로 1,650만 대가 팔렸다. ‘모델 T’는 자동차 역사상 최단기간에 가장 많이 팔린 차로도 이름이 올라 있다. 9위는 1,550만 대를 판매한 폴크스바겐의 파사트, 10위는 대형 세단인 쉐보레의 임팔라도가 1,400만 대 팔린 것으로 집계되었다. 임팔라도는 대형차급에서 가장 많이 팔린 차량이다. NM

▲ 히틀러가 폴크스바겐 모형을 살펴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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