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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평론] ‘홍도야 우지마라'의 가수 김영춘에 관한 짧은 이야기
2018년 08월 04일 (토) 02:25:30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어려운 시대에 던진 희망의 메시지,
‘세상은 구름이요 홍도는 달빛, 홍도야 우지마라 오빠가 있다'

 
우리나라 악극의 대명사 ‘홍도야 우지마라’. 
임선규 작, 홍해성 연출로 1936년 7월 23일, 극단 청춘좌에 의해 동양극장에서 처음 막을 올린 이래 1939년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조선 악극 사상 최다 관객과 최장기 공연을 기록한 우리나라 악극의 대명사로
현재까지도 꾸준히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특히 주제가로 인해 더욱 명성이 높아진 이 악극 ‘홍도야 우지마라’의 주인공, 가수 김영춘(1918~2006) 선생.

최근 우리 대중가요의 재평가 작업과 함께 재조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인물 중 한 분이다.
그 김영춘 선생과의 마지막 만남, 그리고 지금 공개하는 당시 사진 몇 장.
 
글 l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홍도야 우지마라‘ 음반 라벨과 1948년 영인서관이 발행한 최신유행가요집에 실린 ‘홍도야 우지마라’ 가사,

젓가락 장단에 실려 온 국민가요, ‘홍도야 우지마라’

1.
사랑을 팔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지키려는 순정의 등불
홍도야 우지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

2.
구름에 싸인 달을 너는 보았지
세상은 구름이요 홍도는 달빛
하늘이 믿으시는 네 사랑에는
구름을 걷어주는 바람이 분다.

3.
홍도야 우지마라 굳세게 살자
진흙에 핀 꽃에도 향기는 높다
네 마음 네 행실만 높게 가지면
즐겁게 웃을 날이 찾아오리라.
-‘홍도야 우지마라(李孤松(이서구) 작사, 김준영 작곡, 김영춘 노래)’

그야말로 젓가락장단에 실려 오랜 세월을 건너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노래다. 고범(孤帆) 이서구 작사, 김준영 작곡의 ‘홍도야 우지마라’는 악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후편의 주제가. 전편의 주제가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로 이 노래는 남일연에 의해 취입되었다.
이 음반으로 콜롬비아 측은 부산항과 경성역을 왕래하는 직원의 숫자를 늘려야했을 정도로 대히트했다고 전해진다.

여성 수난극의 전형이자 한국적 신파극의 대명사인 이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당시 장안의 기생들이 공연을 보기 위해 인력거를 타고 와 인산인해를 이뤘다는 유명한 일화와 함께 당시 ‘장미화’라는 매우 이름난 기생이 18세 꽃다운 나이로 한강에 투신, 신문에 보도되면서 더욱 화제가 된 노래다. 아울러 이 악극은 1939년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김영춘 선생과의 우연한 마지막 만남

▲ 김영춘 선생과 마지막으로 뵈었을 당시의 필자. 2005년 7월
필자는 원로가수들을 가깝게 지내며 자주 찾아뵌 탓에 크고 작은 일화가 많다. 그러나 자주 뵌 적이 없음에도 특별한 일화가 있는 분도 많다. 그중 한 분이 바로 김영춘 선생이다. 필자에겐 매우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김영춘 선생을 필자가 마지막으로 뵌 것은 선생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하기 두 달 전인 2005년 7월, 경기도 고양의 자택에서다.
뜻밖의 만남이었다. 그날 필자는 경기도 고양에 일 때문에 다녀오다가 우연히 길에서 선생과 마주쳤다. 선생은 나를 보자마자 매우 반가워 하셨다. 늘 정장만 입은 차림으로 뵈었기 때문에 평상복 차림의 모습은 왠지 낯설게 느껴졌던 기억도 생생하다.

선생은 당시 적을 두고 계시던 원로가수들의 친목 단체인 ‘거목회’와 ‘만나리’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참석을 못하신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던 터라 걱정을 하고 았었던 만큼 더욱 반가웠다.

특히 매달 한 차례씩 모임을 갖는 ‘만나리’ 모임은 회장인 작사가 반야월 선생을 비롯해 고향미, 왕수복, 금사향, 김봉선 등 원로 연예인들의 친목 단체였지만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는 회원 대부분이 타계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모임이 없어졌다.

선생은 나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집으로 데리고 갔다. 집이 바로 근처였던 것이다. 헌데 선생은 안타깝게도 말씀을 전혀 못하셨다. 그러나 정신만큼은 매우 또렷하다고 느껴졌다. 이로 인해 의사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못할 것임을 의식해서였을까. 선생의 주민등록 등본과 앨범사진 등 옛 자료들을 미리 준비해놓고 있었고 내가 사진을 찍기 시작되자 벽에 걸린 큰 액자들까지 일일이 손수 떼어다 옆에 놓아주는 등 필자의 방문을 매우 호의적으로 배려해주었다.

당시 김영춘 선생은 부인 박순희(당시 83세, 본명 朴玉順)여사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부인은 악극배우 출신이다. 아랑극단에서 활동하던 박순희 여사는 또한 악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서 홍도역을 맡은 동양극장 전속극단의 간판스타, 차홍녀씨의 이종사촌 동생이기도 하다. 미망인 박순희 여사는 비교적 젊은 때인 60년대 말, 중풍으로 쓰러져 많은 고생을 했다. 

필자가 집에 머무는 두어 시간 동안 선생은 단 한마디 말도 하지 않으셨지만 표정으로, 몸짓으로 모든 의사소통을 했다. 집을 나서자 문 앞까지 나오셔서 배웅을 했다. 때마침 지나가는 동네 분에게 사진 촬영을 부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후 선생은 집 밖에 나섰다가 교통사고를 당한 후유증으로 지난 2006년 2월 22일, 안타깝게도 타계하셨다. 

선생 타계 이후 1년 후쯤에 만난 차남 김무술씨(61세)는, 선생은 만년에 고향인 김해문화원 담당자들과 자주 접촉하며 상당수 자료들을 김해문화원 측에 건네주었다고 전한다.

이 무렵 필자는 김해문화원의 요청으로 선생의 활동 사항을 간략히 정리해 한국가요작가협회보(韓國歌謠作家協會報)인 ‘가요마을’ 2007년 봄호에 게재하기도 했다.

콜롬비아 전속으로 ‘항구의 처녀설’로 데뷔 
 
본명 김종재(金宗才). 1918년 6월 29일, 부친 김치관, 모친 박금년 사이의 외동아들로 경남 김해 어방동 471번지에서 출생했다.

김해 동광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부산으로 건너가 양복 재단 일을 하던 중 그의 나이 스무살 때, 당시 조선일보사와 콜롬비아레코드사가 공동으로 주최한 신인가수선발콩쿠르에 입상하면서 콜럼비아 전속가수로 첫발을 내딛는다. 

1938년 12월에 첫 취입곡인 ‘항구의 처녀설(처녀림 작사, 김송규 작곡)’에 이어 발표한 ‘홍도야 우지마라’로 우리나라 가요사에 남을만한 인기가수 대열에 합류한다.

1.
흘러온 항구에도 가락눈은 나린다
무심한 갈매기의 울음도 내 귀에는 망향가
지내온 주막에다 지내온 주막에다 두고 떠난 그 얼굴
턱을 괴고 드는 잔 속에 아롱아롱 아롱아롱 떠돈다.

2.
맥 풀린 가슴에도 가락눈은 쌓인다
3.
카츄샤 울고 가던 얘기도 생각하니 내 신세
지내온 주막에다 지내온 주막에다 남기고 온 옛 노래
눈을 감고 보는 고향에 가물가물 가물가물 떠돈다

흘겨본 이 부두도 떠나려면 아깝다
평생에 한번뿐인 사랑을 잊을 수가 있느냐
지내온 주막에다 지내온 주막에다 흘리고 온 그 맹서
눈물 속에 어리는 모습 아른 아른 아른 아른 거린다.
-‘항구의 처녀설(처녀림 작사 김송규 작곡 김영춘 노래)’

▲ 생전에 가깝게 지내던 동료, 선후배와 함께. 가수 고운봉. 박재홍. 송해. 김용만. 박일남. 김병조 등의 모습이 보인다. 뒷줄 가운데 모자 쓴 인물이 김영춘 선생
김영춘 선생은 데뷔곡 ‘항구의 처녀설’을 시작으로 대표곡인 ‘홍도야 우지마라’를 비롯해 '버들잎 신세(부평초 작사, 남전 작곡-이하 작사, 작곡 순)', ‘유랑 서커스(산호암, 김준영)’, '잘 있거라 인풍루(유도순, 하영랑)', '바다의 풍운아(남려성, 손목인)', '당신 속을 내 몰랐소(김상화, 김송규)', '동트는 대지(이하윤, 에구치요시)', ‘북극 천리(김상화, 이재호)’, ‘국경 특급(처녀림, 이용준)’, '나그네 황혼(남해림, 김준영)', '청춘마차(이하윤, 김용준)', '향수천리(이하윤, 이용준)', '남국의 달밤(남해림, 김준영)', '인정사정(산호암, 이용준)', '비련의 청춘항(산호암, 어용암)', ‘항구의 전야(이가실, 손목인-듀엣 이해연)’ 등을 잇달아 발표했다. 주로 전속으로 있던 콜럼비아와 자회사인 '리갈(REGAL)'을 통해서였다.

그밖에도 ‘떠나는 배’, ‘가거라 사륜마차’, '희미한 달빛', ‘항구의 사랑’, '포구의 여자', ‘어서가자 노새야’, ‘두 남매’, 눈물의 항구‘, ’흘러온 항구‘ 등 40여 곡을 남겼다.
또한 보관되어 있던 그의 노트에는 직접 자필로 적어놓은 본인의 히트곡 목록도 보였다. 본인이 특별히 아끼는 곡이라고 생각되었다.

1942년 오갑순씨와 혼인, 그 사이에 딸 둘을 낳는다. 그러나 귀한 집 외아들인지라 대를 잇기 위해 집안의 권유로 56년 11월19일, 아랑극단에서 활동하던 악극배우 박순희씨와 재혼, 이들 사이에서 출생한 장남 김무룡씨는 지금은 고인이 되었고 차남 김무술씨는 현재 일산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 아울러 셋째 부인에게서 출생한 아들 김한준씨(51)는 현재 안산에서 연주인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경기도 시흥시 방산동에는 ‘홍도야 우지마라’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방송작가 이서구(1899~1981)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선생의 타계 14주기를 맞은 1995년 5월25일에 세워졌다. 이 노래비의 뒷면에는 극작가 한운사 선생이 쓴 글이 새겨져 있다.
‘홍도야 우지마라’라는 노래를 아시는가. 우리 민족의 수난기(受難期) 일제시대에 고달파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던 대표적인 노래로 오늘날에도 기회 있을 때마다 불리우는 고범(孤帆) 선생의 명작(名作)이다....(하략)’

지난 2005년 한국연예협회가 주관한 ‘스승의 날’ 행사에서 ‘아리랑 술집’의 가수 김봉명 선생과 더불어 스승으로 추대되기도 했던 김영춘 선생은 일제시대 '저항가요'로 출발해 서민의 젓가락 장단에 실려 기쁨과 슬픔을 대신하며 '영욕의 세월'을 건너온 트로트의 대명사, ‘홍도야 우지마라’. 발표된 지 8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이 노래는 여전히 널리 애창되며 국민들 가슴에 살아 있다.  [참고] ‘한국가요인물의 재발견-김영춘 편’ (한국가요작가협회보 ‘가요마을’ 2007년 봄호).

▲ 경기도 시흥에 세워져 있는 ‘홍도야 우지마라’ 노래비에 새겨져 있는 노래 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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