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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평론] ‘바닷가에서’, ‘사랑이 메아리칠 때’의 가수 안다성, 그 부드러운 저음의 미학
2018년 07월 05일 (목) 14:19:45 박성서 webmaster@newsmaker.or.kr

전쟁터에서 깨우친 ‘노래의 힘’이 나의 신념이자 철학

'바닷가에서' '사랑이 메아리칠 때'가 그렇듯 부드러운 저음, 고즈넉한 시를 읊조리는 듯한 분위기의 노래로 먼저 떠올려지는 가수 안다성씨. '

안다성'은 본인 스스로 지은 예명이다. 세계적인 성악가 마리안 앤더슨의 이름에서 착안한 것으로 대중들로부터 부드럽게 불리어지고 싶어 '앤더슨'과 비슷한 발음, '안다성'이라 이름 지었다.

그의 첫 가수 활동은 195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6.25 한국전쟁 중 육군 정훈국 군예대에 입대해 '1102 야전공병단' 소속으로 동부전선의 강릉부근에 배치된 그는 이때부터 2년 9개월 동안 무려 1백여 차례의 공연을 치렀다.

이후 1955년 KBS 전속가수로 발탁되어 활동하던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드라마 주제가 제1호인 ‘청실홍실’을 비롯해 ‘꿈은 사라지고’, 그리고 ‘바닷가에서’, 사랑이 메아리칠 때’를 비롯해 ‘에레나가 된 순이’ 등을 잇달아 히트시켰다. 어느새 국내 최고 원로급 가수가 된 안다성 선생의 음악 여정을 따라가 본다.

글 l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안다성, 그 부드러운 저음의 미학

▲ 가수 안다성
파도소리 들리는 쓸쓸한 바닷가에/나 홀로 외로이 추억을 더듬네/그대 내 곁에 떠나 멀리 있다 하여도/내 마음 속 깊이 떠나지 않는 꿈 서러워라.
아-- 새소리만 바람타고 처량하게/들려오는 백사장이 고요해/파도소리 들리는 쓸쓸한 바닷가에/흘러간 옛날의 추억에 잠겨 나 홀로 있네. -바닷가에서(박춘석 작사, 작곡, 안다성 노래)

1963년에 개봉된 영화 ‘유랑극장’의 주제가로 ‘사랑이 메아리칠 때’와 더불어 발표된 그의 대표곡이다. 그렇듯 부드러운 저음, 고즈넉한 시를 읊조리는 듯한 분위기의 노래로 먼저 떠올려지는 가수 안다성씨.

'안다성'이라는 이름은 본인 스스로 지은 예명이다. 세계적인 성악가 마리안 앤더슨의 이름에서 착안한 것으로 대중들로부터 부드럽게 불리어지고 싶어 '앤더슨'과 비슷한 발음, '안다성'이라 이름 지었다.

'책'잡히고 '흉'잡힐 일, 절대 삼가는 완벽주의자

본명 안영길(安泳吉). 31년, 충북 제천 태생. 지금까지 안다성 선생을 만나오면서 그에게는 늘 변함없는 것 한 가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것은 약속장소에 항상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다는 점과 늘 흐트러짐 없는 차림새였다는 사실이다.

"우리 옛날 가수들은 항상 먼저 와 기다리고 있지 않으면 괜시리 불안하지, 허허..." 이어 그는 말한다. "우리나라 초창기 연극배우 이종철씨 알지? 그 냥반(양반) 꽤나 엄했어요. 분장한 채 대기실 밖에라도 나갈라치면 가차 없이 귀싸대기야. 어떻게 연예인이 무대에 서야 할 얼굴을 함부로 내보이느냐구..."

분장한 얼굴을 함부로 남에게 드러내는 것을 금기시 여기고 살았듯 그 이면에는 일상에서 조차 맨 얼굴을 그대로 내보이며 '책'잡히고 '흉'잡힐 일을 되도록 삼가하려함도 그가 연예인으로 살아오는 동안 몸에 밴 것들이리라.

처음 무대와 연을 맺은 것은 51년, 당시 발발한 6.25전쟁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많은 희생을 강요했다.

“당시 예명을 만들어 청주 방송국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신라의 달밤’을 불렀어요. 이 때문에 6.25 한국전쟁 중 군예대에 입단하게 되었죠.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채로 집이 비워야 하니까 그 조건으로 쌀 두 가마니를 받았어요. 군인들이 사례금을 대신해 준거죠.”

군예대 지원의 대가로 받은 쌀 두가마니를 집에 메어다놓고 인솔자를 따라 나선 그가 도착한 곳은 동부전선 강릉 부근에 배치해 있던 1102 야전공병대.

송달협, 고대원, 유춘산 등의 가수들을 비롯해 7인조 악단과 무용수들, 쇼 단원을 모두 합쳐봤자 고작 25명이 전부였던 '1102 야전공병단' 소속 군예대, 이곳에서 목숨을 건 활동이 시작된다.

군용트럭으로 1백여 리 길을 두 시간, 혹은 그 이상씩 달려 이동하는 도중에 총탄이나 포격 세례를 받기도 수차례. 예고 없는 무차별 폭격은 공연장에도 예외일 수 없어 공연은 수시로 중단되었다. 말 그대로 목숨을 건 공연이었다.

“동부전선 어디쯤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어요. 그 당시엔 라이트가 없으니까 트럭 두 대로 헤드라이트를 비춰 겨우 가설무대를 만들어 놓고 공연이 시작하는데 포탄이 수시로 떨어지는 거예요. 아슬아슬한 심정으로 되어 무대에 서자니 조마조마하죠. 당시 관객들은 미처 피난 못 간 사람들과 군인들이 함께 섞여 있었는데 포탄이 떨어져도 부대장이 일어나지 않을 때는 끝까지 공연을 해야 했어요.”

그는 이 전장에서 2년 9개월 동안 무려 1백여 차례의 공연을 치렀다.
“그래도 공연하는 시간만큼은 모두들 즐거워했지요. 서로 격려의 박수라고 할까, 분위기가 대단했죠. 전쟁하다 말고 온 군인들은 몇 시간 후 다시 전투를 위해 고지에 올라야 하는데 쉽게 흥이 나겠어요? 그러나 그럴수록 모두 일심동체가 되어 흥을 북돋우고 박수 쳐주고... 노래와 격려로 한마음이 되는, 알고 보면 눈물 나는 공연이었던 셈이죠.”

목숨을 건 사투의 시간에도 일순간이나마 노래가 공포나 두려움으로부터 얼마나 사람들에게 큰 위안이 되어주는가 하는 사실이 그에게 생생한 현실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직접적인 이때의 경험이 그의 오랜 가수생활 동안 노래에 대한 '신념'으로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 쉽사리 짐작되어졌다.

KBS 전속가수로 본격 가수 활동 시작

그가 본격적인 가수의 길로 접어들게 된 때는 9.28 서울수복 이후 서울로 복귀한 신흥대학 3학년 때인 1955년. 친구 생일자리에 초대 받아 간 곳이 당시 종로의 '여정카바레'였다.

사교춤이 한창 유행하던 무렵 이 곳은 풀 멤버 밴드가 있던 일류 카바레로 명성만큼이나 무대 또한 근사했다. 물론 그가 이전에 섰던 야전무대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이 때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친구들이 그를 무대로 끌고 올라간 것이다.

이 돌발 사태를 제지하던 웨이터와 친구들 간에 실랑이가 벌어지고 이윽고 몸싸움까지 벌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무대에 오르자 그는 버릇처럼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노래를 시작했다.

'서울야곡'. 야전무대에서 즐겨 부르던 가수 현인의 노래.
노래가 시작되자 아수라장이던 장내가 일순간 잠잠해졌다. 순간 그는 더욱 긴장했다. 그러나 이내 악기들이 하나 둘씩 자신의 노래를 따라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렇게 3절까지 노래를 마쳤다.

무대에서 내려오자 의외로 악단장이 다가와 명함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방송국 전속가수 시험에 응시할 것을 제의해왔다. 명함에는 '중앙방송국 경음악단장 손석우'라고 적혀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당시 대학생 신분에서 대중가요 가수는 썩 매력적이지 않았죠. 허나 방송국의 전속가수 시험제도라는 것이 묘하게 도전의식을 자극하더군요."

결국 그는 이듬 해, 노래와 악보 테스트를 거쳐 권혜경 등과 함께 전속가수로 발탁된다. 그리고 몇 달 뒤 비로소 첫 취입할 노래의 악보를 건네받는다. 이 노래가 바로 우리나라 연속방송극 주제가 제1호인 '청실홍실'이다.

‘청실홍실 엮어서 정성을 들여/청실홍실 엮어서 무늬도 곱게...’로 시작되는 악보를 훑어내려 가면서  그는 순간 난감해졌다. 노래가 지극히 짧고 단순해 감정을 이입할 부분이 도무지 없는 것이었다.

고민 끝에 그는 작곡자 손석우씨를 찾아갔다. "선생님, 이 노래는 어떻게 불러야 합니까?" 이 난감한 질문에 대한 작곡가 손석우씨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명료했다. "그냥 쉽게 불러요, 동요 부르듯..."

우리나라 드라마주제가 1호 ‘청실홍실’의 히트로 이름 알려

청실홍실 엮어서 정성을 들여/청실홍실 엮어서 무늬도 곱게/티 없는 마음속에 나만이 아는/음---- 음---- 수를 놓았소.

인생살이 끝없는 나그네 길에/인생살이 끝없는 회오리바람/불어도 순정만은 목숨을 바쳐/음---- 음---- 간직했다오.

청실홍실 수놓고 샛별 우러러/청실홍실 수놓고 두 손을 모아/다시는 울지 말자 굳세게 살자/음---- 음---- 맹세한다오. -청실홍실(조남사 작사, 손석우 작곡, 안다성 송민도 노래)

1955년 12월부터  시작된 중앙방송국(현 KBS) 드라마 '청실홍실'의 주제가인 이 노래는 또한 우리나라 드라마 주제가 제1호이기도 하다. 당시 방송국 전속가수 안다성씨와 송민도씨가 듀엣으로, 그리고 40인조 시온성합창단(단장 이동일)에 의해 취입되었다.

취입 과정에서 불려지는 노래는 스스로도 근사했으며 반응 또한 예상 밖이었다. 이 노래가 크게 히트하자 이후 드라마에는 반드시 주제가가 있어야 한다는 공식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음반은 오아시스레코드사를 통해 현인, 백일희의 목소리로 발매되었다.

이어 그가 발표한 또 하나의 드라마주제가가 1958년 KBS를 통해 방송된 ‘꿈은 사라지고’다. 이 드라마 ‘꿈은 사라지고’는 '우리에게 꿈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꿈이 절실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강조한 드라마'로 방송 당시 주제가는 안다성과 KBS합창단에 의해 불려졌다.

나뭇잎이 푸르던 날에/뭉게구름 피어나듯 사랑이 일고/끝없이 퍼져 나간 젊은 꿈이 아름다워/귀뚜라미 지새 울고 낙엽 흩어지는 가을에/아- 꿈은 사라지고 꿈은 사라지고/그 옛날 아쉬움에 한없이 웁니다. -꿈은 사라지고(김석야 작사, 손석우 작곡, 안다성 노래)

그러나 이 주제가 역시 이듬해 영화화되면서 남자주인공 역을 맡은 영화배우 최무룡에 의해 음반으로 출반되었다. 안다성씨 입장에서는 ‘청실홍실’에 이어 두고두고 아쉬운 부분이었다.

오아시스 전속 후 영화주제가 ‘비극은 없다’ 히트

▲ 안다성의 대표곡 ‘바닷가에서’ 음반
1956년, 안다성씨는 작곡가 손석우씨의 소개로 오아시스레코드사에 전속된다. 당시 오아시스는 일류 작곡가들이 활동하던 메이저 음반사로 그는 전속되자마자 박춘석 작곡의 '아주까리 주막집'을 비롯해 이재호, 손석우, 김호길씨의 곡을 고루 받으며 주목받기 시작한다.

오아시스 전속 후 가장 먼저 히트한 노래가 ‘비극은 없다’이다. 한국전쟁으로 인해 삶의 질서가 무참히 파괴된 인물들의 내면을 밀도 있게 그려낸 홍성유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이 ‘비극은 없다’의 주제가로 1959년에 개봉되었다.

사랑의 운명 속에 외로운 그대와 나/어두운 밤하늘에 날라가는 낙엽처럼/맺지 못할 인연 속에 흩어지는 청춘/아-- 우리에겐 그래도 비극은 없다.
꽃병에 꽃 한 송이 쓸쓸한 그 모습이/어딘지 모르지만 그대의 모습 같아서/꿈속에서 헤매다가 잠깨어 우는 마음/아-- 우리에겐 그래도 비극은 없다. -비극은 없다(백호 작사, 박춘석 작곡, 안다성 노래)

이 노래의 작사자 백호는 작곡가 박춘석의 또 다른 예명이다. 이 무렵 그는 속칭 ‘박춘석 사단’에 합류해 ‘박춘석 악단’과 함께 전국 순회공연을 다니기 시작했다. 이즈음 발표된 또 다른 히트곡이 바로 그의 대표곡인 ‘바닷가에서’와 ‘사랑이 메아리칠 때’이다. 두 곡 모두 1963년에 개봉된 영화 ‘유랑극장‘의 주제가다.

바람이 불면 산위에 올라 노래를/띄우리라 그대 창까지/달 밝은 밤은 호수에 나가/가만히 말하리다/못 잊는다고 못 잊는다고/아-아- 진정 이토록 못 잊을 줄은/세월이 물같이 흐른 후에야/고요한 사랑이 메아리친다.

꽃피는 봄엔 강변에 나가 꽃잎을/띄우리라 그대 집까지/가을밤에는 기러기 편에/소식을 보내리라/사무친 사연 사무친 사연/아-아- 진정 이토록 사무칠 줄은/세월이 물같이 흐른 후에야/고요한 사랑이 메아리친다. -사랑이 메아리칠 때(서인경 작사, 박춘석 작곡, 안다성 노래)

그는 이밖에도 모나리자, 임자 없는 나룻배, 흐르지 않는 강, 보헤미안탱고, 굿바이탱고 등을 발표한다. 그의 초창기 노래들은 대부분 이전 가요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지극히 서정적이고 분위기 있는 노래 위주로 활동했던 만큼 다른 한편으론 분위기를 띄우는, 일종의 신나는 템포의 곡은 거의 없다. 심지어 지나치게 서정적인 노래로 인해 곤혹을 치른 적도 있을 정도다.

에피소드도 많다. 그중 하나가 전성기였던 1958년, 경남 사천비행장 항공대원들을 위한 공연에서였다. 이때 그는 대표곡인 '바닷가에서'를 부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관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야유를 받았다. 말하자면 신나고 빠른 노래를 불러달라는 주문이었던 것. 

그러나 다른 한편에선 앙코르가 나오고 또 다른 한 쪽에선 야유가 계속되면서 급기야는 객석을 가득 메운 항공대원들이 두 패로 나뉘어져 싸움이 났다. 야유가 나오면 무대 뒤로 들어가고 앙코르가 요청되면 다시 나오고... 두세 번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하는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광경이 연출되었다. 지금은 웃으면서 회고하지만 당시 가수 입장에서는 식은 땀나는 노릇이었을 터. 
 
빈 틈 없는 성격으로 NG 거의 없어

워낙 철두철미한 성격 그대로 누구보다 연습을 많이 했고 취입에 대비하는 것은 그에 관련한 유명한 일화다.

"당시에는 음반 취입할 때 단 한 번 만에 녹음을 끝내야 했지요. 악단이라든지 가수가 취입 도중 실수라도 하면 가차 없이 처음부터 새로 녹음해야 했기에 모든 경비가 이중으로 든다는 것이 당시 여건에서 가장 큰 난제였습니다.

실제로 가수가 취입 도중 몇 번씩 가사가 틀려 계속 NG를 내자 화가 난 음반사장이 연주인들과 식사를 하러가면서 가수를 안에 가둔 채 아예 밖에서 문을 잠그고 나갔던 일화도 있었던 시절이었지요."

때문에 안다성씨는 그만의 방법을 모색했다. 취입할 때 감정에 몰입하다보면 1,2,3절 가사가 혼동되어 실수할 수 있기 때문에 각 절마다 각각 다른 색깔로 구분했다. 이를테면 1절은 검정, 2절은 빨강, 3절은 파랑 등으로 가사를 악보에 적어 마이크 앞에 섰을 정도다. 때문에 그로 인해 녹음이 중단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게 그의 회고.

‘탱고의 왕’이라는 별명답게 20여 곡의 탱고풍의 노래 발표

전성기 때 그의 별명이 '탱고의 왕'이었듯 그에 걸맞게 무려 20여곡이 넘는 탱고 곡을 발표했다. ‘보헤미안 탱고’, ‘뒷골목 탱고’, ‘나의 탱고’, ‘이별의 탱고’에 이어 취입한 '에레나가 된 순이' 역시 탱고리듬의 곡이다.

이 노래는 본래 가수 한정무씨가 취입했으나, 교통사고로 일찍이 타계하자 안다성씨가 바통을 넘겨받아 재 취입, 방송과 ‘극장식 술집’에서 십년 넘게 불러 유행시킨 노래이기도 하다.

‘에레나가 된 순이’와 ‘에레나가 된 순희’, 두 가지 제목으로 이 음반이 발표되던 무렵 6.25전쟁이 남긴 후유증이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어둡게 드리우고 있었다. 미군이 주둔하면서 ‘양공주’, ‘유엔 사모님’이란 신조어가 생겨나고, 또 미군 피엑스에서 빼낸 물건으로 장사하는, 일명 ‘양키장사’들이 돈줄을 쥐고 있었다.

대중가요도 이러한 것들을 놓치지 않고 묘사했는데 그러한 노래 중 하나가 바로 ‘에레나가 된 순이’였다. 먹고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 기지촌을 떠돌며 ‘에레나’가 될 수밖에 없었던 순박한 ‘순이’를 통해 시대의 비극을 담았다.

그날 밤 극장 앞에서 그 역전 카바레에서/보았다는 그 소문이 들리는 순이/석유불 등잔 밑에 밤을 새면서/실패 감던 순이가 다홍치마 순이가/이름조차 에레나로 달라진 순이 순이/오늘 밤도 파티에서 춤을 추더냐.
그 빛깔 드레스에다 그 보석 귀걸이에다/목이 메어 항구에서 운다는 순이/시집갈 열아홉 살 꿈을 꾸면서/노래하는 순이가 피난 왔던 순이가/말소리도 이상하게 달라진 순이 순이/오늘 밤도 양 담배를 피고 있더냐. -에레나가 된 순이(손로현 작사, 한복남 작곡, 안다성 재취입)

이러한 노래들과 함께 50~60년대 전성기를 구가하던 그는 '당시 내 월급이 아마도 대통령 월급의 다섯 배는 되었을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2005년, 그는 50여 년 만에 꿈을 이룬다. 그의 데뷔 초기 취입곡 '청실홍실'과 '꿈은 사라지고'를 비로소 자신의 육성으로 음반을 출반한 것이다. ‘손석우 노래 55년 헌정음반’을 통해서다.

"얼추 잡아도 그동안 5백여 곡은 족히 불렀던 거 같은데 말이지, 이상하게도 아직까지 무대에서 내 노래를 부르는 후배들을 보질 못했어요. 그만큼 내 노래가 너무 어려웠던 것 같아. 안 그런가?" -그가 내게서 동의를 끌어내려는 듯, 계면쩍게 웃어보였다.
-참고 : 서울신문 2006년 5월 11일, 18일 자 ‘박성서의 7080가요X파일-안다성[1][2]’

▲ 박춘석 사단의 멤버들과 함께 공연길에서 한 컷. 좌로부터 안다성, 한사람 건너 이해연, 박춘석, 손인호, 맨 우측이 최갑석. 19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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