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아나운서 출신가수 1호, 이정민(75). ‘국기에 대한 맹세’가 그렇듯 빈 틈 없는 목소리의 주인공인 동시에 영화주제가 ‘남매’, ‘타향처녀’, ‘어느 여인에게’, ‘그대를 보내고’ 등을 발표한 가수다.

1963년 KBS포항방송국 아나운서로 방송계에 첫 발을 내디딘 이후 국군방송 아나운서 실장 겸 보도부장으로 지난 2001년 정년퇴직했다. 하루 스물네 시간이 부족했던 날들, ‘아나운서 겸 가수’라는 두 가지 활동을 동시에 병행하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세월이었다.

많은 제약도 감수해야 했다. 국군방송 아나운서는 사실상 공무원 신분이기에 일반무대에는 일체 나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쪽가수’이자 ‘얼굴 없는 가수’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하나의 목소리로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조율하기 또한 쉽지 않았다. 아나운서는 미성이어야 하는 반면 가수는 개성이 강해야 하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목소리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하고 싶었다’는 아나운서 출신가수 1호 이정민씨, 그의 삶과 노래를 지금, 만나본다.

글 l 박성서(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 이정민

우리나라 국민들 중 아나운서 출신가수 이정민씨의 목소리를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동안 군부대 등에서 방송되었던 ‘국기에 대한 맹세’의 목소리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이 ‘국기에 대한 맹세’는 청와대에서도 20여 년 동안 사용했다.
 
아울러 대부분의 정부 홍보물이나 육해공군 소개 영상 등이 그의 목소리로 제작되었다. 때문에 대한민국 남성이라면 예비군 훈련장이나 민방위교육장 등에서 항상 이정민씨의 목소리와 만나고 있었던 셈이다.

이정민씨가 바로 우리나라 ‘아나운서 출신 가수 1호’다. 1966년에 데뷔곡, ‘먼 산울림’, ‘그대를 보내고’를 시작으로 영화주제가 ‘남매’, ‘타향처녀’, ‘어느 여인에게’, ‘춘천호의 밤’ 등을 잇달아 발표했다. 특히 힘 있고 그윽한 저음으로 사랑받았다. ‘네잎클로버’의 아나운서 출신가수 이규항씨와는 가수로써 1년 선배, 아나운서로써는 2년 후배다.

1963년, KBS 포항방송국 아나운서로 입사해 뉴스부터 다큐멘터리 해설, 음악프로그램 진행은 물론 전속가수, 심지어 당시 방송국에서 자체 제작했던 드라마의 성우까지, 1인 4역을 맡아 다양한 재능을 펼쳐보였다.

“목소리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꿈을 맘껏 펼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지방방송국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겠죠. 그것이 내게는 일종의 행운이었습니다.”라고 술회한다.

아나운서로 입사한 그는 이듬해인 64년, 군에 입대한다. 이때 그가 배치된 곳은 남산 서울중앙방송국 국군방송실. 당시 국군방송실에는 현역인 아나운서 사병이 한명씩 배치되었는데 때마침 전역을 앞둔 이철원 아나운서(MBC)의 후임으로 발령 난 것.

당시 국군방송은 매일 저녁 6시 5분부터 7시까지, 55분간 KBS의 전파를 빌려 방송되었다. 그는 ‘우리의 국군’ 시간을 통해서 군사소식과 함께 음악프로그램 ‘희망의 구름다리’ 그리고 ‘위문열차’ 같은 공개방송도 가끔씩 진행하기도 했다. 특히 주 1회, 전국 각급 부대를 탐방해 구성했던 프로그램 ‘마이크 탐방’은 혼자 기획, 편집, 해설까지 모든 진행을 혼자 도맡아야 했다.

“저는 군인 신분이었지만 주로 사복을 입고 근무했어요. 군사 비밀을 취급했기에 신분과 계급을 밝히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이죠. 당시 매우 바쁜 방송 스케줄 때문에 2인승 경비행기인 ‘L 19’을 타고 출장 다닐 때도 있었고 또 최전방 GOP에 취재 갔다가 시간이 늦어 자고오기도 부지기수였던 만큼 전군을 샅샅이 누비고 다녔죠”

▲ 우리나라 아나운서 가수 1호 이정민씨 데뷔음반 ‘먼 산울림(한국콜롬비아 CR-2505)외

그가 가수로 데뷔한 것이 바로 이 무렵, 군복무 시절이었던 1966년이다. 첫 취입 곡은 ‘먼 산울림’과 ‘그대를 보내고’. 이 노래는 작곡가 황우루씨가 ‘키다리 미스터김’과 함께 발표한 그의 작곡 데뷔곡이기도 하다. 첫 취입곡 ‘그대를 보내고’는 아나운서로써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간주 부분에 내레이션을 넣기도 했다.

‘그대를 멀리 보내고 그대를 잊으려 울었네/그대를 보내는 서러운 내 마음 남몰래 숨어서 울었소/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밟으며/흘러간 옛날의 그리운 내 마음/이 밤도 그대여 안녕히.
(내레이션) 아, 나 여기 조그만 돌이 되리라 영원히 차디찬 돌이 되리라.
그대를 멀리 보내고 그대를 위하여 울었네/영원히 떠나간 그대의 행복을 눈물을 삼키며 빌었소/내 사랑 아름다운 그대여 잘 가오/세월이 흘러도 그대는 내 사랑/잘 가오 그대여 안녕히.’ -그대를 보내고(황우루 작사, 작곡, 이정민 노래)

우리나라에 첫 아나운서 출신가수의 등장으로 화제를 모았던 이 노래는 이후 68년, 노랫말과 제목을 바꿔 ‘꽃잎에 새긴 사랑’으로 가수 차도균씨에 의해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유년 시절, 작곡가 김영광 황우루와 함께 기타연주, 노래지도 받아

본명 이규환(李圭煥). 1943년 2월 9일 부친 이병국과 모친 김순례 사이 3남4녀 중 여섯째로 포항 상원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작곡가 황우루, 김영광씨와 포항중·고등학교 동기동창으로 당시 함께 기타를 배우고 노래를 불렀던 단짝들이다. 이들은 포항에서 활동하던 작곡가 이정화씨에게 기타 연주와 노래 지도를 함께 받았다.

앞서 거론했듯 작곡가 황우루씨는 ‘그대를 보내고(이정민)’, ‘키다리 미스터김(이금희)’을 시작으로 ‘울릉도 트위스트(이시스터즈)’, ‘사랑을 하며는 예뻐져요(봉봉)’ ‘처녀농군(최정자)’ ‘화진포에서 맺은 사랑(이시스터즈)’ 같은 히트 곡을 잇달아 발표하며 유명작곡가로 발돋움한다.

김영광씨 또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울려고 내가 왔나(남진)’, ‘사랑은 눈물의 씨앗(나훈아)’을 비롯해 ‘여고시절(이수미)’, ‘잘 있어요(이현)’, ‘마음 약해서(와일드 캐츠)’, ‘잠깐만(주현미)’ 등 데뷔 때부터 현재까지 슬럼프 없이 계속 활동하고 있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히트메이커.

아나운서 가수 이정민은 ‘먼 산울림’을 시작으로 김기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남매’의 주제가(남국인 작사, 백영호 작곡), ‘타향처녀(이동일, 김학송)’, ‘어느 여인에게(김문응, 정민섭)’를 비롯해 드라마 주제가 ‘산 넘고 물 건너(이인석, 김인배)’ 등을 잇달아 취입하지만 군인 신분이라 어쩔 수 없이 가수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아야 했다. 특히 일반무대엔 일체 나설 수 없었던, 이를테면 ‘얼굴 없는 가수’였다.

어쩔 수 없이  ‘반쪽 가수’이자 ‘얼굴 없는 가수’가 되다

이정민씨는 1967년 제대와 더불어 국군방송 아나운서로 정식 발탁된다. 동시에 가수로써 음반 취입도 더욱 활발해졌다.

이때 발표한 노래들이 ‘마음의 그림자(황우루 김영종)’, ‘춘천호의 밤(유경희, 이철혁)’, ‘호숫가의 민들레(김강섭, 김강섭)’, ‘사랑이 외로워 울었네(김중순, 김영광)’, ‘송별파티(월견초, 김성근)’ 등. 그러나 국군방송 아나운서는 사실상 공무원 신분이었던 탓에 많은 제약을 받아야했다. 무엇보다 야간무대에는 일체 설 수 없었다. 결국 레코드 취입만으로 가수 활동을 해야 하는 ‘반쪽 가수’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

또한 탁음도 개성으로 허용되는 가수와는 달리 아나운서는 반드시 미성이어야만 했다. 때문에 목소리 보호를 위해 절대 큰 소리 지르는 것을 스스로 금기시했기 때문에 무대에서의 ‘열창’한다는 것도 사실상 무리였다. ‘아나운서 겸 가수’의 길은 그에게 결코 쉽지 않았던 선택이었다.

‘군번 없는 용사’로 사이공방송국에 파견되다

1971년 3월, 그는 ‘사랑이여 안녕(장경록, 장경록)’을 끝으로 그해 8월, 방송요원으로 정연익 PD와 함께 베트남에 파견된다. 베트남, 즉 월남은 당시 전시 중이었기 때문에 파월장병을 위한 ‘주월 한국군방송국’이 개국했다. 65년 11월 15일, 시험전파를 첫 발사한 데 이어 주월사령부가 있던 사이공방송국을 비롯해 맹호부대와 십자성부대 지역의 퀴논방송국, 청룡부대 지역의 호이안방송국, 백마부대의 나트랑방송국 등을 잇달아 개국했다.

이는 북한이 먼저 하노이에 평양방송을 설립, 한국말로 방송을 시작했기 때문에 고국을 떠난 많은 장병들과 파월 기술자들이 우리말로 된 이 방송을 듣고 있었다. 때문에 우리 측에서도 서둘러 개국했다.

이정민씨가 파견된 곳은 사이공방송국. 사이공은 외관상 마치 전쟁과 무관한 도시처럼 평온해보였지만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전쟁터였던 지라 방송요원들도 평상시에 무장을 해야 했다. 수당도 당시 ‘한국군 대위의 월급’에 해당하는 1백50불이 별도로 지급되었다. 방송국 주변을 비둘기부대가 경계해주었지만 이따금씩 게릴라가 나타나 비상이 걸리기도 했다.

방송은 하루 9시간. 그중 두 시간은 자체 뉴스와 신청곡 프로그램, 부대 탐방 등을 내보냈고 나머지 시간은 국내에서 공수해온 인기 프로그램 중 CM만을 빼고 방송했다. 당시 국내 인기프로그램들은  KBS의 ‘젊은이의 광장’ ‘노래의 성좌’ ‘노래고개 세 고개’, MBC의 ‘오색의 화원’ ‘인기가수 앨범’ ‘전설 따라 삼천리’, TBC의 ‘가요대상 인기열차’ ‘가요 팝송 베스트 10’ ‘다이아몬드쇼’, DBS의 ‘너와 나의 시간’, ‘명랑 백일장’, 국군방송실의 ‘장막을 헤치고’ ‘라디오 스크린’ ‘향토소식’ ‘우리의 군가’ 등으로 이를테면 국내 인기방송의 하이라이트, 그 축소판이었다.

“해프닝도 많았어요. 국내 제작 시간과 방송날짜가 달라 시차도 엇갈렸고 파월장병 대상 프로그램이라고 내보냈는데 정작 여고생 대상 프로그램이었던 황당한 일도 있었죠. 그중 전국을 누비며 고향소식과 함께 전하는 ‘가족통신’의 인기는 파월장병들에게 대단했어요. 전국 방방곡곡 파월장병의 고향을 찾아 가족들과 인터뷰하면서 무사귀국을 기원하는 그 간절한 사연들이 하나하나 전해질 때마다 함께 목 놓아 울기도 했죠.” 이정민씨의 회고다.

소설 ‘머나먼 쏭바강’, '하얀 전쟁‘, ‘푸른 옷소매’의 배경이 되었던 월남전, 이 열대나라에서 펼쳐진 파월장병들의 전투는 그야말로 악전고투의 연속이었다.

이 무렵 파월 장병들을 찾아가 방송을 진행하는 이정민 아나운서의 활약상은 국내에도 크게 보도되었다. 벙커로 된 방송국 스튜디오에 침대를 놓고 9시간 방송을 했던 그는 아나운서는 물론 음악프로그램 DJ, PD, 엔지니어까지 1인 5역을 혼자 해냈다.

우리 장병들이 있는 부대를 찾아가는 ‘마이크 탐방’의 경우 특히 인기가 높았다. 물론 베트콩의 총격을 받은 헬리콥터가 논바닥에 불시착하는 등 위험한 고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어려움을 겪고 찾아간 부대 장병들의 환호성 소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후에는 각 부대들이 앞 다투어 초청장을 띄우고 헬리콥터까지 보내왔다. 야전병원이나 이동병원, 그리고 의무대 등을 탐방하며 부상당한 병사들을 위로하는 ‘병상을 찾아서’ 또한 인기가 높았다. 부상병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희망 곡을 띄워줌으로써 그들에게는 위로와 격려를, 그리고 업무에 지친 간호장교나 군의관에게는 휴식을 제공했다.

국군방송 40년사에 기술된 월남전선 최대 히트곡 ‘향수에 웃자’

특히 그가 부른 노래 ‘향수에 웃자’는 월남 최대 히트곡이었다.

1977년 한국방송공사가 발간한 ‘한국방송사’에 소개되었다. 그 글 일부 소개하자면,

‘(생략) ...당시 파월장병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노래 중 하나가 바로 ‘향수에 웃자’다. 수륙만리 머나먼 이국전선에서 향수를 달래며 웃고 살자는 매우 고무적인 노래다. 특히 이 노래의 주인공인 이정민 아나운서의 파월근무 소식이 전해지자 더욱 인기가 상승, 주월한국군 방송국에 신청이 쇄도했다. 사이공 방송국의 ‘노래에 사연 안고’ 시간에는 하루 2백여 통의 희망곡 신청 엽서 가운데 평균 40~50장을 차지했다. 사이공 방송국뿐 아니라 나트랑 방송국의 ‘희망 음악회’, 퀴논방송국의 ‘저녁의 희망가요’ 프로그램에서도 마찬가지다.
각 방송국 PD의 이야기에 의하면 하루 평균 5회 이상 10회까지 방송했다는 기록도 있다. 심지어 각 방송국에 한 장씩 밖에 없던 음반이 결국 음질 상태가 고르지 못하게 되자 결국 음질이 좋은 퀴논 방송국 음반을 테이프에 녹음해 틀었다. 이 노래는 특별히 손쉽게 꺼낼 수 있는 곳에 항상 비치했다...(하략)’.

그렇듯 당시 파월장병들에게 가장 인기 있던 노래는 ‘향수에 웃자’였다. 그만큼 향수 또한 깊었던 탓이다. 아울러 이 노래의 주인공인 가수 이정민씨가 직접 방송요원으로 함께 파월되어 근무하게 되자 더욱 장병들 사이에서 애창되며 한껏 사기를 드높이기도 했다.

‘전우야 굳세게 싸워 이기자/이국에 바친 마음 서러워 말고/고향이 가고플 땐 하늘을 보고/사랑이 그리울 땐 편지로 쓰며/먼 하늘 정글에서 향수에 웃자.
전우야 굳세게 한데 뭉치자/열풍의 고달픔도 서러워 말고/고향이 가고플 땐 하늘을 보고/사랑이 그리울 땐 편지로 쓰며/땀방울 씻으면서 향수에 웃자.’ -향수에 웃자(남국인 작사, 백영호 작곡, 이정민 노래, 1967년)

포화 속에 울려 퍼진 사이공방송국의 숨 가쁜 고별방송

▲ 1973년 2월 15일, 이정민 아나운서의 고별 방송 장면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방송국이었던 이 주월 한국군방송국이 마침내 73년 2월, 철수한다. 이미 전선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1972년 2월 청룡부대가 귀국함에 따라 호이안방송국을 폐쇄했고 계속해서 나트랑 해변에도 베트콩이 밀려오기 시작하면서 한국군의 전면 철수와 함께 퀴논방송국, 나트랑방송국, 투이호아중계소가 차례로 폐쇄해 나갔다.

1973년 2월 15일. 마침내 베트콩의 기세가 사이공 가까이까지 밀려오자 사이공방송국도 숨 가쁘게 고별방송을 내보내고 있었다.

“1967년 2월 1일, 월남의 애국시민과 주월 한국군을 위해 개설되어 7년여 동안 동고동락했던 주월 한국군 사이공방송국이, 오늘 마지막 소원을 풀지 못한 채 고별방송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자유를 위해 피를 흘려야 했던 수많은 영혼들의 소망을 저버리고 저희는 이제 떠납니다. 하지만...” 아나운서 이정민씨의 목소리는 끝을 맺지 못하고 있었다.

‘마이크’를 놓고 나니 비로소 ‘노래’가 보였다

국내로 복귀한 이정민씨는 이후 국군방송 아나운서 실장 겸 보도부장을 역임했다. ‘젊고 패기에 찬 영원한 청년방송’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그러했듯 국군방송 전파에 청춘을 실어 보낸 그는 1994년에는 대통령 표창도 받았고 2001년 3월, 정년퇴임할 때까지 33년 동안 방송을 위해 근무한 공로로 녹조근정 훈장을 받았다.

그의 목소리는 ‘국기에 대한 맹세’가 그렇듯 국민 대다수가 쉽게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하다. 하지만 그가 불렀던 노래들은 세월 따라 묻혀 어느새 낯설어졌다.

‘아나운서 겸 가수’, 이 두 가지 활동을 동시에 한다는 것은 사실상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나운서는 미성이어야 했고 반대로 가수는 개성이 강해야 했다. 말하자면 탁음도 개성인 가수와는 달리 아나운서는 탁성이 절대 허용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던 탓에 그는 목소리 관리를 위해 평상시에도 절대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때문에 팬들 입장에서 무대에서의 ‘열창’을 기대한다는 것은 한 편 무리였을 터. 더구나 다소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탓에 남 앞에 나서는 것이 부담스러워 스스로 무대를 사양하기도 했다.

때문에 이정민씨가 발표한 노래 중에는 오히려 다른 가수에 의해 리바이벌, 히트한 노래가 많다. ‘그대를 보내고’는 차도균의 ‘꽃잎에 새긴 사랑’으로 리메이크되었고 ‘마음의 그림자’ 역시 가수 배호의 목소리로, 그리고 ‘어느 여인에게’ 또한 가수 김상진씨에 의해 리바이벌되었다.

결국 다른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어 비로소 히트한 노래가 많았던 만큼 이정민씨가 가수로서 보다 적극적으로 활동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정민씨는 69년에 동갑내기인 변형애 여사와 결혼, 현재 슬하에 2남을 두고 있다. 부인 또한 서울 중앙방송국 전속가수 시험에 패티 페이지의 ‘I Went to Your Wedding'을 불러 합격했던 재원. 바로 이때 방송국에서 가수 이정민씨와 처음 만났다.

“아나운서였기에 가수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어요. 다만 당시엔 노래를 ‘악보 그대로’ 부르는 원곡주의자였기 때문에 테크닉을 전혀 구사하지 않았지요. 오히려 지금 다시 부른다면 노래의 맛과 깊이를 더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을 피력한다.

실제로 그는 2012년, 자신의 칠순을 기념해 ‘일흔 나이에 불러본 이정민 애창곡집’이라는 타이틀로 CD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 음반에는 ‘당신은 나의 운명’ ‘만남’ 등 자신의 애창곡 8곡이 수록되어 있다.

‘국기에 대한 맹세’의 빈 틈 없는 목소리와 삶을 세월의 깊이로 담아낸 그만의 감성. 그는 역시  ‘우리나라 아나운서 출신가수 1호’ 목소리의 주인공다웠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