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주 한의사/ 밝은성연구소장

나이 들어가는 여성들이 들으면 좋아할만한 영시(英詩)가 하나 있다.
‘할머니가 되면, 난 보라색 옷을 입고 빨간 모자도 쓸 거야./ 맞지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겠지만. 연금으로 브랜디, 여름장갑, 새틴 샌들을 사놓고,/ 버터 살 돈이 없다고 말하겠지./ 피곤하면 아스팔트에 주저앉아/ 상점 시식을 먹어치우고 경보 벨도 눌러보고/ 그리고 지팡이로 난간도 긁어보고/ 소심하던 젊은 시절 못했던 일들을 할 거야./ 비오는 날 슬리퍼 바람으로 나가서/ 다른 집 정원에서 꽃을 꺾고/ 길에서 침도 뱉어볼 거야. (후략)’

제니 조셉(Jenny Joseph)이라는 영국의 여류시인이 30대에 쓴 시다. 1961년에 발표된 이 시는 영어권에서도 중장년의 여성들로부터 꾸준히 사랑을 받았다. 1996년에 BBC방송이 여론조사를 통해 뽑은 전후 가장 인기 있는 시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었을 정도다.
예의 바르고 품위 있는 행동을 중시하는 영국인들에게 이 시는 많은 공감을 얻었던 것 같다. 점잖은 삶 이면에는 뭔가 껄렁하게, 조심성 없이, 내키는 대로 해보고 싶은 상대적 심리가 억눌려 있을 수 있다. 영국 여성들은 이 발랄한 시어를 통해 억압된 심리가 해소되는 대리만족을 느꼈을 법도 하다. 
소심한 영국인들이 단지 이 시를 시로서 좋아했다면, 보다 행동적인 미국여성들은 이 시를 즉시 행동으로 옮겼다. 영국에서 BBC의 선정을 통해 이 시가 새삼 주목을 받은 이듬해 미국 캘리포니아에 빨간 모자를 쓴 여성들이 나타났다. 수 엘렌 쿠퍼라는 여성 예술가가 아리조나를 여행하면서 중고시장에서 빨간 페도라 모자를 샀다고 한다. 집으로 돌아온 직후 절친의 55번째 생일 파티에 참석한 쿠퍼가 이 모자를 들고 나와 제니 조셉의 시를 읊었다.
‘내가 할머니가 되면 난 보라색 옷을 입고 빨간 모자도 쓸 거야. 내게 맞지도, 어울리지도 않겠지만….’ 쿠퍼는 친구들에게 늙어갈수록 더 활달하고 재미있게 살아보자고 말하면서, 가지고 온 빨간 페도라를 친구에게 선물했다. 친구들은 각자 가져온 빨간 모자를 쓰면서 화답했다. 그들의 빨간 모자는 즐거움과 우정의 연대, 죽을 때까지 이어질 이러한 꿈의 상징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쿠퍼의 친구들은 빨간 모자를 쓰기 시작했고, 그것이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가 관심을 모으면서 1998년 ‘빨간모자협회’(Red Hat Society; RHS)라는 조직이 생겨났다. 
노년의 발랄함과 우정, 그리고 죽을 때까지 식지 않는 꿈. 이 취지에 공감하는 여성들이 곳곳에서 빨간 모자를 쓰기 시작해 빨간모자협회에 연대를 신청했다. 빨간모자협회에 가입된 지역 클럽은 현재 30개국에 2만개 이상이며, 전체 회원 수는 7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 클럽의 행사에서는 회원들은 빨간 모자와 핑크색 옷을 입으며 클럽의 리더는 여왕으로 분장한다. 가입자격은 본래 50세 이상인데, 지금은 50세 미만의 여성들에게 분홍모자(Pink Hat)의 회원 자격을 주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가입된 클럽의 수가 2만개를 넘고 있지만, 이 가운데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낮은 아시아 국가의 클럽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한때 일본과 대만의 클럽이 등재되기도 했지만, 지금은 빨간모자클럽 홈페이지에서 일본의 클럽은 찾아볼 수 없다.
어쩌면 아시아 국가에서 여성의 지위는 아직도 평등권 확보 차원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로터리클럽이나 라이온스클럽, 와이즈맨 YMCA 등 남성 중심의 클럽들은 아시아 국가들에서도 꽤 활발한 편이지만 한국의 경우 YWCA 외에는 이렇다 할 여성중심의 클럽이 없다. 다만 제니 조셉의 시를 들으며 공감하는 여성들이 많은 것을 보면, 한국여성들 사이에서도 발랄한 노년에 대한 갈망은 점점 높아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당장 생존이 시급한 과제일 때, 사람들은 즐거움이라든가 우정의 연대 같은 것에 관심을 갖지 못한다. 생계의 안정이라든가 신변의 안전 같은 1차적 과제가 해결되지 못한 상태에서는 즐거움을 추구할 정신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시에서 언급된 ‘연금(pension)’ 즉, 노후보장이 충족된 상태까지는 빨간모자클럽 같은 건 좀 요원하지 않을까. 
어쨌든, 생존이 시급한 단계를 넘어선 뒤에는 삶의 여유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생계문제 해결을 넘어서 개인의 인권이 보호되는 선진사회의 문턱을 넘어서긴 했지만, 그런 의미에서 과도적인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생존 바로 다음 단계로서, 이 사회는 나눔과 봉사를 현 단계의 주요 관심사로 삼고 있다. 내가 생존을 확보했으니 이웃들도 손잡아 도와주자는 단계다. 그러나 곧 나도 살고 이웃도 살 수 있게 되는 단계가 올 것이다. 그러면 다음에는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
발랄한 노년과 서로를 배려하는 우정의 연대. 제니 조셉의 다소 발칙한 ‘빨간 모자’에는 유쾌한 시사가 들어있다. 

▲ 이은주 한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