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경 작가의 작품 주제는 <추억 여행>이다. 그런데 추억은 과거 지향적인 측면이 강하고 여행은 미래 지향적인 측면이 강하다보니 어쩐지 말에 어폐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작가도 지나간 과거를 떠올리다가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뛰어들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작품은 하나의 통일된 언어를 가지고 있다. 순간을 통해 영원을 확장시킨다는 의미의 회(回)이다.

신선영 기자 ssy@

여행의 기록

▲ 신성경 작가.

사대미술교육과 서양화를 전공하고 미술 교사로 지낸 신성경 작가는 퇴직 후 갑자기 단절된 외부 세계가 낯설게 느껴졌다. 그래서 동네를 산책하게 됐고 골목을 찾아다니게 됐다고 했다. 평소 다녔던 골목부터 다니지 않았던 골목까지 동네 어귀를 돌고 돌아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그렇게 골목들은 지나간 시간을 정리해주는 통로인 동시에 다가올 미래로 진입시켜주는 창구가 됐다.

“골목길에서 사람 사는 모습들을 보며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추억 거리를 표현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유년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기억을 하나둘 끄집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오랫동안 사용한 수채화 물감으로 시도했지만 지금의 나를 표현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빠르고 명료한 아크릴 물감을 선택했습니다. 작업실에서 아침 열시부터 저녁 여섯시까지 이년 동안 육십 점을 완성했습니다.”

그 중 삼십 여점을 골라 지난 시월 인사동 갤러리 라메르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작품에는 그가 살아온 시간만큼이나 많은 것들이 그려져 있었다. 어머니를 추모하는 한복과 유품부터 아버지와 형제들을 떠올려 주는 소품까지, 내 가족에 대한 소회부터 우리 동네에 대한 단상까지, 떠나지 못한 여행에 대한 그리움부터 떠나고 싶은 여행에 대한 설렘까지 모두 잔잔한 삶의 윤곽을 드러내 주는 것들이었다. 특히 어머니를 추모하는 작품이 가장 주목을 받았다.

“<그녀가 남긴 것>에는 어머니의 한복과 유품인 가방, 거울, 열쇠가 그려져 있습니다. 높은 연세에도 단정한 모습을 잃지 않고자 했던 거울과 문을 열고 들어올 수 있었던 열쇠가 늘 가방에 담겨 있었습니다. <아직도 당신의 향기를 기억해>에는 어머니의 치마폭에서 숨바꼭질을 하는 아이가 그려져 있습니다. 몸을 숨기고 놀 수 있고 칭얼대고 울 수 있는 치마폭이 어느 때보다 크게 느껴지는 그림입니다.”

▲ 그녀가 남긴것, 90.9x72.7cm, acrylic on canvas, 2017.

이밖에도 아버지의 스웨터를 풀어 형제들의 옷감을 마련했던 추억의 <내 새끼 따뜻하거라>, 온 가족이 모여 앉을 수 있는 소파에 동네를 다복하게 그린 <소중한 가정>, 빨랫줄에 걸린 내 아이의 어릴 적 옷 <예쁘게 크거라>, 스카프와 여행 가방이 어디론가 향해가는 <바람처럼 떠날 때>, 일곱 마리의 나비와 외출을 나간 양산 <나들이>, 고양이로 의인화된 자신이 한여름의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생선을 상상하는 <시원해>와 같은 작품들이 주목을 받았다.

“제 작품은 대체적으로 밝은 느낌입니다. 과거를 들춰내는 것도 버겁고 미래를 꿈꾸는 것도 버거워 어디로도 떠나지 못하는 분들에게 가볍게 떠날 수 있는 여행이 되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대한 아픔, 현재에 대한 고민, 미래를 향한 두려움... 이런 것들의 무게를 잠시나마 덜어주는 것이 제 작품의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밝은 기운을 더해주기 위해 배경에 더 많은 신경을 쓰게 됐습니다.”

▲ 예쁘게 크거라, 90.9x72.7cm, acrylic on canvas, 2017.

바탕의 미
간결하게 놓인 대상을 더 특별하게 만들어 준 것은 배경이었다. 그 중에서도 과거의 원형을 길어 올리기라도 하듯 건져 올린 동그란 문양이 대상을 조화롭게 받쳐주고 있었다. 과거의 묵은 먼지가 털어져 나와 미래의 먼지에 도래하듯, 윗세대의 언어가 아랫세대에게 전해지고 아랫세대의 언어가 다음 세대에게 전해지는 회(回)의 연결고리를 연상케 했다. 이러한 문양이 주는 상서로운 기운이 주제를 더 강조하며 창작의 공간을 확장시켰다. 

“대상이 구체적인 이미지의 나열이라면 배경은 회화적으로 풀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꽃송이가 피어오르는 것 같기도 하고 거품이 몽글몽글 떠오르는 것 같기도 한 문양으로 배경을 표현했습니다. 밑 작업을 한 뒤에 서너 번의 수작업을 더 거쳤는데, 먼저 큰 원을 그려 넣은 뒤 중간 원을 그려 넣고 마지막에 작은 원을 채워 넣어서 전체적으로 안정되면서도 연결되는 느낌을 실어줬습니다. 결과적으로 몰입감을 높여주고 구성력을 높여주는 형식으로 발전하게 됐습니다.”

▲ 바람처럼 떠날 때, 53.0x43.5cm, acrylic on canvas, 2017.

무수한 집합으로 이루어진 이 패턴은 세포처럼 자유로운 질서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활기가 느껴진다. 여기에는 색채 표현도 한몫했다. “밝지만 유치하지 않은 색”이라고 표현한 작가는 이 색을 만들기 위해 오랫동안 고민을 했다고 한다. 무채색을 좋아하는 작가에게는 자신의 색을 탈피해야 하는 도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갑기 보단 따뜻함을 주고 싶었고 경직됨 보단 유연함을 보여주고 싶었다.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보면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은 게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아름답길 바라고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이 모여 우리가 자라고 아이들이 자라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전시장에 온 사람들이 하나같이 무표정하게 왔다가도 밝게 웃으면서 나가는 모습에서 보람을 얻었습니다. 우리의 바람이 돌고 돌아 다음 세대에게 전해지듯,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나누어져 있어도 하나 된 느낌을 주는 그림을 그려 나가겠습니다.” NM

▲ 나들이, 90.9x72.7cm, acrylic on canvas,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