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文字)의 나라이자, 성리학의 나라였던 조선은 예부터 붓과 글씨에 대해 철학적 사유와 수신(修身)의 도를 강조했다. 대표적인 말이 서여기인(書如其人)이란 말이 있는데, 글씨는 쓴 사람의 인품, 교양, 학덕 등을 나타낸다고 믿었다.

윤담 기자 hyd@

서예란 단순히 먹과 붓으로 종이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닌, 자신을 닦는 수양 과정이다. 때문에 서예의 과정은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 된다. 디지털·스마트 세대로 접어들며 손글씨 마저 자리를 잃고 있는 현실에서 서예가 더한 위기 상황에 처해 있다. 오늘날 위기에 처한 우리의 서예의 명맥을 묵묵히 이어가고 있는 작가가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와 작품세계 구축

▲ 고하윤 선생

풍헌 고하윤 선생은 평생을 전통 서도에 매진해온 서예계의 원로 작가로, 병풍서의 대가다. 정선에서 40년 가까이 공직에 몸담았던 풍헌 선생은 정선아리랑 복원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강원도 문화상 대상, 공무원 문화상 대상 등을 수상한 바 있다. 특히 양구군청 문화공보실장, 정선 화암면장, 여량면장, 북평면장 등을 역임하면서도 서예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불태웠던 그는 공무원 재직 기간에도 작품 활동을 병행했으며, 은퇴 이후 현재까지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중이다. 유려한 흐름으로 펼쳐진 품위 있는 글씨로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담아내고 있는 풍헌 선생은 규당 오상순 선생과 혜정 박태준 선생을 사사하며 필력을 키웠다.

행서, 초서, 전서, 예서, 해서 등 서예의 오체를 섭렵하며 특히 병풍서에 특출한 재능을 나타내고 있는 그는 초서와 행서에 능한 중국 서예가 왕희지를 본받아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와 작품세계를 구축해 대한민국정수미술대전 서예부문 대상, 전국공무원서예대전 대상, 강원서예대전 대상 등 110여 회 이상 수상하는 쾌거도 거두었다. 풍헌 선생의 대표 작품으로는 서체별 명시 병풍서, 20유형별 명시 병풍서 등이 있다. 강원도 정선에서 평생에 걸친 작품 활동으로 전통 서예의 보급 및 문화 보존에 힘써온 풍헌 선생은 지난 1994년부터 병풍서를 제작, 2011년에는 756질의 병풍서로 인증서를 획득했다. 이후로도 계속되는 작품활동으로 그는 2014년 5월 30일까지 21년간 전서 900폭, 예서 1,698폭, 해서 258폭, 행서 6411폭, 초서 2238폭, 한글 204폭, 총 길이 1만6,275m, 총 1만1,709폭, 1,335질의 병풍서를 제작, 지난 2015년 ‘대한민국 최다 병풍서 인증서’, ‘대한민국 가장 긴 병풍 인증서’를 획득한 데 이어, 지난 2월에는 세계 최다 병풍서로 EU(유럽연합) 오피셜 월드 레코드로부터 세계 최고 공식기록인증도 획득했다.

그간 풍헌 선생이 제작해온 작품들은 전서·예서·해서·행서·초서·한글 등 서체별로 분류해 집대성한 엄청난 규모다. 뿐만 아니라 대학, 중용, 예기, 명심보감, 반야심경, 제갈량의 전출사표, 소동파의 적벽부, 굴원의 이소경, 주자의 권학문 등 주옥같은 동양의 훌륭한 경서들이 모두 담겨 있으며, 해석을 달아 한자를 모르는 사람도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가치는 더욱 크다. 대학, 중용, 예기, 명심보감 등 동양의 훌륭한 경서들을 작품화하고 있는 풍헌 선생은 최근 불교사상을 설한 경전 ‘묘법연화경’을 왕희지체로 교본을 따라 2,292폭으로 완성했으며, 그가 보관하고 있는1957년 정유년 정선아리랑 8폭 병풍서와 함께 한국기록원의 심의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종교와 사상 뛰어넘는 예술혼 발휘
풍헌 선생의 뛰어난 예술성은 이제 해외에서도 주목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중국 계림시에서 세운 계림국제화평우호비림에도 풍헌 선생의 작품이 선정되어 석각(石刻)되는 영예를 누렸다. 한국서예가협회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호남미술대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역임한 풍헌 선생은 현재 호남미술대전 고문, 정수 서화 미술대전 초대작가, 대한민국 서도대전 초대작가, 대한민국서예문인화 원로총연합회전 이사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올해 한문성경보감 1천928폭 초안을 완성하고, 왕희지 필체로 작품을 준비 중인 그는 오늘도 종교와 사상을 넘어 예술작품으로 모든 것을 품어내는 높은 경지의 예술혼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다. “모든 것을 이겨내고 끊임없는 도전과 열정으로 일구어내는 희열이야말로 서예가로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보람이자 행복”이라고 말하는 풍헌 선생. 앞으로 그가 선보일 ‘예술혼의 결정체’가 벌써부터 사뭇 기대된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