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키 로빈슨, 차별에 맞서 싸우다
4월 16일(한국시각) 메이저리그 그라운드에는 온통 ‘42번’만 보였다. 추신수(텍사스 레인저스)도, 류현진(엘에이 다저스)도 42번을 달았다. 감독, 코치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42번은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인 재키 로빈슨의 등번호다. 메이저리그에서 유일하게 30개 구단 전체에서 영구결번됐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2004년 로빈슨이 처음 흑백의 장벽을 허물었던 4월 15일을 기념일로 정했고, 2009년부터는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모든 코치진과 선수들이 이날 42번을 달도록 했다. <한겨레 2014년 4월 17일>

▲ 재키 로빈슨

1908년 흑인 복서 잭 존슨이 흑인 최초로 세계 헤비급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차고 1936년 제시 오언스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육상 4관왕에 올라 히틀러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도 미국의 백인 대중이 보고 즐기는 스포츠에는 여전히 흑인의 진입을 가로막는 높은 장벽이 쳐 있었다.
장벽은 2차대전이 끝나고 대중문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한 194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허물어졌다. 1946년 NFL(미식축구)이 흑인 선수를 받아들인 것을 시작으로 MLB(프로야구·1947), PGA(골프·1948), NBA(농구·1949)가 문호를 개방했으며 1958년 NHL(아이스하키)이 마지막으로 흑인의 진입을 허용했다. 이로써 미국에는 흑인 스포츠 시대가 만개했다.
1947년 4월 15일은 미국의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날이다. 장차 미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 최초의 흑인 신인왕, 최초의 흑인 MVP, 최초의 흑인 올스타, 최초의 흑인 명예의 전당 헌액자로 이름을 떨칠 재키 로빈슨(1919~1972)이 메이저리그 경기에 처음 출전한 날이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로빈슨은 미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가 아니라 20세기 최초의 흑인 선수다. 1884~1887년 사이에 15~20명의 흑인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뛴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1887년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구단주 겸 선수이던 캡 앤슨의 선동으로 흑인 선수들이 모두 쫓겨나면서 메이저리그에는 흑인 선수들이 사라졌다. 흑인들은 1920년 5월부터 프로 선수로 다시 등장했지만 그들이 치고 달릴 수 있는 무대는 흑인들끼리만의 ‘니그로리그’였다.
로빈슨은 조지아주 소작농의 막내로 태어나 UCLA 시절 야구는 물론 육상, 농구, 수영 등에서 두각을 나타낸 만능 스포츠맨으로 활약했다. 그는 인종차별에도 결연히 맞섰다. 2차대전 때인 1942년 장교 양성 학교에 입학하려다가 거부당했지만 끝내 입학을 관철해 중위로 복무했으며 몽고메리 버스보이콧 운동(1955)이 있기 한참 전인데도 버스에서 흑인 자리로 옮기는 것을 거부해 군법회의에 소환되기도 했다. 인종차별을 하는 백인 동료 장교와도 싸움을 벌이다 불명예 제대할 뻔하기도 했다.

“인생은 구경만 하는 스포츠가 아니다”

로빈슨은 1945년 제대 후 니그로리그의 캔자스시티 모낙스에서 야구 인생을 시작했다. 그때 로빈슨의 가능성을 눈여겨본 사람이 브루클린 다저스(현 LA 다저스)의 구단주 브랜치 리키였다. 그가 로빈슨을 불러 “어떤 모욕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선수를 원한다"고 하자 로빈슨이 “어떤 문제도 일으키지 않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입단이 성사되었다. 사실 당시 로빈슨 말고도 입단 제의를 받은 흑인 선수가 더 있었으나 그들은 극심한 인종차별에 지레 겁을 먹고 입단을 포기한 반면 로빈슨은 “인생은 구경만 하는 스포츠가 아니다”라며 과감히 차별에 맞서 새로운 역사를 썼다.
로빈슨은 1946년 브루클린 다저스 산하 마이너리그팀인 몬트리올 로열스에 소속되어 타율과 타점에서 리그 1위에 오르며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러자 리키는 이듬해 로빈슨을 메이저리그 선수로 승격시켜 1947년 4월 15일 보스턴 브레이브스와의 개막전에 출전시켰다.
로빈슨을 괴롭힌 것은 백인들의 실력이 아니라 그를 협박하고 위협한 인종차별이었다. 욕설을 퍼붓는 상대 선수, 불공정하게 경기를 진행하는 심판, 원정 경기 때 숙소와 식사 제공을 거부하는 호텔로 인해 괴로움을 겪어야 했다. 심지어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감독은 소속팀 선수들에게 로빈슨에게 고의적으로 부상을 입히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로빈슨은 이를 악물고 묵묵히 야구에만 전념해 데뷔 첫해에 타율 0.297, 12개 홈런, 48 타점, 29 도루를 기록하며 도루왕을 차지하고 그해 처음 제정된 신인왕을 거머쥐었다. 로빈슨의 활약에 힘입어 다저스는 7년 만에 내셔널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메이저리그 전 구단이 42번을 영구결번으로 결정

1949년은 로빈슨 최고의 해였다. 0.342의 타율로 수위타자에 오른 것을 비롯해 도루는 리그 1위, 타점과 안타는 2위, 득점은 3위를 기록해 내셔널리그 MVP를 수상했다. 1956년 시즌이 끝난 후 구단주가 37살이 된 로빈슨을 뉴욕 자이언츠로 트레이드하자 로빈슨은 1957년 1월 은퇴를 선언했다. 그때까지 10시즌을 뛰며 올린 성적은 통산타율 0.311에 137 홈런, 1,518 안타, 734 타점, 197 도루였다. 다저스는 그의 활약 덕에 10년간 6번이나 리그 우승을 차지해 월드시리즈에 진출하고 1955년에는 창단 처음으로 월드 시리즈 우승의 기쁨까지 맛보았다.
은퇴 후 로빈슨은 개인사업을 하면서 흑인들을 위한 일자리 찾기에 매진하고 NAACP(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 간부로 활동하며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열성적인 지지자로 흑인 인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62년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고 1972년 등번호 42번이 브루클린 다저스의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브로드웨이에서는 그의 인생을 다룬 뮤지컬인 ‘The First’가 제작되었으며 미국 우편국은 로빈슨의 우표를 발행했다. 1997년 4월 15일에는 메이저리그 전 구단이 등번호 42번을 영구결번으로 결정함으로써 인종차별에 정면으로 맞선 그의 진정한 용기를 빛내주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과거 소련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무너뜨리기 위한 선전 도구로 세계적인 명작 소설 ‘닥터 지바고’를 이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미 당국이 1950년대 말 소련의 금서(禁書)였던 ‘닥터 지바고’의 러시아어판 출판과 유통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사실이 최근 비밀문서에서 해제된 CIA 내부 문서를 통해 밝혀졌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6일 보도했다.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쓴 ‘닥터 지바고’는 1900년대 초반 러시아 혁명을 배경으로 주인공 유리 지바고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다룬 소설이다. 어떤 정치적·사회적 선택도 가능하지 않던 시기에 끊임없이 자유를 추구하며 새로운 삶을 갈망하는 지바고의 이야기는 러시아 문학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하지만 소설이 완성된 1956년 소련 당국은 ‘닥터 지바고’의 출판을 금지했다. ‘러시아 혁명과 공산주의에 대한 환멸을 담고 있다’는 이유였다. <조선일보 2014년 4월 7일>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1958년 10월 29일, 스웨덴의 한림원에 한 통의 전보가 날아들었다.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노벨상 수상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곰곰이 생각한 끝에 나에게 별 가치가 없는 이번 수상을 고사하기로 했습니다.” 전보를 보낸 사람은 6일 전인 10월 23일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된 소련의 소설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1890~1960)였다. 수상자 발표 이튿날 시상식에 참석하겠다고 밝힌 그가 왜 당초 입장을 바꿔 수상을 거부한 것일까.
파스테르나크는 소련 모스크바 교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화가였고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파스테르나크는 음악가가 되기 위해 어려서부터 음악이론과 작곡을 공부하다가 방향을 바꾸어 모스크바대와 독일 마르부르크대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1차대전 때는 우랄 지방의 군수공장에서 일하며 틈틈이 시를 썼다. 1914년 데뷔 시집 ‘구름 속의 쌍둥이’에 이어 1917년 2번째 시집 ‘장벽을 넘어서’를 펴냈으며 1922년 시집 ‘삶은 나의 누이’를 발표해 일약 명성을 얻었다.
당초 그는 1917년의 러시아혁명을 지지했으나 1930년대 스탈린의 대숙청을 겪고 난 뒤에는 사회주의 체제에 환멸을 느꼈다. 하지만 소심한 성격 탓에 번역 일로 생계를 꾸려가면서 가급적 침묵하거나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다. 1933년 동료작가가 스탈린을 비판하는 시를 낭독했다가 체포되었을 때도 자신을 추궁하는 비밀경찰에게 시종 “모른다”로 일관하다가 “당신은 동료를 옹호할 능력도 없는 인물”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어야했다. 1934년 소련 내 모든 문학단체가 ‘소련작가동맹’으로 통합되어 문학에도 사회주의 원칙이 적용되고부터는 모스크바 근교의 시골집에 틀어박혀 긴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1946년 한 문학 파티에서 자신보다 22살이 어린 34살의 올가 이빈스카야를 만나 그녀를 모티프로 한 장편소설 ‘닥터 지바고’를 집필했다. 당시 파스테르나크는 아내와 두 아들이 있었고 번역가인 올가는 남편을 잃은 미망인이었다. 첫눈에 서로 끌린 두 사람은 작업 파트너에서 연인으로 관계를 발전시켰다.

진실을 추구한 고독한 작가

▲ 영화 ‘닥터 지바고’ 포스터

당시 파스테르나크는 당국의 감시를 받고 있었고, 올가 역시 요주의 인물 취급을 받았다. 1949년 스탈린 정권은 이미 너무 유명해져 부담스러운 존재가 된 파스테르나크 대신 파스테르나크에게 반혁명사상을 주입했다는 이유를 들어 올가를 4년 동안 감옥에 가두었다. 올가는 감옥에서 파스테르나크 아이를 유산하고, 스탈린 사망 후 대사면으로 풀려났다.
파스테르나크는 ‘닥터 지바고’를 탈고한 뒤 1956년 소련의 대표적인 문학잡지 ‘노비 미르’에 출판을 의뢰했다. 하지만 잡지사는 “소설이 10월 혁명과 혁명의 주역인 인민, 그리고 소련의 사회주의 건설을 중상했다”며 출판을 거부했다. 파스테르나크는 할 수 없이 이탈리아 출판사로 판권을 넘겨 1957년 11월 그곳에서 소설을 출간했다.
‘닥터 지바고’는 혁명의 격랑 속에서 비극적인 운명과 사랑을 겪어야 했던 한 인텔리의 초상이자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었다. 황량한 설원을 무대로 역사의 거친 소용돌이 속에서 의사 지바고와 라라의 비극적인 사랑의 대서사시를 통해 영원한 자유정신을 강조했다. 그의 연인 올가를 라라로 묘사한 소설은 이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번역되었고 파스테르나크는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랐다.
1958년 10월 23일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고 이튿날 파스테르나크가 시상식에 참석하겠다고 하자 “매국노”, “속물” 등 온갖 비난이 그에게 쏟아졌다. 소설에는 반동적·반소적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작가동맹이 10월 28일 그를 제명하고 “국외로 추방하라”는 탄핵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파스테르나크는 결국 이를 견디지 못하고 노벨상을 받지 않겠다는 입장을 스웨덴 한림원에 통보해야 했다. 그의 첫 노벨상 거부는 이후 사르트르(1964), 키신저와 공동 수상이 결정된 베트남의 레둑토(1973)로 이어졌다.

선처 바라는 탄원서 보내 국외 추방은 면해

노벨상 거부에도 불구하고 시민권 박탈과 국외 추방 요구가 끊이질 않자 파스테르나크는 “조국을 떠난다는 것은 죽음을 뜻한다”며 당서기장인 흐루시초프에게 선처를 바라는 탄원서를 보내 국외 추방은 겨우 면했다. 그러나 이때 받은 상처가 죽음을 재촉해 1년 반이 지난 1960년 5월 30일 눈을 감았다.
파스테르나크는 죽어가면서도 올가의 안부를 걱정했다. 하지만 그녀는 소련 당국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파스테르나크의 동향을 소련 정부에 보고한 것으로 훗날 밝혀졌다. 1960년 파스테르나크 사후 다시 체포되어 시베리아에 유폐된 올가가 1961년 흐루시초프에게 “파스테르나크를 침묵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가 외국인과 만나지 못하게 하라는 당국의 지시를 충실히 따랐습니다”라며 자신의 석방을 탄원한 편지가 1997년 공개된 것이다. 이에 대해 올가는 이미 1977년 발간된 자신의 회고록에서 “파스테르나크를 보호하기 위해 정부 측과 접촉한 적이 있다”고 밝혀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분명치 않다.
소설은 1965년 데이비드 린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져 세계 영화 팬들을 감동시켰다. 파스테르나크는 1987년 복권되어 오늘날 ‘진실을 추구한 고독한 작가’로 추앙받고 있으며, 어쩔 수 없이 거부했던 노벨상은 1989년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해 수상했다.

■정통 공산주의자 박헌영 北에서 처형
‘조선의 레닌’으로 불렸던 조선공산당 최고 지도자 박헌영의 아들인 원경 스님이 대한불교 조계종 원로의원이 됐다. 경기 평택시 무봉산 만기사 주지인 원경 스님은 박헌영의 두 번째 부인 정순년씨가 1941년에 낳은 아들로 부친 박헌영이 잠적한 뒤 어머니와도 헤어지는 등 우여곡절 끝에 열살 때 친척이었던 한산 스님을 만나 출가했다. 원경 스님은 2004년에는 아버지의 행적을 정리해 <이정 박헌영 전집>을 냈으며 2010년에는 시 230편을 묶어 시집 <못다 부른 노래>를 출간했다. 원경 스님은 한 인터뷰에서 “제 아버지를 죽이고 저를 힘들게 한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원한의 원인이라는 게 상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일보 2014년 4월 11일>

▲ 박헌영(오른쪽)과 김일성

1945년 8월 해방 직후 박헌영(1900~1956)이 전남 광주에서 서울로 올라왔을 때 길거리에는 “위대한 박헌영 선생이여, 어서 나오시오. 우리는 박 동지를 기다립니다”라는 벽보가 붙어 있었다. 박헌영이 1939년 김삼룡 등과 함께 결성한 경성콤그룹 회원들이 전략적으로 써붙인 벽보였다. 박헌영은 1941년 공산주의자에 대한 일제의 검거 선풍이 불자 광주로 내려가 벽돌공장에서 인부로 위장·은신해 있으면서 일제 패망에 대비하고 있었다.
서울로 올라온 박헌영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8월 20일 경성콤그룹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를 발족하고, 9월 11일 조선공산당 재건을 선언한 뒤 책임비서가 되었다. 그는 장차 서울이 통일정부의 중심이 될 것이라는 판단 하에 평양으로 가지 않고 서울을 본거지로 삼아 미 군정을 상대로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미?소가 점령 지역을 자기 입맛대로 요리하는 상황에서 한반도 전체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한 박헌영의 기대는 어느 것 하나 들어맞지 않았다. 소련의 지원을 받아 김일성이 급부상한 북쪽은 물론 미 군정이 장악하고 있는 남쪽 모두 박헌영이 헤집고 들어갈 공간은 없었다.
박헌영은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1919년 경성고보를 졸업했다. 1920년 9월 중국 상해로 망명, 한인공산당에 입당하고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산하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총국 책임비서가 되어 본격적으로 공산주의자의 길을 걸었다. 1922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자대회에 여운형 등과 함께 참석한 뒤 국내에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기 위해 잠입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년 6개월 동안 징역을 살았다. 1924년 1월 출옥 후 사회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주세죽과 결혼하고 그해 4월부터 1925년 10월까지 동아일보·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남북 어디에도 박헌영이 헤집고 들어갈 공간 없어

1925년 4월 17일 결성된 조선공산당 창당 멤버로 참여하고 이튿날 결성된 조선공산당의 청년전위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 초대 책임비서 직책을 맡아 조선공산당의 핵심 역할을 담당했으나 1925년 11월의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또다시 구속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그는 미친 사람 행세를 하고 감방에서는 자살 소동을 벌이며 자기가 싸놓은 똥을 먹기도 했다. 그 덕에 정신병자로 인정되어 1927년 11월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출감할 때 그는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그와 경성고보 동창이자 기자로 함께 근무한 심훈은 그의 모습을 보고 ‘박군의 얼굴’(조선일보 1927.12.2)이라는 시를 지어 울분을 토로했다. 심훈은 1930년 10월 박헌영을 모델로 삼아 상해에서 혁명의 열정을 불태우는 젊은이를 그린 소설 ‘동방의 애인’을 조선일보에 39회 연재하기도 했다.
1928년 8월 박헌영은 임신 중인 주세죽과 함께 함흥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했다. 주세죽은 모스크바로 가던 중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에서 딸을 낳았다. 박헌영은 1928년 11월부터 1931년 말까지 코민테른이 운영하는 모스크바의 국제레닌학교를 다니며 호찌민 등 각국에서 온 청년 공산주의자들과 교유했다. 주세죽이 서울에서 온 조선 남성과 눈이 맞아 1931년 사랑의 도피행을 선택하는 바람에 박헌영은 딸을 고아원에 맡겨둔 채 1932년 1월 홀로 모스크바를 떠났다. 1933년 7월 상해에서 일경에게 또다시 검거되어 경성의 감옥에 6년 동안 갇혀 있다가 1939년 만기 출소했다.
그 후 지하로 잠적해 국내 조선공산주의 운동 사상 마지막 조직인 경성콤그룹을 새롭게 출범시켰으나 경성콤그룹마저 1941년 일경의 탄압으로 와해되자 전남 광주로 피신, 일제 패망에 대비했다. 박헌영을 시중들던 정순년이라는 여성이 훗날 원경 스님이 될 박헌영의 아들을 낳은 것도 1941년이었다.
해방 후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을 대표하는 인물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소련의 비호를 받는 김일성과 세력관계가 곧 역전되었다. 첫 번째 계기는 1945년 10월 13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설립이었다. 박헌영이 북조선 분국을 승인한 것은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권이 김일성에게 넘어가는 전주곡이자 자신의 비극적 운명에 대한 자필서명이었다. 그렇다고 달리 대안도 없었다. 찬반탁 정국에서 박헌영은 소련의 지시에 따라 찬탁으로 돌아섰다. 이 때문에 대중의 신뢰까지 잃어 남한 내 기반이 흔들린 반면 김일성은 소련군의 든든한 지원을 받아 지위를 더욱 확고히 했다.

박헌영 처형은 광신적 개인숭배에 입각한 사이비 공산주의의 승리

1946년 2월 북한만을 단위로 하는 사실상의 북한 단독정권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발족도 박헌영을 남한 정국의 많은 정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격하시켰다. 결정적으로는 조선공산당이 위조지폐를 만들다 발각된 ‘조선정판사 위조사건’으로 체포령이 떨어지고 1946년 10월 월북을 선택함으로써 남한 내 지지 기반까지 송두리째 잃는 결과를 낳았다. 그가 서울에 없는 동안 조선공산당은 1946년 11월 23일 남조선노동당으로 격하되었다.
박헌영은 1948년 9월 9일 수립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김일성 수상 아래의 부수상 겸 외무상의 지위를 차지했다. 1949년 6월 북로당이 남로당을 흡수통합해 창당한 조선노동당에서는 김일성 위원장에 뒤이은 부위원장이 됨으로써 공식적으로 북한의 2인자가 되었다.
북에서 박헌영은 김일성과 함께 남침전쟁을 준비했다. 1949년 3월 김일성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에게 6·25전쟁 지원을 요청하고, 1950년 4월에도 김일성과 함께 또다시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에게 “일단 공격을 개시하면 지하에 잠복해 있는 20만 명의 남로당원들이 호응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남침이 시작되었을 때 박헌영은 평양방송에 자주 나와 ‘남조선 인민들의 봉기’를 선동했으나 그의 호언장담과 달리 남로당원들의 호응 봉기는 거의 없다시피했다.
휴전이 가까지워지면서 김일성은 패전에 대한 속죄양이 필요했고, 자신이 늘 거북스럽게 여겨온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남로당파를 지목했다. 박헌영에게는 미국을 위한 스파이 활동, 남한 내 민주세력의 파괴, 북한 정부의 전복이란 세 가지 죄목이 씌워졌다. 남로당 20만 봉기설 역시 주요 죄목 가운데 하나였다.
박헌영의 사망 일자는 훗날 북한의 전직 고위인사가 박헌영의 아들 원경 스님에게 증언하면서 알려졌다. 김일성의 지시로 1956년 7월 19일 밤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북한에서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토대를 둔 정통 공산주의가 막을 내리고 광신적 개인숭배에 입각한 사이비 공산주의가 승리함으로써 봉건세습 전체주의가 권력의 역사를 이어가게 된 계기가 되었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