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팔월 인천에 위치한 다솜 갤러리에서 이춘자 작가의 두 번째 개인전이 열렸다. 전시 주제는 <가지 않은 길에 서서>였다. 지난날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소회와 단상을 통해 길에 대한 철학적 사유에 도달하고자 했다.

신선영 ssy@

우연과 필연  

▲ 이춘자 작가.

이춘자 작가가 미술 학도의 길에 들어선 때는 팔십 년대 격동의 시대였다. 민주화 운동이 일고 사회과학과 철학이 중요하게 대두되면서 국가 부조리한 시스템에 대해 비판 의식이 일던 시대였다. 이춘자 작가도 그 영향을 받아 경희대학교 행정학과에 재입학해서 붓 대신 펜을 쥐게 됐다. 공공의 문제를 보다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미대를 입학했지만 국가 운영을 연구하고 관리하는 실천학문에 관심이 생기면서 행정학과로 전공을 바꾸게 됐습니다. 그렇게 사회생활을 하고 결혼생활을 하는 수십 년 동안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도 자연스레 접게 됐습니다. 하지만 중년에 이르러 다시 그 길을 걷게 되면서 예기치 않게 일어나는 삶의 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됐습니다.”

오래 전 가지 않았던 길이 끊어지지 않고 돌고 돌아 자기 앞에 놓여졌다. 자기 뜻대로 흘러갈 수 없고, 자기 뜻대로 고정될 수 없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경험하면서 뜻하지 않게 일어나는 우연성(偶然性)과 뜻하지 않아도 일어나는 필연성(必然性)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이십 대 때 심취했던 철학 사상을 기반으로 풀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장자의 동양 철학이었다.

“장자는 ‘세상의 모든 것은 우연히 왔다가 잠시 멈춰 있는 것일 뿐, 그것이 오는 것을 막을 수 없고 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탄생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삶, 춘하추동이라는 자연의 흐름, 부귀영화와 같은 사회적 추세들은 우연과 필연의 충돌 효과에 의해 발생된다는 얘기입니다. 이러한 예측 불가능한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장자는 이 모든 것을 명(命)이라고 규정짓기도 했습니다.”

▲ hidden intention-생성2, 100.0x80.3cm, acrylic on canvas, 2017.

작가는 우연과 필연의 충돌 효과는 우리 사회의 권력 의지와도 상관있다고 했다. 우연성이라는 비 권력 의지와 필연성이라는 권력 의지가 충돌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로 말로 규정될 수 없으며 하나의 말로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 충돌이라는 것은 순간적으로 모였다가 다시 퍼지는 것으로 창조적이고 비평적인 거리를 끊임없이 제공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충돌도 과거의 충돌에서 비롯된 파생 작용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과거 민주화 운동과 같은 충돌에 의해 방향이 바뀌고 상황이 바뀌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지금의 충돌도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는 모르지만 새로운 지점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충돌을 명확하게 인지하고 그 형태와 색깔 그리고 에너지를 나타내는 것이 제 작품의 기본 모티브입니다. 그래서 지난 팔원에 열린 개인전 <가지 않은 길에 서서>의 부제도 ‘우연과 필연’으로 정하게 됐습니다.”

▲ hidden intention-생성1, 100.0x80.3cm, acrylic on canvas, 2017.

충돌 이미지
이춘자 작가의 작품에는 얼룩이 도드라진다. 비정형의 얼룩이 작품 전반에 포치돼 있기 때문이다. 우선 캔버스에 밑 작업을 하는데 보통 한 가지 색을 세 번에 걸쳐, 여섯 가지의 색을 올린다고 한다. 시간차를 두고 올리기 때문에 색들은 뒤섞이지 않고 켜켜이 쌓이게 된다. 여기에 물줄기를 쏘면 위에 색부터 차차 지워지게 되는데, 이때 얼룩과 함께 아래 색이 드러나는 것에서 미학을 느끼고 있었다.

“하나의 색이 지워짐으로써 하나의 색이 드러나고, 하나의 형태가 지워짐으로써 하나의 형태가 생겨나는 일련의 과정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자 했습니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그 곳에는 자기만이 느낄 수 있는 삶의 희열과 환희가 있습니다. 우연과 필연의 충돌이 찰나적으로 느껴지는 작품들을 통해 삶의 이치를 성찰하고자 했습니다.”

▲ hidden intention-fx, 72.7x60.6cm, acrylic on canvas, 2017.

이러한 작업 의도는 작품 전반에 깔려있다. 작품 <hidden intention-생성1>과 <hidden intention-생성2>는 빛과 어둠이 생성하는 순간을 나타낸 것이고, 작품 <hidden intention-global city>는 국제도시의 야경 속에서 더욱 빛나는 욕망의 실재를 드러낸 것이다. 작품 <hidden intention-fx>와 <hidden intention-봄>은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세계에서 도를 깨닫는다는 장자 사상을 담고 있다.

“‘과연 이것이 무엇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작업하는 게 추상 작업입니다. 삶의 우연과 필연이 끊임없이 충돌하며 아무것도 아니었던 길이 길의 시작이 되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니었던 생각이 생각의 단초가 되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니었던 형태가 생명의 씨앗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드러나지 않는 삶의 감각을 겉으로 끄집어내는 작품으로 작품을 보는 모든 이들에게 기억됐으면 합니다.”

▲ hidden intention-T, 72.7x60.6cm, acrylic on canvas, 2017.

이춘자 작가는 경희대학교에서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인천가톨릭대 일반대학원 조형예술학과에서 현대회회를 전공하고 있다. 두 번의 개인전과 삼십여 회의 국내외 단체전 및 초대전에 참여했다. 대한민국수채화공모대전, 인천광역시미술대전, 한국수채화공모대전 등에서 일곱 번의 특선과 입선을 수상했다. 인천수채화협회 사무국장, 부평미술인회 간사, 인천미협수요사생회 운영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인천수채화협회, 부평미술인회, 인천가톨릭미술가회, THE BLUE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NM

▲ hidden intention-global city, 100.0x80.3cm, acrylic on canvas,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