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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뿌리, 한의학 원전을 찾아서
2017년 07월 10일 (월) 13:30:59 아라리라 예술단장 황보 영 webmaster@newsmaker.or.kr

▲ 황보 영
1970년 이전까지만 해도 서양에서는 침술, 뜸, 한의학을 잘 모르고 있었다. 단순히 민간의 주술행위 정도로 알고 있었는데, 1972년 미국 닉슨 대통령이 중국 방문 때 수행비서가 맹장염에 걸려 급하게 수술을 해야 했다. 마취약을 준비 못한 수행의사가 당황하자, 중국의 중의사가 침으로 마취함으로써 통증 없이 수술을 하게 되었다. 전 세계의 기자들이 이 사실을 대서특필함으로써 그때부터 서양의학계도 침구술을 연구하고 질병치료에 우수함을 입증하기 시작했다.

2003년도 세계보건기구 마닐라 회의에서 「침구갑을경(針灸甲乙經)」의 349개 혈위(穴位)와 그동안 새로 탄생한 12개 혈위를 더해 361개 혈자리를 침구혈위(針灸穴位)의 국제표준으로 제정하고, 2006년 10월 세계보건기구(WHO) 일본국제회의에서 「침구갑을경」을 기초로 국제표준화를 실현하였다. 「침구갑을경(針灸甲乙經)」이 나온 지 1800여 년 동안 무수히 많은 임상실험을 해본 결과, ‘황보 밀’ 현안선생(玄晏先生)의 혈자리 처방이 가장 우수하고 유효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황보 밀(皇甫 謐)은 국적이 중국이며, 진나라 시대의 사람(출생 215년 ~ 사망 282년)으로, 자호는 현안선생(玄晏先生)이다. 서진(西晉) 안정(安定) 조나(朝那) 사람으로, 자는 사안(士安)이고 어릴 때 이름은 정(靜)이다. 젊었을 때 방탕하게 파락호로 생활하였으나 20살 무렵부터 부지런히 공부를 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직접 농사를 지으며 책이 손에서 떨어진 적이 없으며 수많은 서적들을 통독했다. 나중에 질병에 걸렸으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저술에 전심하면서 밥 먹는 것도 잊어버려 사람들이 ‘서음(書淫)’이라 했다.

무제(武帝)때 나라에서 벼슬을 주기위해 여러 차례 불렀지만 나가지 않았다. 그때마다 도망을 다니면서 농기구와 농사일에 매진하며 범부생활로 살아가는 것을 보고 무제(武帝)가 궁중서적 한 수레를 하사했다. 농사일과 촌부로 살던 자신이 병을 얻어 그 병을 고치려고 의학서를 읽어 자신이 임상실험 대상이 되어, 가장 오랜 침구 관련서인 『침구갑을경(鍼灸甲乙經)』을 직접 편찬하였고, 역사에도 조예가 깊었다.

1. 황보 밀의 유년시절
황보 밀은 부친 때에 와서 가운이 쇠하여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신안(新安 : 현재 하남성 민지현)에 살고 있는 작은 아버지 댁으로 가서 살기 시작하였다. 황보 밀은 활발하고 총명하였다. 황보 밀의 숙부와 숙모는 황보 밀을 친자식 이상으로 사랑했고 황보 밀과 함께 사는 것을 기쁨으로 알았다. 그래서 황보 밀에게 엄격한 통제교육을 시키지 못했으며 예의범절을 가르치지 못했다. 황보 밀은 책도 잘 읽지 않고 빈둥빈둥 돌아다니며 말썽을 많이 피웠고, 무예를 좋아하고 방탕한 생활 속에 매일 먹고 마시고 향락을 추구하면서 세월을 보냈다.

황보 밀이 17세가 되었을 때도 돈을 물 쓰듯 낭비했다. 어느 날 황보 밀은 손에 과일을 들고 흥미진진하게 콧노래를 부르며 신바람이 나서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숙모에게 과일을 주었다. 갑자기 숙모님의 눈에서는 눈물이 비오듯 쏟아지며 한탄하는 말씀이 “너를 이렇게 잘못 키워 너의 부모님께 면목이 없고,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얼마나 후회를 하겠느냐”며 호소하는 말을 듣게 된다.

숙모가 간절하게 하는 말을 듣고 이때부터 황보 밀은 숙부님과 숙모님의 뜻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자제들! 응석받이로 자란 부잣집 도령들과 왕래를 끊었다. 그리고 마을에서 가장 학식 있는 학자 석탄(席坦)을 스승으로 모시고, 유학(儒學)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2. 황보 밀의 학문 정진
▲ 현안선생(玄晏先生) 황보 밀 영전
숙모님의 가정 형편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나빠져서 빈곤한 생활은 계속되었다. 그래서 황보 밀은 농사일을 시작했다. 밭을 갈면서 힘든 농사일에 뛰어난 관찰역으로 여러 농기구를 발명하면서 책을 읽었다. 매일 밭에 나갈 때 책을 가지고 나가 쉬는 시간에 밭 두령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그는 시간 아끼기를 금같이 하였으며 시간을 낭비했던 지난날을 보상하려고 굳게 마음먹었다. 사람들은 황보 밀을 서치(書痴)라고 불렀다. 서치란 책벌레, 독서광, 책에 미친 사람을 일컫는다. 황보 밀은 제자백가들의 저작을 비롯하여 기타 많은 서적들을 탐독하여 학식은 진일보 하였으며 유명한 학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황보 밀이 학문연구에 정진하는 투철한 정신에 감동하여 그의 아호(雅號)를 서음(書淫)이라고 불렀다. 황보 밀은 책을 읽기 시작한지 8년, 선생의 나이 28세 때부터 학자로 인정을 받으며 유명한 인사들이 몰려들면서 30세 때 이미 그의 이름은 온 세상에 대학자로 알려져 있었다. 황보 밀은 경사자집(經史子集)은 물론 문학서적과 역사서적 등 가리지 않고 탐독하였으며, 스스로 문학을 깊이 연구하여 문학에도 남달리 조예가 깊었다. 황보 밀은 문장을 짓기 시작했고 인구에 회자하는 시부를 지었다. 그 당시 이름을 떨치던 문학가 좌사(左思)가 삼도부(三都賦)를 저술하고, 황보 밀은 서문을 맡았는데, 이 삼도부는 반향을 불러일으켜 한때 전국을 뒤흔들어 놓았다. 낙양성 내의 종이 값과 붓 값이 앙등하였고 먹과 벼루의 가격도 덩달아 치솟았다.

황보 밀의 재능과 학문은 역사에 크게 공헌하였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였다. 그는 중국전통 침구학 연구에 전심전력하기 시작하며 스스로 자기 몸을 임상 실험대상으로 병을 고치고자 수백 년 전부터 내려오는 황제내경(黃帝內經)의 영추(靈樞), 소문(素問), 난경(難經), 한방과 침구에 대한 의학서적을 모두 탐독하였고, 45세부터 의원으로 불리기 시작하였으며, 20년에 걸쳐 치료한 임상경험을 토대로 만들어낸 것이 바로 WHO(세계보건기구)에서 선정한 책으로 12권 128편이 등재되어 있다.

3. 황보 밀의 「황제삼부침구갑을경(皇帝三部針灸甲乙經)」
황보 밀은 많은 시간과 정력을 침구학 저작에 소비하였다. 각종 침구학 저서들을 수집하고 학술적 가치가 없는 부분을 삭제하고 중복된 부분은 다시 정리하며 중요한 부분은 설명을 덧붙였다. 동시에 진(秦), 한(漢), 삼국시대 이래 전해 내려 온 침구학 방면의 내용을 총 집결하고 자신의 풍부한 임상경험을 결합시켜 서기 282년 침구학의 명저 “황제삼부침구갑을경(皇帝三部針灸甲乙經)”을 편찬하였다. 간단히 「침구갑을경」 또는 「갑을경」이라고도 부른다.

「갑을경」은 가장 오래된 침구학 전서이며 1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제1권에서 제6권까지는 침구학의 기본이론을 논술하였고, 제7권부터 제12권까지는 침구의 임상응용과 각종 질병의 병인과 병리변화 과정, 증후와 적용 수혈, 각 수혈의 주치와 병증 등을 상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갑을경」은 모두 128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 70편은 경혈(經穴)에 대하여 논했다. 황보 밀은 「갑을경」 중 654개의 혈위에 대하여 인체의 머리와 얼굴과 사지와 가슴과 등을 해부학적 부위로 각각 분류하여 정확하게 기술하였다. 동시에 80개의 회혈(會穴 : 두개 또는 그 이상의 경맥이 교차되는 지점의 혈위)과 오수혈(五輸穴 : 사지원단(四肢遠端)과 주관절 및 슬관절 이하 부분에 자리 잡고 있는 혈위로써 오장(五臟) 상용 혈위와 각 혈위의 별명(別名), 소재 부위와 취혈 방법, 주치하는 병증과 침구 치료방법 및 금기 등을 상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그 외에도 이 책에는 어떤 혈위에 침구를 잘못 시술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불량효과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예를 들면 상관(上關)에 침을 너무 깊이 찌르면 이무문(耳無聞) 즉 이롱(耳聾)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으며, 석문혈(石門穴)에 잘못 침자하면 여성들에게 불임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 금침혈(禁針穴) 8개, 심자(深刺)하면 불리한 침점 4개, 오랫동안 유침하면 불리한 침점 1개, 자침했을 때 출혈이 심한 침점 3개, 금구혈(禁灸穴) 31개 등이 수록되어 있다. 또 침구치료 시 꼭 지켜야 할 주의사항 등을 기록해 놓았다.

황보 밀은 「갑을경」 속에 인체의 12경락의 주행과 기타 각종 경락, 즉 기경팔맥(奇經八脈)과 경근(經筋)과 경별(經別)의 순행 노선, 경락상의 주요 병변과 그 진행과정을 상세히 설명해 놓았는데, 이로써 계통적인 경락학이 성립되었다.

「갑을경」은 침구학의 주요 조성성분인 수혈학과 침자학과 경락학의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와 같은 내용은 현대 침구학과 대동소이하다. 다시 말하면 황보 밀의 침구법이 현재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즉 황보 밀의 「갑을경」이 저술된 지 173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변함없이 계속 사용되고 있다.

4. 황보 밀의 「갑을경」 침구학 사례
「갑을경」은 내용이 풍부함은 물론 계통적이며 완전하게 정리되어 있다. 「갑을경」의 이론은 치밀하고 깊으며 상세하다. 예를 들면 「갑을경」에서 경혈을 논술할 때, 어떤 경혈은 이중 조절작용이 있다고 하고, 또 다른 경혈은 부족함을 보(補)해 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어떤 경혈은 지나침을 사(瀉)해준다고 하고, 또 다른 경혈은 화열(火熱)이 상승하는 것을 억제시켜 준다고 한다. 또 어떤 경혈은 음한(陰寒)이 성한 것을 제거시켜 준다고 설명하고 있다.

황보 밀은 이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비위(脾胃)의 병을 예로 들면, 비위에 양기가 넘치고 음기가 부족할 경우 속에 열(熱)이 있으므로 배고픈 증상이 나타난다. 또 비위에 양기가 부족하고 음기가 성하면 속에 한(寒)이 있어 장명(腸鳴)과 복통증상을 수반한다. 이상의 두 경우 모두 족삼리(足三里)에 침자하면 치료된다. 이것은 족삼리가 쌍향조절(雙向調節) 작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다시 말해 음한(陰寒)의 지나침을 덜어주어 평형 시켜주고 양열(陽熱)의 지나침을 덜어서 평형 시켜줌으로써 부족한 음을 보해 주고 부족한 양기를 보충해 주는 결과를 얻는다.

황보 밀은 이와 비슷한 예를 「갑을경」 속에 많이 수록해 놓았다. 이와 같은 경혈의 쌍향조절 작용은 현대의학으로도 이미 증명이 되었다. 이것이 황보 밀의 경혈치병(經穴治病)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갑을경」 중에는 모든 병증에 적합한 취혈처방(取穴處方)도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면 유통(乳痛)에 태충(太沖)과 복류(復溜)혈을 취하고, 후비(喉痺)에 온류(溫溜)와 곡지(曲池)를 취하며, 대변곤란에 중저(中渚)와 대종(大宗)을 취하고, 유뇨(遺尿)에는 신문(神門)과 위중(委中)을 취하여 치료하라고 기록해 놓았다.

황보 밀은 또 인체의 생리작용과 인체 해부, 인체와 자연의 관계, 음양오행과 병인 병리, 사진(四診)과 치료 방법 등을 총 망라하여 「갑을경」에 수록해 놓았다. 「갑을경」은 고대 의학저서들의 내용을 분류 정리하여 중복을 없애고, 후세 의학자들이 배우기 편리하고 이해하기 쉽도록 저술되었다.

역대 의학자들은 「갑을경」을 침구학이론의 표준으로 여김과 동시에 임상진치(臨床診治)의 필독서로 여겨왔다. 당나라 초기부터 「갑을경」은 역대 태의서(太醫署)와 태의원(太醫院)과 태의국(太醫局)에서 의학의 필수교과서로 사용되었다.

황보 밀의 「갑을경」이 세상에 나온 이후에 저술된 각종 침구학 저작은 대부분 「갑을경」을 인용한 것들이 많다. 당나라 때 명의 손사막의 ‘천금요방(千金要方)’과 ‘천금익방(千金翼方)’, 왕도(王燾)의 ‘외대비요(外臺緋要)’와 송나라 때 왕집중(王執中)의 ‘침구자생경(針灸資生經)’, 명나라 때 고무(高武)의 ‘침구취영(針灸聚英)’과 ‘침구절요(針灸節要)’, 양계주(楊繼洲)의 ‘침구대성(針灸大成)’ 마저도 「갑을경」의 원문(原文)을 대량 인용하였다.

5. 황보 밀 「갑을경」의 침구학과 세계표준화
서기 562년 오인(吳人) 지총(知聰)이 160권의 한의학 서적을 휴대하고 배를 타고 일본에 건너갔다. 160권의 한의학 서적 속에는 「갑을경」도 포함되어 있었다. 「갑을경」이 일본에 전입된 후 1450여 년 동안 일본침구학의 기초를 이루었다. 일본의 유명한 한의학자 부사천유(富士川游)의 저서 ‘일본의학사(日本醫學査)’에 보면 “서기 701년부터 일본정부에서 한의과 대학의 필수학습 교과서로 「갑을경」을 규정하였으며, 그 후 침구의사들의 가장 중요한 참고서로 사용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新羅)에는 「갑을경」이 일본보다 더 일찍 전입되었다. 이로써 「갑을경」은 신라 침구학의 기초가 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면 "신라에서는 서기 693년에 「갑을경」이 한의과 대학생들의 필수교재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320여 년 동안 「갑을경」은 신라에서 한의학 경전으로 대접받으며, 우리 대한민국 최고의 자랑인 의서 허준선생의 「동의보감」 책속에 혈자리를 기록 정리할 때 황보 밀 선생의 「갑을경」을 참고했다는 기록이 있다.

「갑을경」이 나오기 전 「황제내경(黃帝內經)」에는 약 130개의 혈(穴) 명칭(名稱)이 나오는데 「갑을경」에는 인체에 349개 혈(穴)자리를 해부학적 부위(部位)로 분류(分類)하여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 각 혈명(穴名)의 소재부위(所在部位)와 취혈(取穴) 방법, 체질(體質)과 음양오행(陰陽五行)에 맞춰 각종 질병(疾病)을 진단(診斷)하고 혈(穴)자리 마다 침(針)의 깊이, 변증(變症)의 한열허실(寒熱虛實), 영수보사법(迎隨補寫法), 금침혈(禁針穴) 자리(예: 석문혈(石門穴): 배꼽아래 2寸지점, 이곳에 심자(深刺)하면 불임(不姙)이 됨) 등의 치료방법, 질병(疾病)의 진행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후의 한의학과 침구자료에 관한 수많은 책들은 모두가 「갑을경」의 내용을 기초로 하고 전 세계에서 현안선생(玄安先生)을 침구의 시조로 인정하고 있다.

진(晉) 무제(武帝) 태강(太康) 3년(282년), 68세를 일기로 황보 밀은 고향에서 세상을 마쳤다. 황보 밀 슬하에 두 아들 황보 동령(皇甫 童靈)과 황보 방회(皇甫 方回)가 있다. 황보 밀의 제자들이 황보 밀의 생전 유언대로 영태현(靈台縣) 장오가보(張敖家堡)에 시체를 묻어 주었다.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에 보면  황보 밀의 묘는 영태현성 서북 십리쯤 되는 곳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황보 밀의 정확한 묘지의 소재는 고찰하기 어렵다. 결과적으로 황보 밀의 한의학 중 침구학에 끼친 공헌은 만세에 빛나고 오늘날까지 전 세계 인류가 황보 밀로 인하여 혜택을 받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 황보 밀은 진나라 때 유명한 침구학자로서 세계 최초 침구술을 연구하여 첫 번째로 손꼽히는 세계적인 침구술의 시조로 불린다.

6. 나의 뿌리, 「갑을경」을 남긴 황보 밀 선생을 기린다
「황보 밀문화원」은 2010년에 준공되었다. 대지 20,000평 위에 웅장한 기념관을 비롯하여 유물전시관 등 거대한 건물 5개동과 맨 뒤에는 황보 밀의 묘소가 있다. 2012년 UN사무총장 반기문은 현지를 직접 방문하고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위해 현지인과 기념촬영도 남겼다.

어려운 가정에서 부유한 삼촌댁에 양자로 가서 어린 시절을 철없는 망나니로 지내던 황보 밀은 17세에 숙모님의 말 한 마디를 듣고 공부에 정진하기 시작하였다. 선생의 나이 28세 때부터 학자로 인정을 받으며 30세 때 이미 그의 이름은 온 세상에 대학자로 알려져 있었다. 또 선생의 나이 43세까지 몸을 험하게 사용하여 못 걸을 정도로 아파 의학서적을 공부하여 본인이 직접 치료와 임상실험을 하여 최고의 의사, 대학자로 일평생을 살았다. 과거도 보지 않았으며 정부에서 무려 일곱 차례나 요직을 맡아주기를 요청하였으나 거절하고, 그때마다 숨어살며 돌아가실 때까지 농사일과 농기구 개발, 의료 일을 하시다가 운명하셨다. 그의 장례식에 모여든 사람이 온천지를 가득 메웠다고 한다.

황보밀 선생은 여러 분야에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저서로는 석권론(釋勸論), 독종론(篤終論), 삼도부서(三都賦序), 제왕세기(帝王世紀), 연력(年曆), 고사전(高士傳), 일사전(逸士傳), 열녀전(烈女傳), 현안춘추(玄晏春秋), 황제삼부침구갑을경(黃帝三部針灸甲乙經)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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