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아는 인물은 아니지만,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인물의 삶과 가치관을 새기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영화 <박열>을 통해 시대를 막론하고 젊은이가 가지고 있는 순수한 신념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 과연 현재에 살고 있는 우리가 일제강점기의 ‘박열’만큼 세상을 정면으로 보고 살아가는지 되묻고 싶다.” - 이준익 감독

신세영 기자 syshin@

최근 일본 정부가 1923년 발생한 간토(關東, 관동)대학살에 대한 유감의 뜻을 표명할 예정이 없다는 답변서를 채택했다고 보도했다. 지난달 12일 일본 교도통신은 일본 정부에서 국무회의를 통해 정부 내에서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 같은 입장을 밝혔음을 전했다. 영화 <박열>은 9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일본 정부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는 간토대학살 사건이 벌어졌던 1923년이 주요 배경이다.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했던 조선의 아나키스트 ‘박열’과 그의 동지이자 연인 ‘가네코 후미코’의 믿기 힘든 실화를 그린다.

간토(關東,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 내각은 민란의 조짐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타고,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계엄령을 선포한다. 이를 계기로 무고한 조선인 6천여 명이 학살당하는 이른바 간토대학살이 벌어지게 되는데, 국제사회의 비난이 두려웠던 일본은 사건을 은폐하기에 적합한 인물로 불령사를 만들어 활동했던 대표적 불령선인 ‘박열’을 지목하게 된다. 영화 <박열>의 진짜 이야기는 바로 여기서부터다. 일본 내각의 계략을 눈치 챈 ‘박열’은 그들의 끔찍한 만행에 국제사회의 시선이 집중될 수 있도록 스스로 황태자 암살 계획을 자백하고, 조선 최초의 대역죄인이 돼 사형까지 무릅쓴 공판을 시작한다. ‘박열’과 ‘후미코’의 이러한 활약은 아사히신문을 비롯한 당시의 일본 신문들에서 상세히 다뤄졌다. 제작진은 철저한 고증을 위해 각 신문사에 연락을 취해 사건이 일어났던 날짜의 신문 기사 내용을 모두 요청해 검토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준익 감독은 “최근 대한민국 젊은이들이 힙합에 열광하고 있다.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음악을 통해 표현함으로써 더 나은 삶의 가치를 향해 나아가려는 이들의 목소리가 힙합이라면, 영화 <박열> 역시 한마디로 힙합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신념’, ‘저항’, ‘투쟁’, ‘아나키스트’라는 단어들은 생소할지 모르나,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내면에도 ‘박열’과 결코 다르지 않은 저항정신이 살아 있음에 주목한 것이다. (6월 28일 개봉)

# 이제훈 배우 “연기 인생 터닝포인트 될 작품”
이제훈은 영화 <파수꾼>을 통해 주목을 받은 이후 <고지전>, <건축학개론>,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 등 다양한 캐릭터로 탄탄한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영화뿐만 아니라 ‘시그널’, ‘내일 그대와’ 등 TV드라마까지 섭렵하며 대세 배우로 자리 잡았다. 그런 그가 거침없고 당당한 조선 최고의 불량 청년 ‘박열’로 분해 데뷔 이래 가장 파격적인 변신을 시도했다. 외모 변신은 물론, 일본어까지 완벽하게 소화한 이제훈은 ‘박열’의 일대기를 세세하게 공부하고 익히며 그의 신념까지도 표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Q. <박열>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 언젠가 꼭 이준익 감독님과 함께 작업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실존 인물을 연기한다는 것이 두렵기도 했지만, 지금까지 제가 보여드렸던 캐릭터와는 완전히 차별화된 새로운 모습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였기에 참여하게 됐다.

Q. 이준익 감독님과 처음으로 호흡을 맞춘 소감은?
- 지금까지 감독님과 함께 작업 했던 배우들과 스태프들 모두 감독님을 인간적으로 좋아하고, 다음 작품도 함께 하기를 바라는 이유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는데, 이번 촬영을 계기로 확실히 알게 됐다. 실존 인물을 연기한다는 것이 두렵고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이준익 감독님이 계셨기에 모든 것을 극복하고 ‘박열’로서 살 수 있었다. 현장에서 언제나 나를 믿어주셨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셔서 정말 감사했다.

Q. ‘박열’이라는 인물을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은?
- 이런 인물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굉장히 호탕하고 당당하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신념을 밀어붙이는 모습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과연 세상의 부조리함에 정면으로 맞서서 바꾸려고 하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었나 하고 스스로 많이 반성하기도 했다. ‘박열’이라는 인물을 연기하면서 스스로에게 ‘더욱 당당한 사람이 돼야겠다’고 다짐했다.

Q. 실존 인물을 연기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가장 힘들었던 점은?
- 나에게 ‘박열’이라는 인물이 완벽히 투영돼야 진정성 있는 연기를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의 신념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공부를 했다. 나 자신을 재단하는 과정도 필요했다. 감옥 안에서 고문을 받는 장면을 연기할 때는 상대 배우 분에게 마치 진짜처럼 가혹하게 해달라고 주문했고, 단식 투쟁을 벌이는 장면에서는 실제 생활에서도 단식을 했다. 그래야만 조금이나마 그분의 삶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Q. ‘가네코 후미코’라는 인물에 인상 깊었거나 매력을 느꼈던 부분이 있다면?
- 일본인들의 조롱과 억압에도 불구하고, 당당하면서 자유롭고 주체적인 모습이 너무 매력적이었다. ‘박열’이 일본제국에 당당히 맞서고, 굴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가네코 후미코’라는 든든한 조력자가 곁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Q. 관객들에게 <박열>이란 영화에 대해 한마디로 정의를 내려달라.
- 역사상 가장 자유롭고 불량한 아나키스트이자, 조선 사람들의 희망이 되었던 ‘박열’의 모습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가슴 뜨거운 불덩이를 지닌 청년의 영화이다.

# 이준익 감독 “누구나 아는 인물은 아니지만…”
‘천만 관객 감독’, ‘타고난 이야기꾼’, ‘시대극의 귀재’는 바로 이준익 감독에게 붙는 수식어들이다. <왕의 남자>를 시작으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님은 먼 곳에>, <소원>, <사도>, <동주>까지 관객들의 마음을 꿰뚫는 감성과 진정성 있는 연출로 작품성과 흥행성 모두를 겸비한 감독이라고 정평이 난 그가 이번에는 일본 제국을 뒤흔든 실화 <박열>로 돌아왔다. 전작 <동주>가 일제강점기에 찬란히 빛났던 미완의 청춘들을 담담히 그렸다면, <박열>에서는 조선 최고의 불량 청년 ‘박열’의 이야기를 통해 불덩이처럼 뜨거웠던 또 다른 청춘을 이야기한다. 이번 영화에서 그는 역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통해 기존의 일제강점기 영화에서의 비장하고 무거운 분위기를 탈피, 통쾌하고 신선한 재미를 담아냈다. 여기에 특유의 날카로운 통찰력을 통해 ‘박열’이라는 인물과 시대가 갖고 있는 뜨거운 감정 역시 놓치지 않았다.

Q. ‘박열’ 역할에 이제훈을 캐스팅한 이유는 무엇인가?
- 이제훈이라는 배우를 떠올렸을 때 드는 첫 생각은 ‘뜨거움’이었다. 본인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불덩이를 뿜어내는 배우다. 그런 모습이 ‘박열’이라는 인물과 완전히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현장에서 연기를 할 때도 감정에만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시나리오를 분석해 연기하는 것을 보고 대단한 배우라 생각했다. 그 인물이 돼서 진심으로 연기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Q. ‘가네코 후미코’ 역할에 최희서를 캐스팅한 이유는?
- 최희서는 완벽한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연기적 기량, 영화에 임하는 자세, 시나리오를 분석하는 능력 등 모든 부분이 뛰어난 배우다. 이야기의 진정성을 위해 ‘후미코’ 역할은 진짜 일본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 중요했다. 최희서가 아니고서는 대안이 없는 캐스팅이었고, 120% 완벽하게 해냈다.

Q.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소속 돼있는 불령사에 대해 소개한다면?
- ‘불령사’는 이름부터 아주 특이하다. 조선인 중에서도 아주 불량한 조선인을 일본인들이 ‘불령선인’이라고 불렀는데, 자신들을 낮추는 그 말을 오히려 단체의 이름으로 사용한 것이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숨기기는커녕, 오히려 뚜렷한 신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행동했던 젊은이들의 단체다.

Q. 실화를 다루는 영화이기에 특별히 중점을 두었던 부분이 있는지?
- 실제 일어났던 일들을 영화 속에 꾸밈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일본의 아사히 신문에 연락해 그때 당시의 ‘박열’과 ‘후미코’가 실려있는 모든 신문을 수급했고, 거기에 나와있는 내용을 토대로 최대한 고증하며 만들었다. 제국주의의 심장부에서 ‘박열’과 ‘후미코’가 보여줬던 찬란했던 순간들을 그대로 담아내고 싶었다.

Q. 기존에 보아왔던 시대극의 틀을 깬 완전히 새로운 연출, 특별한 이유가 있나?
- 보통 일제강점기 영화들은 독립운동가의 투쟁정신과 그들이 독립운동에 임하는 진지한 자세를 다루고 있거나, <암살>과 <밀정>같이 스펙터클한 액션 속에서 승리하는 한 개인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박열>은 조금 다르다. ‘박열’이라는 인물 자체가 아나키스트로서 탈 국가적이고, 탈 민족적인,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온전한 삶의 가치관을 주장하고 있기에 ‘나쁜 일본인’, ‘억울하지만 선량한 조선인’ 이런 이분법적인 모습으로 영화를 다루고 싶지 않았다. 이 인물이 갖고 있는 세계관, 사회관, 국가관 등을 현재 시점에도 대입시켜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기존 일제강점기 배경의 영화와는 다른 연출을 시도했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