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근 설계 '공간 사옥'  

건축가 김수근의 대표작인 서울 원서동 ‘공간(空間)’ 사옥이 문화재로 등록된다. 문화재청은 11월 19일 “공간 사옥을 구성하는 건물 가운데 1971~77년 고(故) 김수근이 설계한 옛 사옥을 등록문화재로 검토, 추진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현행 문화재보호법 시행 제34조에 따르면 ‘등록문화재의 등록기준은 지정문화재가 아닌 문화재 중 건설·제작·형성된 후 50년 이상이 지난 것’을 원칙으로 한다. 다만 ‘50년 이상이 지나지 아니한 것이라도 긴급한 보호 조치가 필요한 것은 등록문화재로 등록할 수 있다’는 단서 조항을 달고 있다.　문화재청은 공간 사옥이 지은 지 42년 됐지만 이 조항을 적용해 등록문화재로 고시할 방침이다. (중앙일보 2013년 11월 20일)
 

▲ 김수근

김수근(1931~1986)은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건축가이자 문화예술인이었다. “건축에도 개념이나 철학이 있어야 한다”며 한국적 전통을 현대에 어떻게 드러낼 것인지를 강박관념처럼 의식하며 살았다.
김수근은 서울의 부유한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경기중 2학년이던 1945년 가을, 덕수궁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대학 건축과에 재학 중 입대한 미군 헌병을 만났고 그를 통해 알게된 ‘건축가’라는 직업에 매력을 느꼈다.
1950년 서울대 공대 건축과에 입학했으나 그해 6월 6·25 전쟁이 터져 피란지 부산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1951년 4월 선진 건축을 배우기 위해 밀항선을 타고 일본의 도쿄로 흘러들어갔다. 무일푼으로 한동안 밑바닥 생활을 하다가 가정교사를 하며 1958년 도쿄예술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2년 후 도쿄대 대학원 건축과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대학 3학년 때 일본인 여성과 결혼하고 도일 9년만인 1960년 봄 고국으로 돌아왔다. 밀항자가 도쿄대 석사가 되고 서울 남산에 신축 예정인 국회의사당 설계 공모에 당당히 당선되어 돌아왔으니 금의환향이었다. 국회의사당 신축계획은 그러나 자유당정권의 붕괴와 5·16 군사쿠데타로 백지화되었다.
김수근은 귀국 직후 자신의 타임 스케줄을 짰다. 일선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간을 40년(1960~2000년)으로 잡아 40년을 전반과 후반으로 이등분하고 이를 다시 4년씩 쪼갰다. 또한 각 4년을 연월일까지 세분해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그래프와 점 등의 도표로 세밀히 기록했다.

“건축에도 개념이나 철학이 있어야 한다”
1960년 11월 ‘김수근 건축연구소’를 설립하고 워커힐 힐탑바(1961년)와 자유센터(1963년) 등을 시작으로 건축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자유센터는 사실상 김수근의 건축시대를 연 개막작으로, 우리나라 근대 건축사에서 처음으로 콘크리트를 그대로 노출시킨 이른바 ‘노출 콘크리트 기법’의 효시로 꼽힌다.
김수근의 건축철학이 화려하게 꽃을 피운 곳은 1966년 11월 창간한 건축전문지 ‘공간’이었다. 김수근은 장차 종합예술지로 변모할 ‘공간’지를 통해 건축 영역에만 한정하지 않고 문화운동을 조율하는 지휘자로 역량을 과시했다. 김수근을 거론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른바 ‘공간 시대’의 문을 연 것으로 평가되는 서울 원서동의 ‘간 사옥’이 완공된 것은 1972년 4월이었다.
‘공간 사옥’은 점차 그 시대의 내로라하는 문화·예술분야 인사들의 사랑방 구실을 했다. 1972년 개관한 미술관 ‘공간 화랑’ 역시 문화예술인들의 단골 장소가 되었다. 1977년 4월 ‘공간 사옥’ 증축과 함께 개관한 소극장 ‘공간 사랑’은 우리나라에 소극장 운동을 처음 활성화시킨 곳으로 의미가 각별하다. ‘공간 사랑’에서는 김덕수의 사물놀이패가 데뷔하고 공옥진의 1인 창무극이 열리는 등 문화예술의 탈출구 역할을 했다.
‘공간 사옥’, ‘공간 화랑’, ‘공간 사랑’이 건축과 미술, 음악, 무용 등 복합문화콤플렉스로 그 시대의 문화예술을 선도하자 1977년 5월 30일자 타임지는 르네상스 때 많은 예술가를 후원한 이탈리아 메디치가의 수장 로렌초 메디치에 비유해 “서울의 로렌초 메디치 김수근”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노출 콘크리트 기법’ 당대 풍미해

▲ 공간사옥

'공간' 건물들에는 토착 재료인 전돌이 사용되었다. 전돌은 우리나라 고궁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검은 벽돌로, 그동안 서양건축 재료의 수입으로 자취를 감췄다가 근 100년 만에 다시 쓰이게 된 것이다. 방문을 없애 문을 열거나 노크할 필요가 없도록 건물을 지었는데도 감춰야 할 곳은 다 감춰져 있는 교묘한 공간배치도 눈길을 끌었다. 얼핏 지하 2층 지상 5층으로 보이지만 지표면에서 높낮이로 측정해보면 무려 22층의 층수로 구성된 것도 화제를 모았다.
김수근은 콘크리트와 철골구조가 드러나는 역동적 조형미가 돋보이는 ‘노출 콘크리트 기법’으로 1960~1970년대를 풍미했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정동 경향신문 사옥(1967년), 타워호텔(1967년), 세운상가 건물(1967년), 한국일보 사옥(1968년), 문예진흥원 문예회관(1977년), 샘터 사옥(1977년), 잠실올림픽주경기장(1976~1984년), 마산 양덕성당(1979년), 경동교회(1981년), 불광동성당(1985년) 등 200여 점이 있다.
이처럼 각광을 받은 그였지만 빛이 강하면 음영도 짙게 마련이듯 그에게도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때가 있었다. 그가 동네북처럼 두들겨 맞은 대표적인 예는 부여박물관(1967년)이다. 박물관 모습이 마치 일본 신사의 도리이를 연상시킨다며 문화계와 언론계로부터 온갖 비난이 쏟아진 것이다. 그는 “일본 식민지 문화 오염세대의 일본에 대한 콤플렉스일 뿐”이라며 항변했으나 곤욕을 피할 수는 없었다.
김원, 류춘수, 민현식, 이종호, 승효상 등 뛰어난 건축가들을 대거 배출한 것도 결코 빠뜨릴 수 없는 그의 대표적 업적 가운데 하나다.

■야세르 아라파트 의문사

독살설이 끊임없이 제기돼 온 야세르 아라파트 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 치명적인 방사성물질에 의해 독살됐다는 과학적인 증거가 처음 나왔다. 아랍권 위성방송 알자지라는 11월 6일 스위스 로잔대 법의학센터가 작성한 108쪽 분량의 부검보고서를 단독으로 입수해 아라파트의 유해에서 정상 농도의 18배에 이르는 ‘폴로늄 210’이 검출됐다고 보도했다. 폴로늄은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마리 퀴리 부부가 1898년 우라늄 광석에서 처음 발견한 방사성물질로, 극소량으로도 인체 장기에 치명적인 피해를 일으켜 독살용으로 쓰인다. 아라파트가 2004년 원인 불명으로 급사한 후 이스라엘의 독살설과 에이즈 보균설 등 다양한 음모론이 제기됐다. 팔레스타인 정부는 지난해 11월 아라파트의 무덤 속 유해에서 장기 표본을 채취했고 올해 3월 스위스, 프랑스, 러시아 3국 조사단이 검사를 진행해 왔다. (서울신문 2013년 11월 8일)

▲ 야세르 아라파트

야세르 아라파트(1929~2004)는 삶 자체가 ‘팔레스타인 투쟁의 역사’였다.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의 상징이었으며 정신적 지주였다. 아라파트가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의 구심점으로 떠오른 것은 1969년이었다. 그해 2월 3일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의장에 선출됨으로써 이후 35년간 PLO는 아라파트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의 주도로 1964년 5월 28일 결성된 PLO의 초대 의장은 아마드 슈케이리였다. 그러나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각 세력 간의 단결도 지지부진해 결국 아라파트가 전면에 나서 슈케이리 의장을 갈아치우고 그 자신이 의장에 선출되었다. 아라파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카키색 유니폼, 머리에 쓴 흑백두건, 목에서 앞 셔츠까지 휘감은 스카프, 엉덩이 부분에 찬 권총집 등이 등장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아라파트는 이집트에서 태어났다. 학생운동 때부터 두각을 나타낸 그는 1958년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을 목표로 ‘파타당’을 결성한 뒤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에 뛰어들었다. 아라파트의 존재가 서방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68년 3월 21일 벌어진 ‘카라메 전투’ 때였다. 아라파트는 시리아의 국경 도시 카라메에서 450명의 파타대원을 이끌고 전차를 앞세운 이스라엘군과 전투를 벌여 150명의 대원을 잃고 이스라엘군 28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내용상으로는 분명 패전이었으나 전투 중 이스라엘군이 철수한 덕에 승리의 주역이 되는 행운을 안았다.
카라메 전투 1년 전 ‘6일 전쟁’의 패배로 실의에 빠져 있던 아랍 세계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래 아랍이 거둔 최초의 승리에 환호와 갈채를 보냈다. 타임지는 그해 12월 아라파트를 표지에 실어 아라파트의 얼굴을 아랍권 밖에 알렸다. 그때까지 팔레스타인 무장 조직들은 요르단 안에서 사실상 ‘국가 안의 국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라메 전투 후 요르단 땅의 통제권을 되찾으려는 요르단 정부와, 그곳을 떠나지 않으려는 팔레스타인 무장세력과 관계가 악화되면서 양측 간에는 긴장이 감돌았다.

“손에서 올리브나무 가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해달라”
1971년 9월 요르단 정부의 토벌작전과 함께 팔레스타인이 말하는 이른바 ‘검은 9월’이 시작되었다. 양측의 치열한 전투 후 아라파트는 수세에 몰려 결국 근거지를 레바논으로 옮겨야 했다. 중앙정부의 장악력이 취약한 레바논에서 아라파트가 이끄는 PLO는 사실상 준정부 기능을 하며 이스라엘을 상대로 테러활동을 펼쳤다.
1972년 9월 팔레스타인의 ‘검은 9월단’이 뮌헨 올림픽에 출전한 11명의 이스라엘 선수를 살해하자 전 세계가 분노했다. 아라파트는 자신과 무관하다고 주장했으나 아라파트를 의심하는 국제적 비난 여론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반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아라파트는 우상이자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PLO는 1974년 10월에 열린 5개국 아랍 정상회담을 통해 팔레스타인의 유일 합법기구로 승인을 받고 유엔의 옵서버 자격을 얻었다. 이를 계기로 유엔 총회에 참석한 아라파트는 1974년 11월 13일의 총회 연설에서 “나는 항상 권총과 올리브나무 가지를 함께 갖고 다닌다. 나의 손에서 올리브나무 가지가 떨어지지 않도록 해달라”며 자신이 평화 옹호자임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1979년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에 체결된 ‘캠프 데이비드 평화협정문’에,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는 이집트에 반환하면서도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를 팔레스타인에 돌려준다는 조항이 빠져있자 아라파트는 이스라엘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벌였다.

‘인티파다(민중봉기)’ 계기로 읽어버린 지도력 회복해
이스라엘은 1982년 8월 PLO의 근거지 레바논을 맹폭격했고 아라파트는 베이루트에서 튀니지로 피신했다. 아라파트는 위기에 빠졌으나 1987년 12월 팔레스타인 땅에서 시작된 제1차 ‘인티파다(민중봉기)’를 계기로 새로운 지도력을 회복해 1988년 11월 알제리에서 독립을 선포하고 정식 망명정부를 수립했다.
1988년 12월 유엔에 초대된 아라파트는 총회 연설에서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고 테러 포기를 선언해 무장투쟁에서 외교 협상으로 투쟁방향을 바꾸었음을 천명했다. 1990년대 들어 든든한 배경이던 소련이 붕괴하고 걸프전 때 이라크를 지원하는 자충수로 국제사회는 물론 아랍 세계에서마저 고립되자 아라파트는 돌파구를 평화협정에서 찾았다.
이런 노력은 1993년 9월 13일 오슬로 평화협정으로 결실을 이뤘다. ▲팔레스타인 평의회가 이스라엘의 점령지역인 가자지구 및 요르단강 서안 예리코시를 1993년 12월부터 향후 5년간 통치하고 ▲이스라엘은 1994년 4월까지 가자지구와 예리코시의 팔레스타인 거주지역으로부터 이스라엘군을 철수시키며 ▲팔레스타인인은 1994년 7월까지 팔레스타인 평의회 구성을 위한 선거를 치른다는 오슬로 평화협정을 체결한 공로로 아라파트는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함께 199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1994년 7월 자치정부 출범과 함께 팔레스타인 땅으로 귀향한 아라파트는 1996년 1월 반대파의 불참 속에 치러진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자치정부 초대 수반에 올랐다. 그러나 1995년 11월 라빈 총리가 이스라엘 극우파 손에 암살당하고 이스라엘의 강경 점령정책에 맞선 팔레스타인의 보복 공격이 되풀이되면서 평화가 점점 멀어지는 듯했다.

공식 사인은 ‘미확인 혈액 질환’
2000년 9월 두 번째 인티파다가 시작된 가운데 2001년 12월, ‘6일 전쟁의 영웅’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가 자치정부 청사 내 아라파트 집무실에 포격을 하면서 “밖으로 나오면 생명을 보장받지 못한다”고 위협해 아라파트는 사실상 연금 상태에 놓였다. 이때부터 아라파트는 내부의 강한 도전에 직면했다. 자신의 권력기반인 파타당의 핵심 인사들조차 수십 년 동안 이어져온 아라파트의 권력 독점과 부패를 지적하면서 개혁을 요구했다.
아라파트는 2004년 10월 25일 갑작스러운 구토와 설사 증세로 팔레스타인 자치구의 병원에 입원했다. 당시 그는 70대였지만 건강한 편이었다. 아랍권 최고의 의사들이 아라파트를 치료했으나 아무도 병명을 확신하지 못했다. 체중이 급격히 줄고 머리카락이 빠졌다. 며칠 후 아라파트는 파리의 군 병원에 이송되었다. 프랑스 의사들이 에이즈, 암, 백혈병 등 발병 가능한 모든 질병을 염두에 두고 진찰했지만 모두 아닌 것으로 판명났다. 아라파트는 결국 11월 11일 평생의 염원인 팔레스타인 독립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병원은 공식 사인에 ‘미확인 혈액 질환’이라고만 기록했다.
이에 대해 2013년 11월 카타르 방송사 알자지라는 아라파트의 생전 소지품들을 스위스 로잔대 병원 등 연구기관에 의뢰해 조사한 결과 이 소지품들에서 자연발생하는 폴로늄 함유량의 18배에 달하는 강력한 독성물질 폴로늄이 검출되었다고 보도하며 '방사능 테러' 의혹을 제기했다.

■‘나비박사’ 석주명
 
뉴욕한국교육원은 데모크라시 프렙스쿨 학생 170명이 지난 11월 21일 맨해튼 재즈링컨센터 프레드릭 로즈홀에서 공연된 뮤지컬 ‘닥터 버터플라이’를 관람했다고 전했다. 닥터 버터플라이는 ‘나비박사’ 석주명 박사의 일대기를 다룬 창작 뮤지컬로 20일과 21일 3차례 공연됐다. 극단 현대극장의 ‘닥터 버터플라이(연출 김진영)’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나비학자의 삶을 모티브로 제국주의와 전쟁의 비극은 물론, 에드워드 로렌츠의 ‘나비효과(Butterfly Effect)’와 기후변화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뉴시스 2013년 11월 24일)

▲ 석주명

석주명(1908~1950)은 일제 치하의 혼란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조선의 나비들에게 ‘이름(학명)과 주소(분포도)’를 찾아주는 데 헌신한 ‘나비 박사’다. 석주명이 자신의 인생행로를 나비 연구로 잡은 데는 일본인 스승의 권유가 결정적이었다. 평양에서 태어나 일본의 가고시마 농림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평소 석주명의 성실성과 연구 태도를 주목해온 스승이 “조선의 나비를 연구하면 큰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했던 말 한마디가 석주명을 나비 연구로 이끈 것이다.
석주명은 1929년 가고시마 농림학교를 졸업하고 고국으로 돌아와 함흥의 영생고보 교사를 거쳐 1931년 자신의 모교인 개성의 송도고보 교사로 부임했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나비 채집을 시작했다. 휴일이나 방학이 되면 나비를 찾아 전국의 산과 들을 누비고 다녔고, 학생들에게는 여름방학마다 200마리씩 나비를 채집하도록 방학 숙제로 냈다. 얼마 전까지 초등학생의 단골 방학 숙제였던 곤충 채집도 이때 생겨난 것이다. 송도고보의 박물관은 곧 온갖 종류의 나비 표본으로 가득 차, 원홍구의 조류표본과 함께 개성의 명소가 되었다. 원홍구는 석주명의 가고시마 농림학교 선배로, 1920년부터 송도고보 교사로 재직 중인 제1세대 조류학자였다.
당시 석주명을 혼란스럽게 한 것은 종(種)의 구분이었다. 크기나 모양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분명히 같은 종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나비가 제각각 다른 이름을 달고 있어 종류를 구분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때까지 한국의 나비를 연구한 학자는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그들은 몇몇의 나비 개체만을 관찰하다가 조금만 다른 형태가 발견되면 무조건 신아종이나 신변종을 발견했다며 자기 이름을 딴 새 학명을 명명하는 식으로 연구 업적을 과대포장했다. 학명을 명명하는 규약에도 결함이 없지 않았지만 자신의 이름을 학명에 올리고 싶어하는 일본인 학자들의 공명심이 이런 결과를 낳게 한 것이다.

전국 누비며 75만 개 표본 채집
석주명은 학계의 이런 풍토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를 바로잡으려면 더 많은 나비 개체가 필요했고 그래서 학생들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75만 개의 표본을 채집했다. 이 나비들을 통계 처리해보니 기존에 등록된 종이나 아종 나비가 단순한 개체변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개체변이란 생물들이 성장하는 환경의 차이에 따라 조금씩 다른 변이를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석주명은 종마다 개체변이의 범위를 밝혀내 잘못된 학명을 하나둘 제거해나갔다.
개체의 ‘변이 범위’를 규명한 ‘변이 곡선’ 이론을 뒷받침하는 데 석주명이 주로 사용한 것은 배추흰나비였다. 그가 ‘배추흰나비의 변이 연구’ 논문을 쓰기 위해 앞날개 길이를 일일이 자로 잰 배추흰나비 개체수만 무려 16만 7,000여 종에 달했다. 이 연구 결과로 그동안 몸집의 크기, 날개의 형태, 무늬의 양상에 따라 이종, 아종, 아형으로 보고된 20여 개의 학명이 하나의 배추흰나비로 정리되었다. 이런 식으로 한국산 나비에 관한 동종이명 844개를 퇴출하고 보니 한국 나비는 248종으로 최종 분류되었다. 한국산 나비의 새로운 분류학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런 연구 성과를 알게 된 영국 왕립협회의 아시아지부가 조선산 나비총목록의 집필을 의뢰했다. 석주명은 1937년 5월 아시아지부 기관지에 150쪽에 달하는 논문을 싣고 1940년에는 논문을 보완해 ‘조선산 접류 총목록’을 출판했다. 영문으로 된 400쪽이 넘는 분량의 이 책은 한국산 나비 연구의 결정판이었다. 한국인의 저서로는 처음으로 영국왕립도서관에 소장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석주명은 세계적인 학자의 반열에 올랐다.
석주명은 1942년 연구 시간을 벌기 위해 송도고보를 사직하고 경성제국대의 촉탁연구원으로 전직했다. 1943년 4월에는 경성제대 생약연구소 제주도시험장 파견을 자원해 1945년 5월까지 제주도에서 근무했다. 석주명은 제주도에 머무는 2년여 동안 나비 연구는 물론 제주도 방언 연구에도 힘을 쏟았다. 그 결과 1949년 ‘제주도 총서’라는 이름으로 ‘제주도 방언집’, ‘제주도의 생명조사서’, ‘제주도 문헌집’이 출판되었다. 사후에는 ‘제주도 수필’(1968), ‘제주도 곤충상’(1970), ‘제주도 자료집’(1971) 등 총 6권의 제주도 총서가 완성되었다.

죽어서도 ‘석(seoki, seokia)’자가 붙은 나비와 함께 날아다녀
우리말에 대한 그의 관심과 재능은 나비 이름을 짓는 데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굴뚝나비’는 굴뚝처럼 까맣다고 해서 붙여졌고 ‘봄처녀 나비’는 봄에 금방 나왔다가 사라져서 처녀처럼 수줍음을 타는 것 같다고 해서 붙여졌다. 수풀알락팔랑나비, 청띠신선나비, 모시나비, 풀흰나비 등도 우리말의 정감을 한껏 살린 고운 이름들이다.
1950년의 6?25 전쟁은 민족적으로도 참극이었지만 석주명 개인에게도 비극이었다. 당시 남산의 국립과학박물관 동물학부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그는 전쟁 발발 후 피난을 떠났다가 9·28 서울 수복과 함께 다시 박물관으로 돌아왔으나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보고 가슴을 쳤다. 출판 준비 중인 나비에 관한 원고, 분신이나 다름없는 15만 마리의 나비 표본 등이 한줌의 재로 변해있었던 것이다. 더 큰 비극은 그의 죽음이었다. 10월 6일 오후 4시 폐허가 되어버린 과학박물관 재건 회의를 위해 집을 나섰다가 개울에서 술을 마시던 일단의 청년들이 그를 인민군으로 오인해 쏜 총을 맞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피란시절에도 늘 배낭에 넣고 다니던 ‘한국산 접류 분포도’ 원고는 1973년 출간되어 한국 나비 250종의 분포 지역을 알려주었다. 그의 죽음을 애석히 여긴 일본인 학자가 그를 기려 흑백알락나비 아종의 학명을 ‘Hestina japonica seoki’로 짓고, 다른 일본인 학자도 네발나비과에 ‘Seokia’라는 새로운 ‘속(屬)’을 설정해 홍줄나비의 학명을 ‘Seokia pratti’로 명명함으로써 그의 이름은 죽어서도 ‘석(seoki, seokia)’자가 붙은 나비와 함께 날아다니고 있다. NM                 

                                                                                      글 / 20세기 이야기 저자- 김정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