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자살

▲ 아돌프 히틀러

독일 나치 정권의 독재자인 아돌프 히틀러를 최후까지 곁에서 보좌한 경호원이 9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AP통신은 9월 6일 히틀러의 충복으로 알려진 로후스 미슈가 전날 베를린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그의 2008년 회고록 집필을 도운 부르크하르트 나흐티갈이 이메일로 알려왔다고 보도했다. SS친위대 장교 출신인 미슈는 히틀러를 ‘보스’라고 불렀으며, 히틀러가 아내 에바 브라운과 권총 자살한 1945년 4월 30일까지 마지막 2주를 그와 함께 지냈다. 히틀러는 제3제국의 종말이 다가오자 총통 집무실 아래에 있는 지하 벙커로 내려간 뒤 미슈를 포함한 필수요원 몇 명만을 남겨놓고 참모들 대부분을 해산시켰다. 미슈는 히틀러가 권총 자살 당일에 나치 정권의 선전장관인 파울 요제프 괴벨스, 비서인 마르틴 보르만, 부관인 오토 귄세와 대화하는 것을 봤으나 자살을 목격하거나 총소리를 듣지는 못했다고 밝힌 바 있다. (연합 9월 7일)

전쟁은 사실상 끝나 있었다. 히틀러(1889~1945)만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베를린 총통 관저 지하실 벙커에서 최후의 반격을 외치며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는 군대를 지휘할 뿐이었다. 전장의 부하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아도 확인할 방법이 없어 허공에 대고 소리치는 격이었다. 마구 남발되는 명령은 지켜지지도 않고 지켜질 수도 없는 것들뿐이었다. 지하 12m의 벙커에서 히틀러는 흰 머리, 떨리는 사지, 굽은 등의 모습으로 발을 질질 끌고 걸어 다녔다. 면도는 빼먹기 일쑤였고 제복은 얼룩져 있었다. 눈은 충혈되고 입가에는 자주 침이 흘러내렸다.
15년 이상이나 히틀러의 정부였던 에바 브라운(1912~1945)이 이런 히틀러를 만나기 위해 베를린에 도착한 것은 1945년 4월 15일이었다. 결혼과 죽음의 의식을 한꺼번에 치르기 위해 총통 관저를 찾아온 것이다. 히틀러가 23살이나 어린 에바 브라운을 처음 만난 것은 1929년이었다. 나치당의 전속 사진사가 뮌헨의 한 사진점에서 일하고 있는 브라운을 히틀러에게 소개한 것이 첫 만남이었다. 그러나 브라운의 아버지가 히틀러와의 만남을 반대하고 히틀러 역시 그의 생애에서 단 한 번의 정열적인 애정을 바쳤던 조카딸 겔리 라우발을 의식해 둘의 만남은 순탄하지 않았다.
라우발은 히틀러의 이복동생 안젤라의 딸이었다. 1928년 히틀러는 안젤라에게 뮌헨에 있는 자신의 살림을 돌봐줄 것을 요청했다. 안젤라는 20살의 딸 라우발과 함께 뮌헨으로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히틀러와 라우발이 공공장소에까지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이 둘의 관계에 대해 쑥덕거렸다. 성적 관계까지 갔는지는 확실히 알려지진 않았지만 당시 히틀러는 라우발에게 깊이 빠져 있었다. 히틀러의 생애에서 처음이자 단 한 번의 사랑이었다. 히틀러는 라우발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심하게 간섭했다. 1931년 9월 라우발이 유대인 음악가와 사랑에 빠져 히틀러의 곁을 떠나려고 했으나 히틀러는 라우발을 보내주지 않았다. 결국 라우발은 9월 18일 히틀러가 없는 아파트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순수한 아리안 혈통으로 유전질환이 없음’을 선언하고 결혼 마쳐

▲ 아돌프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

그녀의 죽음 후 히틀러는 심한 우울증에 빠져있다가 브라운과 본격적으로 만났다. 브라운은 날씬하고 우아했다. 내성적이고 신중하며 품위도 있었다. 지나치리만큼 겸손했고 사람들 앞에 나서지도 않았다. 히틀러는 이처럼 모든 일에 조심성 있고 경망스럽지 않은 브라운을 마음의 안식처로 삼았다. 그러면서도 공적인 자리에는 그녀를 동행시키지 않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독일인들 가운데 그녀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히틀러는 브라운이 그의 본영에 찾아오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매일 전화를 걸어 위로해주었다. 브라운은 이런 자신의 현실을 불만스러워하면서 히틀러가 마련해준 산장에 틀어박혀 수영과 스키를 즐기거나 대중소설이나 영화를 보며 소일했다. 아내도 아니고 애인도 아닌 애매한 지위에 있다 보니 1932년과 1935년 두 차례 자살을 기도했다.
브라운이 베를린에 도착하고 5일이 지난 4월 20일 히틀러가 가장 신뢰해온 친위대 사령관 하인리히 히믈러와 공군사령관 헤르만 괴링이 베를린을 벗어나 도주했다. 히틀러는 분을 참을 수 없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히틀러는 선전상 괴벨스에게 부인과 6남매를 자신이 있는 지하 방공호로 옮기도록 했다. 자신에게 충실한 괴벨스 가족만이라도 브라운과 함께 마지막까지 그의 옆에 남아 있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괴벨스가 배신하지 못하도록 묶어두기 위한 인질용이었다.
4월 25일 미군과 소련군이 엘베강 토르가우에서 감격의 악수를 나누고 있을 때 탈출했던 괴링이 히틀러에게 편지를 보내 또다시 부아를 돋우었다. ‘히틀러가 죽으면 괴링이 뒤를 잇고 또 총통이 통치 능력을 잃게 되면 괴링이 그 대리를 감당할 것’이라는 4년 전 총통 명령에 근거, 지하벙커에 갇혀 있어 사실상 지휘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히틀러 대신 괴링 자신이 히틀러를 대리해도 되겠느냐를 묻는 편지였다. 히틀러는 괴링을 체포하라고 명령했지만 어차피 지켜질 수 없는 명령이었다.
4월 28일에는 로이터통신의 한 뉴스가 히틀러를 또다시 분노케 했다. 히믈러가 히틀러 대신 서부 독일군의 항복을 아이젠하워에게 제의했다는 보도였다. 이 소식은 히틀러에게 결정적 타격을 입혔다. 평소 “충성이 아리안 게르만 친위대의 최고 강령”이라고 늘 입에 달고 살던 히믈러였기에 그의 배신은 히틀러를 충격에 빠뜨렸다. 소련군은 어느덧 총통 관저에서 한 블록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다가와 있었다. 이런 현실은 히틀러에게 최후의 선택을 강요했다.

히틀러는 입속에 총을 쏘고 브라운은 독약을 입에 넣어
히틀러는 4월 28일 자정에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렸다. 선전상 괴벨스와 비서 마르틴 보어가 증인이 된 이 결혼에서 두 사람은 ‘순수한 아리안 혈통으로 유전질환이 없음’을 선언했다. 결혼식이 끝난 후 히틀러는 최후의 유언서를 써 여비서에게 건넸다. 유언장에는 독일 U보트작전의 설계자 칼 데니츠 해군제독을 후계자로 지명한다고 씌어 있었다.
4월 29일 브라운 여동생의 남편 헤르만 페겔라인이 총살형을 당했다. 지하벙커를 벗어나 스웨덴으로 탈출을 시도했다가 베를린 자택에서 붙잡혀 총살된 것이다. 페겔라인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타락한 인간”이라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무자비한 출세주의 성향 덕에 히틀러 주변까지 다가간 인물이다. 게다가 하인리히 히믈러의 심복으로 베를린 총통 사령부에서 히믈러의 대리인 노릇까지 했기 때문에 히믈러가 히틀러를 배신한 그 시점에 탈출을 시도한 것은 영락없이 사형감이었다.
4월 29일 오후 외부 세계에서 방공호 속으로 또다시 우울한 뉴스가 전해졌다. 침략자의 길동무였던 무솔리니가 그의 애인과 함께 최후를 마쳤다는 뉴스였다. 히틀러는 모든 걸 체념하고 최후를 준비했다. 먼저 자신의 애견 블론디에게 독약을 먹여 즉사시켰다. 4월 30일 아침 소련군이 이미 벙커 100m 전방까지 진출했다는 보고를 받고 최후를 준비했다. 무솔리니의 시체가 광장에 거꾸로 매달려 군중 앞에 공개된 것을 알고 자신도 그 꼴이 되는 게 싫어 부관에게 자신의 시체를 태워주도록 요청했다.
그리고 최후의 이별을 고한 뒤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한 발의 총소리가 울렸다. 두 번째 총소리는 없었다. 히틀러는 입속에 총을 쏘았고 브라운은 독약을 입에 넣었다. 1945년 4월 30일 월요일 오후 3시 30분이었다. 56번째 생일을 맞은 지 열흘만이었고 독일의 총리가 되어 제3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12년 3개월이 흐른 뒤였다. 화장은 관저 뜰에서 집행되었다. 불길이 타오르는 곳을 향해 괴벨스는 오른손을 뻗어 나치스식의 고별 경례를 했다. 소련군의 집중적인 포화로 히틀러의 유골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최동원·선동열의 맞대결

▲ 선동열과 최동원

1984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나홀로 4승’이란 전설적 기록을 세운 부산 출신 최동원을 기리는 동상이 부산 동래구 사직동 사직야구장에 세워졌다. 사단법인 ‘고(故) 최동원기념사업회’(이사장 권기우)는 “사직야구장 광장 서편 녹지대에 시민의 힘으로 세운 ‘불멸의 투수 최동원 동상’ 제막식을 9월 14일 열기로 했다”고 9일 밝혔다. (조선일보 9월 10일)

한국의 프로야구사에서 가장 걸출한 투수를 꼽으라면 선동열(1963~ )과 최동원(1958~2011)이다. 현역 시절 선동열은 ‘무등산 폭격기'로 불리며 ‘국보급 투수’ 대접을 받았고, 선동열보다 4년 선배인 최동원은 ‘무쇠팔 투수’라는 별명답게 강철 어깨를 자랑했다.
두 사람의 이력은 대조적이다. 최동원은 부산에서 태어나 경남고와 연세대를 졸업하고, 선동열은 광주에서 태어나 광주일고와 고려대를 졸업했다. 프로야구 은퇴 후 두 사람의 행로는 더욱 극명하게 갈렸다. 선동열은 일본 프로야구에서 ‘나고야의 태양’으로 불리며 전성기를 보내다 삼성과 기아 감독으로 승승장구한 반면 최동원은 1988년 선수회 결성을 추진하다 구단주에 밉보여 조기 은퇴하고 야인 생활을 했다.
두 선수 모두 전성기 때는 150km 중반대의 빠른 볼을 던지는 정통파 투수였으나 구질에서는 큰 차이가 있었다. 다이내믹한 투구 폼을 자랑하던 최동원의 직구가 높은 지점에서 거의 대각선으로 포수 미트에 꽂힌 것과 달리 선동열의 직구는 땅에 거의 붙어 저공 비행하는 폭격기와 같았다. 변화구에서도 차이가 컸다. 최동원은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낙차 큰 커브를 구사한 반면 선동열은 각도 큰 슬라이더를 자랑했다.
최동원은 1970년대 중후반 고교·대학 야구를 평정하고 1980년 실업팀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 무쇠팔과 연투 능력으로 야구팬을 사로잡았다. 1981년 미 프로야구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가계약까지 체결했으나 병역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미국행을 포기하고 1983년 프로팀 롯데자이언츠에 입단했다.
최동원의 진가가 비로소 발휘한 것은 1984년이었다. 그해에 그가 기록한 27승 13패와 탈삼진 223개는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는 국내 선수 최고기록으로 남아 있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 홀로 4승을 독식하며 롯데를 정상에 올려놓은 일은 지금도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최동원은 한국시리즈 7차전 동안 5경기에 등판해 무려 40이닝을 던졌다. 1985년과 1986년에도 각각 20승 9패에 평균자책점 1.92, 19승 15패에 평균자책점 1.55를 기록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무등산 폭격기’ VS. ‘무쇠팔 투수’
선동열은 대학 1학년 때인 1981년 세계청소년 야구선수권대회 MVP에 오르고 1982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최다승 투수 및 MVP로 선정되는 등 국제적으로도 투구 능력을 인정받았다. 선동열 역시 1982년 미국 메이저리그로부터 구체적인 제안을 받았으나 고려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학을 졸업한 1985년 미국의 LA 다저스에서 연락이 와 한국화장품에 입단해 기회를 노렸으나 역시 병역이라는 장벽에 가로막혀 메이저리그 진출을 포기하고 1985년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다.
1986년 야구팬들의 최대 관심사는 최동원과 선동열 간의 첫 맞대결이었다. 두 선수가 첫 선발 맞대결을 벌인 것은 1986년 4월 19일 부산 사직구장이었다. 경기는 선동열의 1-0 완봉승으로 끝났다. 이날의 승부는 선동열이 프로야구 무대에서 거둬들인 첫 완봉승이었지만 최동원에게는 전년부터 이어오던 12연승의 기록이 깨지는 아쉬운 순간이기도 했다. 두 번째 대결은 같은 해 8월 19일 역시 부산에서 이뤄졌는데 이번에는 최동원이 2-0 완봉승으로 첫 대결의 패배를 멋지게 설욕했다.
1승 1패를 기록한 두 선수는 1987년 5월 16일, 우리 프로야구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이자 ‘마지막 승부’를 펼쳤다. 승부는 2-2 동점 상황에서 연장전으로 이어졌다. 두 선수는 투구수 100개를 넘긴 상황에서도 15회까지 마운드를 지켰으나 4시간 56분 동안의 혈투에도 승부가 나지 않아 무승부로 막을 내렸다.
선동열은 56 타자를 상대로 삼진 10개를 잡으며 한 경기 최다투구수(232개)를 기록하고 최동원은 51타자에게 삼진 8개를 솎아내며 209개를 뿌렸다. 양팀 선발 441개 투구수는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는 최고기록으로 남아 있다. 한 야구팬의 말처럼 “신이 한국 야구를 위해 내린 선물” 이후 두 선수는 한 번도 맞대결을 벌이지 않았다. 다만 그 무렵 최동원이 지는 해라면 선동열은 뜨는 해였다.

“신이 한국 야구를 위해 내린 선물”

▲ 최동원

최동원은 1987년 14승 12패를 기록하며 여전히 녹슬지 않은 어깨를 자랑했으나 1988년에는 선수회 결성에 휘말리는 바람에 7승 3패에 그쳤다. 결국 최동원은 구단에 밉보여 시즌 종료 후 삼성으로 트레이드 되었고, 1989년 심신이 피곤한 상태에서 1승 2패의 초라한 성적을 거뒀다. 1990년 6승 5패만 기록하고 은퇴한 후 야구판을 떠났다. 그가 수립한 프로야구 통산기록은 103승 73패 26세이브에 평균자책점은 2.46, 탈삼진은 1019개였다.
1986년은 선동열에게 최고의 해였다. 평균자책점, 다승, 탈삼진 최고를 의미하는 ‘트리플 크라운’을 기록하고 개인 최다승(24승)과 최다 탈삼진(214개), 최다 이닝(262.2)을 달성한 것이다. 평균자책점은 0.99를 기록, 프로야구 역사상 최초의 0점대를 기록했다.
1986년을 기점으로 한국 프로야구는 선동열의 독무대로 진행되었다. 입단(1985년)부터 은퇴(1995년)할 때까지 통산 146승 40패 132세이브에 1.2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는 동안 평균자책점 1위 8회, 다승왕 4회, 탈삼진왕 5회, 정규시즌 MVP 3회, 골든글러브 6회를 수상하고 해태가 한국시리즈 6회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는 데 주춧돌 역할을 했다. 또한 평균자책점 역대 1위부터 10위까지의 기록 중 1~3위를 비롯한 7개가 선동열이 만들어낸 것이다. 1993년의 평균자책점 0.78은 앞으로 좀처럼 깨지기 어려운 기록으로 평가되고 있다.
1996년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에 입단한 선동열은 1999년 11월까지 통산 10승 4패 98세이브에 평균자책점 2.79의 뛰어난 성적을 올리며 ‘나고야의 태양’, ‘주니치 수호신’ 등의 애칭으로 불렸다. 이후 국내로 돌아와 삼성 투수코치를 거쳐 2005년 삼성 감독으로 데뷔, 첫해에 팀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시키는 지도력을 발휘했다. 2013년 현재 기아 타이거즈에서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에 비하면 최동원의 선수 말년은 초라했다. 1990년 은퇴 후 10여년 동안 어느 구단도 지도자로 받아주지 않는 야구계의 ‘왕따’ 취급을 받다가 2001년 한화 투수코치를 맡아 다시 프로야구로 돌아왔다. 그러나 지도자로 뛸 기회를 끝내 얻지 못하고 대장암에 걸려 2011년 눈을 감았다.

■‘별들의 고향’ 작가 최인호 별세

▲ 최인호

‘영원한 청년작가’로 불려온 소설가 최인호씨가 25일 오후 7시10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2008년 5월 침샘암 발병 이후 투병 5년 만이다. 향년 68세. (국민일보 2013년 9월 26일)

최인호(1945~2013)는 1970년대 한국 청년 문화의 아이콘이었다. 해방둥이로 서울에서 태어난 그가 어릴 적부터 꿈꾼 것은 소설가였다. 중고교 시절은 작가가 되기 위한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실험기간이었다. 고교시절 공부는 뒷전이고 하루에 단편 하나씩을 쓰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가 문단에 이름을 올린 것은 196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한 단편 ‘벽구멍으로’가 당선작 없이 가작 입선한 서울고 2학년 때였다. 그러나 활자화되기도 전에 한국일보에 일어난 불로 원고가 모두 타버려 소설은 한 줌의 재가 되고 말았다. 이런 이유로 최인호는 1967년 연세대 영문과에 재학 중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견습 환자’를 자신의 등단 작품으로 여긴다.
등단 이후 어린아이가 술꾼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그린 단편 ‘술꾼’(1970), 산업사회의 인간 소외를 그린 단편 ‘타인의 방’(1971) 등 문제작을 발표하자 1960년대 김승옥의 감수성 혁명을 계승할 작가라는 상찬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소설 ‘별들의 고향’을 분기점으로 문단의 기대와는 다른 새로운 문학 세계를 펼쳐보였다.
최인호가 ‘별들의 고향’을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한 것은 1972년 9월 5일이었다. 당초 제목은 ‘별들의 무덤’이었으나 “조간신문에 ‘무덤’이라는 단어가 좋지 않다”는 조선일보의 요청을 받아들여 '별들의 고향’으로 제목을 바꾸었다. 1973년 9월 9일 314회로 연재가 끝난 ‘별들의 고향’ 주인공 경아의 스물여섯 인생은 이랬다.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때 서울로 이사를 와, 고3 때 아버지가 고혈압으로 쓰러져 대학을 그만두고 무역회사에 취직한다. 6살 위의 남자를 만나 첫사랑을 나눴으나 곧 버림을 받고 낙태수술을 받는다. 다시 17살 연상의 홀아비를 만나 잠시 결혼의 단 꿈을 맛보기도 했으나, 결국 자신의 과거와 홀아비의 결벽증으로 또다시 홀로 된다. 이후 경아는 눈만 뜨면 술을 마시고 핸드백에는 신경안정제가 빠지지 않았다. 술집 작부의 모습으로 마지막 남자 김문오와 하룻밤을 보내고 어느 겨울날,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눈 쌓인 골목길에서 세상과 작별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별들의 고향’은 소설·영화·음반이 동반 히트한 최초 작품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어떻게 여자의 속마음을 그렇게 속속들이 아느냐”, “왜 착한 경아를 비참하게 그리느냐”는 등 전화와 편지가 조선일보에 쇄도했다. 최인호는 무교동의 술집에서 “경아가 가엾다”며 샐러리맨들이 술을 건배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소설은 1973년 가을 단행본으로 출간되고 100만 부 이상이 팔려 문학의 상업적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고교 동기생인 이장호 감독이 만든 동명의 영화는 1974년 4월 26일 서울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었다. 105일 동안 46만 명을 끌어들여 소설에 이어 대박을 터뜨렸다.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김문오(신성일 분)의 대사 “오랜만에 누워 보는군”과 경아(안인숙 분)의 “꼭 껴안아 주세요”는 당대 최고의 유행어가 되었고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술집의 많은 여성이 이름을 ‘경아’로 바꾸는 해프닝이 전국적으로 벌어졌으며 영화 앨범도 불티나게 팔렸다. 윤시내가 부른 주제곡 ‘난 열아홉 살이에요’가 큰 인기를 끈 것을 비롯 이장희가 부른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 잔의 추억’, '휘파람을 부세요’ 등 거의 전곡이 히트곡 반열에 올랐다. 이로써 ‘별들의 고향’은 소설, 영화, 음반이 동반 히트한 최초의 작품이 되었다.

‘반체제’ 아니라 ‘비체제’ 작가
이처럼 ‘별들의 고향’이 사회적 이슈로 급부상하고 작가에게는 “신세대 문학의 기수”라는 찬사가 쏟아졌으나 최인호는 ‘별들의 고향’이 왠지 자신의 인생에 업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빠졌다. 훗날 “산업화를 본격적으로 겪기 시작한 한국 사회에서 도시적 감수성의 문학이 본격적으로 출현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라는 평가를 받긴 했어도 ‘별들의 고향’이 연재될 당시는 유신 치하였다. 따라서 그 엄혹한 시대에 ‘별들의 고향’의 성공은 자칫 민중의 저항의식을 갉아먹는 독소로 인식될 수 있었다. 그의 예감대로 소설은 “호스티스와 상업적인 문학의 전형”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최인호에게도 “퇴폐적 청년문화의 괴수”라는 집중포화가 가해지자 평론가 김현에게 “내가 못마땅하면 내 이름을 평론에서 빼시오”라고 한 뒤 평단과 인연을 끊은 사건은 유명하다.
최인호는 생래적으로 개인주의적 자유주의자였다. 조직이나 규율, 권위주의가 싫었고, 체제냐 반체제냐를 강요당하는 것도 싫었다. 그의 말마따나 그는 ‘반체제’가 아니라 ‘비체제’였다. 최인호는 작가의 의도를 외면한 채 소설 전체를 퇴폐와 상업주의로 몰아붙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자신이 호스티스 문학의 선도 작가로 매도당하는 것은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 최인호는 문단과 거리를 두고 영화 쪽에 발을 담갔다.
다행히 그의 소설들은 도시적 감수성이 짙어 영화와 궁합이 잘 맞았다. 최인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어제 내린 비’(1975), ‘바보들의 행진’(1975), ‘도시의 사냥꾼’(1979), ‘병태와 영자’(1979), ‘고래사냥’(1984), ‘깊고 푸른 밤’(1985), ‘겨울 나그네’(1986) 등의 영화들이 속속 상영되었다. 최인호 자신이 감독한 영화 ‘걷지 말고 뛰어라’(1976년)도 국도극장에서 상영되었다. 특히 ‘바보들의 행진’은 최인호의 삐딱한 감수성과 하길종 감독의 사회적 시선이 어우러져 당시 청년들에겐 일종의 복음이 되었다.

소설 ‘가족’은 국내 최장기 연재물
10년쯤 영화에 빠져 있던 최인호가 본격적으로 역사소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0년대 중반이었다. 1987년 가톨릭에 귀의한 것도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백제왕국의 영광을 복원한 ‘잃어버린 왕국’(198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위업을 그린 ‘왕도의 비밀’(1995), 아랑과 도미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 ‘몽유도원도’(1996), 19세기 조선 거상 임상옥을 재현해 낸 ‘상도’(2000), 장보고의 일대기를 그린 ‘해신’(2003), 가야를 다룬 ‘제4의 제국’(2006) 등이 연이어 발표되었고 한결같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경허 스님을 주인공으로 삼아 한국 불교의 맥을 짚은 ‘길 없는 길’(1993)과, 유교의 숲을 탐사한 ‘유림’(2007, 6권 완간)도 그의 가슴과 머리와 손을 거쳤다.
아내와 딸, 아들을 실명으로 등장시켜 생활 속에서 느끼고 깨달은 짧은 이야기를 소설과 에세이의 융합 형식으로 쓴 ‘가족’도 한국 문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대표작이다. ‘가족’은 1975년 9월호부터 ‘샘터’지에 연재를 시작해 2009년 10월호(402호)를 마지막으로 중단할 때까지 34년 4개월 동안 연재되었다. ‘국내 최장기 연재’로 문학사에 기록된 ‘가족’은 9권의 단행본으로 남았다.
지칠 줄 모르는 생산력으로 작품을 발표하던 최인호는 2008년 침샘암 발병 이후 공식 석상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암 투병 중에도 강인한 정신력으로 마지막까지 펜을 놓지 않고 왕성한 집필활동을 했다. 2011년 5월 항암치료로 손톱이 빠진 상태에서 두 달에 걸쳐 육필로 쓴 장편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발표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결국 2013년 9월 25일 별세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주님을 봤다. 이제 됐다. 가자”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