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강제수용소를 방문해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아베 신조 총리 등 침략의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 정치인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메르켈 총리는 8월 20일 뮌헨 인근 다하우 수용소를 찾아 “당시 수감자들을 생각하면 깊은 슬픔과 부끄러움이 가득하다”며 생존자와 수감자 유족들에게 사과했다. 그는 “이번 방문은 역사와 현재의 다리가 돼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일보 2013년 8월 22일)
 
유대인을 절멸하기 위한 강제수용소가 만들어지기까지 나치 수용소의 역사는 크게 세 단계로 나뉜다. 첫 번째 단계는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부터 나치 독일이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 돌입한 1936년까지로, 이 시기에 세워진 강제수용소는 주로 공산주의자, 정치적 반대파, 노동운동가들을 격리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 기간 처음 세워진 수용소가 1933년 3월 뮌헨 부근에 건립된 다하우 수용소다. 1945년 미군이 진주할 때까지 20여 만 명이 수감되어 이 가운데 4만 3000여 명이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두 번째 단계는 1936년부터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1941년까지로, 1단계 수용소가 나치 입장에서 주로 ‘공공의 적’을 격리·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2단계에 세워진 작센하우젠(1936년), 부헨발트(1937년), 아우슈비츠(1940년) 등의 수용소는 강제 노역과 교화가 목적이었다. 2단계 수용소는 처음에는 독일 땅에 지어졌다가 2차대전이 발발한 1939년부터는 동유럽 지역에 건립되었다. 그 중에서도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폴란드 지역에 집중적으로 세워졌다.
3단계는 절멸수용소가 본격적으로 세워진 1942년부터로, 시발점은 1941년 말 폴란드 헤움노에 지어진 강제수용소였다. 이곳에서는 1941년 12월 8일부터 유대인을 독가스로 살해했으나 상설 가스실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유대인을 절멸할 목적으로 지어진 절멸수용소는 1942년 폴란드에 집중적으로 건립된 베우제츠(1942년 3월), 소비부르(1942년 5월), 트레블링카(1942년 7월) 수용소 등이다. 이 중 가장 먼저 세워진 베우제츠 수용소는 상설 가스실을 갖춘 최초의 학살수용소였다. 나치가 절멸수용소를 건립한 이유는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일일이 살해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기 때문이다.

▲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가스실

절멸수용소 폴란드에 집중적으로 건립
절멸수용소 설치를 주도한, 인간의 탈을 쓴 악마는 나치 친위대장 하인리히 히믈러였다. 그는 1936년 친위대 총사령관 겸 독일 경찰 총수 자리에 오른 뒤 독일 내 여러 곳에 섬처럼 흩어져 있는 강제수용소들을 하나의 체제로 엮기 시작했다. 나치는 강제 노역과 교화를 목적으로 지어진 부헨발트와 작센하우젠 등 2단계 수용소에서도 1942년 봄부터 집단 학살을 단행했으나 본격적으로 대규모 학살이 이뤄진 곳은 아우슈비츠(폴란드어로는 오시비엥침) 수용소였다.
아우슈비츠는 과거 폴란드 군 기지로 사용되던 곳을 1940년 5월 강제수용소로 개조해 만들어졌다. 수용소장은 루돌프 회스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당초에는 저항적인 폴란드인의 격리·수용을 목적으로 지어졌으나 1941년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뒤부터는 포로수용소로 성격이 바뀌었다. 이곳에는 유대인은 물론 동성연애자, 집시, 매춘부, 여호와의증인 신도 등도 수용되었다.
집시는 혈통을 보존하라는 히믈러의 지시에 따라 처음에는 온건한 대우를 받았으나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여호와의증인 신도들은 노동이 하나님께서 만든 규칙이라는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독일군이 시키는 대로 성실하게 일만 해 감시·감독이 필요 없었다. 수용자들은 각기 다른 색깔의 옷을 입었다. 정치범은 빨강색, 일반 상습범죄자는 초록색, 반사회분자는 검정색, 유대인은 노란색, 동성연애자는 연한 자주색 옷을 입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회스가 화장장을 가스실로 개조한 것은 1941년 9월 사이클론B 가스로 사람을 효율적으로 살해하는 과학적 실험이 성공한 뒤였다. 하지만 엄청나게 밀려드는 유대인을 살해하기에는 가스실이 너무 좁다는 것을 알고 1941년 11월 아우슈비츠에서 3km 떨어진 비르케나우에 아우슈비츠 2호 수용소를 세웠다. 이곳이 우리가 알고 있는 아우슈비츠 절멸수용소다. 이곳에서 유대인을 절멸하기 위한 이른바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42년 6월이었다.

쌍둥이·난장이 생체 실험도 이뤄져
당시 아우슈비츠 내 유대인들은 세 그룹으로 분류되었다. 어린이, 애딸린 엄마, 노인, 병자 등은 노동을 할 수 없는 제1그룹으로 분류되어 수용소 내 아우슈비츠 기차역 플랫폼에서 바로 아우슈비츠 2호 수용소로 보내져 죽음을 맞았다. 노동을 할 수 있는 제2그룹은 수용소 내 공장 등에 투입되었으나 부실한 식사, 열악한 보건위생, 고된 노동 등에 시달리다가 죽어갔다. 쌍둥이나 난쟁이는 제3그룹으로 분류되어 ‘죽음의 천사’로 불린 요제프 멩겔레의 실험에 이용되었다.
유대인을 독가스실로 보낼 때는 먼저 샤워를 해야 한다며 발가벗도록 했다. 가스실에는 샤워실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고 ‘옷 벗은 위치를 표시해 둬야 나중에 옷이 바뀌지 않는다’는 안내문까지 붙어있었다. 그렇다고 유대인들 모두가 독가스실을 목욕탕으로 믿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큰 저항 없이 가스실로 향한 것은 심리적으로 자포자기 상태인 데다 같은 종족인 유대인 작업반이 침착하고 온화한 말씨로 겁을 먹고 있는 동족의 불안을 덜어주는 체하며 가스실로 안내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250명 가량을 수용하는 가스실에 모두 들어가면 문이 잠기고 천장에서 독가스가 흘러나왔다. 15~20분 후 유대인들이 시체로 변하면 머리털이 잘리고 반지와 금니 등이 뽑혀 화장터 불가마로 보내졌다. 말 그대로 ‘홀로코스트’(‘완전히 불태워진다’는 뜻의 그리스어)였다. 아우슈비츠가 끔찍한 장소로 알려진 또 다른 이유는 쌍둥이와 난장이 등에 대한 생채실험 때문이었다.

아우슈비츠의 마지막 처형자는 수용소장 회스

▲ 루돌프 회스 수용소장

1945년 1월 27일 소련군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들어섰을 때 그들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피골이 상접한 7,650여 명의 병자와 600여 구의 시체였다. 수용소 곳곳에는 사체에서 수습한 7,000kg이나 되는 머리카락이 자루에 담겨있고 사람의 골분과 의치와 안경테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특히 소련군을 경악케 한 것은 도처에서 발견된 ‘사이클론 B’가스를 사용한 흔적이었다. 소련의 조사 결과 5kg으로 1,000여 명을 살상할 수 있는 ‘사이클론 B’가 2년 동안 수용소에서 1만kg이나 사용된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소련군이 아우슈비츠에서 발견한 학살의 파편들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할 뿐 대부분의 흔적들은 독일군이 빠져나가면서 파괴되거나 빼돌려졌다. 가장 규모가 컸던 비르케나우 수용소(아우슈비츠 2호)는 1944년 10월 나치의 완전 파괴로 만행 흔적이 모두 지워졌고 수용자들은 환자들만 남기고 걸을 수 있는 5만 8,000여 명은 독일 내 다른 수용소로 옮겨진 상태였다.
수용소장 회스는 종전 후의 전범재판에서 “독가스와 화형으로 250만 명이 처형되고 굶주림과 병으로 50만 명이 죽었다”고 말해 방청객들을 전율케 했지만 가스실의 가동 능력을 감안한 각종 조사에 따르면 아우슈비츠에서만 대략 120만명 정도가 죽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폴란드인, 집시, 소련군 포로, 동성애자들도 집단 살해되었다.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 외의 다른 절멸수용소에서도 몇십 만 명씩 죽어갔다. 트레블링카에서 90만 명, 베우제츠에서 60만 명, 소비부르에서 25만 명이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수용소장 회스는 종전 후인 1947년 4월 16일 아우슈비츠에서 교수형에 처해져 아우슈비츠의 마지막 처형자가 되었다. 지금은 기념관으로 변한 아우슈비츠 입구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회스의 좌우명 ‘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가 드나드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리처드 도킨스

▲ 리처드 도킨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진화생물학자이자 논쟁적인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 전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가 이슬람 신자들을 폄하하는 듯한 발언으로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에 대해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저명한 학자, 저술가, 언론인들까지 합세해 이슬람 신앙과 문화, 현대화 등을 둘러싼 논쟁을 벌이고 있다고 가디언, 텔레그래프 등이 8일 보도했다. 발단은 도킨스가 8일 올린 트위터 메시지. 마침 이날은 이슬람 신도들의 라마단 기간이 끝나고 최대 명절인 ‘이드 알 피트르’ 연휴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도킨스는 “전 세계에서 이슬람 신자 중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들을 모두 합쳐도 트리니티대(케임브리지대의 칼리지) 한 곳이 배출한 노벨상 수상자들보다 적다. 하지만 중세 때에는 (이슬람 신자들이) 위대한 업적을 냈다”는 메시지를 트위터에 올렸다. (문화일보 2013년 8월 9일)

결정론과 환경론은 생물학계에서 오랫동안 부딪쳐온 상반된 관점이다. 결정론은 생물체의 모습과 습성 등을 부모로부터 물려받는다는 주장이고, 환경론은 성장 과정에서 주변 환경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는 주장이다. 결정론을 발전시킨 ‘유전자 결정론’ 또는 ‘생물학적 결정론’이 등장한 것은 유전학이 본격적으로 발달한 20세기 후반이었다. 그전에도 “생물의 형질 대부분이 유전된다”는 다윈의 진화론이 있었지만 유전의 매개물질이 DNA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로소 유전자 결정론이 확립되었다.
유전자 결정론이 생물학의 가장 중요한 패러다임으로 등극한 데는 리처드 도킨스(1941~ )의 공이 크다. 도킨스는 2차대전 중 영국 공군에 자원한 아버지의 배속지 케냐 나이로비에서 태어났다. 1962년 옥스퍼드대 생물학과에 진학해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 교수를 거쳐 1970년 옥스퍼드대 교수로 부임했다.
1976년 ‘이기적 유전자’를 발간한 것을 시작으로 ‘연장된 표현형’(1982년), ‘눈먼 시계공’(1986년)의 3부작 시리즈를 완성함으로써 일약 스타 과학자로 부각되었다. 특히 ‘이기적 유전자’는 생생한 사례와 간결한 문체로 대중으로부터도 큰 관심을 끌었다. ‘이기적 유전자’가 출간되기 전까지 과학자들은 머리카락, 피부색, 키 등 외모는 유전되지만 사회적 행동은 유전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도킨스가 인간의 사회적 행동도 유전자에 의해 좌우된다고 주장하면서 혹평과 찬사가 동시에 쏟아졌다.

인간도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기계

▲ 이기적 유전자 초판 표지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자연선택이라는 환경적 압력 속에서 적응하는 진화의 주체를 생물 개체로 이해한 다윈의 생각을 뒤엎고 진화의 진정한 주체는 유전자라고 선언했다. 자연선택이란 생존경쟁에서 환경조건에 적응한 것이 살아남고 그러지 못한 것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을 뜻한다.
도킨스는 자기복제하는 유전자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생물체를 선택하는 것이고, 선택을 잘한 유전자는 생물체와 함께 대를 이어 살아남거나 한층 유연한 적응력을 지닌 새로운 종으로 진화하는 반면 선택을 잘못한 유전자는 생물체와 함께 사멸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자연선택이란 유전자 차원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며 생물 개체는 유전자를 실어나르는 운반자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인간도 유전자의 꼭두각시이고, 모든 동물은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기계이며 미리 정해진 프로그램대로 살면서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로봇일 뿐이다.
도킨스는 더 나아가 같은 종의 생물 집단을 하나의 전체로 보고 유전자가 그 안에서 자유롭게 유영한다는 발상을 전개했다. 유전자는 살아남아 번성하기 위해 집단적 차원의 선택을 하는데 가령 죽음을 불사하는 생물 개체의 이타적 행위도 그 자신의 내부에 든 유전자와 동일한 다른 유전자를 살리기 위한 ‘이기적 선택’인 것이다.
인간의 가족 사랑도 마찬가지다. 유전자가 자기와 비슷한 유전자들을 되도록 많이 남기기 위해 가족 사랑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도킨스는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는 DNA 또는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기계에 불과하며, 그 기계의 목적은 자신을 창조한 주인인 유전자를 보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자기와 비슷한 유전자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지닌 생명체를 도와 유전자를 후세에 남기려는 행동은 바로 유전자의 그런 이기적 습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의 가족 사랑도 이기적 선택
‘이기적 유전자’에서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유전의 영역을 인간 문화로까지 확장한 이른바 ‘밈(Meme)이론’이다. '밈'은 도킨스가 만든 용어로 ‘모방’이란 뜻이다. 유전자는 하나의 생명체에서 다른 생명체로 복제되지만 밈은 모방을 통해 한 사람의 뇌에서 다른 사람의 뇌로 복제된다. 결과적으로 밈은 유전적인 전달이 아니라 모방이라는 매개물로 전해지는 문화요소이다. 밈은 좁게는 한 사회의 유행이나 문화전승을 가능하게 하고 넓게는 인류의 다양하면서도 매우 다른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원동력이 된다.
‘이기적 유전자’ 개념은 개체들 사이의 경쟁을 통해 진화가 이루어진다는 전통적 생각을 유전자들 사이의 적극적 경쟁을 강조하는 것으로 대치시켰다는 데 가장 큰 의의가 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유전자의 관점에서 동물의 행동을 설명하려는 시도들은 이미 10년 전부터 있어왔고 도킨스가 독창적 이론을 발전시킨 첫 인물도 아니었다.
다만 당시에는 유전자 중심의 사실과 이론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그런 것들을 종합해 자연과 인간을 이해하는 하나의 틀을 만들어낸 사람은 없었다. 그럴 때 도킨스가 유전자와 관련된 각종 사실과 이론들을 하나로 종합하고 대중화함으로써 유전자 결정론을 심화시킨 것이다.
‘이기적 유전자’는 1975년 출간된 에드워드 윌슨의 ‘사회생물학’과 더불어 유전자가 생물학적 수준과 사회적 수준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지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인간을 포함한 생물체가 유전자의 명령에 복종하는 로봇에 불과하다는 그의 주장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근원적으로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킨스와 동년배로, 그의 지적 맞수였던 스티븐 제이 굴드가 도킨스를 맹렬히 공격하는 첨병이었다.

■허영만

▲ 허영만

만화가 허영만 화백이 이번엔 한의학에 도전했다. 음식 만화 ‘식객’, 관상 만화 ‘꼴’에 이은 건강 만화 ‘허허 동의보감’(시루)이다. 8월 20일 간담회에서 허 화백은 “허준의 ‘동의보감’은 일반인이 별다른 의학 상식 없이도 실생활에서 적용할 수 있는 책”이라며 “스토리로 전개하면 허준과 주변 인물들의 얘기로 흐를 것 같아서 건강 정보와 상식을 전달하는 에피소드 중심으로 그렸다”고 했다. 총 20권 시리즈 중 1권 ‘죽을래 살래?’가 먼저 출간됐다. 작품을 위해 지난 2년간 한의사 셋에게 ‘과외’까지 받았다. (조선일보 2013년 8월 21일)

허영만(1947~ )은 1980년대 한국 대중만화 시대의 물꼬를 튼 주역답게 대중으로부터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다. 허영만의 오늘은 타고난 자질과 끊임없는 노력의 산물이지만 다른 만화가에는 없는 그만의 작업 방식과 철학도 크게 작용했다. 도박만화 ‘타짜’, 음식만화 ‘식객’의 성공은 소재의 특이성과 구성의 탄탄함이 1차 요인이지만 디테일의 사실성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자기가 보지 못한 것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 한때 중국의 고전 ‘사기’를 만화로 제작하자는 제안이 있어 검토했지만 ‘사기’에 나오는 시대를 보여주는 자료가 없어 포기했을 정도다. 허영만은 만화를 천천히 그렸다. 끙끙거리며 한 자 한 자 쓰는 식이다. 그는 사운드 없는 영화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특히 연출에 공을 들였다. 컷 하나를 그릴 때마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놓고 수차례 고민한 후 하나를 골라 그렸다.
허영만은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어려서 ‘학원’지에 실린 김용환의 ‘코주부 삼국지’를 보며 만화에 빠졌다. 미술에 재주가 있어 미대에 진학하려고 했으나 가정 형편상 포기하고 1966년 1월 여수고를 졸업한 이튿날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박문윤의 문하생으로 1년 동안 지내다가 순정만화가 엄희자와 인연을 맺었고, 8개월 후에는 투견만화로 유명한 이향원의 문하로 들어갔다. 이들 3명의 스승 밑에서 수백 가지 캐릭터와 수천 가지 표정을 만들어 기초를 쌓은 그는 1974년 5월 한국일보가 주최하는 제2회 신인 아동만화 공모전에 응모한 ‘집을 찾아서’가 입선작으로 뽑혀 만화가로 데뷔했다. 당시 심사를 맡은 신동우는 그의 작품을 보고 “이제 우리는 만화 그만 그려야 해”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허영만은 데뷔 후 한 달 간격으로 서부만화 ‘총소리’와 ‘이강토’라는 이름이 처음 들어간 ‘빛 좋은 개살구’를 발표했다. 1974년 8월 발표한 ‘각시탈’이 대히트를 쳐 데뷔 수개월 만에 큰 명성을 얻었다. ‘각시탈’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제와 맞서 싸우는 무술 고수 ‘이강토’는 이후 각종 캐릭터로 변신해 허영만에게 부와 명성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연재는 오래가지 못했다. ‘색시탈’, ‘무쇠탈’ 같은 각시탈의 ‘짝퉁’ 만화가 자꾸 나오자 각시탈을 그만 그리라는 도서잡지윤리위원회의 간섭 때문이었다. 허영만은 더 그리고 싶었지만 출판 허가가 나오지 않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1978년 ‘어깨동무’에 연재한 야구만화 ‘태양을 향해 달려라’도 대히트를 쳐 스포츠만화 붐을 일으켰다. 1980년대 초반 ‘캔디캔디’를 비롯한 일본 만화 단행본이 전국을 강타하면서 국내에서도 서점판매용 단행본 출간 붐이 일어나 허영만 역시 일반 회사원 봉급의 7~8배가 넘는 돈을 벌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는 만화 그만 그려야 해”
대학가의 데모가 끊이지 않던 1985년 말, 그해 12월에 창간된 성인용 월간 만화잡지 ‘만화광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문공부와 사전에 합의된 내용이라며 반공만화를 연재해 달라는 제안이었다. 허영만은 처음엔 거절하다가 “매회 간섭할 것이 아니라 큰 줄거리를 갖고 이야기하자”는 조건으로 승낙했다. 해방과 분단, 6·25 전쟁을 배경으로 이념의 허망함과 그 속에서 고통받는 인간들의 고뇌를 담고자 한 그는 인간의 성격을 제대로 끌어내는 데 탁월했던 만화작가 김세영에게 스토리를 맡겼다.
전국이 민주화 열풍으로 뜨겁던 1987년 6월 ‘만화광장’에서 연재를 시작한 ‘오! 한강’은 첫 회부터 대학가를 강타했다. 허영만과 김세영은 어떤 사상이 옳다 그르다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한 민족 간의 이데올로기 싸움이 얼마나 허망한지와 그 틈바구니에서 고통당하는 주인공들의 인간적인 고뇌를 담으려 했다. 4권의 단행본으로 출판된 ‘오! 한강’은 우리나라 첫 이데올로기 만화로 불리며 오락적 기능이 다분하던 만화에 정치사회적인 무게를 싣게 하는 토대가 되었다.
허영만의 만화 중에는 TV 드라마와 영화로 성공을 거둔 작품이 많았다. 1989년 TV만화로 제작된 ‘날아라 슈퍼보드’는 만화영화사상 처음으로 시청률 1위에 오르고, ‘아스팔트 사나이’(1991)와 ‘비트’(1994)는 극영화로 제작되었다. 1999년부터 스포츠조선에 4년간 연재된 ‘타짜’ 역시 2006년 영화로 제작되어 685만 명의 관객을 끌어들이고 2008년에는 드라마로도 제작·방영되었다.
허영만·김세영 콤비가 만들어낸 숱한 히트작 중에서도 가장 큰 성공을 거둔 ‘타짜’는 도박을 소재로 한 것이지만 단순한 도박만화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정면으로 그린 대작(전 22권)으로 한국 성인만화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식객’은 허영만의 또다른 야심작이었다. 2002년 9월 2일 한국 만화사상 최초로 종합일간지(동아일보)에 ‘어머니의 쌀’로 연재를 시작한 ‘식객’은 2008년 12월 동아일보 연재를 종료하고 이후 내용을 추가해 2010년 5월 총 27권의 단행본으로 완간,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식객’ 단행본은 무려 300만 부나 팔리고 2007년과 2009년 각각 영화 ‘식객’과 ‘식객:김치전쟁’, 2008년 드라마 ‘식객’으로 리메이크되어 명불허전임을 또다시 입증해 보였다. NM

 ‘20세기 이야기(전10권 예정)’ 저자  김정형 gorom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