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유란과 ‘중국 철학사’
중국 관영 CCTV는 ‘펑유란의 중국 철학사는 어려운 시절 나에게 등대와 같은 존재였다’는 박 대통령의 과거 기고문 내용을 소개했다. 7월 2일, 박근혜 대통령의 애독서로 갑자기 주목받고 있는 펑유란(馮友蘭·1895~1990)의 ‘중국철학사’ 번역본이 동났다는 얘기가 돌았다. 그 어렵다는 책이 정말 품절된 것일까?… 이 책이 처음 번역돼 나온 것은 1999년. 상·하 두 권으로 출간돼 지금까지 17쇄 2만 질이 팔렸다. 번역본 분량은 1500쪽이 넘으며, 동양철학 전공자인 박성규 박사가 완역했다. 각주와 한자어가 많아 어지간한 인내심이 아니고서는 책장이 쉽게 넘어가는 책이 아니다. (조선일보 2013년 7월 3일)

▲ 평유란

펑유란(馮友蘭·1895~1990)은 중국 근?현대 철학계의 거목이다. 펑유란 하면 ‘중국 철학사’, ‘중국 철학사’ 하면 펑유란이 떠오를 만큼 그는 중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철학자다. 오늘날 ‘중국 철학사’는 세계가 인정하는 ‘중국 철학의 표준’으로 인식되고 있다. 펑유란은 ‘중국 철학사’를 통해 5,000년 중국 철학의 흐름을 집대성한 ‘중국의 마지막 선비’로 불린다.
펑유란은 청 말엽 중국 하남성 당하현에서 지방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1915년 북경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 그가 관심을 보인 것은 철학사를 중심으로 한 동서 문화의 문제였다. 그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1919년 미국으로 국비 유학을 떠나 컬럼비아대에서 실용주의 철학자이자 교육자인 존 듀이를 사사했다. 미국 유학을 통해 펑유란은 원래부터 깊이가 있는 한학에, 서양철학에 대한 풍부한 지식까지 갖추게 되었다. 1923년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중산대와 연경대 등에서 후학을 가르치다가 1929년 청화대 철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그가 춘추전국시대까지의 고대철학을 정리한 ‘중국 철학사’ 제1편을 출간한 것은 1931년이었다. 1934년에는 ‘중국 철학사’ 제1편의 제목을 ‘자학(子學) 시대’로 바꾸고, 명?청의 철학까지를 정리한 제2편을 ‘경학(經學) 시대’로 구분해 ‘중국 철학서’ 상·하권을 완간했다. 펑유란은 춘추전국시대의 사회적 대변동 즉 귀족계층에 한정된 원시학문이 귀족층의 몰락과 함께 지식인층으로 확산된 다양한 학문활동을 중국 철학의 출발점으로 파악하고 이른바 제자백가의 사상사?철학사적 발전을 ‘자학 시대’라는 틀 속에서 다뤘다.
그 후 유가사상이 독존적 국가이데올로기로 확립된 때부터 서양문명의 충격으로 무너져버린 최근세까지 즉 유교 경전의 주석을 중심으로 전개된 사상사적 시기를 ‘경학 시대’로 규정했다. 따라서 ‘자학 시대’란 특정한 준거틀 없이 공자, 맹자, 노자 등이 서로의 사상을 겨루던 고대철학시기를 뜻하며, ‘경학 시대’란 유가의 책들이 경전이 되어 모든 철학 체계가 그것을 벗어나지 못한 중세철학시기를 말한다.

‘중국 철학사’는 세계가 인정하는 ‘중국 철학의 표준’

▲ 중국철학사 표지

당시 중국 철학사 연구의 대표 저작은 펑유란의 스승 호적의 ‘중국철학사 대강’ 상권(1919년)이 꼽히고 있었다. 이 책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으나 십수 년 후 발간된 펑유란의 ‘중국 철학사’와 비교되면서 평가절하 되었다. 펑유란의 철학사가 내용과 체제 모두에서 호적의 철학사를 능가했기 때문이다. 호적의 철학사가 고대편(상권)에서 끝난 것과 달리 펑유란의 철학사는 최근세까지 아우른다는 점에서도 호적의 철학사를 뛰어넘었다. 호적은 '백화문학사'(1928년)도 상권만 내고 후속편을 내지 않아 '상권 선생'이라는 놀림을 받았다.
펑유란의 ‘중국 철학사’는 당시 청화대에 유학 중이고 나중에 미국에서 교수로 활동한 더크 보드에 의해 1937년 상권이, 1952년 하권이 영역·출간되었다. 더크 보드는 상·하권 발간의 중간 지점인 1948년 축약본인 ‘중국철학 소사’를 발간했는데, 이 축약 영어본이 세계적으로 널리 보급되면서 펑유란은 중국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명성을 얻었고, ‘중국 철학사’는 중국을 대표하는 철학서로 서양에 알려졌다.
당시 장개석은 취약한 통치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공자의 유학을 떠받드는 ‘신생활운동’을 벌였다. 펑유란은 장개석의 통치기반 확립에 큰 역할을 한 것을 인연으로 국민당에 가입하고 1935년 국민당 제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전국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1949년 국공내전에 패한 장개석이 “함께 대만으로 가자”고 요청했을 때는 대륙에 남아 장개석과 결별했다. 대신 내전의 승자 모택동에게는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해 5년 안에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중국철학사를 다시 쓰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덕분에 그는 1952년부터 북경대 철학과 교수로 봉직했다. 이후 펑유란은 자신이 그동안 정립한 공자와 유교에 관한 관념론 철학을 버리고 유물론철학으로 전향했다.

‘고름 철학’ 비판도 받아
1962년에는 마르크스주의 유물사관의 입장에서 쓴 ‘중국철학사 신론’ 두 권을 출판했다. 이같은 표변으로 인해 가장 논쟁적인 인물이 되고, 일부 학자로부터 ‘고름 철학’이라고 비판을 받기도 했다. 겉은 반질반질하지만 속에 고름이 잔뜩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펑유란의 딸은 “아버지는 당시 구상하고 있는 ‘중국 철학사 신편’을 쓸 시간이 필요했다”고 훗날 변호했다. 중국철학사를 국내에 처음 번역·소개한 국내의 한 교수 역시 “펑유란은 대만이나 미국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철학은 자기 고장을 떠나면 안된다’는 신념으로 대륙에 남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펑유란 역시 문화대혁명의 암흑기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이른바 ‘존공숭유(尊公崇儒) 분자’로 몰려 수차례 자아비판을 하는 등의 고초를 겪었다. 교수직도 박탈당했다. 교수들에 대한 사상 검증 광풍 속에서 “반동 학문의 권위자”라는 죄목이 씌워져 그의 책들이 제자들에 의해 불태워지는 광경을 목격하기도 했다. 결국 펑유란은 임표와 공자를 겨냥한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이 한창일 때 공자를 비판하는 대열에 가담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묵묵히 학문에 정진했다. 서양의 물질문명을 동경하지도 않았고, 중국의 전통만을 고집하는 국수주의자도 아니었다. 오로지 동양과 서양, 근대와 전근대의 사이에서 철학적 토대를 놓고자 했다.
인생 말년인 84세에 그가 착수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쓴 ‘중국철학사 신편’이었다. 1960년대 초반부터 시작한 일이었지만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 중단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개혁?개방 이후에 비로소 다시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시력과 청력을 거의 잃어 병상과 휠체어에서 그가 구술하면 막내딸이 받아썼다. 이렇게 10년간에 걸친 작업 끝에 1990년 7월 150만자에 달하는 분량의 ‘중국철학사 신편’ 7권을 모두 완성했다. 하지만 마지막 제7권은 출간을 보지 못했다. 몇 개월 후 눈을 감았기 때문이다.
펑유란의 묘비명에는 “삼사에서 고금의 철학을 해석하고, 육서로 신리학의 체계를 세웠다”(三史釋古今, 六書紀貞元)는 열 글자가 새겨져 있다. 삼사(三史)는 ‘중국철학사’ ‘중국철학소사’ ‘중국철학사신편’을 말한다.

■현대 한국 바둑의 개척자 조남철  

▲ 조남철

한국 바둑 최고의 명문가인 조남철-조치훈 가문에 또 한 명의 프로기사가 탄생했다. 최근 끝난 제2회 영재입단대회에서 입단에 성공한 최영찬(13·충암중2)군이 그 주인공인데, 최군은 한국기원 프로기사회장을 맡고 있는 최규병 9단의 아들이다. 한국 현대바둑의 개척자인 조남철 9단은 전북 부안이 고향이며 7년 전 타계했는데 직계 중에 프로기사는 없다. 그러나 조 9단의 친형인 조남석옹의 큰아들이 조상연(72) 7단이고 막내아들이 일본 바둑을 통일했던 조치훈(57) 9단이다. 조남석옹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낸 데 이어 외손자들에게도 바둑을 가르쳐 프로기사의 길을 걷도록 했다. 최규병(50) 9단은 어려서 외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입단대회에 출전했고 12세 때 관문을 통과했다. 최규병의 이종사촌인 이성재(36) 9단도 15세 때 프로의 길에 들어섰다. (중앙일보 2013년 7월 19일)
 
조남철(1923~2006)은 한국기원 설립의 산파였다. 프로제도 마련, 바둑서적 출판, 신문기전 창설 등을 주도한 한국 현대 바둑의 개척자였다. 조남철은 전북 부안군에서 태어나 9살 때 부친에게 바둑을 배웠다. 바둑 인생에 전환점이 된 것은 서울 교동보통학교 3학년 때 한국을 방문한 일본의 프로기사 기타니 미노루(1909~1975)에게 받은 지도대국이었다.
기타니는 훗날 일본 최대의 바둑도장을 이끈 인물로, 그의 도장에는 일본기원 소속의 주역 스타들이 즐비했다. 조치훈도 1962년 그의 문하생이 되었다. 오늘날 일본 바둑의 몰락을 기타니 도장이 문을 닫으면서부터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정도로 당시 기타니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조남철은 11살 때 기타니 6단에게 7점을 깔고 졌으나 기타니는 즉석에서 조남철을 제자로 삼겠다는 뜻을 부모에게 전달했다. 조남철은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37년 14세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기타니의 문하생이 되었다. 1941년에는 일본기원 프로 등용문인 입단 대회를 통과해 한국인 최초로 일본기원 전문기사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라 없는 설움과 차별을 겪게 되자 일본기원 화장실에서 울며 '기도보국(棋道報國)'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조남철은 도일 7년 만인 1944년 귀국했다. 해방 후 1945년 11월에는 서울 남산동에 한국기원의 전신인 한성기원의 간판을 내걸어 현대 한국 바둑의 씨앗을 뿌렸다. 당시 그는 ▲순장바둑(일명 조선바둑)을 폐지하고 현대바둑으로 대체할 것 ▲내기바둑을 금하고 건전한 국민오락으로 보급할 것 ▲한성기원을 장차 일본기원 못지않게 발전시킬 것 등 3가지를 원칙으로 삼았다.
순장바둑은 흑돌 9개와 백돌 8개 등 17개를 깔아놓고 백선수로 시작하는데 귀와 변, 중앙에 고루 돌이 놓여 있어 포석없이 곧바로 전투에 돌입하는 게 특징이다. 진행은 현대식 바둑과 같으나 계가에는 차이가 있다. 바둑이 끝난 후 잡은 돌과 공배를 모두 들어내고 오직 집 계산만으로 승부를 가린다. 한성기원은 1948년 4월 조선기원, 1949년 7월 대한기원으로 개칭되었다가 1954년 1월 한국기원으로 확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도보국(棋道報國)’ 평생의 좌우명 삼아
조남철은 1950년 한국 최초의 단위(段位) 결정대회를 개최했다. 6월 20일부터 낙원동의 대한기원에서 열린 첫 단위 결정 경기 결과 조남철은 3단이 되고 민중식과 이석홍 등 13명은 초단이 되었다. 대한민국 첫 프로기사 14명이 탄생한 것이다. 대회는 도중에 6?25 전쟁이 발발했는데도 6월 27일까지 계속 진행되었다.
대회를 마친 후 조남철은 피난을 가려했으나 그 사이 한강다리가 끊겨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되돌아왔다. 며칠후 기원의 사정이 궁금해 기원을 찾아갔다가 무참히 버려진 바둑판과 잿더미에 던져진 바둑알을 발견하고 오열했다. 조남철은 1951년 1월 입대해 어깨와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명예제대를 했다. 1955년 3월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시합인 제1회 한중(대만) 바둑교류전 때 민영현·김봉선 등과 함께 대만에 원정, 16대 8로 압승을 거두고 귀국했다.
조남철은 1955년 12월 국내 최초의 바둑교재 ‘위기개론’을 출판했다. ‘위기(圍棋)’ 라는 일본어가 바둑이라는 우리말과 함께 사용될 때였다. 조남철은 ‘위기개론’ 외에도 ‘행마의 정석’, ‘포석의 요령’ 등 주요 바둑 저서 27권을 남겼다.
이런 저술활동 과정에서 그가 남긴 업적은 우리말 바둑 용어의 정립이었다. 먼저 그는 바둑, 바둘, 바독 등 지역마다 달리 불리고 ‘위기’라고 표기되던 것을 바둑으로 통일시켰다. ‘아다리’, ‘우데까시’ 등 일본어 일색이던 바둑용어는 ‘단수’, ‘환격’, ‘빵때림’, ‘끝내기’ 등 우리식 용어로 바꿨다. 그가 제시한 ‘끊으면 뻗어라’, ‘붙이면 젖혀라’, ‘좌우동형은 중앙이 급소’, ‘두점 머리는 두들겨라’, ‘상대방 급소가 나의 급소’ 등의 공식은 부동의 바둑용어로 자리잡았다.

조카 조치훈을 일본에 보내 일본 바둑계 평정케 해

▲ 조카 조치훈과 대국을 벌이는 조남철

1956년에는 동아일보와 손잡고 국내 최초의 기전이자 ‘국수전’의 전신인 ‘국수 제1위전’ 창립에도 참여했다. 첫 ‘국수 1위전’은 15명의 기사가 참여한 가운데 1956년 4월 15일 개막해 9월 26일 조남철 5단이 우승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조남철은 이후 김인, 이창세, 윤기현 등 젊은 기사들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국수전 9연패를 달성하며 1950~1960년대 무적시대를 구가했다. 또한 최고위전 7연패, 초대 명인 등 통산 30회 우승을 기록하며 한국 바둑을 주도했다.
김인 4단은 1962년 국수전 도전기에서 조남철에게 패한 뒤 실력 부족을 절감하며 일본 유학을 떠났다가 돌아와 1966년 2월 조남철 국수를 3-1로 누르고 타이틀을 따 내 조남철 국수전 9연패의 대장정을 끝냈다. 조남철은 김인, 윤기현, 하찬석, 조훈현의 일본 유학을 주선하고 자신의 조카인 조치훈 9단은 1962년 8월 자신이 직접 일본으로 데려가 일본 바둑계를 평정하게 했다.
조남철은 1972년 5월 서봉수 2단에게 명인위를 빼앗긴 뒤 다시는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했다. 그러나 바둑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3년 9월 명예 9단으로 추대되고 1994년에는 71세의 나이로 국기전 본선에 올라 최고령 본선 진출 기록을 세우는 등 현장에 대한 열정을 멈추지 않았다.
조남철은 직계 중에 프로기사가 없다. 하지만 친형인 조남석은 두 아들을 프로기사로 키웠다. 조상연 7단이 큰 아들이고 일본 바둑을 통일했던 조치훈 9단이 막내아들이다. 조남석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낸 데 이어 외손자들에게도 바둑을 가르쳐 프로기사의 길을 걷도록 했다. 이종사촌간인 최규병 9단과 이성재 9단이 조남석의 외손자들이다. 2013년에는 최규병 9단의 아들인 최영찬도 입단에 성공, 조남철·조치훈 가문에서만 6명의 프로기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NM

   ‘20세기 이야기’ 저자  김정형 gorom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