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숲에서의 연놀이>, <수수밭에서의 프러포즈>, <비 오는 날의 월송정>, <폭포수가 있는 휴가>. 작품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조순옥 작가에게 있어서 작품은 그림일기와 같다. 삶의 단편들을 기록하는 아날로그적 감성으로 그날의 표면을 어루만지고자 했다.

신선영 기자 ssy@

石으로 만든 그림

▲ 조순옥 작가.

조순옥 작가의 그림은 그린다기보다 만든다는 성격이 더 강하다. 주재료인 석채를 직접 채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입자감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석채는 너무 고와서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입자감을 낼 수 없었다. 고운 입자와 거친 입자를 선택적으로 사용해서 더 다채로운 느낌을 실어주고자 했다.

“제가 원하는 건 우둘투둘한 거친 느낌이었어요. 거칠어 봤자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 작은 차이에서부터 보는 맛이 달라지거든요. 그래서 지인들을 수소문해서 직접 석채를 채취한다는 교수님을 찾아갔어요. 거의 조르다시피 해서 배워온 기술이에요.”

채취 방법은 이렇다. 현무암, 자갈, 암석 등 다양한 돌들을 선별해서 깨끗하게 씻는다. 불순물이 어느 정도 제거되면 망치로 최대한 작게 조각내서 절구통에 넣고 빻는다. 단단한 돌일수록 더 많은 공력이 요구되지만 그만큼 거친 입자감을 얻을 수 있다. 그걸 큰 체와 작은 체에 서너 번씩 걸러서 공병에 담는다. 막상 담고 나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수시로 채취해야 한다.

“채취는 어렵지만 이렇게 작업하고 나면 회화이지만 공예 같은 느낌, 평면이지만 입체 같은 느낌, 투박하지만 세련된 느낌을 동시에 느낄 수 있어요. 칠하는 것과 쌓아 올리는 것이 동시에 이뤄지는 작업이거든요. 그 특유의 질감, 색감, 무게감 때문에 보는 분들도 더 눈여겨보시더라고요.”

구상과 추상의 경계
하지만 이런 작품에 대한 관심이 단순히 재료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기하학 패턴의 반추상 이미지가 흥미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기하학 패턴이 주는 단서들로 작품 안의 내용을 발견하고 풀어가는 재미가 또 다른 관람 포인트다.

“주로 여행에서 얻은 단상들이에요. 대표 작품인 <수수밭에서의 프러포즈>는 지리산 둘레길에 있는 수수밭인데, 수확을 앞둔 수수가 오후 석양 때문인지 더 붉게 도드라지더라고요. 그 붉은 빛들의 조화가 환상적이었어요. 그 옆에 마주앉은 연인도 너무 사랑스러워서 프러포즈하는 장면으로 바꿔 그렸어요.”

▲ 수수밭에서의 프로포즈, 91x117cm, 닥종이, 석채, 분채.

작품 <비 오는 날의 월송정>은 울진에 있는 월송정의 정자가 배경이다. 한 여인이 우산을 쓰고 서서 먼발치에 있는 바다를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 작가는 그 여인의 생각이 궁금했다. ‘대체 어떤 사연이 저 여인을 이곳까지 오게 한 것일까’ 걱정되는 마음에 그 자리에 같이 있어줬다고 한다.

“비록 뒷모습이지만 삶의 무게가 다 느껴지는 듯했어요. 가서 얘기도 들어주고 위로도 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기에 그림으로 그렸어요. 여인의 마음이 어두워서 아직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없다는 뜻으로 격자무늬의 해를 그렸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걸 창문으로 보더라고요. 이런 해석의 여지가 반추상의 매력인 거 같아요. 어찌 보면 그림 그리는 사람의 미덕이기도 하고요.”

▲ 비 오는 날의 월송정, 72.7x53cm, 닥종이, 석채, 분채.

색의 어우러짐
점, 선, 면의 기하학 패턴이 돋보이는 그의 작품은 어릴 적 좋아한 칸딘스키의 영향이라고 한다. 기하학 패턴이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색채와 함께 배가되는 감명이 그를 더욱 추상 세계로 이끌었다.

“작품 <내 마음을 받아줘>를 보면 제가 색채간의 조화를 얼마나 중요시하는지를 알 수 있어요. 같은 계열간의 조화, 계열과 계열간의 조화를 맞춰나간 그림이거든요. 사람들이 제가 채색을 어렵게 한다고들 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좋아하는 색을 맞추고, 칠하고, 그걸 다시 보면서 행복을 느끼고 있어요. 성취감도 크고요.”

▲ 내 마음을 받아줘, 85x50cm, 닥종이, 석채, 분채.

사실 조순옥 작가는 채색 방식이 남다르다. 으레 전체 배열을 하고 칠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어느 한 부분을 기점으로 점진적으로 확장해 나가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그날의 기분과 상태에 따라 시작점도 색채도 달라진다.

“예를 들어서, 작품 <직박구리의 여행>의 주제가 새라고 해서 새에서 시작하지 않아요. 색의 주제는 나무나 집에서 시작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구도, 형태, 색채가 다 다른 포인트를 잡고 있어요. 그게 또 조화가 되니 신기한 노릇이죠. 율동감이 느껴진다며 되려 좋다는 분도 많았어요.”

▲ 직박구리의 여행, 100x72.5cm, 닥종이, 석채, 분채.

최근 2년만의 작업이라고 보기에 믿기지 않는 결과다. 오랫동안 해온 분채 작업을 석채로, 구상 작업을 비구상으로 모든 면에서 변신을 꾀했다. 변화에 대한 목마름이 어느 날 크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작가는 “미술작가로서 이제 첫 발을 떼었다는 생각”이라며 앞으로 생명의 기가 느껴지는 작품으로 더욱 다가갈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NM

▲ 엄마와 함께, 34x19cm, 비단, 석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