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왔다. 봄이란 관념적으로 해방과 자유의 감정을 느끼게 하고, 실제로도 사람들은 이 시기에 활발한 나들이를 시작한다. 아마 정신적인 해방감도 덩달아 확대될 것이다. 청춘(靑春)이라는 말은 청년기란 연령을 봄이란 계절에 빗대어 만든 말이다. 봄처럼 푸른 청년기랄까. 한 개인에게 있어서 그 기간은 고작해야 20-30년 정도에 해당할 뿐이지만, 청춘이란 말은 나이 든 노인들에게도 영원히 저물지 않는 로망을 느끼게 한다.
생리적으로도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난다. 차츰 길어지는 햇빛은 사람의 송과샘을 자극하여 좀 더 민감하게 성적(性的) 신호들을 느끼고 반응할 수 있도록 잠을 깨운다. 전통적으로 봄이 되면서 ‘청춘의 사건’들이 더 많이 일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오죽하면 ‘봄에 받는 사랑고백은 믿지 말라’는 말이 다 있겠는가. 굳이 ‘죄’를 묻자면 계절이 유죄다. 사람만 그러한가. 식물에 있어서는 꽃이 일종의 섹스인 셈인데(암술과 수술 사이에 꽃가루 교배가 이루어지기 위해 꽃이 필수적이다), 하필 봄부터 피기 시작하는 데에도 같은 이유가 있다. 새들이 알을 품기 시작하는 계절도 봄이다. 먹을 것이 풍부해지고 설사 집이 허술하더라도 새끼들은 얼어 죽을 위험이 없이 다음 겨울이 오기 전에 의젓한 성체로 자라날 것이다. 대부분의 생물들에게서 성 관련 호르몬이 가장 활발해지는 시기가 봄에 맞춰져 있다는 점을 보면 지구 생태계의 시스템 설계는 정말 치밀한 것 같다.
그런데 요즘 인류라는 종(種)에게서 일어나는 현상은 20세기까지 유지되던 전통적인 현상과는 좀 달라진 게 명확해 보인다.
요즘은 국내에서도 동성애 문제가 공공연한 주제로 제기되곤 한다. 남성끼리 여성끼리 사랑을 나누는 동성애 주제의 영화나 문학을 접할 수 있는 기회는 매우 흔해졌다. 인기가 올라가는 정치인들은 이제 필수적으로 동성애에 대한 동성애자들의 질문공세(입장을 밝히라는)를 거쳐 가야 할 정도가 됐다. 사실 현상으로 말하자면 동성애 문제도 이미 한물 지나갔다. 입춘이 지나고도 한두 달은 더 지나가야 땅에서 체감이 되듯이, 우리 사회에서의 체감기가 이제 도달했을 뿐이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이슈일 뿐이라는 의미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가질만한 성의 주제는 무성애(asexuality)라고 할 수 있다. 섹스에 대한 관심이 거의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 역시 직접적으로 이슈화되지 않았을 뿐, 성에 대한 무관심이 가져온 현상들은 이미 흔하다. 결혼을 기피하거나 늦게 하는 풍속, 출산 기피현상, 심지어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불임증상들. 섹스리스 부부, 이혼이나 결혼기피로 늘어나고 있는 싱글족(族)의 증가, 이른바 혼족 혼밥 혼술 등등의 현상들….
다수의 사람들이 섹스에 관심을 잃어간다는 것은 분명 걱정의 시각에서 살펴봐야 할 문제이긴 하다. 그러나 생태주의자로서 느끼는 감정은 결코 불안 같은 것만은 아니다. 21세기 인류가 자연스럽게 도달한 생태 변화의 한 장면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10-20년 전만 해도 이성에게 관심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럽게 동성애자인가 하는 호기심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성애자들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성에 대한 호기심이나 의욕이 없는 사람들끼리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인연을 맺고 일반적인 이성친구들처럼 사귀다가 결혼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사랑도 없고 섹스에 별로 흥미도 없으면서 전통적인 섹스와 자식을 갖기 원하는 상대와 결혼한 뒤에 서로 갈등을 겪는 경우보다는 합리적일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은 친구로서 절친해진 다음에 서로 섹스를 갈구하지 않는 친구사이로 함께 살기 위해 결혼을 하기도 한다. 서로에 대한 인격적 존중이 이들 사이에선 무엇보다 중요한 조건이다. 외형상은 동성부부보다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다. 섹스리스에 합의한 두 사람만의 약속은 전통적인 형태의 결혼으로 받아들인 가족 친지들에게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들은 가족을 원할 뿐 섹스를 원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좀 더 다복한(?) 가족을 만들기 위해 자식을 입양하기도 한다.
전통적 성 역할을 상식으로 알고 있는 세대에게는 이런 현상이 ‘이기주의’의 결과로 보일 수 있다. 너무 낯설고 걱정스러워보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변한 세태를 걱정하면서 전통적인 성생활의 부활(!)을 외치는 ‘로맨티스트’들의 역할도 한편으로는 필요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지구 생태계의 한 축으로서 거의 수천 년을 지구의 주인공인양 휘젓고 다닌 인류 역시 거대한 생태변화의 흐름 속에서 그 영향을 받고 있다는 건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이다. NM

▲ 이은주 한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