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희의 그림은 고요하다. 그 어떤 장식이나 기교도 없이 단색조 화면에 대상만 두어 개 단출하게 그렸기 때문이다. 자기 고백을 하는 어느 수행자의 고해성사처럼 누구보다 진솔하게 그린 그림이다.

신선영 기자 ssy@

신앙의 길에 들어서다

▲ 김숙희 작가.

김숙희 작가는 모든 작품 내용을 성경 묵상을 토대로 한다. 특유의 냉소적인 시각으로 세상의 모든 걸 부정하던 그를 바꿔준 것이 바로 성경이었기 때문이다. 성경을 통해 삶의 모든 허무와 무상으로부터 벗어나게 됐다고 한다.

“이십여 년 전, 대학을 졸업하고 세상과 사람이 너무 두려웠어요. 정말 죽을 것 같은 극도의 불안 속에서 과연 사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했어요. 그 답을 얻기 위해 택한 것이 성경이었어요. 신학은 다름 아닌 인간학이기도 하니까요.”

마음 기댈 곳을 찾던 걸음이 한 선교단으로 향했고, 안식년을 맞아 한국에 온 한 선교사와 인연이 되어 성경에 발을 들이게 됐다. 선교사의 진심어린 배려와 관심 속에서 마음에 있던 오랜 빗장도 풀어지게 됐다. 그렇게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생각에 자연히 교회도 다니게 됐다.

“성경에서 깨닫게 된 건 두 가지에요. 하나는 내 생각과 너무 다른 하나님이었다는 것과 또 하나는 지금까지의 내 모습이 참 모습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주면서까지 사람을 절절히 사랑한 분이었고, 그런대로 착하단 소리 듣고 살아온 저는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심각한 죄인이었던 거예요. 이 당황스러운 아이러니를 조금씩 풀어보고 싶었어요.”

구절 하나하나를 의심했던 그였다. 그리고 수없이 되물었던 그였다. 그 긴 물음에 답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마음속의 고통과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게 됐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를 보듬어주고 일으켜주며 영을 새롭게 해주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타락한 인간사에서 욕망과 탐심은 서로에게 먹잇감이 되고 달콤한 맛이 되다가 결국에는 독을 내밀게 돼요. 그 독을 마시고 죽을 것 같던 순간이 지난겨울에 있었어요. 그 혼돈을 뚫고 겨우 잡은 것이 십자가에요. 십자가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을 잇는 다리에요. 참사랑만이 걸을 수 있는 그 다리에서 다시 쉼을 얻고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어요.”

▲ SONG, 50×60cm, oil on canvas. 화려한 꽃잎을 벗고 이내 초라해져도 때에 따라 가장 좋은 것을 예비해 놓은 창조주를 신뢰하며, 가지마다 싱그러운 잎사귀들이 움이 트고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나무와 새들의 노래를 표현했다. (작가노트)

그렇게 2015년 첫 번째 개인전 <SONG>을 열고, 2017년 두 번째 개인전 <동행>을 열었다.  자신을 괴롭힌 모든 고통의 근원을 찾아서 상처 입은 자아를 치유한 내용을 담았다. 그래서 거룩한 성화가 아닌, 고요한 자전적 회화라고 할 수 있다.

“나의 묵상이 얼마나 작품성 있게 그려질지, 얼마나 소통을 끌어낼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분명해요.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시고, 사랑으로 우리의 일그러진 상처를 치료해주신다는 거예요. 저의 이야기를 통해 그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어요.”

▲ 별, 53×45.5cm, oil on canvas. 새벽하늘의 아름다운 별들을 바라보면 이렇게 근사한 세상을 만들어 우리에게 안겨준 창조주의 사랑과 그 솜씨에 언제나 넋을 잃는다. 몸을 가려주던 잎들을 벗고 맨몸으로 차가운 겨울 견디며 약속을 기다리는 나와 겨울나무의 소망을 담았다. (작가노트)

참된 나를 바라보다
내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났고 비도 그쳤고 꽃도 피었고 새도 노래하니 이 땅에 비둘기 소리 가득하구나. 무화과나무도 푸른 열매 맺고 포도나무도 흰 꽃 피우니 그 향기 만연하구나. 내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서 2:10-13)

두 번째 개인전인 <동행>전의 모티브가 된 구절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상처 난 몸 일으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하다. 무거운 짐 내려놓고 회복된 자신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자 했다.

▲ SONG, 60.6×72.7cm, oil on canvas. 나로 기뻐하며 노래하는 만물의 소리가 들리는가. 그들은 불평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다만 본분을 다해 조물주를 경배한다. 자신을 지어준 이에게 감사와 찬양을 돌려드리는 것이 그들의 본분이기에 슬퍼하고 불평할 틈이 없다. 나도 슬픔의 때에 여전히 감사하며 인내하는 것을 그들에게서 배운다. (작가노트)

“그림을 그리기에 앞서 용기가 필요했어요. 결혼한 뒤 계속되는 육아로 이십 여 년을 전업주부로 살았거든요. 다시 붓을 잡는 것도 용기였지만, 그 어떤 미사여구나 기교 없이 솔직한 나를 표현하는 것도 용기였어요. 그러기 위해 내 삶부터 되돌아봐야 했어요.”

그 되돌아본 길에 있던 것이 나무였다. 어릴 적 살던 고향에 있던 나무, 새벽기도 다녔던 교회에 있던 나무, 산책하던 숲길에 있던 나무들이다. 나무를 그리게 된 건 초기작인 <기억-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 40.9×31.8cm, oil on canvas.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쓸쓸하고 우울했다. 슬프고 힘들었던 유년의 기억이 이제는 더 이상 아프지만은 않다. 그때 미처 다하지 못한 사랑, 미안함, 연약했던 한계들을 이제는 두 팔로 껴안아 주고 싶기 때문이다. 이제는 나이 들어, 나 그리고 모두를 다시 안아주러 가는 이 길. (작가노트)

“아버지께서 저를 엄하게 키우셨어요. 어린 마음에 그게 무서웠나 봐요. 어느 날 고향에 있던 나무가 생각나서 그렸는데 가지도 없이 나뭇잎만 아버지 눈 모양으로 가득 그렸더라고요. 그 잎에 가려 집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요. 그 뒤로 나무가 제 마음의 메인 테마가 됐어요.”

이후 그린 <아버지의 품>에서는 내 아이들이 언제든지 날아와 몸도 쉬고 노래도 부를 수 있는 든든한 나무를, <SONG>에서는 나뭇가지가 물결처럼 일렁이는 자유로운 나무를 그렸다. 나뭇가지의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처럼 생명력 있게 살고자 한 마음이었다.

▲ 아버지의 품, 72.7×90.9cm, oil on canvas. 세상을 지으신 아버지와 나를 낳으신 아버지의 사랑은 어쩌면 같은 것이다. 다만 못나고 아픈 사랑밖에 줄 수 없는 부모였던 것은, 우리가 참 사랑을 배우지 못했고 세상이 힘들었던 까닭이었으리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비로소 그 못난 사랑이 절절히 느껴져 나는 참 가슴이 아팠다. 그때는 알 수 없었던 그 깊고도 큰 사랑에 감격한다. 지금도 우리는 깨닫지 못한 채 지독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 (작가노트)

“작품은 전반적으로 쓸쓸해요. 하지만 예측할 수 없게 뻗어나간 나뭇가지에서 삶의 활력을, 아름답게 떨어진 꽃잎에서 창조주의 가르침을 얻어요. 결코 나의 작음에 초라하지 말고, 꽃잎이 짐에 낙담하지 말라는 주님의 은총이에요. 앞으로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속 눈 없는 나뭇잎, 들판에 핀 소박한 꽃, 마을에 내린 금빛 길처럼 생기를 불어넣고자 해요. 주님께서 말씀하신 생명의 빛이 집안까지 가득하게요.”

김숙희 작가는 숙명여대 서양화과를 졸업했다. 두 번의 초대개인전을 열었다. 향토작가 초대전, 우리사이 회원전, WE-NOW 회원전에 참여했다. 태국과 미얀마에서 벽화 SONG을 그렸다. 2016년과 2017년 크리스천 캘린더를 제작해 작품과 함께 성경 묵상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