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받는 작가 한중옥은 서귀포의 화가다. 한 사람의 자연인으로서 그의 의식의 심층엔, 또 작가로서 그의 조형세계 속엔 서귀포 바닷가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바다와 마주해 온 삶의 결이 녹아들어 있다.

서귀포 바다의 바람은 여느 바다의 바람과 다르고, 서귀포 바다의 물 빛깔, 바위 질감과 형태는 여느 바다의 물 빛깔 바위 질감과 형태와도 다르다. 강정 구럼비 바위, 1킬로미터가 넘게 하나로 이어진 검은 빌레에 서면 그 바닥 모를 심연의 아름다움이 극한에 이르도록 인간의 미감을 시험한다. 작품 속에 그는 50여 년 서귀포 바다를 대면하면서 켜켜이 쌓여온 삶의 마디와 결을 촘촘히 그리고 정직하게 새겨 넣었다.

▲ 작가 한중옥은 40년 가까이 크레파스로 작업해 온 매우 드문 작가다. 크레파스는 유화처럼 혼색과 붓질, 덧칠하기에서 오는 색감과 양감, 질감 표현이 어렵고, 세부묘사에 큰 한계를 드러내는 재료다. 때문에 이런 크레파스의 질료적 특성에서 오는 약점과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작가는 오랜 작업 과정을 통해 특유의 창작 기법을 찾아냈다.

크레파스의 질료적 특성 이용한 독창적 기법 이용
작가 한중옥은 40년 가까이 크레파스로 작업해 온 매우 드문 작가다. 크레파스는 유화처럼 혼색과 붓질, 덧칠하기에서 오는 색감과 양감, 질감 표현이 어렵고, 세부묘사에 큰 한계를 드러내는 재료다. 때문에 이런 크레파스의 질료적 특성에서 오는 약점과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작가는 오랜 작업 과정을 통해 특유의 창작 기법을 찾아냈다. 완성될 작품의 전체적인 색체 톤과 구성을 고려해 종이 위에 크레파스로 여러 층을 두텁게 올리고, 예리한 칼끝과 칼날로 긁어내고 새기고 문질러 제주 용암 특우의 핍진(逼眞)한 형태미와 공간적 깊이를 창출한다.

붓의 감각과는 또 다른 칼맛으로 은근하게 드러나는 디테일의 정밀함은 자연석의 기괴한 굴곡과 기복이 손으로 잡힐 듯한 촉각성을 띠며 완성도 높은 세밀화의 작풍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반복적인 노작(勞作)으로 화면 위에 구축된 조형성은 매우 치밀하고 섬세하다. 바느질로 종이 위에 수를 놓듯 한 땀 한 땀, 한 올 한 올의 공력으로 결정되는 조형세계는 장인적 작가정신이 아니고선 범접할 수 없는 치열함을 보여준다. 불상과 마애불을 통해 불교적인 구도의 정신세계와 불교가 주는 한국인의 보편적인 정서를 형상화한 2001년 개인전 이래 한중옥의 근작들은 주로 제주 해녀와 제주 해변의 용암석을 주제화하고 있다.

회청색의 톤을 주조로 물질을 하거나 물질하러 나가고 물질에서 돌아오는 제주 해녀들의 건강한 노동의 일상성을 담아낸 해녀 연작에 이어 최근 가졌던 개인전에 선보인 30여 점의 작품들은 작가가 태어나 지금껏 살고 있는 서귀포 앞 바닷가 언덕의 용암층과 조간대의 용암석들을 모티브로 삼았다. 생활의 주변에서 새삼 작가의 눈에 살갑게 다가온 대상들이다. 아득한 태고적 땅 속 깊은 곳에서 분출된 용암이 지표면을 흐르다 점성의 높낮이와 지형의 생김새에 따라 자연적으로 응고된 제주 용암석은 다공질의 표면과 기묘한 형태감에서 그 자체로 풍부한 회화성을 띠고 있다.

물상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에서 비롯된 진정성
작가 한중옥 작품 속에 등장하는 대상의 리얼리티는 탄탄한 묘사력과 치밀한 구상력, 매체의 능란한 운용, 어떠한 작위성도 배제한 채 대상을 파고드는 정치하고도 집요한 탐구성이 만나 이루어진 미학의 산물이다. 조급함을 버리고, 부드럽게 내밀한 관조의 시선으로 끌어들인 아름다움이기에 잔잔히 보는 이들의 마음을 흔든다. 해녀와 용암석을 주제로 한 근작들은 대체로 자연주의풍을 띠고 있지만 기계적인 즉물성을 넘어 어머니의 바당, 그 제주 자연이 갖는 대지의 모성성에 착근해 있기에 그의 미학은 옹색하지 않다.

그 바당은 노동의 바다였고, 저항의 바다였다. 제주 바당의 아름다움은 이를 지켜내고자 피땀 흘린 제주인의 역사와 바람과 설화를 맞대어 껴안지 않고선 좀처럼 그 속살을 내어주지 않는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수십 년을 한 결 같이 크레파스 하나로 종이 위에 삶과 자연의 리얼리티, 구도의 세계를 고집스럽게 담아 온 그의 진지한 작가정신은 시류에 손쉽게 편승하는 신진작가들에게 훌륭한 귀감이 될 만하다. 매체를 다루는 장인다운 기교, 삶과 밀착되어 삶 주변의 물상들에 대한 깊은 관심과 따뜻한 애정에서 비롯된, 주제를 형상화하는 작가의 진정성은 한중옥의 작품성을 다시금 주목하고 정당하게 평가해야 할 이유다.

지금까지 총 7회의 개인전을 가진 작가 한중옥은 제1회 서울국제드로잉비엔날레 출품, 제주도미술대전 대상 및 특선5회를 입상한바 있다. 제주도미술대전에 초대작가로 출품했으며 고영우·한중옥 2인전, 제주도립 미술관 기획 <창작과 패러디>전 및 다수의 그룹전을 통해 기량을 발휘해왔다. 법정사 항일독립유공자 66인의 영정을 제작하기도 했던 작가는 지속적으로 실존적 삶 앞에 흐르는 인간 의식의 형상화 작업에 몰두하며 전업작가로 활동 중이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