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 플레밍 원작 007 시리즈 첫 영화 ‘살인번호’ 개봉
영화 ‘007 시리즈’가 태어난 지 50년이 됐다. 1962년 10월 5일 영국 런던에서 ‘007 살인번호’가 처음 공개된 이후 이제껏 22편의 시리즈가 개봉됐고, 10월 말 또 하나의 신작 ‘스카이폴’이 관객을 만난다. 한 영화 시리즈가 50년 이상 롱런한 것은 영화사에서도 획기적인 일이다. 제임스 본드가 펼쳐낸 화려한 액션과 섹시한 본드걸과의 로맨스, 기상천외한 신무기들은 007을 보며 자라온 다양한 세대의 관객들에게 진한 기억을 새겨 놓았다. (한국일보 2012년 10월 12일)

▲ 007 첫 영화 ‘살인번호(Dr. No)’ 포스터

‘007 시리즈’의 산파는 영국 작가 이언 플레밍(1908~1964)이다. 그는 로이터통신 기자와 주식 브로커 등의 일을 하다가 1939년 7월 우연한 기회에 영국 해군정보국 장교가 되어 2개월 뒤 터진 2차대전에서 탁월한 첩보능력을 발휘했다. 독일의 군부를 혼란시키기 위해 흑색선전용 라디오 방송국을 운영한 것을 비롯 상상력이 풍부한 각종 속임수들을 끊임없이 궁리하고 실현시켰다.
플레밍은 1941년 뉴욕에 소재한 영국의 해외정보국(M16) 지부로 발령을 받아 그곳에서 장차 ‘007’ 소설을 탄생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주요 인물들을 만나고 새로운 첩보 훈련을 경험했다. 캐나다 토론토 인근에 있는 미국의 전략정보국(OSS) 극비 훈련장에서도 각종 훈련을 받았는데, 이때의 경험은 훗날 제임스 본드의 이미지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그 무렵 플레밍이 자주 접촉하며 친분을 쌓은 인물이 OSS를 이끌던 윌리엄 도노번 장군이었다. 도노번이 OSS를 확대한 CIA 창설을 준비하면서 플레밍에게 자문했을 때 플레밍은 완벽한 첩보원이 갖춰야 할 조건을 정리한 수십 쪽 분량의 메모를 전달했다. 플레밍은 이 메모 덕에 CIA의 탄생에 기여했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 도노번은 플레밍과 맺은 인연으로 007 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의 고집 센 미국 친구 ‘펠릭스 레이터’로 등장하는 영광을 누렸다.
지칠 줄 모르는 정력가로 7년 동안 활동하던 플레밍은 2차대전이 끝나자 첩보원 생활을 그만두고 주식 브로커로 돌아왔다. 그러나 짜릿하고 변화무쌍한 삶을 살던 그에게 주식 브로커 생활은 고리타분했다. 플레밍은 자신의 경험을 살려 책을 쓰기 시작했고, 제임스 본드를 주인공으로 한 첫 007 소설 ‘카지노 로얄’을 1953년 4월 출판했다. ‘죽느냐 사느냐’(1954년), ‘문 레이커’(1955년) 등을 잇따라 선보였으나 판매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그러다가 ‘다이아몬드는 영원히’(1955년), '위기일발'(1957년) 등이 나오고부터는 본격적으로 제임스 본드 붐이 일기 시작했다. ‘Dr. No’(1958년), ‘골드핑거’(1959년), ‘유어 아이즈 온리’(1960년), ‘썬더볼 작전’(1961년), ‘나를 사랑한 스파이’(1962년) 등이 출판된 뒤에는 스파이 소설의 대명사가 되었다. 특히 케네디 대통령의 애독서에 ‘위기일발’이 포함되었다는 미국의 ‘라이프’지 기사가 나간 뒤에는 더욱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본드의 인기가 높아지고 그래서 플레밍이 더욱 열심히 소설을 쓸수록 플레밍의 건강은 나빠졌다. 그런데도 1962년 10월 5일 첫 007 영화 ‘살인번호(Dr. No)’가 영국에서 개봉된 것에 고무되어 후속작을 계속 쏟아냈다. 결국 4편의 시리즈를 더 쓰고 1964년 8월 눈을 감았다. 그때까지 플레밍이 쓴 007 시리즈는 ‘옥토퍼시’(1966년)를 마지막으로 총 14편이었다. 

※부제 : 현대 영화사상 최다 관객과 최장수 시리즈 기록

▲ 이언 플레밍(1908~1964)

첫 007 영화 ‘살인번호’는 자메이카 근해 외딴 섬에 비밀기지를 구축해 미국의 인공위성과 미사일의 진로를 방해하려는 중국계 박사 닥터 노의 음모를 본드가 차단한다는 내용이다. 테런스 영 감독이 연출하고 숀 코너리가 본드로 출연했다. 숀 코너리는 ‘살인번호’의 순조로운 흥행과 뒤이어 개봉된 ‘위기일발’(1963년), ‘골드핑거’(1964년), ‘썬더볼 작전’(1965년) 등의 폭발적인 히트로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했다.
이후 제임스 본드의 이미지는 플레밍의 손을 떠나 숀 코너리가 연기하는 대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한국에서는 첫 007 영화 ‘살인번호’가 먼저 개봉되지 않고 두 번째 영화 ‘위기일발’이 1965년 4월 개봉된 후 ‘살인번호’는 1965년 8월 개봉되었다.
서방세계의 안전을 위해 사악한 악당의 음모를 처단하는 본드의 활약상은 작품마다 늘씬한 미녀로 상징되는 본드걸, 기기묘묘한 첨단 장비,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들이 부른 주제가 등 이목을 끌 만한 화제성을 담아 현대 영화사상 최다 관객과 최장수 시리즈라는 숱한 기록을 수립했다. 특히 끊임없이 소개되는 첨단 과학장비들은 007 영화가 스파이물의 대명사로 자리잡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007 영화에도 고비는 있었다. 1990년대 초 냉전 종식과 더불어 본드의 적인 소련 정보기관 KGB가 사라져 적과 아군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전개되던 스토리의 근본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보통 1~2년 주기로 나오던 영화는 제작 주기가 길어져 ‘살인면허’(1989년)가 나온 이후 후속작인 ‘골든 아이’(1995년)가 개봉되기까지 6년이나 걸렸다. 007 영화는 2012년 10월 개봉한 ‘스카이폴’까지 모두 23번째 작품이 세상에 나왔다.
주인공인 본드 역은 1962년부터 2012년까지 6대에 걸쳐 바뀌며 세계인의 사랑을 받아왔다. 1대 제임스 본드인 숀 코너리(6회 출연·1962~1967년, 1971년)를 비롯해 2대 조지 레전비(1회·1969년), 3대 로저 무어(7회·1973~1985년), 4대 티머시 돌턴(2회·1987~1989년), 5대 피어스 브로스넌(4회·1995~2000년), 6대 대니얼 크레이그(3회·2006~2012년) 등이 007 시리즈를 빛낸 주인공들이다.

■버마 아웅산 폭발사건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10월 9일 테인 세인 미얀마 대통령과 함께 방한한 운나 마웅 린 미얀마 외교장관에게 1983년 아웅산 폭탄 테러가 발생했던 아웅산 국립묘지에 ‘희생자 추모비’를 건립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공식 요청했다. 이에 대해 미얀마 정부는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답했다고 청와대 관계자가 밝혔다. (조선일보 2012년 10월 10일)

▲ 1983년 10월 9일 미얀마의 양곤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북한이 설치한 폭탄이 폭발하기 직전, 전두환 대통령의 도착을 기다리던 한국 대표단 일행의 모습이 담긴 사진. 핏자국과 화약흔 등으로 필름이 얼룩져있다

전두환 대통령과 수행원들을 태운 대통령 전용기가 버마(현 미얀마) 랑군에 착륙한 것은 1983년 10월 8일 오후 4시 조금 지나서였다. 버마는 전두환 대통령이 인도 스리랑카 호주 뉴질랜드 브루나이 등 6개국을 순방하는 일정의 첫 방문지였다.
영빈관에서 하룻밤을 보낸 전 대통령은 10월 9일 오전 10시 30분 자동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아웅산 묘소를 참배할 계획이었다. 출발 시간은 10시 20분으로 예정되었다. 그런데 전 대통령을 아웅산 묘소로 안내할 버마 외무장관이 영빈관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10시 25분에야 영빈관을 출발했다. 그 시각 서석준 부총리를 비롯 십수 명의 장차관으로 구성된 공식수행원들은 전 대통령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묘소 앞 단상에 2열 횡대로 도열해 있었다. 최금영 연합통신 사진부장과 이중현 동아일보 사진기자는 아웅산 봉분 옆에서 참배객을 대상으로 촬영준비를 했다.
비슷한 시각, 천병득 경호처장은 묘역 안을 여기저기 둘러보다 이상한 차림의 두 버마인을 발견했다. 경호처장이 두 사람에게 다가가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물으며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한 버마인은 손에 나팔을 쥐고 뒷짐을 지고 있다가 경호처장이 손을 내밀자 웃으며 나팔을 불었다. 훗날 밝혀지지만 버마인은 경호처장이 손을 내민 것을 “나팔을 불어보라”는 뜻으로 잘못 알고 나팔을 불었던 것이다.
나팔에서 “뿌~”하는 소리가 나고 몇 초가 지났을까, 갑자기 지축을 울리는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아웅산 묘소 건물 지붕이 하늘로 붕 뜨더니 폭삭 무너졌다. 10시 28분, 묘소 천장에 설치된 강력한 TNT 폭발물이 터진 것이다. 현장에서만 우리 측 수행요원 16명이 목숨을 잃고 십수명이 부상을 당했다.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장관, 김동휘 상공장관, 서상철 동자장관,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심상우 의원, 강인희 농수산 차관, 김용한 과기처 차관,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 이계철 주버마 대사, 하동선 기획단장, 이재관 공보비서관, 민병석 대통령주치의, 한경희 경호원, 정태진 경호원, 이중현 동아일보 사진기자 16명은 이렇게 타지에서 황망히 떠났다. 부상을 당했던 이기욱 재무차관이 필리핀으로 이송해 치료를 받던 중 숨져 순직자는 모두 17명으로 늘어났다. 국가원수의 외국 순방길에 17명이나 되는 장차관이 테러로 한꺼번에 목숨을 잃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폭발 순간 묘소로부터 1.5km 떨어진 지점을 통과하고 있던 전 대통령은 “폭발했다”는 긴급 연락을 받고 영빈관으로 돌아갔다. 장세동 경호실장으로부터 오전 11시(한국 시간 오후 1시30분) 직전 소식을 전해들은 한국에서는 오후 2시(버마시간 오전 11시30분) 군과 경찰에 비상근무령이 발령되고 오후 3시와 9시 두차례 비상국무회의가 열렸다. 같은 날 북한도 전군 경계령을 내렸다. 경계령은 다음날인 10일 준전쟁상태 경계로 강화되었다.
버마 시간 11시가 지났을 무렵 우산유 버마 대통령이 영빈관을 찾아와 전 대통령에게 사과했다. 오후 3시에는 버마의 최고 실력자 네윈 의장이 찾아와 역시 심심한 유감을 표하고 돌아갔다. 전 대통령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오후 4시 30분 버마를 떠나 한국 시간으로 10월 10일 새벽 3시 40분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부랴부랴 한국을 출발한 박세직 안기부 2차장을 단장으로 한 13명의 조사단이 버마 랑군공항에 도착한 것은 10월 11일 오전 6시 45분이었다. 도착 바로 전 버마 군경은 이미 범인 3명의 신병을 확보해놓고 있었다. 조사단은 범인들이 사용한 권총과 수류탄, 무전기 등을 분석한 결과 북한의 소행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도 버마 정부는 공식 발표를 미뤘다. 게다가 당시 랑군시에서는 한국의 자작극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일본의 시사통신이 한국의 경호원들이라고 밝힌 범인들이 뇌물을 주고 사다리를 빌려 폭탄을 장치했다고 보도한 것이 와전되어 한국 경호원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시사통신의 보도는 결국 사실이 아닌 오보로 밝혀졌다.
버마 정부가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연 것은 11월 4일이었다. 버마 정부는 테러가 북한의 소행이라며 북한과 단교를 선언하고 북한 대사관 요원들에게 “48시간 이내에 철수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버마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북한군 특수부대 강창수 소장으로부터 전 대통령 암살 밀명을 받은 북한 특수부대원 진 모 소령, 강민철 대위, 신기철 대위 3명이 2300t급의 북한 선박 동건애국호를 타고 9월 9일 북한 원산항을 떠나 랑군항에 입항한 것은 9월 17일이었다. 암살범들은 9월 22일 시내로 잠입, 북한 대사관이 임대한 숙소에 은거하며 범행 장소를 사전 조사하는 등 치밀한 계획을 세운 뒤 전 대통령이 버마에 도착하기 하루 전인 10월 7일 새벽 2시 묘소 천장에 원격조정으로 폭발하는 2개의 폭발물을 설치했다.
사고당일에는 묘소로부터 200m 떨어진 곳에서 구경꾼들 틈에 끼어 전 대통령 일행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10시 24분쯤 버마 경찰이 앞에서 선도하고 태극기가 걸려있는 벤츠 안에 머리가 벗겨진 사람의 모습이 언뜻 보이자 암살범들은 그가 전 대통령이라고 믿었다. 사실 벤츠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이계철 주 버마 대사였다.
암살범 중 진모는 국빈차량이 앞을 지나가자 곧 참배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호주머니 안에 든 무선전파 발사기에 손을 얹고 때를 기다렸다. 10시 28분 아웅산 묘소에 도착한 이계철 대사가 이미 도열하고 있는 공식 수행원들에게 다가가 “각하께서 곧 도착하신다”고 말하자 수행원들이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 모습을 멀리서 본 범인들은 전 대통령이 악수하는 것으로 오인했다. 뒤이어 묘소 쪽에서 “뿌~”하는 나팔 소리가 들리자 범인들은 참배행사 중 진혼나팔을 부는 것으로 알고 원격버튼을 눌렀다.
사고 후 버마 정부는 즉각 공항을 폐쇄하고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암살범들은 탈출로를 찾던 중 신기철은 10일 오전 발견되어 사살되고 진모는 10일 밤, 강민철은 11일 아침 생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버마 군인 3명도 사망했다. 전체적으로는 한국 측에서 17명이 목숨을 잃고 14명이 다쳤으며 버마측에서는 4명이 죽고 32명이 부상했다.
12월 9일 랑군 최고재판소가 진모와 강민철에 대해 사형을 선고했다. 두 범인은 즉각 상고했으나 최고 인민법원이 1984년 1월 11일 상고를 기각, 사형을 확정했다. 그후 진모는 1985년 4월 사형되었고 강민철은 집행이 유예된 상태로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2008년 5월 감옥에서 사망했다.
아웅산 사건은 남북한의 외교관계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코스타리카, 코모로, 서사모아가 버마에 이어 외교를 단절하고 호주, 일본, 미국 등 25개국이 규탄성명을 발표했으며 이탈리아, 바레인, 태국 등 21개국이 인적·물적 교류 제한을 밝혔다. 한국은 1983년 말 수교국 수에서 120개국 대 102개국으로 북한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출간          

▲ 카프카의 소설 ‘변신’초판본

20세기 천재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유고 소유권 다툼이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의 승리로 끝이 났다. 10월 14일 AFP통신은 이스라엘 텔아비브 법원이 카프카의 원고 및 기록물을 소유하고 있던 호파 자매와 이스라엘 국립도서관 간의 소유권 재판에서 도서관의 손을 들어줬다고 보도했다. 체코 출신 유태인 소설가 카프카는 1924년 세상을 떠나기 전 친구 막스 브로트에게 원고를 모두 불태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브로트는 ‘심판’과 ‘성채’ ‘아메리카’ 등을 출간해 카프카를 20세기 최고의 작가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 (문화일보 2012년 10월 15일)

프란츠 카프카(1883~1924)는 오늘날 세계적인 작가로 인정받고 있지만 생전에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 사후에도 한동안 알려지지 않고 있다가 1940년대 들어 사르트르나 카뮈 등 프랑스 실존주의 작가들로부터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라는 찬사가 쏟아진 후 유명해졌다. 훗날 같은 나라 후배 작가인 밀란 쿤데라는 카프카의 작품을 두고 “검은색의 기이한 아름다움”이라고 표현했다.
오늘날에는 그에 대한 책이나 논문이 전 세계적으로 수만 편에 이를 정도로 가히 ‘카프카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인간 존재의 불안을 날카롭게 통찰하여 현대인의 실존적 체험을 극한까지 표현한 작가라는 점에서는 만장일치에 가까운 동의가 이어지고 있다. 그가 생전에 각광을 받지 못한 것은 일차적으로 동시대인들이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지만 극도로 단조롭고 평범한 삶을 산 카프카 자신에게도 원인의 일단이 있다.
카프카에게는 작품의 소재가 될만한 특별한 경험이 없다. 이렇다할 투쟁도, 생명을 건 모험도, 일생을 좌우할 사랑도, 감동적인 만남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살았다. 소설의 무대 역시 그가 태어난 체코 프라하에서 이루어지고 그의 생애 역시 프라하의 구 시가지 광장을 중심으로 반경 1㎢ 정도 되는 공간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는 중고교와 대학은 물론 14년 동안의 샐러리맨 생활도 모두 프라하에서 시작하고 프라하에서 끝냈다. 카프카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이방인이었다.
심약하고 왜소해서 남성 중심 사회에 낄 수도 없었고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체코어를 쓰는 체코 사회에도 끼지 못했다. 유대 문제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유대교는 물론 모든 종교를 부정해 유대인들로부터도 소외되었다. 사회주의에는 평생 공감했으나 맹목적인 교조주의자가 아니라 적당히 거리를 둔 비판적 관찰자였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는 아나키즘에 가까웠다.
프란츠 카프카는 체코 프라하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수성가한 남자의 전형이었다. 독단적이고 강압적이었다. 당시 체코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아버지는 카프카의 출세를 위해 카프카를 체코어 학교가 아니라 독일어 소년학교와 오스트리아 왕립김나지움으로 보냈다. 카프카는 개인의 고유한 특성을 무시하는 학교 생활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내면에서는 가정과 학교에 존재하는 권력자에 강한 적대감이 끓어올랐지만 이를 밖으로는 표출하지 않았다. 카프카는 대학 역시 체코어 대학과 독일어 대학으로 나뉘어 있는 프라하 대학의 독일어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카프카는 아버지의 기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법학을 공부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법학은 카프카의 삶과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학을 졸업한 후 죽는 날까지 법률 지식을 이용해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카프카 문학의 주요 테마는 권력 비판인데, 카프카 소설에서 권력은 법이라는 얼굴로 자주 등장한다. 형법 시간에 배운 범죄 수사와 심리 절차에 대한 지식도 훗날 '성'이나 '심판'에서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1906년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카프카는 1907년 일반보험회사에 입사했으나 나이 어린 상관이 나이 많은 종업원들을 모욕하고 함부로 대하는 것에 실망해 10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가정과 학교에 이어 직장에서도 권력자의 실체를 확인한 것이다. 카프카는 1908년 7월 산업재해보험공단에 입사했다. 이후 건강 때문에 퇴직해야 했던 1922년 7월까지 14년 동안 낮에는 샐러리맨으로 밤에는 마치 밀교의 경전을 정리하듯 불가해한 소설들을 줄기차게 써내려가는 것으로 성년기를 보냈다.

▲ 프란츠 카프카(1883~1924)

카프카는 1912년 12월 처녀작 '관찰’을 출판해 작가로서의 이력을 시작했다. 1915년 11월에는 훗날 그의 대표작으로 기록될 ‘변신’을 출판했다. ‘변신’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된다. “어느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Samsa)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체코어로 ‘나는 고독하다’는 뜻의 주인공 '잠자'가 부모와 여동생의 생계를 책임지는 외판사원으로 일하다가 어느 날 벌레로 변한 것이다.
잠자의 갑작스런 변화에 가족은 한동안 동정을 보내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괴물 취급을 했다. 어머니는 잠자를 볼 때마다 까무러치고 아버지는 적개심을 드러내며 혐오했다. 특히 잠자의 마음을 안타깝게 한 것은 자신은 벌레의 몸이지만 인간으로 지냈던 시절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고, 가족의 대화를 모두 들을 수 있는 반면 가족은 벌레인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었다. 이처럼 존재 간 의사소통의 단절은 절대적으로 믿어왔던 가족 간의 사랑조차 증오로 바꿔놓았다. 결국 잠자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등을 맞고 한 마리 벌레로 삶을 마감했다.
‘변신’이 고전으로 평가되는 것은 그 시절에 이미 해고에 대한 두려움, 회사 출근 시 지각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절박감, 자신의 직업에 대한 한탄, 현대인의 불안과 소외 등 자본주의 사회라면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현실감과 보편성을 확보한 데 있었다. 소설에서의 벌레 역시 벌레라는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는 뚫기 힘든 막다른 벽에서 출구를 찾는 그런 존재를 의미했다.
인간이 자본주의의 거대한 기계 조직으로부터 이탈하는 순간 그는 곧장 해충으로 전락해 버린다는 작가의 상상력은 1915년 당시로서는 대단히 선지자적이고 파괴적인 은유였다. 오늘날에는 “서양 소설의 근간을 이뤄온 리얼리즘적 특성이 ‘변신’의 발간 후 뿌리 채 흔들렸다”며 ‘변신’을 서양문학의 새로운 분기점으로 해석하는 평론가도 있지만 당시 문단에서는 이런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불안을 조장하는 괴상한 작가’라는 소리까지 있었다.
카프카는 여러 여자와 사랑을 나누고 세 번이나 약혼했으나 결혼에까지는 이르지 못해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결혼 직전까지 갔다가도 결혼과 문학의 양자택일에서 늘 문학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결핵을 앓다가 1924년 6월 41살이라는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그의 작품은 유대인 사회에서만 읽혀졌을 뿐 독일어권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더구나 1924년 6월 빈의 요양원에서 죽기 전 절친한 친구인 막스 브로트에게 “출판되지 않은 원고는 모두 태워버리고 이미 인쇄되어 나온 작품은 재판발행을 중지해달라”고 유언을 남겨 모든 작품이 불에 태워질 운명이었다.
다행히 카프카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카프카의 탁월한 재능을 잘 알고 있던 친구가 유언과는 정반대로, 훗날 ‘고독의 3부작’으로 불릴 ‘심판’(1925년)과 ‘성’(1926년), ‘아메리카’(1927년) 등을 책으로 펴내고 카프카를 알리는데 혼신의 힘을 기울인 덕에 카프카는 죽지 않고 뒤늦게 부활할 수 있었다. 여기에 1930년~1940년대 나치의 압제를 피해 미국으로 대거 이주한 체코 유대인들을 통해 카프카의 작품이 미국 사회에 널리 소개되면서 카프카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2차대전 후에는 사회 전반의 암울하고 자조적인 분위기와 맞아 떨어져 유럽 지식인 사회에 ‘카프카 유행’이 대대적으로 일어나고, 당시 세계를 휩쓴 실존주의 문학의 열풍 속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카프카의 소설은 영화와 연극으로 만들어져 세계 무대에 올려졌다. 특히 ‘변신’과 ‘성’은 세 번이나 영화화되었다. 단편작품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1917년)는 1977년 8월 한국에서도 성격파 연극배우 추송웅에 의해 ‘빨간 피터의 고백’이라는 제목의 모노드라마로 만들어져 장장 7년 동안 482회나 공연되고 15만 명 이상이 관람함으로써 한국 연극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