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영 화백의 화두는 소리다. 소리의 청각 영역을 빛의 시각 영역으로 잡아내는 데 그의 화업을 다해왔다. 그래서 화면 가득 펼쳐놓은 파노라마 같은 점, 선, 면의 불멸의 미학은 그가 걸어온 발자국처럼 형형하다. 한국 화단의 새로운 지형과도 같은 그의 작품 세계를 뉴스메이커에서 취재했다.

신선영 기자 ssy@

청각의 시각화

▲ 이주영 화백.

사실 이주영 화백은 음악가가 꿈이었다.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전공하지는 못했지만 1973년 교사 음악회에서 테너 부문에 입상하고, 합창단에서 성악가로 무대에 오르면서 음악에 대한 끈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작품을 완성하는 주요 기제로써 음악을 본업 시 해왔다.

“어릴 적부터 음악은 나를 이끌어 준 힘의 원천이자, 그림으로 옮기고픈 갈망의 대상이었다”고 말하는 그는 “그래서 음악을 캔버스에 잡아낸다는 게 어림없는 줄 알면서도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작업 배경을 설명했다.

그래서 그의 작업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청각의 시각화라고 할 수 있다. 음악의 사유 방식을 듣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전환한 것인데, 1978년부터 시도한 이 작업은 거듭되는 실험 과정 끝에 영상에까지 이르게 됐다. 음악에 맞춰 만든 작품들을 환등기에 차례대로 투사한 뒤, 그 투사한 장면을 재편집해서 영상으로 만든 것이다.

“저는 작품을 슬라이드 필름으로 찍어두는 습관이 있습니다. 어느 날 그 필름들을 모아서 환등기에 틀었는데 교차, 배열, 이동할 때 나타나는 효과들이 재밌더라고요. 그 효과들을 만들기 위해 한 대에서 두 대, 세 대... 총 여섯 대까지 틀었는데, 보기에 좋아서 슬라이드 프로젝터로 영상까지 제작하게 됐습니다.”

음악과 함께 보는 이미지는 기억에 오래 남는다. 그 역할을 톡톡히 한 게 레이 린치(Ray Lynch)의 뉴에이지 음악이다. 작업할 곡을 찾던 중 한 음반 가게에서 듣고는 단번에 매료됐다. ‘이 곡이라면 내 기법을 고수면서도 음악과 접점을 이룰 수 있겠다’는 생각에 작곡가에게 저작물 이용을 허락해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렇게 그의 대표작 <회화에서 영상으로 영상에서 회화로>가 만들어 졌다. 5분에서 10분에 달하는 곡을 한 곡당 수십 장씩, 총 세 곡을 영상화 했는데, 완성까지 12년이 걸렸다. 그 오랜 공력만큼이나 숭고함, 견고함, 강인함 같은 것들이 그의 영상에 깃들어 있다.

▲ 현을 위한 아다지오Ⅶ, 145×112cm, acrylic on canvas.

소리의 기하학
이주영 작가의 작품은 레이 린치의 음악에 아귀를 맞춘 듯 딱 들어맞는다. 레이 린치의 미래지향적인 사운드에 어울리는 수직수평의 강한 도상과 기하 광선, 주파수 같은 색채 스펙트럼이 앙상블을 이루고 있다. 스타카토 같은 점 패턴도 멀리서 보면 실로 촘촘히 엮은 듯하지만, 사실은 수백수천개로 잘라 붙인 종이들이다.

그는 물감으로 여러 장의 그림을 그린 뒤 가늘게는 3mm까지 잘라 그것을 다시 화면에 붙였다. 돗자리 짜듯이 색채와 형태를 한 가닥씩 붙인 것이다. 이러한 작품은 보는 이의 시선을 더욱 끌어당기기 마련인데, 가까이에서 봐도 정교한 붓질과 반듯한 수공이 어디 하나 흠 잡을 데가 없어서 회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완결하다는 느낌을 준다.

▲ 오 환희Ⅰ, 370×244cm, acrylic on canvas.

“작품을 하나의 세계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계는 캔버스에 갇혀 있는 것 같아도 생명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모든 것은 생명으로 존재하고, 살아 있는 것은 움직이며, 움직이는 것에는 소리가 나기 때문입니다. 이 소리를 통해 영혼과 귀를 정화해 주고 싶었습니다.”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그의 작품 세계는 음악적 질서와 균형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음악으로부터 보호 받는 느낌이 난다. 선은 현처럼, 원은 북처럼, 막대들은 피아노 건반처럼 마치 손을 대면 그 소리가 배음으로 퍼져 나갈 것 같은 아름다움이다.

▲ 빛Ⅰ, 370×244cm, oil color on canvas.

그는 이를 공명이라고 표현했는데 “눈과 귀가 일치되는 것을 보고 들었을 때 나타나는 뇌의 공명”이다. 이 공명에서 빛을 보는 그는 “빛을 보고 있으면 소리가 들려오고, 소리를 듣고 있으면 빛이 보이는 듯하다”며 이 세계를 찬미했다. 그가 음악과 함께 일궈 낸 예술 정신이다. 단순히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너머로 향해 나아가는 그의 예술 세계를 경험해 보기 바란다.

▲ 빛과 소리의 어울림, 160×240cm, acrylic on canvas.

이주영 화백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단국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단국대학교 서양화과 교수를 역임했다. 서울, 미국, 프랑스 등지에서 10여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상파울로 비엔날레 국제전, 프랑스 국제 살롱전 등에서 20여회의 국제전과 단체전에 참가했다. 작품 <빛Ⅰ>은 서울 시립미술관에 소장 및 중등 미술교과서에 수록돼 있다. 예술의 전당, 63갤러리, 대전 시립미술관 등 기관에서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미술과 음악을 조화시킨 멀티슬라이드 영상물 <회화에서 영상으로 영상에서 회화로>는 서울, 인천, 파리, 미국에서 13회의 공연을 가졌다. 현재 단국대학교 서양화과 명예교수다. 작품과 영상은 http://blog.naver.com/rjy40에서 감상할 수 있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