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재건위 사건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 재판은 대한민국 사법 현대사의 질곡 그 적나라한 사례로 회자돼 왔다. 1972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선포 이래 이듬해 1973년 10월 대학가의 저항이 시작되고,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유인물이 배포되면서 공안 당국이 그 배후로 지목해 기소한 인혁당에 대해 대법원은 1975년 4월 8일 관련자 8명의 사형을 확정했다. 다음날 곧바로 사형이 집행됐다. (문화일보 2012년 9월 11일 31면)

▲ 4월 9일 사형집행 소식을 듣고 가족들이 서대문 구치소 앞에서 오열하고 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1964년의 인혁당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4년 8월 14일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북괴 지령를 받아 국가 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 인민혁명당(인혁당)을 적발했다”고 발표한 것이 인혁당 사건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당시 중앙정보부로부터 47명의 피의자와 조사 자료를 넘겨받아 18일간 수사를 벌인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불온단체를 조직했다는 혐의가 하나도 없다”며 기소장에 서명을 거부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사건은 공안부에서 형사부로 넘어가 구속 마감일인 9월 5일 밤이 되어서야 형사3부장의 서명으로 26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고 21명이 불기소 처리되었다. 그런 가운데 한국인권옹호협회가 전기고문과 물고문 등 고문 사실을 9월 12일 세상에 폭로하는 등 조작설과 고문설이 연속적으로 터져 나와 검찰은 수사라인을 서울지검에서 서울고검으로 교체했다.
서울고검은 9월 16일 14명을 석방하고 도예종, 박현채, 이재문, 임창순 등 12명의 공소장을 최고 사형까지 처할 수 있는 국가보안법에서 최고 7년형인 반공법으로 변경해 초기 수사에 문제가 많았음을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게다가 1심 법원이 1965년 1월 20일 도예종에게 3년, 추가 기소된 양춘우에게 2년형을 선고했을 뿐 나머지 11명의 피고에게는 무죄를 선고함으로써 검찰의 기소에 무리가 있었음을 또다시 확인시켜 주었다. 비밀서클을 조직한 사실은 인정하나 인혁당 강령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게 무죄 이유였다.
그러나 서울고법은 5월 29일 원심을 파기하고 13명 전원에게 유죄 판결을 내려 도예종에게는 징역 3년, 박현채 등 5명에게는 징역 1년, 나머지 7명에게는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서울고법은 “인민혁명당의 존재는 인정할 수 없다”면서도 “혁신계 정당의 모체로 조직한 서클의 조직 확대, 강령 등을 논의한 것은 인정된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대법원도 9월 21일 상고 기각으로 2심 형량을 확정함으로써 인혁당 사건은 사실인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1974년 중앙정보부가 인혁당을 민청학련 사건의 배후로 지목하면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불거졌다. 민청학련 사건은 1974년 4월 25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사건의 전모를 발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중정 부장은 "민청학련의 배후에 공산 단체인 인혁당과 조총련계 일본 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가 복합적으로 관련되어 있다"면서 조사 대상자 240명 가운데 일본인 2명을 포함 60여 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또한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는 5월 27일 “민청학련이 주동이 된 국가 변란 기도 사건의 주모자급 253명 중 1차로 54명을 구속?기소했다”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의 발표에 따르면 인혁당은 국가 변란을 기도하기 위해 강령과 규약을 채택한 지하정당이었고, 민청학련은 이 인혁당과 조총련의 조종을 받는 대규모 지하조직이었다. 당국이 인혁당을 문제삼은 근거는 세 가지였다. 북한으로부터 지령을 받았고, 간첩과 접촉했으며, 북한의 공작금으로 활동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은 과거 인혁당처럼 일정 수준의 조직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당명은 물론 강령과 규약이 없다고 주장했다. 더구나 도예종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10년 전 인혁당 사건과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재판은 민청학련과 인혁당 관련자들을 분리해 사상 유례 없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인혁당 관련자들은 1964년의 인혁당 사건과 구분하기 위해 ‘인혁당 재건위’로 불렸다. 비상보통군법회의(1심)는 7월 11일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21명에 대해 7명 사형, 8명 무기징역, 6명 20년형을 선고했다. 7월 13일에는 민청학련 관련자 32명에 대해 여정남·이철·유인태 등 7명에게는 사형을, 나머지 관련자들에게는 징역 15~20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1974년 9월 7일 비상고등군법회의(2심)는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7명의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에 대해서는 그대로 사형을 선고했으나 민청학련으로 사형선고 받은 7명에 대해서는 여정남을 제외하고 모두 무기징역 이하로 감형했다. 민청학련 관련자는 1975년 2월 대부분 석방되었다. 유인태와 이현배 등은 학생 신분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이후 몇 년 더 감옥에 있어야 했지만 사형·무기 운운했던 것치고는 싱겁게 끝난 셈이다.
그런데도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들만은 감옥에서 나오지 못했다. 대법원은 2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7명과 민청학련 관련자 1명의 상고를 1975년 4월 8일 기각했다. 이로써 8명은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20시간이 지난 4월 9일 새벽 도예종, 여정남, 서도원,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김용원, 이수병 등 8명은 가족도 모르게 서울구치소에서 죽음을 맞았다. 게다가 시신은 가족에게도 인계되지 않은 채 화장장으로 보내졌다.
그들의 죽음에 국제법학자협회는 4월 9일을 ‘사법 암흑의 날’로 선포하며 유신 정권의 폭력성을 규탄했다. 가족들은 어디에 하소연도 하지 못하고 억울한 죽음을 가슴에 안은 채 살아야 했다.
그러다가 2002년 9월 의문사진상규명위가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당시 중앙정보부의 조작극”이라며 “참혹한 고문으로 허위진술이 강요되고, 공판 기록조차 의도적으로 조작되고 누락되었다”고 발표하고,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과거사위) 역시 2005년 12월, “1·2차 인혁당 사건과 민청학련 사건은 정권 차원의 조작과 기획”이라며 “인혁당이란 명칭은 구성원 사이에서 불리는 여러 명칭 중 하나였고 강령과 규약은 논의된 적도 채택된 적도 없었다”고 발표함으로써 가족들은 뒤늦게나마 신원할 수 있었다. 재심을 받아들인 사법부 역시 2007년 1월 8명의 죽음에 대해 무죄를 선고해 8명은 32년이나 지나서야 지하에서 명예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10년 6월, “1차 인혁당 사건 역시 정권 차원의 조작과 기획이었다”는 국가정보원 과거사위의 발표를 정면으로 뒤집는 새로운 증언이 나와 논란이 벌어졌다. 박범진 전 의원이 자신의 저서에서 제1차 인혁당 사건의 인민혁명당이 국가 변란을 목적으로 실제로 활동한 지하당이었다고 증언한 것이다. 물론 박범진 전 의원의 주장은 ‘인혁당 재건위’가 아니라 ‘1차 인혁당’에 한정된다.
그는 서울대 정치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63년 봄 자신도 인혁당에 입당했다며 인혁당은 (중앙정보부의) 조작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나를 포함해 5명의 서울대생이 입당할 때 문서로 된 당의 강령과 규약이라는 것을 직접 보았고 북한산에 올라가 오른손을 들고 입당 선서를 한 뒤 인혁당원으로 활동했다”며 “제1차 인혁당 사건은 실재했던 사건이었는데도 수사기관이 (물증을 확보하지 못하는 등) 객관화하는 데 실패해서 조작사건처럼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1차 인혁당 사건 관련자 중 일부는 통일혁명당(통혁당·1968년)과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1976년)에도 참여했다고 증언했는데 이것은 실제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 발견과 ‘가갸날’ 제정

▲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본). 국보 제70호

행방이 묘연한 국보급 문화재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이 세상 밖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아졌다. 상주본을 훔쳐 은닉한 혐의(문화재보호법 위반)로 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은 배모씨(49)가 항소심 재판 과정에서 상주본을 국가에 위탁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후 항소심 재판부가 배씨에게 7일 무죄를 선고했기 때문이다. (경향신문 2012년 9월 8일 8면)

조선왕조실록에는 훈민정음 반포와 관련된 두개의 기록이 나온다. 세종 25년(1443년) 12월 30일조에 ‘이 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는데…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는 기록과 세종 28년(1446년) 9월 29일조에 ‘이 달에 훈민정음이 이루어졌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두 기록을 놓고 일제 시대 학자들이 다소 혼란에 빠지긴 했으나 곧 정리가 되었다. 1443년 12월에 한글이 만들어지기는 했으나 문제점이 많아 3년 동안의 수정·보완 작업을 거쳐 1446년 9월에 한글을 반포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1443년 12월보다는 1446년 9월을 한글이 만들어진 시기로 보자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실록에 1446년 9월 며칠인지가 명시되지 않아 9월의 마지막 날인 9월 29일을 한글의 반포일로 간주했다.
그 무렵 순수 한글연구단체 ‘조선어연구회’가 1921년 12월 3일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발족되었다. 최두선(중앙학교 교장), 임경재(휘문학교 교장), 장지영(조선일보 문화부장), 권덕규(휘문학교 교사), 이승규(보성학교 교사), 이규방(보성학교 교두), 신명균(한성사범 졸업생) 등 발족 당시의 멤버들은 우리말의 문법적 원리를 규명하는데 힘을 쏟았다.
‘조선어연구회’는 훈민정음이 반포되고 8번째 회갑이 되는 1926년의 음력 9월 29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11월 4일 서울 식도원에서 훈민정음 반포 480년을 기념하는 행사를 가졌다. 참석자들은 “이 날을 경절로 하자”는 지석영의 제안을 받아들여 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로 제정했다.
이듬해부터는 가갸날과 한글날이라는 명칭을 혼용했으나 모든 생활이 양력으로 이뤄지는 것과 달리 한글날만을 음력으로 지내는 것이 불편하다는 의견이 1931년 제기되어 1446년 9월 29일 당일을 양력(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한 10월 29일을 훈민정음 반포일로 바꿔 기념했다. 그러다가 1582년에 율리우스력이 그레고리력으로 바뀐 점을 감안해 1934년부터는 음력 9월 29일을 그레고리력으로 계산한 10월 28일을 한글날로 기념했다.
날자에 다시 변경이 가해진 것은 1940년 8월 경북 안동의 한 고택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된 뒤였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창제한 훈민정음에는 ‘해례본’과 이를 한글로 풀이한 ‘언해본’이 있다. 언해본은 훈민정음에 대해 간결하게 요점을 밝혀놓은 것으로, 세종 말년부터 세조 때까지 다양한 버전의 판본이 존재한다. 그중 월인석보(1459년) 제1권에 실려 있는 것이 가장 완벽하다. 교과서에서 배워 누구에게나 익숙한 “우리나라의 말씀이 중국과 달라서 한자로는 서로 잘 통하지 아니한다”로 시작되는 문장은 바로 월인석보에 실린 언해본의 서문이다. 
해례본은 몇 개의 판본이 존재하는 언해본과 달리 1940년 경북 안동에서 발견된 판본이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간송 전형필이 구입해 지금은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해서 ‘간송본’으로 불린다. 간송본은 그동안 발견 경로가 경북 안동군 이한걸의 집에서 그의 셋째 아들 이용준이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실제는 같은 안동 지역 광산김씨 종택인 긍구당 소장본을 이용준이 훔친 것이라는 주장이 2005년 제기되었다. 당시 긍구당을 지키고 있는 김응수가 그의 사위인 이용준에게 긍구당의 책을 이용하게 했는데 이용준이 해례본과 김매월당집(김시습 문집)을 빼돌려 간송 전형필에게 팔아넘겼다는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한문본으로 훈민정음에 대한 해설과 예의(禮儀)가 적혀있다고 해서 해례본으로 불린다. 목판본으로 만들어진 1책 33장 중 세종의 서문·예의가 4장 분량이고 집현전 학자 8명의 훈민정음에 대한 설명 즉 해례가 29장 분량이다.
그중 정인지가 쓴 서문에는 ‘세종 28년 9월 상한(上澣)’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를 근거로 1945년 해방 후부터는 상한 즉 상순(上旬)의 끝날인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한 10월 9일을 한글날로 바꿔 기념하고 있다. 한글날을 10월 9일로 바꾸기 전 “1446년 9월조의 기록은 문자로서의 한글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해례본이 완성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소수 의견으로 받아들여졌다.
북한은 세종 25년(1443년) 12월에 한글이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해 12월을 양력으로 환산한 1월의 중간인 1월 15일을 한글날로 기념하고 있다. 즉 북한은 세종 25년에 한글이 반포되고 세종 28년에 이것을 정리한 해례본이 나온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간송본은 국내 유일의 해례본답게 1962년 국보 제70호로 지정되고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그런데 2008년 7월 간송본과 동일한 진본이 경북 상주(상주본)에서 발견되어 학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그로부터 한 달 뒤에는 상주시의 한 골동품 가게 주인이 “해례본은 당초 경북 안동시 광흥사의 나한상의 뱃속에 들어 있던 복장(伏藏) 유물로, 1999년 문화재 도굴범이 훔쳐 자신에게 팔아넘긴 것”인데 “배모씨가 가게에 있는 해례본을 몰래 훔쳐 넣어갔다“고 주장하면서 소유자 논쟁이 벌어졌다. 이에 대해 배모씨가 “집에 쌓여 있는 책을 정리하면서 찾은 것”이라고 맞서면서 소유권을 둘러싼 논쟁은 법정으로 비화되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상주본이 사라져 학계를 안타깝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2011년 6월 대법원이 ‘배씨가 훔친 것이니 골동품 가게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판결했으나 배씨는 해례본의 소재를 밝히지 않고 있다. 검찰과 법원이 수차례 강제집행과 압수 수색을 했지만 찾아내는 데 실패했다. 검찰은 2011년 9월 배모씨를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배씨는 상주본을 훔쳐 은닉한 혐의(문화재보호법 위반)로 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으나 대구고법(2심)이 배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해 석방되었다. 재판부는 “증인들의 진술에 일관성이나 신빙성이 없고, 검찰의 증거만으로는 공소사실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법리에 따라 무죄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석방된 배씨는 해례본의 행방에 대해 일절 함구하고 있어 과연 상주본을 찾을 수 있을지는 의문인 상황이다.

■성철 스님 조계종 종정 추대

▲ 성철 스님(1912~1993)

한국 현대 불교, 최고의 선승(禪僧) 중 한 명으로 추앙받았던 성철 스님. 그의 속가(俗家) 딸 불필 스님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버지 성철의 권유에 따라 1957년 출가한 지 50여 년 만이다. 지독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치열한 수행 인생을 압축한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를 냈다. (중앙일보 2012년 9월 19일 34면)

1980년의 ‘10·27 법난’은 한국 현대 불교계의 최대 치욕이었다. 불교계는 위기 국면을 타개할 인물로 성철(1912~1993) 스님을 선택했다. 성철은 “불교가 중흥한다면 기꺼이 응하겠다”며 제7대 종정직을 수락했다.
성철은 그러나 1981년 1월 20일 서울 조계사에서 열린 종정 추대식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다른 사람이 종정 수락 법어를 대독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山是山兮 水是水兮·산시산혜 수시수혜). 해와 달과 별이 일시에 암흑이구나(日月星辰一時黑·일월성신일시흑). 만약 이 가운데 깊은 뜻을 알고 싶다면(欲識箇中深玄意·욕식개중심현의) 불속의 나무말이 걸음걸음 가는 도다(火裏木馬步步行·화리목마보보행).’
알쏭달쏭한 이날의 취임 법어는 이후 저잣거리에서, 대폿집에서, 가정에서, 대학가에서 순식간에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성철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켰다. 일생을 엄격한 수행승으로 살며 속세를 멀리해 불자들에게만 큰스님으로 떠받들어졌던 성철이 69세라는 뒤늦은 나이에 비로소 ‘전국구 스타’로 유명해진 것이다.
성철은 경남 산청의 부농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신동소리를 들을 정도로 명민했다. 진주중학을 졸업하고 결혼을 한 뒤인 1935년, 23세 나이로 영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리산 대원사에 들어갔다. 성철의 비범함을 전해들은 해인사의 동산 스님이 1936년 겨울 성철을 해인사로 불러 출가를 권유하자 성철은 1937년 3월 동산 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았다. 이영주라는 속인의 옷을 벗고 성철이라는 법명으로 수행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출가 2개월 뒤에 딸이 태어나 속세의 인연을 완전히 끊지는 못했다. 딸은 이후 성철이 지어준 ‘불필’이라는 법명으로 출가했다.
성철은 1940년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에서 하안거 중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그때부터 등을 대고 눕지 않는다는 그 유명한 ‘장좌불와(長坐不臥)’ 정진을 8년 동안 계속했다. 1947년 10월부터 1950년 3월까지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기치 아래 20여명의 스님과 함께 시작한 ‘봉암사 결사’는 식민 불교를 밀어내고 조선 불교를 다시 일으키는 초석이 되었다. ‘봉암사 결사’는 제도 개혁이 아닌 참선 수행을 통해 무너져 내리는 불교를 바로 세우자는 운동이었고, 철저하게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되 뼈를 깎는 노력을 기울이는 참선 수행이었다.
결사에 참여한 스님들은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 즉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않는다’는 정신에 따라 하루 2시간 이상 직접 물을 긷고 나무를 하고 밭일을 했다. 방 안에서는 면벽좌선하고 잡담을 금했다. 법당에서는 부처님과 제자들의 상(像)만 남기고 토착 신앙과 결합된 요소들은 모두 없애 버렸다. 오늘날 우리 불교에서 행해지고 있는 주요 의식과 의례들이 모두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봉암사 결사’는 현대 한국 불교의 출발점으로 일컬어진다.
성철은 40대 중반이던 1955년 대구 팔공산 성전암 주위에 아무도 근접하지 못하게 철망을 쳐 놓고 이후 10년간 속세로 나오지 않은 채 용맹정진하는 실로 초인적인 극기수행을 보여주었다. 8년간의 ‘장좌불와’에 이어 10년에 걸친 ‘동구불출(洞口不出)’의 신화가 시작된 것이다. 성전암 8년과 경남 통영의 안정사에 딸린 천제굴의 2년까지 포함해 10년 동안 성철은 절 문 밖을 나가지 않고 불경은 물론 독학으로 티베트어, 산스크리트어, 영어, 독일어, 일본어 등을 공부했다. 물리학, 정신분석학, 심령학 등 현대학문들도 깊이 연구했다.
성전암 기간은 사실 불교 공부에 새롭게 정진했다기보다 그동안 공부한 내용을 현대적인 학문을 동원해 알기 쉽게 설명할 수 있도록 정리하는 기간이었다. 불교가 시대에 뒤떨어진 종교가 아니라 얼마든지 현대의 서구 학문에 들어맞을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다양한 분야의 자료를 구해 읽었던 것이다.
그가 ‘동구불출’하는 동안 밖에서는 ‘불교정화’(대처승은 ‘법난’으로 규정)라는 이름으로 대처승과 비구승의 투쟁이 한창이었다. 하지만 성철은 시류를 멀리한 채 오직 한국 불교의 진정한 내적 정화를 위해 이른바 ‘성철 불교’로 일컬어지는 독보적인 불교이론과 실천 논리를 확립했다.
1965년 성철은 마침내 ‘동구불출’을 끝내고 경북 문경 김용사에서 대중들을 상대로 기존 불교 법회와는 차원이 다른 성철 특유의 설법 방식으로 최초의 법문을 펼쳐보였다. 해인사 총림의 초대 방장으로 취임한 1967년 겨울에는 대중을 위해 하루 2시간씩 100일 동안 그 유명한 ‘백일법문’을 열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 쇼펜하워와 아퀴나스의 종교론, 스티븐슨의 심령론 등을 원용한 그의 법문은 교단 안팎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많은 지식인들이 성철의 법문을 듣고 출가를 결심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성철은 줄곧 가야산 해인사를 지키면서 ‘가야산 호랑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는 공부하는 대중 스님들이 정진 중에 졸음에 빠질 때 육두문자를 섞어 “이 도둑놈아 밥값 내놔라”라고 고함을 지르고 어김없이 등줄기를 죽비로 때린 데서 연유한 별칭이었다.
성철은 1976년 출간된 최초 저서 ‘한국불교의 법맥’에서 보조 지눌스님이 종조(宗祖)라는 종래의 설을 뒤엎고 태고 보우스님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종조 논쟁은 일단락되었다. 깨달음 문제는 1981년 출간된 두번째 저서 ‘선문정로’에서 다뤄졌다. 성철은 저서에서 단번에 깨달음에 도달하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선가의 적자로 선언했다. 이는 깨달음 뒤에도 수행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는 보조의 ‘돈오점수(頓悟漸修)’를 배격한 것이다. 성철의 선언은 1990년대 돈점논쟁을 불러일으켜 종권다툼과 잿밥 싸움으로 끝없이 추락하던 불교의 위상을 높여주었다.
성철은 1991년 제8대 종정으로 재추대되었으나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1993년 11월 4일 입적했다. 살아서는 당대 최고의 선승으로 존경을 받고, 죽어서는 한국 불교사에 빛나는 큰스님 반열에 오른 성철의 해인사 다비식에는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도 30만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그의 쩌렁쩌렁한 가르침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음을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