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희 감독의 ‘만추’ 개봉 50주년 
이만희(1931~1975)는 1960년대 한국 장르영화의 달인이자 충무로의 보헤미안이었다. 15년 동안 50편의 영화를 양산하면서도 작품마다 자기 색깔을 놓치지 않은 거의 유일한 감독이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경신고 재학 시절부터 영화를 보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던 그는 6·25 전쟁 후 안종화 감독의 ‘사도세자’에 자객으로 출연하면서 영화 이력을 시작했다. 이후 5년 동안 안종화, 박구, 김명제 감독 밑에서 조감독 생활을 하고 영화 ‘인력거’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면서 영화를 천직으로 삼았다.

▲ 이만희 감독

이만희의 감독 데뷔작은 1961년 1월 25일 국제극장에서 개봉한 ‘주마등’이었다. 이 영화가 이만희에게 각별했던 것은 데뷔작인 데다 그가 연출한 총 50편의 영화 중 25편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은 문정숙과의 만남 때문이었다. 당시 기혼자였던 이만희와 미혼자였던 문정숙이 연인 사이였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이만희가 연출력과 흥행력에서 인정을 받은 첫 영화는 1962년 8월 9일 개봉한 ‘다이알 112를 돌려라’였다. 당시로는 그리 대중적이지 않았던 스릴러 장르의 이 영화로 이만희는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은 것은 물론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끌어들여 상업성까지 인정받았다.
이만희를 당대 최고의 흥행 감독으로 끌어올린 것은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성공이었다. 1963년 4월 11일 국도극장에서 개봉한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전쟁영화로는 최초로 20만 관객 동원이라는 기록을 세워 영화계를 놀라게 했으며 오늘날에는 한국 전쟁영화의 한 획을 긋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성공의 기쁨도 잠시뿐, 이듬해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예고편이 극장에서 상영되고 있던 ‘7인의 여포로’가 반공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1964년 12월 18일 구속영장이 청구된 것이다. 북한 인민군에게 잡힌 국군 간호장교 포로 7명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서 북한군이 국군보다 더 좋은 옷차림을 하고 있고 또 국군이 바보스럽게 묘사되어 북한이 더 우월한 체제로 보이게 했다는 것이다.
다행히 구속영장은 기각되고 필름에 대해서만 압수수색 영장이 발부되었다. 그러나 중앙정보부가 나서 이만희의 구속을 주도하는 바람에 이만희는 결국 1965년 2월 5일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다. 3월 15일 보석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재판을 받는 동안 각계에서 이만희를 옹호하는 성명서가 발표되었으며 정부에 진정서가 제출되었다.
이만희는 재판 중에도 ‘7인의 여포로’ 내용의 일부를 삭제하고 보충 촬영을 통해 재편집한 뒤 ‘돌아온 여군’으로 제목을 바꿔 1965년 8월 27일 개봉했다. 그러나 당국의 검열로 이미 누더기가 된 영화의 흥행 결과는 참혹했다. 이런 가운데 법원이 12월 8일 선고유예 판결을 내림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한국 영화의 예술성을 한층 높인 걸작으로 꼽혀

반공영화를 만들고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시련을 겪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만희는 고집스럽게 다시 반공 전쟁영화로 돌아왔다. 그런데 “진짜 반공영화를 만들겠다”며 만든 ‘군번 없는 용사’(1966.3.23 개봉) 역시 북한군의 제복이 너무 멋지다는 이유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또다시 벌어졌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천국의 사랑’은 촬영이 50% 정도 진행된 시점에서 제작정지 처분을 받았고 ‘포대령’은 제작허가조차 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영화에 대한 열정이 수그러들 이만희가 아니었다. 자신의 대표작이자 한국 영화사를 빛낸 주옥 같은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히는 ‘만추’를 1966년 12월 3일 명보극장에서 개봉한 것이다. 3일 동안의 특별휴가를 얻어 어머니 성묘를 가는 살인 복역수 문정숙과 위폐범으로 지명수배되어 쫓기는 신성일 두 사람이 펼치는 인생의 불안과 고독 그리고 사랑을 그린 ‘만추’는 촬영과 녹음이 보름 만에 완성되고 출연진이라야 신성일과 문정숙 두 사람이 전부였는데도 20만 명의 관객을 끌어들여 이만희 영화의 정점을 찍었다.
‘만추’는 각종 영화상을 휩쓸었다. 베를린 영화제에도 출품되었고 몇 편의 영화로도 리메이크되었다. 1975년 김기영 감독의 ‘육체의 약속’(김지미 주연), 1982년 김수용 감독의 ‘만추’(김혜자 주연), 2011년 김태용 감독의 ‘만추’(현빈·탕웨이 주연)로 국내에서 세 차례에 걸쳐 리메이크되었으며 일본에서도 1972년 ‘약속’이라는 제목으로 리메이크되어 그해 일본영화 베스트5에 올랐다. ‘만추’는 이처럼 한국 영화의 예술성을 한층 높인 걸작으로 꼽히지만 원판 필름은 물론 지방 상영을 위해 복사한 필름도, 외국에 수출한 필름도 사라지고 없어 한국 영화계의 큰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반면 아예 개봉도 하지 않아 존재조차 불투명했던 영화 중 37년 만에 부활한 영화도 있었다. 1968년작으로 추정되는 ‘휴일’은 “우울하고 퇴폐적인 정서”라는 이유로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고 상영금지 처분을 받아 사실상 이 영화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는데도 2005년 필름이 발견되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만희는 1975년 4월 3일 쓰러졌다. 마지막 영화가 될 ‘삼포 가는 길’의 편집을 하다가 쓰러진 그는 결국 열흘 뒤 44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개성파 영화배우 이혜영이 그의 딸이다.

■캄보디아의 ‘킬링 필드’
캄보디아 전범재판소(ECCC)가 11월 23일 최소 170만 명이 희생된 ‘킬링필드’의 핵심 전범으로 기소된 누온 체아(90) 전 공산당 부서기장과 키우 삼판(85) 전 국가주석에 대해 종신형을 선고했다고 AP가 보도했다. 1979년 크메르루주 정권이 붕괴된 지 37년 만에 킬링필드 주범 일부에 대한 단죄가 이뤄진 것으로, 이날 판결로 단죄가 확정된 킬링필드 전범은 3명으로 늘었다.… 누온 체아와 키우 삼판은 1975~1979년 크메르루주 정권의 2인자와 명목상의 지도자로 강제 이주와 반대 세력 처형, 학살 등을 저지른 혐의로 2010년 9월 기소돼 2014년 8월 1심에서 모두 종신형을 선고받자 항소했다. 2006년 ECCC 출범 이후 지금까지 기소된 킬링필드 전범은 모두 9명이다. 크메르루주 정권의 1인자였던 폴 포트는 1998년 사망해 법정에 세우지도 못했다. <서울신문 2016년 11월 24일>

동남아시아의 가난한 나라 캄보디아가 80년 동안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다가 가까스로 독립한 것은 1953년 10월이었다. 그러나 캄보디아 앞에 놓인 것은 해방의 환희가 아니라 피비린내 진동하는 내전과 희대의 살인마 폴 포트에 의한 대량학살이었다. 여기에 강대국들의 잦은 침공까지 더해져 아비규환의 일상이 계속되었다.
독립 후에도 실권자는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이었다. 그는 캄보디아가 프랑스의 식민지였을 때 왕족 가문에서 태어나 프랑스식 교육을 받았다. 애초 왕위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19살이 되던 1941년 전격적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의 외할아버지인 국왕이 사망한 뒤 아버지가 왕위를 계승할 차례였으나 프랑스 식민당국이 만만하게 보인 그를 왕위에 앉힌 것이다. 하지만 그는 프랑스와 협상 끝에 1949년 사법·경찰·군대를 제외한 주권을 인정받았고, 1953년 완전한 독립을 이뤄냈다.
1955년에는 왕위를 아버지에게 넘겨주고 물러난 뒤 총리와 국가원수로 실질적인 통치를 하며 미국과 중국, 베트남 사이를 오가는 비동맹  중립 외교로 인도차이나 반도에 몰아닥친 냉전의 바람이 캄보디아로 확산되는 것을 차단했다. 그러다가 1960년대 중반 무렵부터는 캄보디아 국경 너머에서 베트남전을 전개하고 있는 미국과 거리를 두었다. 북베트남의 공산군이 미군이 지배하고 있는 남베트남으로 잠입할 때는 캄보디아의 동부지역을 거쳐야 하는 ‘호찌민 루트’를 묵인해주어 미국의 미움을 샀다.
미국은 ‘호찌민 루트’에 대규모 공습을 가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이 투하한 네이팜탄과 폭탄들로 수많은 캄보디아인이 죽었다. 1969~1973년 미군이 폭격기로 캄보디아에 쏟아부은 폭탄만 2차대전 당시 미국이 일본에 투하한 폭탄량의 3배에 달했다. 이 때문에 캄보디아의 ‘킬링 필드’는 ‘크메르 루주(붉은 크메르)’ 치하의 1970년대가 아니라 사실상 1960년대 말 미군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미국은 반시아누크 무장세력들을 배후에서 지원하는 방법으로 쿠데타를 획책하거나 시아누크를 암살하는 음모도 꾸몄다.
1970년 3월 시아누크가 중국에 머물고 있을 때 미국의 지원을 받은 론 놀의 쿠데타로 시아누크는 결국 망명객 신세가 되어 1975년까지 중국과 북한 등지에서 5년간 유랑생활을 했다. 그가 캄보디아에 없는 동안 미국은 캄보디아 영토 안에서 수월하게 베트남전 작전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쿠데타 한 달 후에는 캄보디아 내 공산기지를 쓸어내기 위해 수만 명의 미군과 남베트남 정부군이 캄보디아 영토를 침범하기도 했다.
이처럼 미군의 공습과 침공으로 수많은 사람이 가족과 생활터전을 잃게 되자 캄보디아인들은 미군에 강한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캄보디아인들은 당시 미국의 탄압을 받고 있는 공산 급진세력 크메르 루주 반군을 반사적으로 지지했다. 당시 크메르 루주 지도자는 모택동을 추종하는 폴 포트였다. 크메르 루주가 중국의 군사적 지원과 캄보디아인들의 지지를 받아 론 놀 정권에 무장투쟁을 벌이면서 캄보디아에는 피의 살육전이 전개되었다. 미국은 론 놀 정권을 지원했으나 부패한 그들은 개인 착복에 혈안이었고 경제는 파탄일로를 걸었다.

‘킬링 필드’는 ‘대학살’ 또는 ‘대학살의 현장’을 가리키는 일반명사

1970년대 중반 베트남전이 끝나가고 미군이 철수함에 따라 실정과 부패로 민심을 잃은 론 놀 정권의 붕괴는 시간문제가 되었다. 결국 론 놀 정권은 1975년 4월 17일 수도 프놈펜을 점령한 크메르 루주에 의해 붕괴되고 5년간에 걸친 내전은 종식되었다. 내전으로 약 60만~80만 명이 죽고 300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캄보디아인들은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다는 기대에 한껏 고무되었으나 그것은 새로운 공포와 죽음의 시작이었다.
폴 포트는 캄보디아 사회의 완벽한 개조와 국가의 자립을 꿈꾼 몽상가였다. 그는 캄보디아의 과거를 모두 지워버리기 위해 1975년을 ‘0년(零年)’으로 선언하고, “유토피아적 농경 공산사회를 세우겠다”며 도시민 전체를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도시민들이 크메르 루주의 신념과 상반되는 사상을 가졌다고 생각해 통제를 쉽게 하고 구질서와 관련된 모든 물질적 연결고리를 끊어버리기 위해 그들을 농촌으로 보낸 것이다.
도시민들은 농촌에서 농사를 짓고 댐을 건설하고 혁명에 봉사하도록 강요받았다. 이 과정에서 식량과 식수 부족 그리고 무더위로 인한 각종 전염병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다. 론 놀 정부에서 일했던 군인, 경찰, 공무원, 교사 중 상당수도 감옥에 갇히거나 처형되었다. 시아누크는 폴 포트가 정권을 장악한 후 1975년 캄보디아로 돌아와 칩거하다가 그나마 크메르 루즈 정권이 무너지자 1979년 중국으로 다시 망명했다.
폴 포트는 불교, 돈, 개인 소유를 모두 금지했다. 개인주의는 마땅히 제거되어야 할 악으로 규정하고, 가족은 부르주아적이고 불법적인 집단으로 간주해 해체했다. 남편은 아내와 떨어져 지내야 했고 아이들은 가족과 격리된 채 잔인한 훈련과 이념교육을 받아 광란의 도살에 동원되었다. 악명 높은 강제수용소도 전국적으로 수십 개가 세워졌다.
이런 식으로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처형된 사람이 150만~200만 명에 달했다. 20세기 중 전시가 아닌 평시에 동족을 대상으로 이념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대규모 학살을 저지른 것은 폴 포트가 유일했다. 1984년 영화 ‘킬링 필드’가 개봉된 후 ‘킬링 필드’는 크메르 루주의 대학살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이면서 ‘대학살’ 내지 ‘대학살의 현장’을 가리키는 일반명사가 되었다.

5년 동안 150만~200만 명 처형

폴 포트 정권의 공포정치를 멈추게 한 것은 베트남이었다. 당시 친소 성향의 베트남은 친중 성향의 폴 포트 정권과 국경분쟁을 벌이다가 1978년 12월 25일 캄보디아 국경을 침공하고 개전 2주 만인 1979년 1월 7일 수도 프놈펜을 점령했다. 폴 포트는 태국 국경지대의 밀림으로 도주해 권토중래를 꿈꾸다 20년이 지난 1998년 4월 자연사했다. 베트남은 크메르 루주에서 활동하다가 과거 베트남으로 도주해온 헹 삼린과 훈 센을 전면에 내세워 친베트남 정권을 구성했다.
1979년 2월 중국이 캄보디아 주둔군 철수를 요구하며 베트남을 침공했으나 베트남군의 강력한 반격에 막혀 개전 1개월 만에 물러났다. 미국도 베트남을 비난했으나 무력을 동원하지는 않았다. 당시 캄보디아의 친베트남, 친소련 정권에 맞선 반정부 세력은 키우 삼판이 이끄는 크메르 루주와 중국에서 망명 중이던 시아누크 국왕, 그리고 손 산 전 총리가 이끄는 크메르 인민민족해방전선 등 세 갈래였다. 이들은 1982년 6월 ‘민주 캄보디아 연합정부’를 구성한 뒤 대통령 시아누크, 부통령 키우 삼판, 총리 손 산으로 자리를 안배했다.
중국은 태국을 거치는 이른바 ‘등소평 루트’를 통해 이 크메르 루주군에게 무기를 제공했다. 미국 역시 직접 원조는 하지 않았지만 자국의 무기들이 크메르 루주로 흘러가도록 도왔다. 이렇게 베트남 점령군과 크메르 루주군 간의 내전으로 캄보디아인의 삶은 또다시 죽음으로 내몰렸다. 비극의 캄보디아에 평화의 서광이 비친 것은 1980년대 말이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중재로 1989년 가을 베트남군이 캄보디아에서 물러난 것이다. 1991년 7월에는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되어 내전도 막을 내렸다.
중국으로 망명했던 시아누크 국왕은 12년에 걸친 망명생활 끝에 1991년 프놈펜으로 돌아가 1993년 국왕으로 복귀했다. 시아누크는 연립정부를 구성해 자신의 아들 노로돔 라나리드를 제1총리, 훈 센을 제2총리로 임명했으나 1997년 7월 훈 센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계속된 총선에서도 승리해 훈 센이 총리로 재직하고 있다. 시아누크는 계속 국왕으로 재직하다가 2004년 아들에게 양위한 뒤 상왕으로 물러났다가 2012년 사망했다. NM

▲ 영화 ‘킬링 필드’의 한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