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삶이 나 아닌 타자를 만나
아름다운 울림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나에게 획은 또 다른 획과 마주쳐서 일어나는
울림(韻)의 주체이며 동시에 개체다.”
-항백 박덕준의 ‘豪心(붓의 마음) 墨意(먹의 생각)’ 中

▲ 작가 박덕준은 영화의 한자락을 절묘하게 포착한 글씨체에 알듯말듯한 이야기가 교묘히 숨어 있었던, 관객들로 하여금 필체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던 바로 그 병풍 글씨체의 주인공이다

주목받는 작가 항백 박덕준은 화선지, 장지, 전통한지 등으로 국한되던 서예지의 카테고리를 과감히 벗어나 목간에로의 시도를 감행했다. 그는 독특한 서체를 목간 형식의 두루마리로 벽에 펼쳐 보임으로써 벽이 책이 되는 상상을 마침내 현실로 구현했다.

필묵 머금는 서예지에 대한 다양한 실험 진행
지난 2007년 임권택 감독의 영화 <천년학>포스터의 한켠을 장식하던 병풍을 기억하는가. 작가 박덕준은 영화의 한자락을 절묘하게 포착한 글씨체에 알듯말듯한 이야기가 교묘히 숨어 있었던, 관객들로 하여금 필체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던 바로 그 병풍 글씨체의 주인공이다. 그간 끊임없이 필묵을 머금는 서예지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진행해 온 가운데 작가 박덕준은 최근 ‘목간’이라는 새로운 시도를 선보였다. 목간(木簡)은 종이가 발명되기 전에 대나무로 만든 죽간(竹簡)과 더불어 문자를 써서 기록하던, 얇게 조각낸 목편(木片)이다. 눈으로 본 대나무와 가슴 속에 형상화 된 대나무, 붓으로 종이위에 나타난 대나무가 다르듯, 작가 박덕준의 작품에 대한 소회는 만나는 시점과 시각에 따라 층층이 다른 모양, 다른 느낌으로 울림을 준다. 그의 작품들의 특징은 화선지가 아닌 한지에, 그것도 목간의 틀을 빌려 다양한 시도를 한 작품들이 다수다. 웬만한 필력의 내공을 거부하는 한지에 자기의 의도대로 붓을 운용하기도 쉽지 않지만 딱 들어맞는 먹색을 내기란 거의 불가능한 도전이다. 게다가 목간이라는 공간상의 제약은 획의 배치와 만남, 그리고 문자와 문자의 조화와 대치가 불러일으키는 울림과 떨림을 만들어 내는 작업 곳곳에 작가의 고통이 수반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 辨香(변향)

즉 서경즉시경이(書境則詩境耳)-필묵의 골기가 바탕을 이루는 시각적 경지가 좋은 시를 읽을 때 느끼는 황홀한 감정의 울림처럼 다층적이고도 입체적으로 형상화되어야 한다는 것-를 창출하기 위한 작가 박덕준의 작업은 먹 덩이를 목간의 공간 위 한지에 세워놓고 붓으로 조각품처럼 깎아내는 작업이었다고 비유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서예 자체로서 완벽한 구성미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되니 추사가 왜 추사인지 짐작조차 못하는 후학들에게는 언감생심 시도조차 허락하지 않는 고약한 영역이다. 하지만 작가 박덕준은 멋있게 그 영역으로 비상한다. 수십 년 닦아온 필묵법의 공력이 비상의 원동력이겠지만 울릉도에서 태어나 촌놈(?)으로 유년 시절을 보낸 기억이 또 한몫을 했으리라.

필묵법의 비결은 공백을 만드는 작업

▲ 필묵법(부분)

작가 박덕준은 졸박함과 자연에의 순응이 무엇인지 아는 성품이 붓과 먹과 종이와의 소통에 기교와 멋을 최대한 절제한다. 삐치면 삐치는 대로, 서면 서는 대로 붓의 요구에 자신을 맞춘다. 그러나 그는 치밀하고 놀라울 정도로 계산적이다. 그의 필묵은 문자와 문자 사이, 획과 획 사이 그리고 문자와 여백과의 만남과 격리 사이에 한 치의 빈틈도 두지 않음과 동시에 무한한 울림의 공간을 남겨둔다. 그에게는 배접과 액자까지도 작품의 연장이다. 당연히 방서와 낙관은 본문 못지않게 인고의 작업이다. 필묵법의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공백(空白)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답했다. 종이와 글씨가 만나 남는 빈 공간을 우리는 흔히 여백이라 하지만, 작가는 여백이 아니라 공백이라고 말한다. 남는 공간이 아니라 작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공간이라는 의미다. 그의 답을 듣고 보니 그의 작품에서 여백이 전혀 없다. 종이와 필묵과의 절묘한 만남만 있을 뿐이다. 서로 다르지만 범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지만 결코 같지 않은 길을 걸어온 작가 박덕준. 그는 오늘도 거리낌 없는 자유로 붓의 마음과 먹의 생각으로 아름다운 울림을 만들어 내기에 여념이 없다. 작가 박덕준은 지금까지 총 3회의 개인전 및 미국, 태국, 한국 등을 오가며 국내외 유수의 그룹전에 참가하며 역량을 발휘해왔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천년학>포스터 병풍 작품 제작, 국악방송 <21C KOREAN MUSIC PROJECT>포스터용 캐릭터 제작을 비롯, 최근에는 <筆墨法散稿>를 출간했다. 서예가 현대 시와 철학과 회화가 해후하는 예술적 공간임을 확신하고 있는 작가 박덕준. 멋스러운 문자향이 고스란히 느껴질 그의 다음 행보가 기다려진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