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컵·펜·제도용 컴퍼스 등 우리의 일상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친근한 소재를 흰색으로 압축해 시점 변화를 강조한 조각 작품을 주로 선보였던 작가 박선기가 지난 5월 개인전을 가져 큰 주목을 받았다.

▲ 박선기 작가는 “깊은 통찰력과 끈질긴 집념으로 작업의 성과물이 나오는 것이다. 앞으로도 시각이 가지는 허구성과 계산된 착시가 주는 재미난 흐트러짐을 관객들이 즐겨 주었으면 한다”고 소망을 밝혔다

5월 15일부터 6월 10일까지 서울 통의동 아트사이드 갤러리에서 열린 이번 전시에서는 박선기 작가는 조각 9점과 드로잉 6점, 대형 숯 설치작품 1점 등 신작 10여 점을 선보였다. 특히 기존 작업에 ‘슬라이스 기법’을 추가해 시점의 변화에서 더 나아가 대상의 시각적 분열을 모색했다.

전통조각엔 생소한 ‘숯’ 소재로 17여 년간 작업
“작가에게 작업은 끝없는 고행의 연속이고 고민의 연속이다. 무엇보다 어려운 건 머릿속 생각을 시각적으로 표출시키는 방법적 문제가 가장 큰 고통의 순간이다. 하지만 그렇게 나온 작품은 또 다른 창작발전 에너지가 된다.” 천장에 매단 숯 설치작업으로 잘 알려진 작가 박선기의 이번 개인전은 3년 만이다. 작가는 이번 전시회에 대해 “시점의 유희를 즐길 수 있는 조각 작품에 다시 한 번 착시를 줄 수 있게 대상을 슬라이스(slice)한 게 이번 작품들의 특징”이라고 밝혔다. 작가의 압축된 조각은 입체주의적 시점 개념을 조각으로 옮겨놓은 듯, 사물을 바라보는 관찰자들의 시점을 어지럽힌다. 특히 회화적 기법으로 제작된 조각은 전통적 조각의 특징인 양감과 덩어리감을 박탈당하고 질감을 배제했다. 이를 위해 시점에서 시작해서 한곳에서만 정상적으로 보이는 조각을 다시 한 번 착시를 줄 수 있게 슬라이스 했다. 또 이번 전시에서는 4월 베이징아트페어 특별전 ‘Solid Illusion Beijing’에 전시됐던 숯 설치작품 ‘An Aggregate 120215’와 수만 개의 숯을 허공에 매달아 우아한 전통 한옥의 대문 모습을 형상화한 6m짜리 대형 설치작품도 선보였다. 전통조각에는 생소한 ‘숯’이라는 소재를 17년 이상 다루어 온 작가는 “늘 자연을 주제로 무언가를 해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자연 중에서 가장 좋아했던 바람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그것을 조각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 다음 산을 표현하고 싶었지만 그 역시 조각의 대상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 다음이 바로 나무였다. 이제 나무는 작가 박선기에게 있어 표현의 대상이 아닌, 그가 가장 잘 다루는 소재가 되었다.

작가는 “숯은 변화한 나무다. 즉 저의 전작을 꿰뚫고 있는 소재는 바로 나무인 것이다”고 덧붙였다. 동양화의 붓 자국 같은 형상이든, 계단 형상이든, 서양식 건물의 형상이든 윤곽이 멀리서 읽히는 그의 작품들은 조각의 물질성을 초월하여 조각의 영혼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또한 숯 조각들은 형태론적 측면에서뿐 아니라 색채감에서도 동양 서예의 필선을 연상하게 하며 사물의 직접적인 재현보다는 추상적인 정신성을 앞세웠다. 형태의 추상성에 전전긍긍하던 추상조각을 정신적인 측면에서 한 단계 진일보시킨 것이다.

뛰어난 작품성으로 세계에서 인정받다
작가 박선기는 우리나라보다 해외에서 먼저 알려진 작가로, 1994년 중앙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2002년 밀라노 국립미술원을 졸업했다. 밀라노 유학 시절을 거쳐 그는 숯의 가벼운 성질과 독성을 흡수하는 특성 때문에 건축적인 요소와 건강과 정신의 치유적인 요소를 조화롭게 접목할 수 있었다. 이후 1994년, 이탈리아로 유학 간 지 2년 만에 밀라노의 로렌스 루빈 갤러리에 발탁되어 본격적인 작가의 길에 들어선 그는 유학길에서 귀국하기 이전까지 이미 21회 베를린 건축과 예술전 2002, 베니스의 아레스날레 특별전시에 초빙되는 등 이탈리아와 유럽에서는 이미 인정받은 조각가가 되었다. 뉴욕, LA, 밀라노, 리스본, 마드리드, 베를린 등 세계 각국의 유명 화랑에서도 앞 다투어 전시하고 있으며 유명 백화점과 미술관에 많은 곳에 그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2003년 귀국 개인전을 통해 국내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그는 한국 조각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 중 하나인 ‘김종영미술관 2005 올해의 작가’로 선정되고 2006년 김종영 미술상을 수상하면서 국내에서의 입지를 다졌다. 그는 “작품이 가지는 우월한 값어치가 있다면 단연 작품에서 우러나오는 깊이감이다”면서 “깊은 통찰력과 끈질긴 집념으로 작업의 성과물이 나오는 것이다. 앞으로도 시각이 가지는 허구성과 계산된 착시가 주는 재미난 흐트러짐을 관객들이 즐겨 주었으면 한다”고 소망을 밝혔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