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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장의 여인'의 가수 권혜경, 그 후 4년간의 이야기
'사랑은 한갓되이 풀잎만으로 맺었지만 삶은 스스로 두 번 엮다'
2012년 06월 04일 (월) 17:13:02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webmaster@newsmaker.or.kr

이름 앞에 늘 '산장의 여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던 가수 권혜경(1931~2008) 여사가 타계한 지 4년. 그가 생의 마지막을 보냈던 충북 청주 일원에서는 현재 추모 열기가 한창이다.
두 차례에 걸친 추모콘서트에 이어 문의관광단지 입구에 세워질 '권혜경 노래비'와 함께 '제2의 권혜경'을 발굴하기 위한 '권혜경가요제' 또한 두 차례 열렸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한 여인의 삶과 운명을 함께 한 이 노래처럼 만년에 삶의 의지를 불태웠던 곳. 그러나 그 '산장'엔 현재 다른 이가 살고 있다. 집이 남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이 '산장'에는 대체 어떤 일이 그동안 있었던 것일까. 내가 만난 권혜경, 그리고 타계 후 4년간의 이야기를 2회에 걸쳐 연재한다.

   글 l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사진 l 최광호, 박성서

   
▲ '산장의 여인' 가수 권혜경
필자가 권혜경 여사를 처음 만난 것은 지난 2004년이다. 원로가수 채록 작업으로 이어진 이 만남의 사진은 최광호가 맡았다.
권혜경 여사는 단숨에 사진작가 최광호를 매료시켰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이토록 당당하게 받아들이며 끔찍하게 껴안고 사는 모습에 전율을 느꼈다고 했다.
이러한 감동을 계기로 최광호는 원로 연예인들의 삶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이후 채록 일정이 잡히면 그가 누구든 간에 만사 제쳐두고 달려 나와 셔터를 눌러댔다.
권혜경의 그 무엇이 우리나라 대표적인 인물사진작가 최광호를 사로잡았을까.
2004년 부산mbc의 '박성서의 음악파일'을 시작으로 그동안 방송과 신문 지상을 통해 밝힌 우리의 첫 만남은 이러했다. 그 일부분인 당시 기사를 먼저 소개한다.

이 사람이 사는 이야기ㅣ'산장의 여인'의 가수, 권혜경의 삶과 사랑
이름 앞에 늘 '산장의 여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가수 권혜경. 그 노랫말대로 운명이 바뀌어 지금껏 살아온, 그러나 대중들 앞에서는 늘 웃는 모습만을 보여주던 가수, 권혜경 여사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몇 년 전, '산장의 여인'의 작사자 반야월 선생과의 술자리에서였다. 술자리에서 '산장의 여인'의 노래비 또한 세워져야 하는 것 아닐까, 주장하다가 화제는 자연스럽게 가수 권혜경씨의 근황으로 옮겨져 갔다. 문득 그녀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수소문 끝에 전화번호를 입수했다. 그로부터의 몇 년 간의 이야기.

1.
   
 
사는 곳은 충북 청원군 남이면이라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사는 곳의 위치를 알기 쉽게 설명하지 못했다. 바깥출입을 거의 안하고 산지 오래이기 때문이라고도 했고 또 기억력이 자꾸 떨어지는 나이 탓이라고도 했다. 마음에 걸렸지만 무작정 주소만 가지고 길을 나섰다.
작업 때문에 몇 날 밤을 샜기 때문에 핸들을 잡을 수 없었던 사진작가 최광호를 대신해 그의 아내 심옥련이 핸들을 잡았다. 서울서 멀지 않은, 그러나 처음 가보는 길을 셋이서 출발했다. 곧 맞닥뜨리게 될 가수, 권혜경 여사의 현재 모습이 쉽게 떠올려지지 않았다. 오래 전 어느 신문에선가 웃고 있는 작은 사진을 본 것도 생각해보니 무려 이십년 전이다. 이따금씩 들어보는 음반 사진들도 사오십 년 전 모습들일 뿐이다. 그 걸 걱정했을까, 권혜경 여사는 우리가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빨간 옷을 입고 집 앞에 서있겠노라 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나 권혜경은 이제 백발 할머니야'.
그렇게 찾아낸 그녀의 집은 산마을의 거의 끝자락에 있었다.
-백발, 빨간 옷, 눈 주위의 짙은 검정 색조 화장, 때문에 더욱 작아 보이던 얼굴. 주름살 가득한 웃음. 헐렁한 추리닝 바지에 맨발에 신겨진 고무신. 이것이 우리가 만난 권혜경 여사의 첫 모습이었다.

2.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예쁜 집'이다. 열 평 남짓한 정원에 꽃나무들이 가득했다.
그 정원 한가운데에 움푹 파여진 구덩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시간 날 때마다 스스로 혼자 팠다고 했다. 나중에 본인이 누울 곳이라고도 했다. 이 정도 크기면 혼자의 몸을 충분히 눕힐 수 있다고 했고 언젠가, 누군가 찾아와줄 사람들과 되도록이면 가깝게 있고 싶어 일부러 지면에서 얕게 팠다고도 했다. 그 속에 풀이 몇 포기 자라고 있어 판 지 얼마간 지났음이 짐작되어졌다. 그녀의 꿈은 이 묘 앞에 '산장의 여인' 노래비(碑)를 세우고 싶은 것이라 했다. (사진-05)그렇다, 우리는 지금 '산장의 여인'의 바로 그 '산장'에 와 있는 셈이다. (사진-06)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단풍잎만 채곡채곡 떨어져 쌓여 있네/세상에 버림 받고 사랑마저 물리친 몸/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나 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반야월 작사 l 이재호 작곡 l 권혜경 노래 l 1957년 발표.
이 노래는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 그녀 나이 스물여섯에 발표한 데뷔곡이자 대표곡이다.
작사가 반야월 선생이 마산결핵요양소를 찾았다가 그 곳에서 보게 된 한 환자복의 여인을 모티브로 해서 즉석에서 노랫말을 지었다.
그리고 이 가사에 '한국의 슈베르트'라 불리던 작곡가 이재호 선생이 곡을 붙였다. 음악생활 내내 지병인 폐결핵이라는 병마에 시달리며 43세라는 짧은 생을 살았던 작곡가 이재호 선생은 이 노래를 만들 즈음엔 폐 한 쪽을 잘라내야 했을 만큼 악화된 상태로 특히 아름다운 이 멜로디는 저간의 사정을 알고 있는 이들의 눈시울을 젖게 만든 노래이기도 하다.
반야월 선생은 당시 의학으로는 쉽게 치료할 수 없었던 불치병, 즉 결핵을 노래로 치유하고 싶었다고 회고했다. 거실은 널찍했고 벽에 걸린 각종 그림과 사진들, 표창장을 비롯해 상패들이 가득 진열되어 있는 거실은 마치 개인 기념관에 들어선 착각마저 불러 일으켰다. 벽면에 커다랗게 걸려 있는 사진들과 현재 그녀의 모습이 묘하게 대비 되었다.앉자마자 그녀가 먼저 여러 가지 얘기를 시작했기 때문에 나는 그저 묵묵히 듣고 있어야만 하는 입장이 되었다.
   
 
최광호는 이곳저곳을 샅샅이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고 그의 아내 심옥련은 주방으로 갔다. 나중에 심옥련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냉장고는 비어있었고 바닥을 보인 커피, 설탕 등도 모두 굳어 있어 아무것도 내올 수 없었다고 했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이 불청객들, 그러나 권혜경 여사는 우리를 향해 '마치 오랜만에 집에 돌아온 자식들 같다', 고 했다.물을 마시기 위해 일어섰다가 냉장고 앞에 붙어있는 글귀에 순간, 시선이 멈췄다.
'(나) 죽은 후 연락처. 손성미 02)907-xxxx, 019-xxx-0xxx.' 자필 메모다. 이 메모 속 '손성미'가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죽은 셋째언니의 서울 사는 딸이라고 했다. 죽음을 거둬달라고 부탁할 이가 '언니의 딸'이라니... 이렇듯 권혜경은 이 집을 지은 이래 줄곧 홀로 이 '산장'에서 살고 있다. 1994년 5월부터다.

3.
가수 권혜경, 본명 권오명(權五明).
1931년 10월 3일, 세무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2남 4녀 중 넷째 딸로 삼척에서 출생했다. 이후 의정부로 이사, 대문을 세 번이나 열어야만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부유하고 엄격한 가정에서 자랐다. 의정부보통학교를 거쳐 서울의 동구여상을 졸업한 후 부모의 뜻을 따라 당시 조흥은행에 입사해 사회에 첫발을 디딘 그녀. 스물여섯이 되던 해인 1956년, 당시 서울중앙방송국(현 KBS) 가수모집에 응시, 전속가수로 발탁된다.
   
 

'사랑이 메아리칠 때', '바닷가에서'의 가수 안다성씨, 그리고 영화배우 박노식씨의 동생인 박노흥씨 등이 그녀의 방송국 입사 동기다. 그러나 부모는 가수활동에 대해 완강히 반대했다. 심지어 '풍각쟁이 광대'는 집 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고 해서 집에서 쫓겨나야 했다. 부모의 뜻을 거역했다는 배신감으로 그녀가 번 돈마저 바닥에 내동댕이쳤던 부모와는 그 후 쉽사리 화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 점차 부친은 어느 정도 이해해주기 시작했지만 정작 어머니는 끝내 용서치 않은 채 갑자기 타계했기 때문에 권혜경 씨 입장에서는 당시 받은 충격을 감당해내기가 쉽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스스로 대견하다 싶은 일이라도 생기면 먼저 어머니 무덤부터 찾곤 했다.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권혜경은 KBS 전속가수가 된지 얼마 후 발표하는 '산장의 여인' 단 한 곡으로 신데렐라로 부상한다. 이어 그는 당대 최고 작곡가들인 손목인, 이재호, 손석우, 박춘석씨 등과 손잡고 노래를 발표했다.
   
 
59년, 신상옥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동심초'의 주제가를, 그리고 라디오 드라마 '호반에서 그들은'의 주제가인 '호반의 벤치'를 강수향씨와 듀엣으로 발표했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사랑의 길', 김화랑 감독의 '그림자 사랑'을 비롯해 송민도의 노래 '나 하나의 사랑'이 모티브가 되어 영화로 제작되었을 때 이 영화 주제가 또한 권혜경씨가 취입한다. 우리나라 드라마 주제가 제1호인 '청실홍실' 역시 음반으로 취입될 때는 현인과 함께 권혜경씨가 컴비를 이뤄 취입했다. 예명 '권혜경'은 본인 스스로 지었다. 특히 '벼슬 경(卿)'자를 이름에 선택했을 만큼 엘리트 의식 또한 강했다. 실제로 그녀는 그 때까지 가요의 주류를 이루던 트로트 창법과는 다른 클래식한 발성으로 우리 가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산장의 여인'을 시작으로 인기 가수 대열에 들어선지 얼마 뒤인 59년, 그녀 나이 스물아홉 살에 심장판막증 판명을 받으면서 기구한 운명이 시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행한 음반 취입과 지방 공연 등으로 당시 그의 허리는 '18인치까지 줄어들었을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이러한 투병 속에 연예 활동을 하던 전성기의 권혜경은 또다시 후두암까지 선고받는 등 무려 네 가지나 되는 불치의 병마에 시달린다.
   
 
그녀의 또 다른 대표곡인 영화 '물새야 울지마라'의 주제가인 '물새 우는 해변'은 작곡가 박춘석씨가 투병 중인 권혜경을 배려해 호흡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원곡의 멜로디 일부를 개작까지 해 건네준 곡이기도 하다. 당시 치료차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지불해야 했던 치료비가 '자그마치 2억5천 만 원 정도였다', 고 술회한다. 이러한 삶에 대한 집착의 대가로, 또 당시 매스컴의 보도대로 기적적으로 소생하는 듯했지만 또다시 병이 재발하는 등 몇 년간의 가수 활동 내내 사투를 반복했다.
그녀의 노래 '산장의 여인'의 끝부분, 한 구절처럼 그녀는 홀로 '재생의 길'을 걷겠다는 의지로 종교에 귀의하기도 했다. 본래 수녀가 되고 싶어 했던 그녀는 절에서 목숨을 건진 후 불자가 된다. 가톨릭에서 불교로 개종하면서 도선사의 청담(淸潭)스님으로부터 하루 5천배씩 절을 하라는 명을 받고 또 다른 힘든 고행을 시작한다. 그리고 비로소 '대명화(大明華)'라는 법명을 받기도 했다. 스스로는 청신녀(淸信女)라 이름 지었다.
한 때 '산장의 여인'을 만들어 부르게 한 작사가 반야월 선생에게. '하필이면 슬픈 노래를 내게 주어 이렇게 힘들고 외로운 인생을 살게 했느냐'며 자신의 심경을 토로한 적도 있다고 전해지지만 그녀는 오히려 그러한 시련을 딛고 일어섰다. 스스로 남은 인생 모두를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 스스로 위로하며 자신보다 못한 이웃들을 위한 봉사활동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왔다.  권혜경 여사는 그때까지 근 50여 년 간 전국 교도소와 소년원을 돌며 사형수, 무기수, 10대 범죄자 등 재소자들을 격려해오고 있어 수인들 사이에서 지금도 '어머니'라는 칭호로 불리고 있다. 교도소 위문공연, 강연만도 4백여 차례. 이러한 공로로 권혜경은 제 34회 세계인권의 날에 인권옹호유공 표창을 비롯해 현재까지 표창만도 5백여 회 수상했다.
한 때 그녀의 빨간 통굽 하이힐은 이제 고무신으로, 그리고 무스와 스프레이로 치장했던 화려한 헤어스타일은 어느덧 백발로 변했지만 아직도 가발을 네 개나 갖고 있는 '멋쟁이'라고 스스로 말한다.

4.
   
 
밤은 깊어갔고 이윽고 그녀의 노래가 '동심초'로부터 시작되었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한 때 고음이 특히 고왔던 그녀의 목소리는 어느새 굵고 거칠게 변해 있었다. 그러나 놀라우리만치 여전히 호흡이 길었다. 어느덧 세월의 한 '켠'을 지나 삼베처럼 거칠어진 권혜경의 목소리가 가슴을 헤집고 들어와 폐부를 훑고 지나갔다. 전율이 느껴졌다. 노래는 그녀를 살아있게 하는 충분한 힘이다, 단박에 느낄 수 있었다. 동심초, 이 노래를 들으며 여전히 혼자인 그녀의 삶과 사랑이 오버랩 되었다. 한 때 분단국가 한국을 뒤흔든, 그녀의 이루지 못한 로맨스. 하필 '동심초', 북쪽에서만 자라는 풀이라 했다.
'무어라 맘과 맘을 맺지 못하고/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설도 시ㅣ김안서 역사ㅣ김성태 곡ㅣ권혜경 노래ㅣ59년 영화 '동심초'의 주제가.
'동심초'의 꽃말, 맺을 수 없는 사랑.
이 생각에 미치자 그녀가 아직 살아있는 동안 본인 입으로는 절대 다 털어놓지 않을 얘기를, 혹은 알아서는 안 될 것들을 여전히 궁금해 하고 있는 내 자신이 한 편 부끄러워졌다. 밤11시 30분, 우리는 서둘러 일어나야 했다. 밤길이 위험하니 배웅 나오지 말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길 어귀, 차를 세워둔 곳까지 따라 나섰다.
'나 권혜경은 뼈대 있는 집안의 양반집 딸이라서...'
그녀가 어둠 속에서 주름살 가득한 웃음으로 잘 가라, 손을 흔들었다. 차창 밖 어둠 속으로 이내 사라지는 그녀의 모습이 점점 작아졌다가  잔상으로 뇌리에 남겨져,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 커져만 갔다. - 이 글은 지난 2006년, 서울신문에 연재했던 '박성서의 7080 가요X파일/권혜경‘의 내용이다.

   
 
이렇게 발표한 당시 이 기사에서는 밝히지 않았지만 권혜경 여사는 이미 '치매'였다. 이후 병원진단까지 받아놓고 있었다. 때문에 보다 정확한 이야기를 듣거나 채록한다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리였다.
그런데 우연히 '아빠의 청춘', '고향무정'의 가수 오기택씨 집을 방문했다가, 뜻밖에도 한 통의 편지를 발견했다. 발신자는 권혜경. 수신자는 오기택. 지난 2000년도 초에 쓴 편지였다.편지 내용에는 권혜경 여사로부터 정확히 듣지 못했던 '집에 대한 자신의 심경'이 비교적 소상하게 담겨 있었다.
편지 중 일부를 소개하자면, '시골에 이사 온 지 9년, 그 많은 병이 다 나았어요. 죽으러 왔는데 '암, 심장판막'. 뽕나무를 차 대신 마시고 살았더니 모든 암이 없어졌어. 모든 신이 날 살려주었어. -중략- 연예인은 죽음의 길에서는 집도 잘 지어야지. 집을 예쁘게 지었어. 내가 죽은 후 어려운 아이들에게 주고 싶고 땅도 많이 있는 것 아이들에게 줄 거야. 남이 하지 못하는 일도 많이 했어. 죽음으로서 나의 모든 것이 공개될 거야. -바보 같은 누나, 혜경이가.' 이다. 권혜경 채록작업을 하고 있었던 내겐 매우 반갑고 소중한 내용이었다. 굳이 외딴 곳에 집을 짓고 살아가는 이유가 그동안 궁금했었기 때문이었다.이미 치매가 그러했듯 어느덧 권혜경 여사는 집에 관해서 조차도 때때로 앞뒤 내용이 바뀌는 등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사진이다. 이 사진을 공개하겠다고 결정할 때까지 적잖이 고심했음을 밝힌다. 이 사진은 권혜경 여사 타계 4개월 전에 권혜경 여사집을 찾았던 오기택씨와 20여년 만에 만나는 첫 장면이다.
처음엔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 날 만남에 대해서는 짧게 정리해 쓰기가 결코 쉽지 않을 정도로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둘 다 독신이다. 평생을 홀로 살았고 또 누구보다 서로를 위하고 걱정했기 때문에 오히려 만나기를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꺼려했다. 마음 아프게 하기 싫어서였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계속)

가수 권혜경(1931~2008)은...
   
 
본명 : 권오명. 1931년 강원 삼척 출생. 1956년 KBS 전속가수로 활동을 시작. 이듬해 '산장의 여인'을 발표하며 데뷔, 이후 '호반의 벤치', '동심초', '물새 우는 해변' 등을 발표. 1960년대 전성기 시절 심장판막증, 결핵 등 병마와 싸우며 활동, 이후 전국 교도소와 소년원을 돌며 재소자를 위한 4백여 차례 봉사활동을 펼쳐 수인들 사이에서 '어머니'라 불리기도 했다. 생의 절반 이상을 봉사활동에 바쳤던 그는 제34회 세계인권의 날에 인권옹호유공표창을 비롯해 5백여 회 표창을 수상했다. 2008년 5월25일 타계. 현재 청주 일원을 중심으로 '권혜경가요제', '노래비 건립' 등 각종 추모사업이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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