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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서 평론] 한명숙의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노래
한때 애국가보다도 많이 불리던 노래, ‘노란 샤쓰의 사나이’ 50주년
2012년 05월 03일 (목) 16:33:25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webmaster@newsmaker.or.kr

한류스타 1호, 한명숙 Story

60년대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흐름을 바꾼 노래 ‘노란 샤쓰의 사나이’로 등장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주인공, 가수 한명숙의 등장은 60년대 시대의 변화를 상징하는 중요한 키워드다.
   
 
이른바 ‘미성(美聲)가수들의 시대’에서 ‘개성시대’로의 전환점이 되었고 미8군 무대가수들이 대거 일반무대로 진입하는 자극제가 된 동시에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이 가요의 주류로 부상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또한 이 노래는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를 강타, 이른바 ‘한류 1호’로 평가받고 있는 동시에 북한을 비롯한 공산권에서도 널리 애창되었던, 말하자면 민간외교에도 한몫했다. 무엇보다 한때 애국가보다 많이 불렀던 노래로 기억되는 이 노래를 시작으로 한명숙은 너나없이 궁핍했던 시절, 아름다운 노래로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다.
그 한명숙 스토리.

1. 가수 한명숙이 지금 살아가는 이야기

많은 국민들이 기억할 것이다. 최근 몇 년 전 원로가수 한명숙씨(75)가 본의 아니게 정치권의 공방에 이름이 오르내렸던 것을.
진원지는 속칭 ‘강-부-자 내각’이란 신조어를 탄생시켰던 청문회장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Y장관 후보자는 자신의 재산에 대해 ‘연기생활 35년이면 그 정도 모을 수 있는 것 아니냐?’며 한류스타 욘사마의 예를 들어 해명한 데 대해 야당 측으로부터 “배용준은 보이고, 사글세도 제대로 못내는 가수 한명숙은 보이지 않느냐”는 공방으로 이어졌다.
청문회 일거수일투족이 연일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던 시점에 돌출된 이 발언은 예상보다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때가 2008년 2월. ‘어느 날 아침 눈을 뜨니 갑자기 불우한 연예인의 대명사가 된 한국의 원로가수들’, 그 당사자인 한명숙씨의 입장은 정작 어떠했을까...
 
“갑자기 찾는 사람이 많아졌어요. 전화벨도 쉴 새 없이 울렸고... 정치권으로 부터도 많은 전화가 걸려오는 등 이러저러한 도움을 주겠다는 분들이 꽤 많았지요. 무엇보다 늘어난 건 공연요청이었죠.”
 
실제로 이 무렵부터 3개월 간, 한명숙은 무려 다섯 차례나 무대에 선다. 그해 4월, 평창동 김준재즈카페에서의 소규모 콘서트 형식의 공연을 비롯해 다음날 이틀 연속 ‘쌍문동 재개발 경로잔치공연 등등. 필자 또한 매 공연 현장에 함께 있었다. 
 
   
 
데뷔곡이자 대표곡 ‘노란 샤쓰의 사나이’가 끝날 때마다 특히 많은 앙코르가 쇄도했다.
한 중년은 큰절과 함께 술잔을 건네며 한때 자신이 입에 달고 다녔던 노래의 실제 주인공을 만났다는 것에 감격해 했다. 이 노래가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주었다고도 했다.
주거니 받거니 많은 일화들이 쏟아졌다. 당시 이 노래가 얼마나 유행을 했던지 한 외국인이 길가다가 ‘노란 샤쓰의 사나이’가 나오자 갑자기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던 일화도 나왔다. 그 외국인은 이 노래가 대한민국의 애국가인 줄 알았다는 것. 한명숙 또한 몇 가지 일화를 털어놓았다.
 
“당시에는 외국 관광객들이 한국관광 기념으로 이 음반을 사가는 경우도 많았지요. 언젠가 대만에 공연 갔을 때인데 대만사람들이 ‘노란 샤쓰의 사나이’와 ‘빨간마후라’가 자기네 나라 노래라고 우기는 거예요. 워낙 대만에서도 널리 불리어졌으니 당연히 그렇게 여겼겠지요. 그 무렵 북한을 비롯해 공산권에서도 널리 애창되었으니 저로써는 민간외교에도 한몫했던, 그야말로 애국자가 된 기분이었죠.”
 
인사 청문회로 불거진 한명숙의 어려운 생활이 화제가 될 무렵 언론에는 한 거물 정치인과 만난다, 는 뉴스도 떴다. 그러나 실제로 정치권에서 직접 찾아왔다거나 도와준 사례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정작 도움을 준 이들은 평소 그를 따르던 후배가수들이었다. 가수 최백호씨가 원로 돕기 자선공연을 펼쳐 수익금 전체를 건넸고 또한 2010년 10월 23일, (사)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회장 백순진)가 마련한 ‘원로가수 돕기 아름다운 콘서트’도 펼쳐졌다.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후배가수 최수진씨가 TV를 본 뒤 연락, 5천 불을 보내오기도 했다.
 
   
 
정치인들이 실제로 찾아온 경우는 없었지요. 아마도 내 생각에는 얼마를 도와야할 지 판단이 어려워 그랬지 않았나 싶기도 해요. 어쨌든 위로전화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지요.” -담담한 어조로, 그리고 남을 헤아리는 평소 마음 씀씀이 그대로 필자에게 털어놓았던 말이다.
 
당시 심경을 묻는 질문에는 한사코 답변하기를 거부했다. 입버릇처럼 무엇이든 숨김없이 털어놓겠다던 평소 말이 미안했던지 어느 날 불쑥 이렇게 말했다.
 
“그때 특별히 해줄 말이 없었어요. 부끄러우니 감추고 싶다, 이런 게 아니라 내 말을 듣고 나면 같이 속 상해할까봐서... 그저 속상한 일은 나 혼자 꾹 참으면 되지...”

2. 소설 ‘방랑의 가인’의 실제 주인공이 되다

   
 
대중들 앞에서는 늘 밝은 모습만을 보여주던 가수 한명숙, 하지만 그가 살아온 시대가 그러했듯 그의 삶 역시 그리 밝지만은 않았다.

일제 강점기 때 태어나 광복, 그리고 한국인들의 삶의 지도를 크게 바꿔놓은 한국전쟁 등을 거치면서 이북 땅, 진남포 출신인 한명숙의 가족사에도 시대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유년시절, 한명숙은 부친에 대한 뚜렷한 기억이 없다. 일제 강점기 때 부친은 중국을 오가며 사업을 하다 광복 후 홀로 월남, 부산에 거주하고 있었고 때문에 어린 명숙은 유치원 보모였던 어머니와 외가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말수도 적었다. 오죽하면 외할아버지가 ‘명숙이가 말을 하면 천지가 개벽할 것’이라고 까지 했을까.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친구들과 어울리며 점차 성격도 밝아지고 무용과 노래로 학예회를 주름잡기도 했다. 총명하고 끼가 많았던 한명숙은 당시 담임선생들과 현재까지도 서로 연락을 하며 지내고 있다.
 
   
 
무남독녀 한명숙이 모친과 단 둘이 부친을 찾아 피난민 대열에 합류한 때가 한국전쟁 당시, 진남포 제2여고에 재학 중이던 16살 때였다. 그러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진 부친과 상봉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다행히도 해군통신부대원과 인연을 맺게 된 모녀는 잔일을 도와주며 해군함정을 타고 인천에 정착한다.
 
“예전에 어머니가 이따금씩 들려준 얘기 중 하나가 제게 젖을 물리면서 읽은 소설 ‘방랑의 가인’에 대한 얘기였어요. 부모와 헤어진 주인공이 부모를 만나기 위해 택한 방법이 유명가수가 되어 자신을 알아보고 찾아올 수 있게 하겠다는 것. 해서 갖은 역경을 이겨낸 뒤 결국 유명가수가 되어 부모와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참 많이 우셨다더군요.”
 
어머니가 이따금씩 들려주던 이러한 말이 알게 모르게 작용했을까. 공교롭게도 16세의 피난소녀 한명숙은 인천에 정착한 뒤 악극단 가수로 활동을 시작한다.
 
전쟁 통에 경제적 어려움이 겹쳐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던 한명숙의 유일한 낙은 이따금씩 주인집에 있는 풍금을 치며 노래를 부르는 일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일본 우에노음악학교(지금의 도쿄예술대학)를 나온 외삼촌 김재섭의 평양음대 제자인 드러머 이원근씨를 만나게 된다. 그의 추천으로 ‘태양악극단’에 들어가면서 연예계에 첫 발을 내딛는다. 아울러 군예대(軍藝隊)에도 참여, ‘군번 없는 용사’로 참전했다.
 
   
 
휴전 이후 실력을 점차 인정받으면서 미8군 쇼 단체인 럭키쇼단에 픽업된 이후 세븐스타쇼, 에이원쇼 등으로 활동을 넓혀 나갔다. 특히 안정된 허스키보이스는 외국 팝을 부르기에 적당한 음색으로 미군들의 반응 역시 좋았다. 이 인기와 유명세를 몰아 패티 페이지가 내한했을 때 함께 무대에 오르는 행운도 차지했다.
 
어려움 또한 많았다. 처음엔 영어를 전혀 쓰거나 읽을 줄 몰라 노래가사에 한글로 소리 나는 대로 토를 달아 무대에서 불러야 했다. 이북에서 중, 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영어를 전혀 접하지 못했고 대신 러시아어를 배웠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영어라고는 기하(幾何)시간에 배운 A, B, C, D 등이 전부였어요. 그것도 문자가 아닌 기호로 접했을 뿐이지요. 더구나 발음도 미국식이 아니라 억센 러시아 스타일이어서 팝을 부르기엔 부적당했죠. 우리말로 토를 달아 열심히 연습했지만 그런 식의 발음은 미군들에게는 물론 한국 사람들에게 까지 매우 어색하고 괴상한 것이었지요.”

   
 
 이 때 외국 노래들을 녹음해주고 일일이 가사를 적어주었던 인물이 후에 음악평론가로 활동했던 이백천씨다. 그는 당시 미8군 무대에서 알토 색소폰 주자로도 활동하며 특히 영어를 잘해 통역을 도와주기도 했다. 또 쟈니카슨쇼로 유명한 사회자 쟈니윤 역시 당시 한명숙씨의 매니저 일을 봐주었다. 다들 어려웠던 때, 서로가 서로를 위해주었던 이러한 인연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지면서 한명숙은 점차 큰 무대로 적응해나갔다.

3. ‘노란 샤쓰의 사나이’ 의 작곡가 손석우, 그리고 뷔너스레코드사

우리나라 대중가요사에 있어 ‘60년대 문열이’로 기록되는 노래 ‘노란 샤쓰의 사나이’는 작곡가 손석우 선생이 자주(自主) 제작으로 만든 음반사 뷔너스레코드사의 첫 번 째 음반, ‘손석우작곡집-노란 샤쓰의 사나이(VL-1)’의 타이틀곡이다.
 
   
 
손석우 선생은 이미 우리나라 드라마주제가 제1호로 자리매김 되는 ‘청실홍실 (송민도 안다성 노래, 1956년)’을 비롯해 '나 하나의 사랑(송민도)' '검은 장갑(손시향)' '꿈은 사라지고(최무룡)' '나는 가야지(문정숙)' '이별의 종착역(손시향)' 등을 작곡했던 실력파.
 
손석우 선생은 당시 KBS 악단 지휘자로 늘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추구했다. 그러나 그가 만들고자 했던 노래들은 당시 상업성의 기준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 대중들의 선호와 음반 판매와의 사이에서 갈등을 겪기 시작했고 때문에 스스로의 음악적 진로 모색에 대해 고민한다. 레코드 상업주의와 추구하는 음악이 점차 간격이 벌어지고 있다고 느낀 그는 고심 끝에 스스로 자신의 뜻을 펼쳐보고자 뷔너스레코드사를 통해 '자주 제작'을 시도한다. 60년대 초의 일이다.
 
이무렵 작곡가 손석우 선생은 무대가수 한명숙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한명숙씨를 처음 본 순간의 회고다.
 
“당시 지인 한 분이 노래를 썩 잘 부르는 가수가 있다고 해서 함께 공연장에 갔지요. 대구의 한 극장에서였어요. 이전까지 가수의 음색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느낌을 주더군요. 순간 이 목소리에 맞는 노래를 만들어야겠다, 하는 욕심이 생기더군요.”
 
정식으로 서로 인사나누기 이전에 이미 한 작곡가가 자신을 눈여겨보고 있었음을 한명숙씨는 현재까지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노란 샤쓰의 사나이’는 탄생했다. 단순하면서도 친근하게 느껴지는 힐빌리(Hillbilly, Country & Western) 리듬의 이 곡은 처음 발표되었을 당시 일부 가요관계자들로부터 '그저 단순히, 동요에 털이 좀 난 것뿐'이라는 악평도 받았지만 바로 그 '파격'으로 말미암아 60년대 이후 우리나라 가요 흐름을 완전히 뒤바꿔놓았을 만큼 큰 반향을 일으켰다.

   
 
 ‘시인의 혼(L'ame Des Poetes)’의 가수로 에디뜨 삐아프, 줄리에뜨 그레꼬와 함께 프랑스를 대표했던 샹송 가수 이베뜨 지로(Yvette Giraud)가 이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처음 부른 것은 1963년, 서울시민회관에서 가졌던 내한공연 무대에서였다. 마치 우리말을 알기라도 하듯 섬세하면서도 역동감이 넘치는 표현력... 그래서 '노래는 표현'이라는 것을 새삼 일깨워준 그녀의 가창력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지로는 무대에서 이 노래를 부른 뒤 자청(自請)해서 뷔너스레코드사를 통해 음반을 취입한다. 특히 이 음반 취입 당시 하이힐을 벗고 맨발로 마이크 앞에 서서 노래에 집중하던 그녀의 모습, 또한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전해진다.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는 이베뜨 지로, 그리고 일본의 하마무라 미치코를 비롯해 자국의 가수들 목소리에 제각각 실려 일본을 비롯한 동남아를 강타한다. 이른바 ‘한류’의 원조인 셈이다.

   
 
 ‘노란 샤쓰의 사나이’ 붐은 영화 제작으로까지 이어졌다. 62년 3월, 엄심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영화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영화 제목은 이렇게 바뀌었다)’는 당시 서울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어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을 만큼 ‘만원사례’를 기록했다.
 
한명숙씨 또한 이 영화에 직접 출연했다. 당시 한 신문에 실린 칼럼에 의하면 ‘한명숙은 연기력 없는 것이 오히려 매력’이라는 평이 실리기도 했을 만큼 세간의 평가는 일단 호의적이었다.
 
“당시에는 TV가 없던 시절이었어요. 때문에 노래는 아는데 가수얼굴을 모르니까 꽤나 궁금했겠지요. 무대인사 차 지방에 내려가면 제 얼굴을 보려고 사람들이 극장으로 몰려들었어요. 심지어 대구에서는 인파가 너무 몰려 영화상영이 중단되는 사태까지 일어났을 정도였으니까요.”
 
에피소드도 많다. ‘뒷골목 전문배우 겸 가수’ 트위스트김은 이무렵 한명숙의 얼굴과 각선미를 보고 연예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일화 또한 유명하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이 영화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후 가수 생활에만 전념한다. 스크린에 나서는 것보다 노래를 수백 곡 이상 힘들게 부르더라도 무대에 서는 게 훨씬 행복하다고 여겼을 만큼 연기는 자신의 길이 아니다, 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소설 ‘방랑의 가인’의 주인공처럼 한명숙씨가 실제로 부친을 만난 것은 ‘노란 샤쓰의 사나이’로 스타덤에 올랐던 62년, 부산 삼일극장 공연 때다. ‘한명숙 무대인사 차 내부(來釜)’라는 포스터 문구를 보고 놀랍게도 부친이 직접 찾아온 것.
 
그러나 오랜 숙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명숙의 반응은 냉담했다. 가족을 남겨두고 혼자 떠난 부친에 대한 앙금이 풀리지 않은 탓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부친은 새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하기엔 그는 아직 너무 어린 나이였다.

4. 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 ‘한명숙 헌정음악회’ 무대에 올리다

   
 
60년대는 한명숙의 전성기다. 영화로 제작되어 직접 출연까지 했던 ‘노란 샤쓰의 사나이’의 작곡가 손석우씨와 손잡고 계속해서 ‘우리 마을’ ‘눈이 내리는데’ ‘검은 스타킹’ ‘시름의 꼬리별이’ ‘센티멘탈 기타‘ ‘선유가’ ‘상한 갈대를 꺾지 마라’  등 히트곡을 잇달아 발표했다.

이 노래들은 모두 뷔너스레코드사를 통해 발표되었다. 당시 뷔너스는 한명숙을 비롯해 60년대 가요계의 주축을 이뤘던 많은 가수들이 활동을 시작했던 곳이기도 하다.
 
최희준 블루벨즈 김성옥 이춘희 현미 박형준 김계자 김상희 최양숙 차도균 최동길 등 유능하고 개성적인 신인을 발탁, 음반 데뷔를 도왔다. 그 밖에도 곽순옥 김치켓 김동일 김선풍 오사라 이재성 등이 이 무렵 '뷔너스가(家)'의 '일가(一家)'를 이루고 있었다.
 
이어 작곡가 김인배 선생의 작곡 데뷔곡인 ‘삼별초’ ‘너는 말했다’를 비롯해 ‘그리운 얼굴’ ‘울고 웃는 인생’ ‘강가에 피는 꽃’ ‘딸이 더 좋아’ 등도 잇달아 발표하는 한명숙은 손목인 작곡의 ‘내 별은 어느 하늘에’, 이봉조 작곡의 ‘비련십년’ ‘세월’ 그리고 이희목 작곡의 ‘으스름 달밤’ 그리고 64년 전오승 작곡의 ‘사랑의 송가’에 이어 당시 동아방송 캠페인 송이었던 ‘걸어서 가자(듀엣 강수향)’ 등등, 라디오를 켜면 하루에도 몇 번씩 한명숙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해외공연 또한 많았다. 일본을 비롯해 홍콩, 싱가폴, 필리핀, 태국, 말레이시아 등... 특히 ‘노란 샤쓰의 사나이’가 빅히트한 나라들마다 공연 요청이 쇄도했다. 음반 사인회에도 많은 인파가 몰렸다.
 
해외공연에서 돌아오면 각 방송국 PD들이 무대에 세우기 위해 직접 공연장에서 기다렸다가 데려가는, 이른바 ‘모시기 경쟁’의 주인공이었던 한명숙.

 
최전방 위문공연은 물론 파월장병을 위한 위문공연에도 누구보다 앞장서온 전성기 시절, 그에게 붙여진 별명은 두 개다. 하나는 ‘왕대포’, 그리고 또 하나는 ‘감초’. 항상 구수하고 걸쭉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동료 블루벨즈가 지어준 별명이 ‘왕대포’, 그리고 어느 곳에서든 늘 해결사 역할을 도맡아 한다고 해서 ‘감초’라는 별명을 얻었을 만큼 동료들과의 유대관계 또한 돈독하다. 오히려 너무 흠이 없어 매력이 없다고 치부될 정도로 연예계에서 드물게 ‘갖춘 사람’으로 통한다.
 
현모양처형인 한명숙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스캔들이 없었던 가수이기도 하다. 시련도 많았다.
한국전쟁 중 군예대 시절에 만난 군악대 소속 트럼펫 연주인 이인성씨와 56년 1월에 결혼했지만 41세의 일기로 타계하자 2남1녀의 자녀를 혼자 키워야 했고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를 동시에 모시고 살아야 했다. 거듭된 시련으로 성대가 손상되어 언어장애와 함께 목소리를 3년간 잃어버렸기 때문에 노래를 접어야했던 아픔도 있었다. 가수로써 치명적인 성대수술을 두 차례나 감당해야 했다.
 
   
 
슬하의 2남1녀 중 큰딸 은경씨는 미국에, 그리고 장남 이일권씨는 이명훈이 부른 ‘내 사랑 영아’ ‘엄마의 소망’ 등의 작곡자로 언더그라운드 그룹 ‘화랑’을 이끌기도 했다. 막내아들 일준은 일본 유학을 마친 뒤 현재 미국 샌디에고에서 일식집을 운영하고 있다.
 
이렇듯 가족에 대한 헌신적인 뒷바라지로 78년 '장한 어머니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2000년 10월, 국민문화훈장을 받았다.

힘들게 견뎌온 가족사(史)가 그렇듯 가족들에게 미안함도 많다.
“무대와 가정, 둘 중 하나만 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때때로 시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상에 앉아야했어요. 그러다보니 지금도 음식을 잘 못해요. 며느리에게 요리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걸리죠. 심지어 김치를 처음 담글 때 소금을 잘못 넣어서인지 배추에 싹이 돋아났더라고요.”
현재 수원에서 장남 가족과 살고 있는 한명숙씨는 손자들에 대해 물어보자 ‘이젠 자랑 좀 해야지’하며 갑자기 밝은 목소리로 이것저것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순간만큼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할머니였다.

아직도 노란 샤쓰를 입은 사나이를 보면 여전히 마음이 설렌다는 그.
우리 가요의 큰 획을 그은 노래 ‘노란 샤쓰의 사나이’ 발표 50주년을 맞아 2010년 10월 20일, KBS홀에서 매우 의미 있는 행사가 열렸다. 바로 ‘한명숙 헌정음악회’다.

(사)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회장 백순진) 주최로 후배가수들인 송창식 임희숙 최백호 인순이 박상민 포커스(박학기 강인봉 이동은 박승화) 그리고 신세대 아이돌스타 포미닛이 출연, 함께 하는 이 공연은 매우 뜻 있고 감동적인 무대였다.
 
이 훈훈하고 감동적인 무대를 계기로 우리의 60년대, 그동안 묻혀있던 소중한 음악에의 가치와 의미가 되찾아지고 재평가되기를 한편 기대해본다.


가수 한명숙은...
   
 
1935년 12월 1일 평남 진남포에서 출생해 진남포 가덕초등학교, 진남포 제2여중을 거쳐 제2여고에 재학 중 한국전쟁으로 인해 월남 이후 태양악극단 입단. 군예대 활동을 거쳐 이후 미8군쇼 단체에서 활동. 1961년 ‘노란 샤쓰의 사나이’로 음반 첫 취입, 데뷔. 이후 ‘우리 마을’, ‘눈이 내리는데’, ‘사랑의 송가’, ‘그리운 얼굴’, ‘센티멘탈 기타’, ‘비련십년’ 등 300여 곡 발표.
2000년 국민문화훈장, 2003년 KBS 가요대상 공로상 등 수상.
2010년 (사)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 주최 ‘한명숙 헌정음악회’ 공연.
현 원로가수회 거목회, 종군참전연예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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