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회화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바로 소재에 대한 관념성이다. 이는 사물의 생태적 특징이나 형상을 빌어 특정한 의미를 전달하고 표출하는 비덕(比德), 혹은 비의(比擬)의 조형체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 작가 유미란이 대나무를 소재로 선택한 것은 대나무에 대한 과도한 해석과 의미부여를 통해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현실에 대한 조용한 항거다

동양회화의 조형체계는 표현의 대상이 되는 사물의 객관적 상태의 재현이나 묘사를 전제로 하는 서구적 구상회화의 시각과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 즉 형태를 빌어 의미를 전달하기에 구상의 형식미를 지니고 있으나 그 궁극적인 목적은 형태 이면에 내재되어 있는 함의의 표출이기에 비구상적인 성격을 동시에 지니게 되는 것이다.

상반된 가치와 조형체계가 충돌, 대립 그리고 조화를 이루다
“늘 푸르고 꼿꼿이 자라는 대는 절개와 지조로 대변되는 우리 민족의 기상을 표상한다. 아울러 시간별로 바뀌는 오묘한 대나무의 빛과 바람에 응답하는 댓잎의 소리는 풍부한 감성과 소박하였던 민족을 표현한다. (중략)대나무를 소재로 삼는 이유는 나무가 가진 조형적 의미도 크지만 대나무의 민속학적 의미는 지조와 절개를 의미하고 곧음, 타협하지 않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기본 정서가 대나무가 가진 의미를 동경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일상에서 만나는 평범한 것을 통해 더욱 크고 더욱 의미 있는 것을 추구하고 싶다.” 주목받는 작가 유미란의 작업은 대나무를 소재로 삼고 있다. 그 형상성과 표현방식으로 미루어 보아 작가의 작업은 동양회화의 소재주의적 경향과 일정한 연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대나무는 강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어 사군자의 하나로 즐겨 다루어졌다. 사실 대나무는 일상생활에서 다양하게 이용되는 활용성 외에도, 수천 년 동안 철학, 문학, 음악, 그리고 예술과 같은 정신적인 분야에 영감을 주는 원천으로 인식되어 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대나무는 자연스레 동양의 문화와 동일어로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동양을 상징하는 대나무는 세속적인 면이 침투되면서 이제 대나무의 신화는 과열된 소비문화에 밀려 결국 세속적인 장식물로 전락한 인상을 지울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작가 유미란이 대나무를 소재로 선택한 것은 대나무에 대한 과도한 해석과 의미부여를 통해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현실에 대한 조용한 항거다.

작가 유미란의 작품은 화면에 대나무의 생태적 특징을 개괄하는 표현으로 점철되고 있다. 반복과 집적을 통해 이루어지는 채색화 특유의 조형방식을 원칙적으로 적용한 치밀한 작업방식이 인상적인 화면은 극히 정적이다. 더불어 푸른빛으로 주조 색을 삼은 화면들은 그 자체가 대나무가 지닌 생태적 특징이나 식생의 묘사가 관심이 아님을 여실히 드러낸다. 결국 작가는 대나무의 관념성을 차용하지만 이를 주관적인 조형의 수단으로 수용함으로써 그 질곡을 극복해내고 있다. 결국 작가에게 있어 대나무는 작업의 정체성을 담보하는 상징물인 동시에 자신이 속한 현대라는 시공을 반영하는 매개인 셈이다. 곧 작가 유미란의 작업에는 객관과 주관, 조형과 사의(寫意)라는 서로 다른 가치와 조형체계가 충돌하고 대립하며 독특한 조화를 이루어낸다. 이는 곧 전통의 재해석에 의한 현대성의 모색이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다.

‘정지와 움직임의 사이’를 결정화하다
작가 유미란은 대나무의 부러지지 않는 강직함을 경외로 갖고 접근하여, 대나무의 진정한 특성이 올바르게 표출될 수 있는 예술적인 시각을 마련했다. 작가는 주의 깊게 자신의 오브제인 대나무를 인식하며 일반적인 존재로부터 표출되는 특정성에 집중하고 있다. 작품을 통해 그는 관객에게 ‘정지와 움직임의 사이’라는 인식하기 쉽지 않은 순간을 결정화하여 보여 주고 있으며, 이를 통해 재현불가능하고 애상적인 순간의 현상을 관객으로 하여금 인식하도록 하는 작품으로 완성시켰다. 순간을 포착한 사진, 또는 순간에 굳어버린 화석과도 닮은 작품을 우리에게 선보이고 있는 작가 유미란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지금까지 총 10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신춘 청년작가 20인전, 한국의 현대미술 서울에서 마드리드까지, 한국화 21인 초대전, 현대 한국화 정립전, 아시아 여성 미술 초대전, 한국-방글라데시 수교 30주년 기념 오늘의 한국미술전, 아시아 비엔날레 초대전, 한국-케냐 수교 40주년 기념 오늘의 한국미술전 등 국내외 유수의 기획전, 단체전에 참가하며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그는 국립강릉대학교 강사, 여주대학 강사를 역임하고 한국미협, 춘추회, 여백회, 홍익여류한국화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