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져 가는 역>

지난 3월호에는 경상지역의 폐역 두 곳을 찾아 안타까운 현장을 보도한 바 있다. 적자 경영으로 인해 여객 점유율이 현저히 떨어지는 간이역들을 속속 폐역 처리하고 있는 코레일이 앞으로 이 폐역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해 고심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당장은 손을 놓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상황일 것이다. 국민가수 나훈아의 노래 '고향역'의 주인공인 호남선의 황등역과 전라선의 율촌역을 찾아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향수를 느껴보기로 한다.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역

입뿐이 곱뿐이 모두 나와 반겨 주겠지

달려라 고향 열차 설레는 가슴 안고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

전 국민이 고향을 찾아 떠나는 구정, 추석 명절. 이맘때쯤 TV나 라디오를 틀면 귀에 박히도록 흘러나오던 가수 나훈아의 ‘고향역’이다. 너무나도 정겨운 이 가사에 누구나 한번쯤 공감하고 따라 불렀음직한 노래 ‘고향역’. 나훈아씨의 고향에 있는 간이역을 무대삼아 작곡했을 것이라 생각이 들지만, 실제로는 호남선 황등역이 바로 이 노래의 무대이다. 특히 이 노래는 나훈아씨가 작곡한 것이 아닌 임종수씨가 작곡을 했기에 이 분의 고향역이 과연 어떤 모습일지 궁금케 한다. 황등역에 가면 노래 ‘고향역’이 절로 생각날 만큼 정겨운 풍경을 만날 수 있을까? 하지만 어렵사리 찾은 황등역은 우리가 예상했던 정겨운 풍경은 보여주지 않았다. 역무원도, 경보장치도 없는 이 역은 지난 2008년 12월 1일부터 모든 여객열차가 중지된 채 어느 누구도 반겨주고 있지 않았다.

전라북도 익산시 황등면은 예로부터 국내 최대 양질의 화강암 산지로 알려져 있었다. 일제가 세운 ‘조선총독부’를 황등 지역에서 나온 돌로 만들었을 정도였으니, 이 지역 화강암의 우수성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화강암을 부지런히 실어 나르기 위해 세워진 이곳 황등역은 불과 7km 떨어진 호남 제일의 철도역 익산역이 있기에 차츰 역으로서의 모습을 사라져갔다. 노래 ‘고향역’에서 느끼던 향수를 이제는 느낄 수 없기에 매우 안타깝다.

“익산군 삼기면 형님 집에서 산길을 넘어 황등역으로 가서 통학 열차를 타곤 했습니다. 아침밥을 해먹고 이십 리 산길을 넘어 열차 시간에 맞춰 가는 것은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뛰다시피 해서 겨우 열차에 타고, 열차 발판에 걸터앉아 이리역에 도착할 때까지 숨을 몰아쉬곤 했습니다. 그때 기차길 옆에 핀 코스모스를 보면서 고향의 어머니가 생각나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일단 주제를 ‘고향역’으로 하자 가사는 술술 풀려나갔죠.” 작곡가 임종수씨의 말이다. 속도를 무기로 탄생한 KTX 로 인해 이제 황등역은 정든 고향역이 아닌 그저 옛 기억 속에서나 더듬을 수 있는 추억의 풍경으로 사라져가고 있다.

전라남도 여수시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전라선 율촌역은 다른 간이역들과는 달리 건물 모양이나 양식이 독특하다. 이러한 점을 인정한 문화재청에서는 지난 2005년 12월 율촌역을 등록문화재로 확정해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이렇게 문화재로 지정돼 일반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지만 율촌역에 정차하는 열차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2005년 11월 경전선 통근열차 폐지 정책에 따라 유일하게 정차하던 여수와 목포 간 통근열차 운행이 중지됐기 때문이다. 역으로서의 기능이 사실상 끝나버린 역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어쨌든 율촌역은 아직까지도 역무원이 근무하고 있고, 철도승차권 단말기도 운영하고 있다.

역내 맞이방은 각종 조각품과 도서들이 구비돼 있어 나름 아기자기한 맛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승강장에 나가보면 이 역은 여느 폐역과 마찬가지로 썰렁한 바람만이 승강장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승강장에 남은 플라스틱 의자에서도 더 이상 사람의 온기를 느낄 수 없다.

역목이 나한이 놓여 있는 율촌역 내부역사 전경은 시골 간이역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곧 열차가 도착한다는 방송과 함께 할머니, 할아버지 승객들이 나올 것만 같고, 나이 지긋한 역장이 나와 승객들을 맞이하고 열차에 이들이 안전하게 승차할 때까지 이들을 배웅해 줄 것만 같다. 율촌역 앞은 생각 외로 번화가가 있어 율촌역의 썰렁함은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다.

율촌역의 고요함을 깨고 용산행 무궁화호 열차가 지나가고 있다. 지난 세월의 흔적만이 통과하는 무궁화호를 반겨주고 있는 율촌역. 역무원이 아직까지는 근무하고 있지만 곧 무인화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고 안타까운 마음을 뒤로한 채 율촌역을 떠났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