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눈물로 손자 ‘육아일기’ 쓰다

조선시대, 선비가 손자를 키웠다? 남녀의 역할이 엄격히 구분됐던 조선시대 자기 손으로 손자를 길러낸 한 남자가 있었다. 바로 명문가의 사대부 이문건(1494-1567). 그는 손자가 태어나 성장할 때까지 16년간 직접 기르며 쓴 일기, ‘양아록(養兒錄)’을 남겼다. 양아록은 조선시대 사대부가 쓴 유일무이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육아일기다. 그는 왜 손자의 양육 일기를 쓴 것일까?

▲ 이문건 양아록 원본

양아록은 조광조의 문하생으로 사화에 휘말려 귀양지로 떠난 이문건이 병을 앓던 아들도 잃고, 직접 손자 수봉의 탄생순간부터 6세까지의 성장과정 등을 시와 산문으로 기록한 일종의 조선판 육아일기다. 유배지에서 그는 손자를 직접 기르고 무려 17년간 육아의 과정에서 일어난 소소한 일들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그의 기록으로 선비가 아이를 직접 키웠다는 다소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졌고, 조선시대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고 병치레하고 교육받고 부모와 갈등을 겪었는지에 대해서도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게 되었다.

조선시대, 남자아이 육아는 남자의 몫?
조선시대에는 남자가 아이를 돌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까? 이문건이 손자를 키운 기록 외에도 아이를 업은 남자가 환영잔치를 구경하는 모습, 아이에게 밥을 먹여주는 남자의 모습 등 조선시대의 풍속화에서는 남자가 아이를 돌보고 있는 모습들이 확인된다. 예컨대, 김홍도가 그린 <평양감사 뱃놀이> 그림을 보면 매우 이채로운 광경이 나온다. 평양감사의 뱃놀이답게 강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감사의 뱃놀이를 구경하고 있는데, 강변에 서 있는 구경꾼들이 눈길을 끈다. 구경꾼들 중에는 유난히 남자아이들이 많이 보이며, 큰 남자아이는 머리를 땋아 내렸고, 그보다 어린 아이는 더벅머리를 하고 있다. 전형적인 조선시대 소년들의 모습이다. 특히, 아이를 데리고 있는 보호자들 모두가 남자, 즉 아버지이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할아버지가 남자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며 돌보고 있는 장면도 보인다. 이처럼 아버지나 할아버지들이 아이를 데리고 나와 있는 모습, 그냥 같이 서 있는 것이 아니고 손을 잡고 있거나 아이를 업고 있는 모습. 이것은 아버지들도 아이들의 양육을 맡았다는 뜻이 아닐까? 전통사회의 양육은 어머니의 몫이긴 하나 아버지들이 전혀 참여 않거나 묵인했던 것이 아니라는 뜻인 것이다. 또한, 조선시대 전통가옥은 남녀의 생활공간이 구분되어 있었다. 당시 남자 아이는 일곱 살이 되면 어머니 품을 떠나 남자들의 공간인 사랑채로 옮겨 생활하게 했다. 그때부터 남자아이의 육아는 남자들이 담당했던 것이다. 사랑채에서 할아버지 슬하에 글을 배우고 예의범절을 익혔으며, 손님이 찾아오면 인사를 올리는 곳도 바로 사랑채였다. 따라서 남자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집안의 남자 어른들과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이문건은 누구인가

▲ 경북 고령군 운수면 대평리에 자리한 이문건 묘소

이문건은 16세기 중종, 명종 시대를 살아간 관료, 학자로 본관은 성주, 호는 묵재이다. 그의 집안은 고려말부터 재상을 여러 명 배출할 정도로 이름 높은 명문가였으며, 정승 판서 반열에 오른 인물이 16명, 조선시대 문과에 급제자가 75명이나 될 정도로 학식 높은 가문이었다. 8대조는 고려말 명재상인 이조년이었고, 5대조는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이직이었다. 이문건은 형 이충건과 함께 조광조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관료의 꿈을 키워 나갔으나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스승인 조광조가 사약을 받으면서 그의 인생도 큰 위기를 겪게 된다. 이문건은 조광조를 축출하는 데 앞장섰던 실권자 남곤과 심정의 미움을 받아 형과 함께 옥사에 연루되었다. 형 이충건은 1521년 유배되어 가는 도중에 사망했으며, 이문건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는 형벌을 받았다. 이후 1527년 사면이 된 이문건은 이듬해 과거에 합격했고, 인종이 즉위하면서 그의 인생은 순탄한 길을 가는 듯했다. 하지만 인종이 빨리 죽고 명종 즉위 후 문정왕후와 윤원형이 주도하는 외척정치가 시작되었고, 인종의 편에 섰던 이문건 역시 정치적 탄압을 피할 수가 없었다. 더욱이 큰 형 이홍건의 아들 이휘가 명종의 즉위를 반대하는 말을 퍼뜨렸다 하여 시신이 팔도에 효시되는 참형에 처해졌고, 이문건은 성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23세가 되던 해에는 안동 김씨 김언묵의 딸과 혼인했으나 당시 아이들은 대부분 천연두(마마) 등의 병으로 불구가 되거나 일찍 사망했다. 유일하게 장성한 아들이 둘째 아들 온이었고, 그의 나이 58세인 1551년 1월 5일 아들 온이 손자를 낳았다.

▲ 경북 성주 선석산 태실(왼쪽), 태항아리(오른쪽)

왜 양아록을 썼을까?
이문건은 손자의 이름을 ‘길하라’는 뜻으로 숙길(淑吉)이라 했고, 후에 숙길은 수봉(守封)으로 이름을 고쳤다. 이제 이문건의 모든 관심은 손자에게 쏠렸고, 손자에 대한 모든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이렇게 시작된 손자의 양육일기가 바로 ‘양아록’이었다. 이문건은 일기를 쓴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아이를 기르는 일을 꼭 기록할 것은 없지만 기록하는 것은 할 일이 없어서이다. 노년에 귀양살이를 하니 벗할 동료가 적고 생계를 꾀하려고 해도 졸렬해서 생업을 경영할 수 없으며 아내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고독하게 거처하는데 오직 손자 아이 노는 것을 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 습좌(習坐), 생치(生齒), 포복(匍匐) 등의 짧은 글을 뒤에 기록하여 애지중지 귀여워하는 마음을 담았다. 아이가 장성하여 이것을 보게 되면 아마 글로나마 할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문건은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두 형과 조카들이 당화(을사사화)를 당하고, 자신은 귀양을 가는 처지에 이른다. 설상가상으로 아이를 여럿 잃고, 하나 밖에 없던 아들 온마저 병으로 잃었다. 손자 수봉은 가문을 이어나갈 유일한 핏줄이었다. 이문건의 손자에 대한 기대와 관심은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양아록은 쇠퇴해가는 일으키려던 한 할아버지의 절절하고 애잔한 사랑의 기록이다. 손자의 출생과 그에 대한 기록은 연이은 가족사의 불운에 처한 이문건의 탈출구였으며, 그 탈출구는 손자에 대한 한없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눈물겨운 할아버지의 진한 사랑

▲ 김홍도의 ‘서당’. 이문건은 9세 손자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직접 뒤통수와 엉덩이를 때렸다고 양아록에 기록하고 있다

이문건은 귀한 손자가 태어났을 때, 그 탯줄을 잘라 경북 성주 선석산 서쪽 마을 태봉 아래에 몰래 묻었다. 태봉은 조선 왕조 왕자들의 태를 묻은 태실이 있는 곳으로 풍수지리적인 명당이다. 만일 왕실의 태봉에 자신의 후손의 태를 묻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형에 처해질 정도로 아주 엄격한 처벌을 받게 된다. 이문건은 손자의 앞날과 자신의 가문의 번창을 위해 위험한 도박을 감행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양아록 전체 39편의 일기 중 손자의 질병에 관한 기록이 반 정도를 차지한다. 손자 수봉은 이질, 학질, 귓병, 홍역 등 많은 질병에 시달렸다. 그래서 거의 매일의 일기에서 손자의 건강에 대한 걱정이 끊임없던 와중에 손자 수봉이 여섯 살이 되던 해 천연두를 심하게 앓는다. 당시 천연두는 걸리고 나면 달리 손쓸 치료법이 없어 열 명 중 네다섯 밖에 살지 못할 정도로 사망률이 높은 병이었다. 아들과 딸을 천연두로 잃은 경험은 이문건을 특히나 긴장시켰다. 이문건은 손자를 살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열이 불덩이 같고 종기는 잔뜩 곪았는데, 몸 전체가 모두 그러하였다. 눕혀 놓아도 고통스러워하고 안아도 역시 아파했다. 아프다고 호소를 해도 구할 방법이 없다. (…) 이틀 밤낮을 틈틈이 미음을 먹이고 어루만져 주며 답답함을 위로해 주었다”는 기록에는 이문건의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 또한, 이문건과 손자 둘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손자 숙길의 나이 여섯 살 때의 기록이다. “6월에 이르러 전염병에 걸려 아파할 때 손자는 죽 먹이고 똥 누이는 일을 일일이 할아버지가 해달라고 졸라댔다. 기쁜 마음에 꺼리지 않고 돌보아주니 즐거워하고 좋아했다. 할아버지가 밖에 나갔을 때 날이 저물면 곧 슬퍼하고 밤에 잠자리에 들어 졸려도 자지 않고 안타까워하며 늦게 돌아온다고 원망한다. 집에 들어오면 문 앞에서 기쁘게 맞이하고 펄쩍펄쩍 뛰면서 마음에 있는 말을 한다. 이것이 진정 더불어 사는 것, 한 뿌리 한 가지에서 나온 까닭이다.” 이렇게 할아버지와 손자의 관계는 돈독했다.

생생한 조선시대 생활사를 엿보다

▲ 양아록

“술취하고 구토하여 밥을 못 먹은 적이 매우 잦다. 응당 풀이 시들고 꽃이 마르는 것과 같은 처참한 일이 있기에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써서 후에 참고 하도록 한다.” 양아록에서 11살 이후 과음이 잦아지는 수봉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당시 11살 이 후 남자 아이들은 이미 성인으로 취급받았고, 음주도 비교적 자유로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시대에는 낯선 모습이 아니었다. 손자가 14세 되던 새해 첫날 이문건은 “늙은이가 아들 없이 손자를 의지하는데 손자 아이 지나치게 술을 탐하여 번번이 심하게 토하면서 뉘우칠 줄을 모른다. 운수가 사납고 운명이 박하니 그 한을 어떻게 감당할까”라며 손자의 음주벽에 대해 매우 마음 아파했다. “극도로 화가 나는 것을 이기지 못해 대살가지로 등과 궁둥이를 때렸더니 숨을 잘 쉬지 못하기에 그만 두었다.” 양아록에는 위와 같은 강한 체벌의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조선시대에는 체벌의 관행이 아이를 잘 양육하기 위한 교육 방법의 하나라는 당대 사람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아이의 교육, 질병을 무당의 주술적 힘으로 치료하고자 했던 당시의 민간습속 등 조선 중기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증언해주고 있다. 이문건의 ‘양아록’의 마지막 ‘노옹조노탄(老翁躁怒嘆)’에서 손자에게 자주 매를 대는 자신에 대해 “늙은이의 포악함은 진실로 경계해야 할 듯하다”며 반성을 하면서도 “할아버지와 손자 모두 실망하여 남은 것이 없으니 이 늙은이가 죽은 후에나 그칠 것이다. 아, 눈물이 흐른다”면서 손자에 대한 야속함과 자신의 슬픔을 표현했다. ‘노옹조노탄’을 끝으로 이문건은 더 이상 ‘양아록’을 쓰지 않았다. 손자가 이제 다 자라 자신의 품을 떠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양아록, 그 역사적 의미는

▲ 조선 전기 학자였던 묵재 이문건은 문집 ‘묵재일기’와 더불어 손자가 태어나 성장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기록한 ‘양아록’을 남겼다. 사진은 ‘양아록’의 일부

조선의 선비 이문건이 쓴 ‘양아록’은 500여 년의 전의 매우 독특한 기록이다. 조선의 근엄한 선비가 손자의 성장 과정을 가감 없이 솔직하게 적은 것으로 유일한 양육일기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리고 책 속에는 조선의 생활상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으며, 손자에 대한 할아버지의 끝없는 사랑, 자라는 손자를 바라보는 경이로움, 질병의 위협과 당시의 놀이문화와 음주문화까지 조상들의 숨결이 그대로 담겨 있어 조선시대 역사 자료로서의 가치까지 지니고 있다. 1567년 이문건은 일흔 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이때 숙길의 나이는 스물여섯 남짓, 할아버지가 죽고 난 뒤 이름을 수봉으로 고친 숙길은 외가가 있는 괴산으로 옮겨와 살았다. 수봉은 할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인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조정에서 상을 주려고 했지만 당연히 할 일이라며 사양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문건은 한 남자로서, 한 할애비로서 핏줄과 손자에 대한 지극한 애정의 기록을 남겼다. 남자가 아이를 기르고 가르치는 것, 조선시대에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자신의 가족을 잘 돌보는 것, 사랑하기에 엄격할 수 있었던 것, 그것은 조선 선비가 갖춰야 할 또 하나의 덕목이었다. 끝없는 경쟁으로 내모는 것이 교육이라고 여기는 오늘날, 그래서 이문건의 ‘양아록’은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참고. ‘한국사를 바꿀 14가지 거짓과 진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