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텍사스 유전 발견과 중동 석유 개발     1901년
1901년 1월 10일, 미국 텍사스주 버몬트 남쪽 스핀들탑 유전 땅속 깊숙이 박혀있던 굴착 파이프가 폭발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땅 위로 튕겨나더니 갑자기 시커먼 액체가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다. ‘검은 황금’ 석유의 분출이었다. 이후 ‘걸프’와 ‘텍사코’라는 석유업계 절대강자가 등장하고 미 북부의 석유 독점시대는 종지부를 찍었다.
석유의 상업적 이용 가능성이 처음 확인된 곳은 1859년 8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의 소도시 타이터스빌이었다. 사람들은 땅으로 흘러나오는 정도의 분량으로는 채산성을 맞출 수 없어 지하의 석유를 지상으로 퍼올리는 방법을 구상했다. 당시에는 석탄을 증류하여 등유를 뽑아내고 있어 이 석탄등유와 가격경쟁을 벌이려면 땅속 석유는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퍼올려져야 했다. 전직 철도원 에드윈 드레이크는 파이프를 연결시키는 방법으로 굴착기를 만들었고, 이 굴착기는 23m 땅속 석유지층에서 석유를 땅 위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당시의 기술로는 땅속 깊숙이까지 파들어가는 데 한계가 있었다. 하루 동안 1m 밖에 파들어가지 못했고 배출량도 30배럴에 불과했다.
석유가 석탄보다 훨씬 유용하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이에 따라 석유 소비량이 급증하면서 새로운 채굴방식이 필요했다. 발상의 전환은 텍사스주 스핀들탑 유전에서 시작되었다. 많은 돈을 들여 시추공을 뚫었으나 굴착 파이프가 지하 100m 지점에서 암반에 막혀 더 이상 땅속을 뚫지 못하게 되자 땅주인은 새로운 굴착법을 찾는다는 신문광고를 냈다. 그때 광산 전문가 앤터니 루카스가 찾아와 로터리 굴착법으로 땅주인의 고민을 해결해주었다.
종래의 굴착기와 달리 파이프 끝에 분쇄기를 달아 이것을 회전시키면서 지하에 박아 넣는 식의 이 로타리 굴착법은 석유개발 사상 최대 발명으로 꼽힐 만큼 획기적인 방식이었다. 굴착 파이프 끝에 달린 회전 비트 덕에 현장의 암반층은 돌파되고 파이프는 길이 130m에서 검은 황금을 담아 올렸다. 매일 쏟아져 나온 10만 배럴은 처음 석유의 상업화를 성공시켜 석유개발의 붐을 이룬 펜실베이니아주 전체 산유량에 맞먹는 양이었다.
1901년 성공한 텍사스주 스핀들탑 유전은 스스로 용솟음치는 자연분출로만 610만 배럴(1901년), 1700만 배럴(1902년)을 생산하다가 이듬해부터 생산량이 감소하긴 했으나 이후 30년간 미국 땅에 부를 쌓아주었다.
오늘날 세계 석유 생산량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중동 지역에서 유전이 발견된 것도 1901년이었다. 19세기 말 호주의 ‘골드 러시’에서 부를 축적한 영국 광산기술자 윌리엄 녹스 다시(D'arcy)는 1901년 프랑스 지질학자 콕토와 고고학자 잭 드 모르강이 페르시아(이란)에서 유전을 발견했다는 소문을 듣고 밀사를 테헤란에 급파했다.
협상결과 다시는 1901년 5월 8일 페르시아 국왕에게 4만8000파운드의 현금과 주식 그리고 개발이익의 16%를 돌려준다는 조건으로 텍사스주의 2배나 되는 넓은 땅의 석유 및 천연가스 개발에 관한 60년 독점 개발권을 얻어냈다. 그러나 그가 동원한 전문가들이 수년간 페르시아 땅 이곳저곳을 파들어 갔으나 모두가 허탕이었다. 자금고갈에도 불구하고 땅파기를 계속하던 1908년 5월 26일, 그토록 고대하던 석유가 쏟아져 나왔다. 중동 땅에서 첫 대규모 유전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1909년, 다시는 훗날 세계적인 기업 ‘BP(영국 석유회사)’로 성장할 ‘앵글로 페르시안 석유회사(APOC)’를 설립, 석유를 갈망하는 서방제국의 전초기지를 자처했다. 당시 페르시아는 영국과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사실상 반식민지 상태였다. 영국 정부는 굴착자 보호를 위해 식민지 인도로부터 군대를 파견하고 1910년에는 인도인 노동자를 대거 동원해 중동 최초의 파이프라인 건설에 착수했다. 1914년에는 APOC사의 주식 대부분을 매입해 1차대전 때 유효적절하게 활용했다.
석유가 생산된 곳은 20세기 내내 세계 정치·경제의 전쟁터였다. 그 전쟁터를 먼저 점령한 것은 ‘일곱 자매’라 불리는 BP, 엑손, 걸프, 텍사코, 모빌 등 7개 메이저였다. 이들은 세계의 석유망을 장악했고 중동국가들은 이들의 원료생산기지로 전락했다. 그러나 그 엄청난 검은 황금을 깔고 있는 산유국이 언제까지 그것을 고스란히 내주고 있을 리 없었다. 산유국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1960년 산유국 대표들이 모여 OPEC(석유수출국기구)를 설립하고 석유생산 삭감을 무기로 서방측에 맞섰다. 산유국들이 자신들의 놀라운 힘을 확인하고 이를 지렛대 삼아 메이저로부터 석유주권을 빼앗아온 것은 1973년 제1차 오일쇼크가 일어난 뒤였다. 비로소 석유자원의 주권이 자원 보유국의 손으로 돌아간 것이다.

■‘짐머만 전문’과 미국의 1차대전 참전     1917년
1차대전이 벌써 30개월째 접어들고 연합국과 독일이 전쟁에 지쳐가고 있던 1917년 1월 17일, 영국 해군정보부가 독일에서 미국으로 발신된 전문 하나를 가로챘다. 그런데 이번 암호에는 평소와 달리 독일 외무장관 짐머만, 주미 독일대사 폰 베른스토르프 백작, 멕시코 주재 독일 공사 폰 에크하르트의 이름이 등장해 암호 해독가들을 바짝 긴장시켰다. 당시 영국은 침몰한 독일 구축함과 독일 첩보요원에게서 독일의 암호책을 확보하고 있었으나 독일은 이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전문은 2월 19일 모두 해독되었다. 발신일이 1월 16일로 되어있는 전문은 짐머만 독일 외무장관이 보낸 것으로 미국 주재 독일 대사를 경유해 멕시코 주재 독일 공사를 최종 수신자로 했다. 내용은 이랬다. “우리는 2월 1일부터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시작할 계획이다. 그럼에도 미국이 계속 중립을 지키도록 해야 한다. 성공하지 못할 경우 멕시코에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동맹을 제의한다. 함께 전쟁 수행, 함께 평화 체결, 넉넉한 재정지원, 그리고 멕시코가 미국에 빼앗겼던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주를 회복할 때 지원. 세부 사항은 공사가 알아서 할 것”.
즉 미국이 중립을 지키지 않고 참전할 경우 멕시코가 대미(對美)전에 가담해준다면 멕시코가 미국에 빼앗겼던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의 영토를 수복하는데 독일이 도움을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미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할 경우 미국을 아메리카에 묶어 두겠다는 복안이었다. 워싱턴의 주미 독일 대사는 전문을 받고 1월 19일 멕시코 주재 독일 공사 폰 에크하르트에게 이 내용을 전송했다.
이런 사실을 해독한 영국 해군정보부의 암호해독 담당 윌리엄 레지널드 홀 제독은 전문을 두고 고민에 빠졌다. 영국이 독일의 암호를 해독했다고 눈치채지 못하게 하면서 전문을 미국에 전달하는 방법이 문제였던 것이다. 독일이 영국의 암호해독을 눈치챈다면 독일은 앞으로 같은 암호를 쓰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새로운 암호 해독을 위해 또 몇 년이 걸릴지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전문 공개는 곧 암호해독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전문을 공개하지 않으면 천금같은 미국의 참전을 포기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진퇴양난에 빠진 홀 제독은 독단적으로 전문을 공개하지 않고 자신의 금고 속에 넣어두었다. 2월 1일에 시작될 독일의 잠수함 작전에 맞서 미국이 참전한다면 다행이지만 그래도 참전하지 않는다면 그때 전문을 공개할 생각이었다.
무제한 잠수함 작전 돌입 8시간 전인 1월 31일, 독일 대사는 미 정부에 잠수함 작전을 통보했다. 워싱턴은 충격에 휩싸였으나 윌슨 미 대통령은 여전히 “어느 쪽도 승리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며 평화만을 고집했다. 2월 3일 윌슨은 국회에 나가 “우리는 독일이 분명한 군사적 행동을 취해야 믿을 것”이라는 취지의 연설을 했다. 사소한 도발정도는 참겠다는 태도였다.
이처럼 미국의 참전의사가 분명하지 않았는데도 독일 외무장관 짐머만은 만일을 생각해 2월 5일 주 멕시코 에크하르트 독일 공사에게 “지금 멕시코 동맹을 제안하라”고 전문을 보냈다. 홀 제독은 이 전문 역시 가로챘다. 윌슨이 아직 전쟁에 개입할 의사가 없음을 알게 된 홀 제독은 마침내 전문을 미국에 전달하기로 작정했다. 미국이 참전하지 않으면 영국은 악화되어가는 전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번에도 독일이 암호해독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것이 숙제였다.
홀 제독은 주미 독일 대사 베른스토르프가 미국에서 멕시코에 보낸 전문을 확보해 이것을 미국에 전달하면 영국이 중간에서 암호를 가로챈 사실을 독일이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독일이 미 대륙 어디에선가 부주의로 전문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게 하자는 것이다. 독일은 여전히 그들의 암호가 해독될 수 없다고 강하게 믿고 있었다. 다행히 멕시코 내 영국 요원이 미국에서 멕시코로 보낸 전문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2월 19일 홀 제독은 멕시코에서 가로챈 이 전문을 밸푸어 영국 외무장관에게 보고했다. 2월 23일 영국 주재 미 대사에게 전달된 전문은 24일 저녁 워싱턴에 도착했다. 전문을 본 윌슨은 전과 달리 몹시 분개하는 반응을 보였다. 미국의 뒤통수를 때리는 이런 전문을 보내놓고 겉으로는 평화공세를 취해온 독일의 기만행위에 분노한 것이다.
전문 내용이 3월 1일자 각 신문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자 그날 하원이 선박의 무장화를 의미하는 무장선박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상원은 일부 의원의 반대로 법안을 통과시키지 못했다. 심지어 그 전문을 어디서 확보했는지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그런데도 독일의 짐머만은 미 정부가 전모를 알고 있을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 자신이 전문을 보냈음을 시인하는 기자회견을 했다. 이로써 미 상원도 짐머만 전문을 분명한 사실로 믿게 되었다.
모든 게 사실로 밝혀져 미국인들 가운데 4분의 3이 참전을 지지하고 있을 때 3월 18일 3척의 미국 선박이 경고 없이 독일의 U보트에 의해 침몰되는 사건이 벌어짐으로써 참전은 기정사실화되었다. 4월 6일 상·하원 모두 참전결의안을 통과시킴으로써 미국은 1차대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김상옥 의사,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과 자결     1923년
일제하 서울의 종로경찰서는 일제 경찰력의 심장부이자 수많은 조선인들을 고문하고 탄압한 원한의 상징이었다. 1923년 1월 12일 저녁 8시, 누군가 던진 폭탄이 이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 서편 담벼락에 맞고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유리창 3장이 깨지는 등 건물 일부에 피해가 있었으나 퇴근 후에 일어난 일이라 경찰측 인명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부근을 지나가던 5명의 매일신보 직원 등 7명이 파편에 맞아 중경상을 입었다.
피해는 경미했지만 일제에게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중차대한 시국사건이었다. 일제는 한동안 폭탄을 던진 사람을 목격했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 수사에 애를 먹다가 사건발생 수일 만에 폭탄 투척자가 김상옥(1890~1923)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상옥은 서울에서 태어나 가난한 집안 탓에 직공 등으로 생계를 도우며 소년기를 보냈다. 16세 되던 해 동대문교회를 찾아가 기독교에 입교한 그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교회 부설 신군야학교에서 배움의 길을 이어갔다. 주경야독하는 고단한 일과 속에서도 악착같이 돈을 모아 19세에 자신의 대장간을 차리고 23세에는 철물점을 세웠다. 28세 되던 해에는 당시 상권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상인들에 대항하며 국산품장려운동을 벌였다.
경제적으로는 먹고 살만 했지만 김상옥은 늘 마음이 무거웠다. 일본의 국권 침탈과 강압적 통치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그러던 차에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김상옥도 파고다공원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1919년 4월 1일에는 수명의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 ‘혁신단’을 조직하고 4월 17일부터는 ‘혁신공보’라는 지하신문을 간행·배포했다. 그러던 중 1919년 8월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고초를 겪고 그해 10월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김상옥은 이후 좀더 적극적인 투쟁방법을 모색했다. 1920년 1월 23일 혁신단의 여성단원 이혜수의 효제동 집에서 동지들과 비밀회합을 가진 끝에 총독, 고관, 친일파까지 모조리 처단하기로 뜻을 모으고 암살단을 조직했다. 김상옥은 암살단과 함께 날마다 북한산 깊숙한 곳에서 사격술을 연마했다. 그러던 중 미국 상하 양원 의원과 가족 등 일행 40여명이 중국을 거쳐 1920년 8월 24일 서울을 방문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김상옥은 입국에 맞춰 조선총독을 비롯 일제 고관을 처단함으로써 일제의 침탈 사실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다. 일경들은 혹시 있을지 모르는 불상사를 막을 생각으로 예비검속을 실시했다. 혁신단 사건 이후 경찰의 요시찰인 명부에 오른 김상옥도 예비검속 대상자에 포함되었다. 이 검속의 일환으로 일경이 김상옥의 집에 들이닥친 것은 8월 23일 오전 9시30분이었다.
당시 김상옥은 집과 붙어 있는 철물점 2층에서 무기를 가져올 동지 한훈을 기다리고 있었다. 2층에서 몰래 일경의 태도를 살펴보니 무슨 단서를 잡고 들이닥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도 그들의 예비검속에 응할 수 없어 옆집 지붕을 거쳐 탈출했다. 그것을 본 일경은 김상옥의 집을 샅샅이 뒤져 암살단 취지문, 경고문, 암살단 가입서와 명부, 암살 대상자 목록 등 각종 기밀서류들을 찾아냈다.
한훈은 이 사실을 모른 채 무기를 소지하고 김상옥 집을 찾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한훈에게서 10연발 육혈포 권총 3자루와 실탄 300발이 쏟아졌다. 서울시내 전역에 경계가 강화되었고 8월 24일 경성역에서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던 미국 의원단 환영행사는 모두 취소되었다. 일경은 대대적으로 혐의자 검거에 나서 24명의 암살단 단원 중 18명을 체포했다.
김상옥은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1920년 10월 상해로 망명, 자신이 국내에서 추구했던 암살단의 활동과 그 성격이 유사한 의열단에 가입했다. 그리고 의열단 단장 김원봉이 마련해준 권총 3자루와 실탄 500발을 비단상자에 숨겨 1922년 12월 1일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왔다. 의열단이 그에게 부여한 임무는 총독과 고관을 암살하고 관공서와 주요 시설을 폭파하는 것이었다.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것은 그 일환이었다.
범인이 김상옥인 것을 알게된 일경은 1월 17일 새벽5시 김상옥이 은신해 있는 후암동의 한 집을 급습했다. 김상옥은 양손의 쌍권총을 쏘아붙이며 신도 신지 못한 채 버선발로 쏜살같이 뛰쳐나가 남산으로 피신했다. 그사이 3명의 일경이 총에 맞아 1명은 즉사하고 2명은 중상을 입었다. 김상옥은 남산을 빠져나와 왕십리 안장사에서 여승으로 변장하고 18일 저녁 왕십리를 향해 산길을 내려갔다. 김상옥은 1월 18일 미아리 이모집에서 유숙하고 1월 19일 효제동 이혜수의 집으로 은신처를 옮겼다. 그러나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혁신단 동지 전우진의 자백으로 은신처도 발각되었다.
1월 22일 새벽 4시30분경 400여명의 일경이 이혜수의 집을 포위했다. 곧 특공대가 지붕을 타고 마당으로 내려와 일제사격을 가하면서 효제동 일대는 마치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총성으로 뒤덮였다. 김상옥은 양손에 권총을 들고 인근 가옥의 지붕을 타고 넘나들며 수백 명의 일경과 신출귀몰한 접전을 벌였다. 총구는 쉴 새 없이 불을 뿜었고 일경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다른 집에서 30분간의 대치에도 김상옥이 항복하지 않자 일경의 일제사격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집주인이 유탄에 맞아 죽었고 김상옥도 온몸 수십 군데에 총상을 입었다. 3시간에 걸친 총격전으로 이미 일경 15명이 죽거나 다쳤지만 김상옥으로서도 중과부적이었고 탄환도 다했다. 김상옥은 마지막 남은 한발의 총탄으로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일제 하 국내외에서 전개된 의열투쟁 가운데 가장 장렬하고 대표적인 ‘항일 시가전’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면서 확인한 총상이 무려 11군데나 될 정도로 김상옥의 저항은 초인적이었다.

■나치의 ‘반제회의’      1942년
1942년 1월 20일 아침, 독일 베를린 근교 ‘암 그로센 반제’라는 조용한 저택에 나치의 차관급 인사 10여명이 속속 모여들었다. 나치 국가보위부 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초대로 이뤄진 조찬회동이었다. 훗날 ‘반제회의’로 불려진 그날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친위대 소속 아돌프 아이히만을 포함해 모두 15명이었다. 이들은 아이히만을 제외하고 내무부, 법무부, 외무부, 수상 비서실 등을 대표한 고위 관리들로 대략 3번째 서열의 지도자들이었다.
회의 시작 전, 하이드리히는 ‘유태인 문제의 최종해결’ 권한이 친위대 사령관 히믈러와 그의 수임자인 자신에 있음을 상기시킨 뒤 입을 열었다. 그날 작성된 회의록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유럽 내 1100만 유태인을 동부로 이주시켜 강제노동시키면 상당수의 유태인이 자연도태될 것이다. 그러나 최후까지 살아남는 유태인들은 저항력이 있는 자들이므로 이들을 석방하면 유태인의 르네상스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인류역사상 가장 잔인한 ‘유태인 절멸’이 안건으로 상정된 회의였지만 이 사실을 구체적으로 적시한 표현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회의 분위기도 화기애애했고 이의제기와 토론도 없었다. 굳이 대량학살, 독가스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참석자들은 나치의 언어에 익숙해 있었고,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이미 1941년 9월부터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독가스가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반제회의’ 후부터 홀로코스트가 시작된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이 회의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 ‘최종 해결’ 즉 ‘유태인 절멸’을 결정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오늘날까지 ‘반제회의’는 독일의 교과서에 실려 그들의 참회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왜 그럴까.
유태인들을 남김없이 절멸시킨다는 오래전의 공식 결정사항에 대해 ‘지휘선의 단일화’와 “독일 생활권에서 합법적인 방식으로 유태인을 청소하는 것”이 대학살의 목적이라는 것을 실무책임자들끼리 분명하게 확인했다는 데 그 해답이 있었다. 식사 후 하이드리히와 게슈타포 국장 뮐러 그리고 아이히만만이 남아 만족스러운 듯 코냑을 들이켰다.

■이승만 대통령 ‘평화선’ 선포     1952년
1952년 4월 28일은 일본 어민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었다. 그날은 1951년 9월 8일 일본과 52개 연합국이 체결한 이른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는 날로, 발효가 되면 1946년부터 7년동안 일본 어민들의 족쇄로 작용해온 이른바 ‘맥아더 라인’이 폐지되기 때문이다.
‘맥아더 라인’은 패전 후 일본 어민들이 본토 주변의 정해진 선을 벗어나 조업하지 못하도록 1946년 6월 미 극동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일본 주변에 선포한 조업 한계선이었다. 독도 주변으로도 12해리 이내에는 진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 어민들은 ‘맥아더 라인’ 폐지로 우리의 동해에서 어로작업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첨단장비를 갖춘 어선을 200만t이나 보유하고 있어 주로 무동력선에다 총선박 규모가 10만t에 불과한 우리 어선을 압도했다. 앞선 장비와 기술을 이용해 수시로 ‘맥아더 라인’을 침범, 한국측에 나포된 일본어선 수가 1947년 9척, 1948년 18척, 1949년 10척, 1950년 9척, 1951년 37척으로 총82척에 이르렀다. 우리로서는 ‘맥아더 라인’이 폐기되면 우리 어업이 고사되는 것은 물론이고 독도까지 일본이 지배하겠다고 나설 것이 뻔해 어떻게든 막아야 할 입장이었다. 이런 점을 의식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후 자동폐기될 운명에 놓인 ‘맥아더 라인’의 일시 존속을 요구했으나 일본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었고 미국 역시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러자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 해안에서 평균 60마일(약 97km) 이내의 자연자원·수산물 등에 대해 배타적 권리를 주장한 이른바 ‘대한민국 인접해양에 대한 대통령의 주권선언’을 국무원 공고 제14호로 선포했다. 이는 ‘맥아더 라인’이 폐지되어도 한국의 새로운 해양 주권선언에 의해 또 다시 한국 연안으로의 진출이 막혀버린다는 점에서 일본 어민들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소리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해양주권선언은 북한의 연안침투를 방어하고 세계 각국의 전관수역이 확대되는 추세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도 적지 않았으나 무엇보다 해양주권선언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 안에 독도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부르며 자국의 영토임을 부각시키고 있는 일본의 주장에 쐐기를 박기위한 포석까지 감안한 쾌도난마의 선언이었다.
다급해진 일본은 열흘 뒤인 1월 28일 “한국의 일방적인 영토침략”이라며 우리측에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미국·대만 등 국제여론도 비난 쪽으로 기울자 이 대통령은 오히려 “한일양국의 충돌을 막는 평화유지에 선언의 목적이 있다”며 명칭을 ‘평화선’으로 바꿔 불렀다. 일본은 이승만의 반일감정을 부각시키기 위해 ‘이승만 라인’ 혹은 ‘이 라인’으로 부르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평화선 선포 후 잠시 주춤하던 일본 어선의 침범조업이 다시 기승을 부리자 7월 18일 “선포수역에서 조업하는 외국어선은 국적을 불문하고 나포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가 떨어졌다. 일본도 1952년 9월 ‘ABC라인(일본경비구역선)’을 선포, 양국 간에 해상마찰이 빚어졌다. 하지만 주로 나포된 것은 일본 어선과 어민이었다. 1952년부터 1964년까지 나포된 일본 어선이 326척이나 되었고 억류 일본인이 3904명이나 되었다. 이 과정에서 1953년 2월 제주도 부근에서 조업 중이던 일본 어선 선장이 우리 경비정의 총에 맞아 숨지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평화선 선포 8개월 후인 1952년 9월 27일 당시 유엔사령관 마크 웨인 클라크가 중공군과 북한군의 잠입을 막고 전시 밀수출입을 봉쇄하기 위해 한반도 주변에 해상방위선 즉 ‘클라크 라인’을 설정했다. 이 선의 안쪽 수역이 평화선의 안쪽 수역과 거의 겹치다보니 결과적으로 ‘클라크 라인’은 평화선 선포를 간접적으로 지원한 셈이 되었다.
이처럼 평화선 선포는 6·25라는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이승만 대통령의 외교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쾌거였으나 1965년 6월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고 12월 비준서 교환과 함께 사실상 소멸되었다. 평화선이 역사속으로 사라지던 날 우리 국민들은 “얻은 것은 돈이요, 잃은 것은 평화선”이라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피카르, 세계에서 가장 깊은 챌린저 해연 도달         1960년
하늘과 바다 양쪽에서 가장 높은 곳과 가장 깊은 곳을 최초로 정복한 사람은 벨기에 물리학자 오귀스트 피카르(1884~1962)다. 그는 기구로 성층권까지 올라가고 그가 만든 잠수정으로 아들을 가장 깊은 바다에 잠수시켜 우주와 심해 탐험에 신기원을 연 사람이다.
1931년 5월 27일 기구를 타고 인류 최초로 1만5781m 상공 성층권에까지 오른 피카르는 기구에서 힌트를 얻어 곧 심해 잠수정을 준비했다. 바닷 속으로 내려갈 때는 밸러스트(추)를 싣고, 올라올 때는 버리면 된다는 원리였다. 공기보다 가벼운 헬륨이나 수소를 기낭에 채우는 기구와 달리, 잠수정에는 물보다 가벼운 가솔린을 채웠다.
1953년 피카르는 그가 만든 잠수정 ‘트리에스테호’을 타고 아들 자크 피카르와 함께 그때까지 누구도 가보지 못한 1080m와 3250m 잠수에 연이어 성공,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이듬해 다른 경쟁자가 그의 기록을 깨며 도전장을 내밀자 피카르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바다를 잠수할 계획을 세웠다. 도전자의 의욕을 일거에 잠재울 작정이었다. 당시까지 알려진 가장 깊은 바다는 괌 남쪽 350㎞ 떨어진 마리아나 해구의 챌린저 해연(1만893m)이었다. 피카르는 자신이 만들어 미국에 판 트리에스테호로 미 해군과 함께 잠수 실험을 반복하며 그 날을 준비했다.
1960년 1월 23일 오전 8시23분, 아들 자크 피카르와 미 해군 대위 도널드 월시를 태운 ‘트리에스테 2호’가 물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자체 동력으로 이동하는 현대식 잠수정이 아니라 모선에 예인되어 단순한 부력 조절로 하강과 상승만 하는 잠수정이었지만 바닷속 1100기압을 이겨내야 하는 최첨단 잠수정이었다. 한때 잠수정이 멈춰서고 바깥쪽 창틀이 수압으로 부서졌지만 잠수정은 계속 내려갔다. 오후 1시6분, 마침내 잠수정이 바닷속 상아빛 부드러운 흙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세계에서 가장 깊은 곳, 그때까지 어느 누구도 접근하지 못했던 미지의 바닷속에 마침내 인간의 발길이 닿은 것이다.  순간 잠수정 옆으로 넙치 한 마리가 지나갔다. 그리고 오후 4시56분, 트리에스테 2호가 가뿐히 수면위로 솟구쳤다.

■‘소련 수폭의 아버지’ 사하로프 유배     1980년
안드레이 사하로프(1921~1989). 수소폭탄을 만들어 ‘소련 수폭의 아버지’로 불리던 그의 젊은 날은 탄탄대로였다. 1947년 26세로 박사학위를 받고 이듬해에는 수소폭탄의 이론적 가능성을 검토하는 특별그룹의 일원으로 뽑혀 과학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1953년에는 수소폭탄 실험을 성공시켜 인생의 절정기를 맞았다. 32세로 소련 과학아카데미 최연소 정회원에 선출되었고, 레닌훈장과 노동자영웅훈장 등을 받았다. 이렇듯 출세가도를 달리던 그의 인생이 가시밭길로 들어선 것은 1957년, 핵무기의 윤리성에 회의를 느껴 ‘반핵’을 제창하면서였다.
그의 ‘반핵’ 선언은 한계를 모르고 치닫던 미·소 간의 핵대결에 제동을 걸었다. 그러나 그의 앞날에는 험난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하로프는 1960년대를 가로지르며 냉전 청산, 인류의 평화공존을 줄기차게 외쳐댔다. 1968년 오랜 지적·도덕적 방황과 사색을 청산하고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긴장완화 전 소련의 민주화가 선행요건이라고 주장한 에세이 ‘진보, 평화공존, 지적자유에 관한 고찰’이 소련 지하 문학지 사미즈다트를 거쳐 7월 22일 뉴욕 타임즈에 발표된 것이다.
그가 세계의 주목을 끌기 시작하자 소련 정부도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때를 계기로 사하로프는 인권운동가, 평화운동가로 변신했다. 1970년 11월 4일, 저명한 지식인들과 함께 발족한 소련 인권위원회는 본격적인 인권운동의 출발점이었다. 사형제 철폐와 정치범 사면을 요구하는 호소문 발표(1971년), 소련사회의 민주화가 수반되지 않는 동서데탕트는 잘못된 것(1973년), 카터 대통령에게 소련과 동구권 국가의 정치범들을 위해 관심 가져줄 것을 요구하는 서한 발표(1977년) 등 이 ‘행동하는 양심’은 1970년대를 관통했다.
1975년 그에게 노벨평화상이 주어졌지만 소련정부의 출국불허로 부인 엘레나 보너 여사가 수상을 대신해야했다. 관영 타스통신은 “노벨평화상이 ‘인민의 적’ 사하로프에 수여되었다”며 강하게 비난했다. 10년 넘게 계속되던 소련정부와의 위태로운 관계는 1980년에 드디어 파국을 맞았다. 그해 1월 22일 체포와 동시에 볼가강변 고리키로 강제추방된 것이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