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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정사를 좌지우지하는 지도자를 육성하겠다”
화산중학교 심의두 학교장
2011년 10월 06일 (목) 17:53:01 황인상 전문기자 his@newsmaker.or.kr

화산중학교의 심의두 교장은 성인교육에서 시작해 화산학원, 화산고등공민학교를 거쳐 화산중학교(학교법인 화봉학원)을 탄생시킨 상록수교사이자 교육자, 농촌 계몽 운동가이자 육영사업가다.

   
▲ 화산중학교 심의두 교장
완주군의회에서 100% 전라북도의회에서도 100% 찬성으로 교육위원당선과 다시 의장에 당선된 경이적인 기록 교육행정가인 심의두 교장은 ‘중학교 의무교육 실시’ 및 ‘사립학교 시설비 지원’의 일등 공신으로 백년지대계인 우리 교육 발전에 획기적인 기여를 한 숨은 교육발전 유공인사다. 2000년 제 27회 교단 시부문 문학신인상으로 수상한 시인이기도한 심교장. 그는 11년 8월을 끝으로 화산중학교 학교장에서 물러나 이사장으로 취임한다. 어떠한 난관에도 굴하지 않고 ‘위기는 새로운 기회’라는 신념으로 살아온 심의두 교장의 삶을 되짚어 본다.

어린 시절부터 가졌던 교사의 꿈
심의두 교장의 초등학교 시절 장래 꿈은 교사였다. 학생들이 조금만 잘못해도 선생들이 때리는 것을 보고 ‘선생님이 이 세상에서 최고 높으니까 때리나 보다’며 소박하게 교사라는 꿈을 갖게 된 것이다. 이 꿈은 그가 4학년 때 교장선생으로 바뀌었다. 당시 그의 담임선생은 앞줄의 3명에게 교무실 청소를 시켰고, 꼬마 심의두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교무실에서 회전의자를 처음 본 그는 얼른 의자를 타보고 청소를 하자고 제의, 제일 먼저 타고 놀던 그 순간, 주번교사가 나타났다. 교무실 청소를 담당했던 어린 세 학생은 사죄의 의미로 얼른 고개를 숙이고 차렷 자세로 섰다. 주번 교사는 미소를 지으며 학생들에게 다가와 “꼬마 교장선생님, 언제 부임하셨습니까”라고 물었고, 그 미소에 꼬마 심의두는 처벌을 안 받을 줄 알고 “예, 오늘 부임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 주번 교사는 “뭐야, 네가 교장이야?”하며 심의두를 끌고 교무실 한가운데 넓은 곳으로 가서 주먹으로 때리고 발길로 차서 넘어뜨렸다. 심의두는 바닥에 떨어져 너무도 아파 눈물이 날 뻔 했다. 순간 평소 아버지의 말씀이 생각났다. 첫째는 신의를 지키는 것이고 둘째는 나의 생각을 정확히 상대에게 전달하여야 하고 셋째는 팔다리가 불어져도 울지 않는 것이다. 가 떠올라 눈물을 삼키고 빨리 일어났다.
그리고 “호기심에서 그랬습니다”라고 대답하려고 하자 말을 꺼내기도 전에 주번교사는  그 의자가 얼마나 훌륭한 의자인지나 알아? 우리 학교 선생님이 열일곱 분인데 교감도 나도 지금까지 앉아보지 못했어. 그런데 감히 네가 앉아?!”하면서 꼬마 심의두를 또 다시 때리고 발로 차서 넘어뜨렸다. 교장선생님이 더 훌륭하다는 말에 꼬마 심의두는 ‘교장이 더 높다면 교장이 되어야지’하는 인생의 꿈을 바꾸었다,  그러고 중학교 때의  그의 꿈은 중학교 설립이었다.  심의두 교장은 가정형편상 완주에 신설된 완주중학교에 3회로 입학했다. 그나마도 그가 보채고 졸라 입학 후 석 달이 지나서야 입학하게 된 것이었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점심도 못 싸가지고 다니는 데다 통학거리가 왕복 100리다 보니 심신이 피곤해 매일 코피를 쏟곤 했다. 이때 그는 ‘내가 대학을 나올 때까지 화산에 중학교가 없으면 내가 학교를 세워 나 같이 원거리 고생을 하며 학교를 다니는 전철을 우리 후배들만큼은 밟지 않토록 하여야 하겠다는 신념으로 한평생을 살았다고 한다.
   
 

고학으로 고진감래 끝에 고교 졸업
심의두 교장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해 만고풍상을 겪었다. 6.25가 지나간 1954년 서울 시내 전체가 폐허가 된 상태에서 일자리를 얻는다는 것은 하늘에서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콩비지나 눌린 보리밥에 반찬은 소금 하나만으로 약 100일 동안 연명하기도 했고, 일주일을 굶고선 자살을 하기 위해 한강철교 위까지 올라갔다가. ‘앗, 참으시오’라는 글귀를 보고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 신문배달, 행상, 가정교사, 체신청 사서함 열쇠를 고치는 공장 등을 전전하면서도 고진감래 끝에 그는 드디어 박사학위보다 값진 고교 졸업장을 받았다. 심 교장은 고교시절 어렵게 구한 생명과 같은 직장인 컴퍼스 공장을 친구에게 양보하는 미덕을 보여주었으며, 근무도 남보다 한 시간 전에 출근하고 한 시간 늦게 퇴근하면서 남의 일이지만 자신의 일 이상으로 열심히 해 항상 ‘나보다는 가정이 우선이고 가정보다는 직장이 우선이며 직장보다는 국가가 우선’이라는 것을 몸소 실천했다. 그 결과 월급을 배로 받는 호사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늘 힘들어야 했고, 같은 직장 동료의 시기와 질투로 근거 없는 험담을 듣기도 했다.

 박사학위보다 값진 고교 졸업장 받은 후
주위의 도움으로 평생소원이었던 대학생의 꿈 이뤄

심의두 교장이 어렵게 서울용문고등학교를 다니던 그 시절, 그에게 가장 의미 있었던 일은 바로 은사이신 신익희 선생을 존경하고 따른 점이었다. 신 선생의 강의라면 직장을 결근하면서까지 듣는 열렬한 지지자였던 심의두 교장. 그는 “신익희 선생은 한국을 스웨덴과 같은 나라로 건설하겠다는 신념이 있었다”며 신 선생을 존경하는 이유를 밝히기도 했다. 한편 신익희 선생의 강의마다 가장 맨 앞자리를 차지하다 보니 신 선생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이후 신익희 선생이 대통령으로 출마했을 때 심 교장은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피켓을 들고 종로 6가에서 세종로까지 앞장서서 선거운동을 열렬히 펼쳐 이로 인한 어려운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이후 낙향한 심의두 교장은 곧 군에 입대하게 된다. 군 복무 중에 항상 한신 소장과 장기를 두었던 것을 계기로 그는 전북대학교 황하분교를 수용연대 앞으로 이사하도록 했다. 당시 한신 소장은 하사관 이하가 시험에 합격하면 군에서도 대학에 다닐 수 있도록 수업료 면제의 특혜를 베풀었고, 그 기회를 잡은 심 교장은 평생소원이었던 대학생의 꿈을 이루었다. 심 교장의 대학 졸업은 이후 그의 목적달성을 가능케 한 초석이 되었다.
   
▲ 영어교육

중학교 설립 목적으로 성인교육 시작
심의두 교장이 면 회의실을 빌려 성인교육을 시작한 것은 그가 대학 4학년 2학기때인 1963년이었다. 그는 ‘성인교육을 하면서 중학교를 설립 한다’ 하면 전 면민들이 환영할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는 엄청난 착각이었다. 면민들은 그에게 ‘국가에서도 돈이 없어 못 세우는 중학교를 어떻게 개인이 세워?’ 라는 등의 조소를 보냈다. 바람막이 역할을 해야 할 기관장부터 그에게 한 소리씩 하고 나니 심 교장을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사람까지 등장했다. 심지어 심 교장의 선친이 면사무소에 나가면 “미친 아들 뒀다면서”하며 비웃기까지 했다. 이는 결국 부자간의 불화로 이어져 결국 심 교장은 분가를 할 수 밖에 없었다. 1964년 섣달 그믐날 쌀 한 가마니를 주며 “땅 590평을 타 가지고 사랑채로 나가라”는 선친의 엄명에 의해 분가한 심의두 교장. 남들이 민족의 명절인 설을 보낼 준비로 한창 바쁜 와중에, 심 교장은 삽과 괭이, 쇠스랑을 고산 장에서 사가지고 와 정월 초하룻날부터 모두가 세배를 다니는 그 시간에 땅을 개간하기 시작, 방학을 이용해 부인과 함께 동내 종산 약 1천평을 개간했다. 그곳에 고추를 갈았더니 상상 외로 고추 농사가 잘 됐다. 당시 고추 1근을 팔면 쌀 2말이었는데, 3년 동안 고추농사가 대풍작이었다. 한편 그의 부인은 닭과 돼지를 키워 돈을 모았다. 그렇게 돈이 조금씩 모이자 심 교장은 당장 학교부지부터 샀다.

 주위의 조소에도 불구 학교 설립에 착수
국내 최초로 美 학교와 자매결연 맺어

학교 부지를 마련했지만 교실 마련도 시급했다. 심 교장은 6개 교실을 신축하기 시작, 순식간에 쌀 1,200여 가마가의 빚더미에 앉게 됐다. 어려운 상황에서 교실을 짓다 보니 일의 진행을 어렵게 만드는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다. 공사비 문제로 경찰서, 검찰청, 법원 등을 수없이 들락거리기도 했던 그는 그때마다 지혜롭게 극복하여 결국 6개 교실을 신축하고 완공에 앞서 화산공민고등학교 설립인가도 받았다. 1968년엔 학교법인 인가신청을 했다. 그러나 6개월 만에 당시 문교부에서는 사유서 한 장 없이 반려가 됐다. 그 후 겨울방학 동안 심 교장이 얼마나 청와대와 교육부를 들락거렸던지 교육부와 청와대에서는 임시직원이라고까지 하였다. 결국 일이 성사된 것은 국회파동으로 권 장관이 물러나고 홍 장관이 부임한 이후였다. 1969년 12월에 드디어 학교법인 ‘화산학원’ 설립인가와 화산중학교 인가를 받게 된 것이다. 심 교장은 “얼마나 기뻤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당시를 술회했다. 그렇게 심 교장은 전국 최연소 교장으로 20대에 자신의 인생의 뜻을 이루었다. 한편 화산중학교는 교실이 부족해 1969년 국내 최초로 자매결연을 맺은 미 오하이오주 우드모어중학교와 미 뉴욕 리퍼블고등학교에서 보내준 2,500불로 1971년 강당을 준공했고, 그 강당을 막아 교실로 사용했다. 그렇게 하고도 교실이 부족해 1972년 CAC사령관이었던 송호림 장군을 설득해 4개 교실을 증축하였고, 1978년에는 12학급 증설인가를 받는데 성공했다. 
   
▲ 일본어교육

중학교 의무교육 실시, 사립학교 시설비지원에 일등공신
1969년 중학교 인가는 났지만 당시는 보릿고개가 있던 시절이라 국가에서 책정한대로 수업료를 받을 수가 없다 보니 교사들의 월급을 공립학교의 10분의 1인 월 3천원밖에 줄 수 없었다. 이는 담뱃값도 되지 않는 금액이었다.  교사들에게 하숙비를 대줄 수 없어 심 교장은 아버지의 사랑채에 살면서 옆집의 방을 빌려 기숙사로 사용했고, 식사는 심 교장의 집에서 그의 부인이 손수 해주다 보니 농촌의 바쁜 일손에 부부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사정도 모르고 심 교장이 하숙비까지 챙긴다며 욕심이 많다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심 교장은 변명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이러한 문제점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중학교 의무교육 밖에 없다”며 1969년부터 1985년까지 16년 간 줄기차게 청와대와 문교부를 쫓아다녔다. 그 결과 중학교 의무교육과 사립학교 시설비 지원, 그리고 면단위 학교부터 초중등 교사 일, 숙직면제 등에 대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냈다. 전 대통령은 중학교 의무교육은 당장 돈이 없으니 화산중, 위도중, 무풍중을 1985년부터 5년간 시범학교로 운영하여 점진적으로 실시키로 하고, 시설문제는 개축교실부터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이로써 화산중학교는 1985년 의무교육 시범학교가 되어 교사들의 월급이 100% 지급되었으며, 교사들의 일숙직이 면제되었다. 이후 심 교장의 요구대로 1990년에는 면 단위, 1993년에는 읍 단위, 2002년에는 전국적으로 중학교 의무교육이 실시됐다. 한편 심 교장의 끈질긴 요구로 ‘사립학교 시설비 지원’은 1985년 당시 50억 국회통과하여 전북에 4억 3천만원이 배정되어 이중 심 교장은 8,200만원을 지원받고 나머지는 전주농고 앞의 집과 화월리 산을 팔아 18개 교실을 개축 하였다. 당시 전주 복덕방 사람들은 그 돈이면 화산동이나 서신동 땅을 12,000평을 사고 나머지만 학교에 투자하라고 그를 설득했으나 이 말을 듣지 않자 사람들은 심 교장이 평생을 후회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심 교장은 “당신네들은 자기 하나 살기에 급급하지만, 이 돈으로 화산중학교에서 훌륭한 지도자가 배출되면 한국이 달라지고 세계가 달라진다”라는 말을 남기면서 사재를 털어 18개 교실 본관을 개축 완료할 뿐 아니라 교재 교구를 현대화 시키었다.

중학교 의무교육과 사립학교 시설비 지원, 면단위 학교부터                                                                       초중등 교사 숙직면제 층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재가 얻어

한편 교육계에 평생을 바쳐온 심 교장에게 주위에서는 교육위원으로 나가는 권유가 계속됐다. 결국 1995년 교육위원으로 출마한 심 교장은 완주군의회에서 100%지지, 전북도의회에서 58명 100% 지지로 교육위원에 당선됐다. 선거사상 유례없는 두 번의 100% 찬성에 각 언론마다 기네스북에 올라야 한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이후 심 교장은 다시 의장에 당선되었다. 당시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국회의원 270여 명으로부터 “어떻게 선거에서 100%가 두 번씩이나 나올 수 있나, 김일성이도 그렇게 나오지는 못했다. 며 기네스북에 오를 일이다”라며 찬사를 하였다. 한편 심 교장은 의장으로 활동할 당시 짧은 임기에도 학생들에게 올바른 가치관, 곧 ‘신의’를 지키는 인성교육을 확실하게 심어주는데 노력했는가 하면, 도시위주에서 농촌위주로, 큰 학교보다는 작은 학교 위주로 평준화교육을 비롯하여 교육계의 많은 현안들을 개선했다. 이후 교육위원으로서의 활동이 끝난 후에는 전주 중앙여고 교장으로 부임, 한국의 위대한 여성지도자 교육에 힘썼다. 당시 학생들은 스스로가 전주 중앙여고에 배정된 것을 고민 했으나, 심 교장의 영향으로 목표의식이 뚜렷해졌다. “그 동안 이 학교에 입학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는데, 상록수 심교장 선생님의 위대한 여성지도자 교육에 우린 활짝 웃어요” 라는 말은 심교장의 가슴을 울렸고 그러한 당시 학생들의 심리를 잘 대변해준다.
   
▲ 국제자매결연

명강사로 유명해진 후 전국서 특강요청 줄이어
심의두 교장은 명강사로도 유명하다. 그가 명강사로 이름을 날리게 된 계기는 순전히 우연이었다. 1970년 당시 그는 교장 850명이 참가한 삼청동의 교육연수원에서 새마을연수를 받는데 첫 시간의 강사였던 새마을 국장이 외국 바이어 때문에 펑크를 낸 것. 이에 전주 선배 교장들이 심교장은 새마을 전국초청강사니 강의를 하라고 권유하여 심 교장은 ‘어떤 교장이 될 것인가?’에 대해 특강을 진행해 호평을 받았다. 당시 그의 요지는 “기존의 권위의식을 버리고 교장실을 직원들에게 편안한 장소로 개방함은 물론 학생들에게 언제나 열려 있는 상담소로 개방하고, 교장선생이 직접 신입생들에게 오리엔테이션에 참가, 아름다운 마음의 인성교육도 시키어 학생들과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의 장도 만들어야 학교가 발전 한다”라는 요지의 강의를 90분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쏟아지면서 “우리는 헛살았다. 생각할 점이 많다”는 등의 자탄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이후 연수를 받았던 교장들은 그 다음시간도 심 교장에게 강의해달라고 원장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원장이 “강의는 예정표가 있기 때문에 안 된다”고 거절하자 교장들은 저녁식사 후 강의실을 빌려달라고 요청하여 오후 6시부터 강의에 들어갔다. 원래 1시간 예정이었던 특강은 새벽 3시까지 이어졌다. 당시 연수원에서는 밤에는 심 교장의 강의를 듣고 낮에는 조는 상황이 계속되는 진풍경이 계속되기도 했다. 일주일을 그렇게 강의하자 당시 심 교장의 특강을 들었던 이들은 그 답례로 1인당 3천원씩을 모아 (합 쌀로 계산 900가마를)  심 교장에게 전달했다. 전달이 끝나자 이러한 사람은 지금까지도 없었지만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 후 심 교장에 대한 소문이 청와대 등 여러 곳으로 퍼지면서 그는 한국은행, 서울은행, 전북은행 등 여러 곳에서의 강의 요청으로 1,500명 내지 2,000명이 모인 가운데 90분씩 하면 100만원씩을 받고 다니었는데 1970년 당시로선 적지 않았던 강의 비라고 했다. 당시 문선명 통일교 총재도 심 교장에게 수안보온천에서 고급관리들을 대상으로 하는 특강을 요청해 40분씩 3시간 강의비로 120만원을 주었다. 당시 빚이 많았던 심 교장으로서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했다.
가정에서는 농사 외에 닭, 돼지, 토기와 오소리50마리 사슴50마리도 손수 길러 연 3,4억의 수익으로 내부나 시급한 현안들을 해결하는데, 기타 학교발전에 70여억 원을 투자 큰 도움이 되었다.

폐교 위기의 화산중을 명문사학으로 바꾸다
21세기 급격한 정보화사회는 농촌의 이농현상을 가속화시켰다. 화산중학교 설립 당시 주변에는 7개의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6개의 초등학교가 폐교되고 1개교만 남아 겨우 1년에 17명이 입학하여 화산중학교도 폐교 위기에 놓였다. 학교의 설립자인 심의두 교장의 마음도 편할 리 없었다. 그는 “죽기보다 더 심한 고통 이었다”며 당시의 심정을 토로했다. 이에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한 그의 노력은 시작됐다. 심 교장은 화산중학교를 2005년 한국 최초로 자율중학교로 승격시켜 전국의 학생들을 거주지를 옮기지 않고 전국 단위로 모집할 수 있는 명문사학으로 재탄생시켰다. 이러한 여건은 서울, 경기, 강원, 부산, 울산, 대전, 충남북, 전남북, 제주 등 전국에서 학생이 몰려오게 만들었다. 자율중학교로 승격한 이듬해인 2006년 신입생 모집에서 많은 학생이 몰려 10:1이라는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오지의 중학교가 전국의 학생들로부터 각광받는 이유는 다름 아닌 화산중학교만의 영재교육프로그램과 좋은 시설 때문이다. 특히 사제간의 두터운 신의로 청와대 국중호국장의 협조로 강당과 본관3층교실, 기숙사가 부족하자 화산중학교 3회 출신 임동순(전 광진갑 민주당 위원장) 제자가 16억원을 투자(20년 운영조건) 계약서 한 장 없이 제2의  문무숙’을 신축했으며 전주의 유용수 사장 역시 20억원을 투자(20년 운영조건) 제3의 문무숙을 계약서 한 장 없이 건축하였고  식당, 수학교실 도서관 공자학당,  과학교실 사회과교실 등 교육당국의 지원과 사재 70여억원을 투자 교실내부 현대화 사업에 앞장 서 새 역사 창조의 장을 열었다.
그 결과 2009년 화산중학교는 교과교실제 A타입 전국 1위로 선정되며 15억의 지원을 받았고, 2009, 2010년 연속 한국 최우수학교로 선정되면서 교과부 직속 연구시범 선도학교가 되었다. 이러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 화산중학교를 벤치마킹하기 위해 최근 화산중학교를 찾는 국내외 귀빈들도 이제는 일 년에 6천명 이상이 방문하는 명문학교가 되었다.
   
▲ 한,중,일 학생교류

농촌학교 살리기 운동에 앞장서다
심의두 교장은 “어떠한 일을 할 때에는 천지를 개벽시키겠다는 마음으로 하라”고 가르친다. 화산중학교는 호연지기를 넓히기 위하여 중국 쑤저우 청하이학교, 일본 쓰시마 남양중학교 호주학교 등과 자매결연을 맺어 수시로 상호교환 학습을 실시하고 있다. 그리고 길립시 제1고등학교와 연계하여 공자학당을 설립, 교사 2명이 배정되어 운영하고 있으며 중국에는 세종학당을 운영할 계획이다. 화산중학교는 지금까지 5,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1980년 초 컴퓨터 이름도 모르고 있을 때, 화산중학교 출신 국중각 씨는 컴퓨터 박사 1호가 되었고, 김영만 씨는 한빛게임으로 2000억의 거부로 주목을 받았다. 이 외에도 화산중학교는 청와대 국중호 민원국장, 건설의 맹주 심기주 500억 사장, 대검 검사를 거쳐 1등 변호사 박승권, 부산 김영환 판사 외 기라성 같은 인재들을 배출했다. 특히 지난 2004년에는 전북 정보올림피아드대회에서 당시 1학년 배민석 군이 3학년을 압도하고 1위에 입상했으며 중학교 2학년이 한국과학영재학교에 입학해 주목을 받았던 성윤제 군, 토익 995점으로 화제를 모았던 김법창, 그 뒤를 이어 김태영 군 등 화산중학교는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며 기염을 토했다.

 명문사학으로 재탄생 후
 기라성 같은 수많은 인재 배출

심의두 교장은 “우리 학교의 프로그램은 한국의 미래 지도자를 육성하고 위기에 직면한 농촌학교도 살릴 수 있는 해결책이다”며 “사교육비도 줄이고 외국유학도 방지하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볼 수 있다. 앞으로도 학생들이 훌륭한 지도자가 되도록 1. 영, 수, 국의 N+2의 수준별 수업 2. 아름다운마음 갖기 운동전개 3.국가관교육(애국조회) 4.전학생 전교사 하나가되는 교육전개. 5. 전학생 특기적성심화 6.중국어 일본어 택일지도 7.건강지도 운동장돌기 8.유도2단따기. 등 다양한 수업을, 최선을 다하여 지도하여 전설의 고향답게 한국의 정사는 물론, 세계의 정사를 좌지우지하는 지도자를 육성 하겠다”고 강조했다. 한편 심 교장은 먼 미래를 바라보는 한 인간이기도 하다. 동서고금을 통해 농촌을 무시하고 도외시하는 정권은 얼마가지 못하고 망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는 “농촌은 뿌리요, 도시는 꽃이다”며 농촌학교 살리기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특히 그는 “농촌은 우리 인간 생명체의 근원이기 때문에 식물로 말하면 뿌리에 해당된다. 뿌리가 없으면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없다”면서 “위정자들은 이 깊은 뜻을 감지하고 농촌학교와 농촌을 살릴 수 있는 특별법을 하루 속히 만들어야 한다. 왜 우리의 선인들이 ‘농자는 천하지대본이라 하였는가?’를 음미할 때다”라고 피력했다. NM

교육은 최첨단 산업이다. 화산중학교 심의두 교장
오늘날 교육은 가르치는 것을 뛰어 넘어 최첨단산업이다. 1982년에 프랑스는 학교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 3000평만 확보하면 국가에서 시설과 교구 일체를 전부 지원해준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이유인즉 ‘학교 하나만 잘 갖추어 놓으면 인근 국가에서 학생 하나만 와도 자동차 10대를 파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에서 사립학교를 키운다는 뜻이다.
이 좋은 공해 없는 산업을 왜, 우리는 외국 사람에게만 혜택을 주는가? 지금 제주도에는 영국 사람이 중학교를 세운다고 하면 1년에 500명, 3년에 1500면을 받게 하고 일 년에 수업료를 3600만원씩 받게 허락해주지만 우리 국민이 설립한 사립학교들은 1/10도 받지 못하게 규제를 하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지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다. 외국 사람이 세운 학교에서 우리 자녀가 무엇을 어떻게 배울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과연 그 학교에서 우리국민의 혼과 국가관을 가르치겠는지 반문하고 싶다. 이러한 속에서 배운 학생이 지도자가 되어 한국을 어데로 이끌어갈 것인지 참으로 걱정이 된다.
나는 국가에 제언한다. 우리는 자존심도 없는가? 나는 교육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하루 속히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특히 머리 좋은 우리의 자녀들에게 걸 맞는 우리의 학교를 설립해야 하며, 이를 국가가 나서서 지원해야 한다. 그리하여 외국으로 나가는 유학생도 막고 우리의 혼이 담긴 교육을 우리가 실천해야 한다. 이렇게 했을 때 비로소 대한민국은 지구상에서 일등 국가로 빛날 것이다.
나는 젊은 나이에 학교를 세워 한국의 정사는 물론 세계의 정사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지도자를 기필코 육성하겠다고 다짐한 후 이 산골짜기에서 50년의 세월을 지내왔다. 최근 미국, 캐나다, 프랑스, 호주, 일본, 중국, 몽고 등 많은 외국 교육시찰단들이 화산중학교를 방문하는 과정에서 나는 일본사람들이 제일 무서웠음을 고백한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한국에 이런 좋은 학교도 있구나”하며 자매결연을 하자고 교류를 시도하지만, 일본인들은 몇 년을 자매결연을 하고 교류를 하다가 이를 끊고, “일본에는 지도자 육성중학교가 없지만 한국은 있구나”하며 교류를 할 때마다 놀라며 돌아가곤 했다. 분명히 무슨 일인가 벌어질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음해 일본 기업인 3명이 일인당 1천억원씩 총 3천억원을 투자하여 영국이튼학교의 모델학교를 나고야시에다 설립한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2년 후 개교하여 모집하는데 경쟁률이 100:1이라는 기사를 보면서 며칠을 울었다. 나는 일본의 교육정책을 보면서 몸부림쳤다. 1963년 당시 국가는 잠자고 있었지만 정작 나는 몸이 부서지고 가정 파탄이 되어가면서도 성인교육에서부터 시작해 그 많은 비웃음을 물리치고 내 어린 시절의 꿈, 중학교 설립을 이루었다. 이제 나는 재도약하여 제2의 꿈 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일본에 앞선 교육, 세계 제1의 교육을 간절히 하고 싶다. 2009년 5월 최규호 교육감에게 나의 뜻을 전달하니 흔쾌한 대답을 듣고 고등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학교부지 매입부터 시작해 6개월 동안 서류를 구비해 12월 전북교육청에 제출하였다. 다시 교육청과 3개월의 검토기간을 거쳐 2월에 접수를 완료하고 기다렸지만 4월 말까지 인가가 났어야 할 것이 5월로 미뤄지다가 결국 무산되었다. 물론 하늘의 뜻이라 생각하고는 있지만 국가의 장래가 암담함을 느끼면서 비통하기만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단념하지 않는다. 모든 일은 때와 장소가 정하여 있다는 신념에서 ‘패자는 눈이 녹기를 기다리지만 승자는 눈을 밟아서 길을 만든다’라는 그의 명언을 기억에 담고, 우리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면 몸과 마음, 그 모든 것을 다 바쳐 일을 해야 한다는 결심 하에 2009년 한국의 심장부인 세종시로 달려가 학교부지 5만여 평을 사놓고 때가 오기를 기다린다.
그는 지금 77세의 나이로 8월 말로 교장 직에서 물러나지만 다시 이사장직을 맡으면서 전국에서 모인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아들, 딸들과 대화하며 이들을 내 애인으로 삼고 이들을 위하고 사랑하며 기어이 전설의 고향답게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지도자를 기르면서 천사와 같이 살겠다고 다짐한단다.

 

                                     신의 (信義)

                          
   
 
신의는                            작시 심 의 두
                           우리 인간생활의
                           원동력이다.

                           신의를 
                           지키는 사람은 
                           날로 날로 성장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지키지 않으면
                           가정에서는 파탄
                           사회에서는 혼돈이 온다.

                          신의는 
                          사회기풍을 진작 시킬 수 있는 
                          힘과 논리가 이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의를
                          우리 인간의 
                          정신적인 지주로 삼아
                          우리 온 국민의 
                          천철학으로 삼을지어다.

 

                                                                                               본교 설립이념과 가치관 교육을 사색하며
                                                                                               1964년 이 시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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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설금
(211.XXX.XXX.82)
2017-03-14 23:28:14
기적의 물질 생설금 만세~!
머리에 뿌리면 머리가 나고, 음식에 뿌리면 향균이 되고, 그냥 먹어도 기적의 물질인 생설금이 심의두 이사장님의 든든한 후원을 받아 미래로 나아갑니다~!!
김민우
(125.XXX.XXX.140)
2013-10-03 20:27:05
대단하군요.
최고의 지도자가 우리를 지도해주시고 바른길로 이끌어준다니
정말 아름답고 정말로 행복합니다. 부디 좋은길로 인도해주길 바랍니다. 자랑스런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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