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0.6.7 일 08:32 전체기사 l 기사쓰기 l 자유게시판 l 기사제보 l 구독신청 l 광고안내 l 회사소개
> 뉴스 > 시사·이슈
     
국가와 국민을 위한 희생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당신들을…
2016년 06월 06일 (월) 21:59:28 신세영 기자 ssy@newsmaker.or.kr

‘겨레와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치니 그 정성 영원히 조국을 지키네. 조국의 산하여 용사를 잠재우소서. 충혼은 영원히 겨레 가슴에 님들은 불변하는 민족혼의 상징. 날이 갈수록 아~ 그 충성 새로워라.’ 조지훈 시인이 가사를 쓴 ‘현충일 노래’는 우리를 숙연하게 만든다.

신세영 기자 ssy@

6월은 현충일과 6.25 한국전쟁 발발일이 있는 ‘호국보훈의 달’이다. 올해로 61번째를 맞는 현충일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선열과 국군 장병들의 넋을 위로하고,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정한 기념일이다. 정부가 6월 6일로 정한 데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풍습이 반영된 것이다. 조상들은 1년 24절기 중 “손이 없다”는 청명일과 한식일에는 사초와 성묘를 하고 망종에는 제사를 지내왔다. 그래서 1956년 현충일 제정 당시 6·25전쟁이 발발한 6월 중, 제사를 모시는 망종일인 6월 6일을 현충일로 지정하게 됐다.
   
▲ 6.25 전쟁중 눈덮인 능선을 넘는 군인들의 모습
6·25전쟁으로 한국은 사망 13만7,899명, 부상 45만742명, 실종 2만4,459명, 포로 8,343명의 피해를 입었다. 미국은 사망 3만6,940명, 부상 9만2,134명, 실종 3,737명, 포로 4,439명 등 피해가 컸다. 군인과 무기로 참전한 16개국, 의료장비 지원 5개국, 물자만 지원한 40개국, 전후복구를 지원한 7개국 등 무려 68개국이 직·간접으로 우리나라를 도왔다. 당시 전 세계 93개국의 62퍼센트가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도왔다.

그 외 참전국의 인명피해(사망·부상·실종·포로)도 컸다. 영국(4,908명), 터키(3,216명), 오스트레일리아(1,584명), 캐나다(1,557명), 프랑스(1,289명), 태국(1,273명), 네덜란드(368명), 그리스(738명), 에티오피아(657명), 콜롬비아(639명), 벨기에(440명), 필리핀(398명), 뉴질랜드(103명) 등의 병사들이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들어본 적도 없는 나라 대한민국을 위해 희생했다. 6·25전쟁은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결코 잊어서 안 되는 현재이다.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는 목숨을 바친 선열들의 희생으로 이뤄진 것이다. 6월만이라도 모두가 호국의 영웅들께 감사하는 마음을 되새겨 보자.

“전장의 부하들과 생사를 함께 하리라” ① 김홍일 육군 중장
항일무장 독립운동 선봉…6.25 불리한 전세 반격으로 전환

김홍일 육군 중장은 1898년 9월 평안북도 용천군 출생으로 오산중학교를 졸업한 뒤 조국의 독립투쟁을 위한 큰 뜻을 품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1920년 중국 귀주강무학교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해 1944년 중국청년군사대리참모장을 지낸 후 1945년 4월 한국광복군 참모장으로 항일무장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다. 1948년 8월 귀국 직후 육군사관학교 교장,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제1군단장 등을 역임했다. 김홍일 중장은 6.25전쟁 당시 풍전등화의 대한민국을 지켜내는데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한강 방어선에서 북한군 공격 성공적으로 저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고 3일 만에 북한군이 서울까지 진격해 들어오자 국군은 속수무책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된 김홍일 장군은 후퇴하던 국군을 결집해 3개의 혼성사단을 편성하고 한강이남 24km에 이르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서울을 빼앗긴 아군에게 한강은 전략적인 요지였으며 조국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지역이었다. 김홍일 장군의 진두지휘 아래 국군은 노량진-영등포 일대와 신사리-말죽거리 일대에서 도하하려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싸웠다. 일주일간 치열했던 한강 방어선 전투는 비록 적의 전차 부대에 밀려 후퇴로 끝났지만 초기 전세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수도권의 국군 주력을 초반에 섬멸하려던 북한군의 작전 계획에 일대 차질을 가져왔으며, 시간적인 여유를 확보함으로써 국군의 전략적 후퇴와 미 지상군의 참전 등 차후 작전을 위한 전기를 마련했다. 한강 방어선이 붕괴된 후 국군과 유엔군은 금강과 소백산맥 일대에 새로운 저지선을 형성했다.

포항 전투 등 북한 군 공격 저지하고 반격으로 전환
제1군단장에 오른 김홍일 장군은 예하의 제2사단 16연대와 제25연대, 독립 제17연대를 지휘해 진천 남쪽 봉화산-문안산 일대에서 전차와 포병으로 증강된 북한군 제2사단의 남침을 5일 동안 저지해 적에게 타격을 입혔다. 7월 15일에는 독립 제17연대는 화령장 북쪽에 매복 작전을 펼쳐 속리산으로 남하해 상주로 침공하려는 북한군 선두부대를 궤멸시켰다. 제1군단 예하의 제8사단은 안동 북쪽 일대에서 북한군 제12사단의 침공을 저지하던 와중에 서쪽 풍산지역으로 침공하는 북한군 제8사단과 동쪽 배후에 침투해오는 북한군 유격대에 맞서 싸우며 나흘 동안 방어전을 전개했다. 이 전투로 북한군의 안동 지역 진출이 지연됐다. 의성으로 철수한 뒤에는 북쪽 향로봉 일대에 주저항선을 형성해 국군이 보현산과 기계지역 정면에 새로운 주저항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낙동강전선으로 철수하며 방어에 돌입한 후에는 기계-안강-영덕-포항 일대에 침공해온 북한군을 격퇴시켰다.

   
▲ 6·25전쟁의 격전지였던 강원 철원군과 경기 연천군 일대의 중부전선
이 전투로 북한군 2개 사단은 낙동강전선의 동부지역 돌파작전에 실패했고, 제1군단은 기계와 포항지역 북방으로 후퇴한 북한군을 추격해 다음 단계의 반격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이처럼 김홍일 장군은 불리한 전력과 전세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반격으로 전환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후에는 육군종합학교 총장으로 취임해 전시에 급격히 소요가 증대되는 육군 간부의 양성에 전념하다가 1951년 3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그는 사관생도들에게 “부하를 사랑하라. 평소에 고락을 함께하지 않은 부하는 전장에서 생사를 같이할 수 없다. 청렴 결백하라. 재물을 탐하면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잃을 것이다”라고 항상 강조했다. 일제 치하에는 중국에서 광복군 참모장 등으로 활동하며 무장 항일 투쟁을 전개하고, 광복 후에는 풍부한 경험과 탁월한 지휘력을 바탕으로 전란에 휩싸인 조국을 위해 싸운 그는 진정한 군인이었다.

잿빛 하늘에 꽃으로 타오르다 ② 이근석 공군 준장
우리나라 최초 전투기 편대장…34세의 젊은 나이에 장렬히 산화

1917년 1월 17일 평안남도 평원군 청산면 구원리에서 태어난 이근석 공군 준장은 1933년 평양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의 가미다니(態谷) 비행학교에 소년비행병 제2기생으로 입교했다. 그는 1948년 5월 14일 경비사관학교를 간부후보생 1기로 졸업하고 육군소위로 임관한 후 육군비행단장 등을 지냈다. 1948년 10월 공군이 독립하자 새로 창설된 공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임명돼 공군 간부를 육성하는데 이바지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비행단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장병들이 전장 곳곳에서 육탄으로 적의 탱크를 파괴하고 장렬히 전사하고 있다는 전황을 전해들은 이근석 대령은 오후 6시께 부하들과 함께 정찰을 마치고 비장한 결단을 내렸다.

경비행기에 폭탄 싣고 맨손으로 폭탄 투하
   
▲ 군인의 기상이 느껴지는 비석들의 모습
그는 여의도 기지 내에 공군 작전지휘소를 설치하고 보유하고 있던 모든 항공기 22대로 남하하는 적군을 저지하기로 결정했다. 경비행기에 폭탄을 싣고 적을 공격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다음날 의정부-동두천 방향으로 출격하면서 30파운드의 폭탄을 껴안은 관측사를 뒷자리에 동승시켰다. 동두천-의정부 축선 상에는 약 700여대로 추산되는 적의 탱크와 차량이 들어차 있었다. 목표물의 상공에 도달한 그는 200피트의 초저고도 비행을 하면서 뒷좌석의 관측사에게 싣고 온 폭탄을 손으로 직접투하도록 지시했다. 싣고 온 폭탄이 모두 투하되고 나면 다시 폭탄을 싣고 날아가 계속 투하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 수도 서울은 마침내 적의 수중에 넘어갔다. 6월 28일 거칠 것 없이 남진하는 적의 T-34 탱크를 대한민국 공군이 보유하고 있는 경비행기로는 도저히 파괴할 수 없게 되자, 미 극동공군사령부는 10대의 F-51 무스탕기를 대한민국 공군에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인수 편대장으로 선임된 이근석 대령은 다른 9명의 조종사를 인솔해 일본 이다쯔께기지로 건너가 F-51 기종 전환훈련을 받은 후 10대의 F-51 전투기를 인수했다.

F-51 무스탕기 직접 지휘·공격…적 탱크 지리멸렬
7월 2일 이근석 대령은 양 날개에 태극마크가 선명한 F-51 무스탕기를 직접 지휘, 현해탄을 건너 대구 동촌비행장에 무사히 안착했다. 미 극동공군의 전투기 제공계획에 따른 1차분 10대가 한국에 도착했던 당시의 전황은 한강방어선을 돌파한 적이 수원을 점령하고 경부축선을 따라 남진을 계속하고 있었다. 1950년 7월 4일 무스탕편대의 편대장이 돼 첫 출격에 나섰다. 지상에서는 편대의 장도를 기원하는 기지 장병들의 환성이 울려 퍼졌다. 편대와 더불어 기지 상공을 서서히 선회해 장병들에게 답례한 그는 북으로 기수를 돌렸다. 편대가 평택 상공에 들어서자 도로를 따라 남진하고 있는 적의 무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갑작스런 무스탕기의 출현에 적은 당황하고 있었다. 편대장 이근석 대령은 “공격을 개시하라”는 무전명령을 각 편대기에 하달하고, 편대에서 이탈해 급상승한 후 이어 급반전 강하로 적의 머리 위로 내리 닥치며 기총소사를 가했다. 뒤따르던 편대기들도 편대장의 뒤를 이어 급반전 강하를 하며 적을 공격했다. 흩어졌던 편대기들의 전열을 정비하면서 단숨에 수원을 지나 안양-시흥 가도에 이르렀을 때, 초저공비행으로 선두에서 적진을 탐색하던 이근석 대령의 시야에 남하중인 4000~5000명의 적을 호위하고 있는 20여 대의 탱크가 눈에 들어왔다.

이근석 편대장은 “전방에 적 탱크 발견, 로켓탄 공격개시”라는 지시와 함께 기수를 급상승시켰다. 당황한 적은 계속 대공포를 쏘아댔고, 갑작스런 공습에 적 탱크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급강하를 시작한 그가 적 탱크를 향해 로켓탄을 발사하자 번쩍이는 섬광에 이어 검붉은 연기에 휩싸여 폭발하고 말았다. 이어 2번기와 3번기의 공격이 계속됐고, 적의 탱크들은 화염에 휩싸인 채 오도 가도 못했다. 편대의 1차 공격을 끝내고 나머지 탱크에 재차 공격을 가하기 위해 이근석 대령은 급강하를 시작하며 로켓탄을 발사했다. 적 탱크를 폭파하고 기수를 올리려는 순간 난사하는 적의 포탄 중 한 발이 그가 조종하는 전투기의 엔진에 명중했다. 순식간에 기체는 붉은 화염으로 휩싸였고 도저히 수습할 길이 없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이근석 편대장은 정신을 가다듬고 푸른 하늘로 마지막 상승을 시도했다. 그는 지상의 적정을 살핀 후 뒤따르는 편대기에게 “3번기 도로 좌방 탄약차량 공격, 건투를 빈다”라고 강한 어조의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이와 동시에 그의 불붙은 기체는 하늘에 반원을 그리며 적 탱크를 향해 돌진해갔다. 이어 지상에서는 화산이 폭발하는 듯한 폭음이 진동했다. 34세의 젊은 나이에 장렬히 산화한 이근석 대령은 사후인 1951년 9월 19일 태극무공훈장의 추서와 동시에 공군 준장으로 진급했으며, 1957년 4월 28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장군묘역 1-2에 안장됐다.

“우리는 이 바다위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쳤다” ③ 손원일 해군 제독
해군 창설·해상 제해권 확보 주역…초대 해군 총참모장

대한민국 해군 창설의 주역인 손원일 제독은 1909년 5월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에서 종교인이자 항일 독립투사였던 손정도 목사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1930년 상해 국립중앙대 농학원 항해과를 졸업한 후 1945년 조국광복과 더불어 해군창설에 투신했다. 그는 해군이 정식 발족됨에 따라 초대 해군총참모장으로 취임했다. 손 제독은 1950년 6월 25일 전쟁발발 첫날부터 북한 공산군의 해상침투를 막아서며 유엔해군과 더불어 동·서·남해에서 제해권을 확보했다.

해군 총참모장으로 북 해상상륙 무력화
   
▲ 국립묘지를 찾은 한 어린이집 원생들이 참전용사들의 묘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
그는 예하 전 부대에 비상경계 돌입과 전투준비에 임할 것을 명령하고 동·서·남해의 해상경비를 강화하는 등 해군총참모장으로서 6·25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크게 공헌했다. 특히 개전초기 옥계해전과 PC 701함의 해전 승리는 초기의 승리라는 상징성 뿐만 아니라 제해권 확보라는 전략적 의의가 내포돼 있었다. 당시 동해안을 따라 남침한 북한군 제766유격부대는 옥계 등지의 해안을 공격목표로 6월 25일 새벽 4시 해안상륙을 시도했다. 동해안 경비임무를 담당하고 있던 YMS 509정이 묵호항에 정박하고 있었고 적의 상륙 사실을 보고받은 사령관은 이를 해군본부로 타전했다.동시에 YMS 509정의 현지출동을 명령했다. 묵호경비부사령관으로부터 상황을 보고받은 손 총참모장은 즉시 “긴급출동 지시, 북한수송선단 남침, 옥계 해안에 적군 상륙 중, 긴급 출동하여 격침하라”는 전문을 YMS 509정에 하달했다.

인천상륙작전 등 해상 주요작전 승리 이끌어
6시에 묵호를 출항해 북상한 509정은 짙은 안개로 시계가 불량한 해상을 2시간 동안 항진한 끝에 한 척의 배를 발견했다. 아군의 경비정으로 오인한 509정이 발광신호를 보내며 접근해가자 상대편 배는 509정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509정도 37㎜포와 중기관총으로 사격을 가해 붉은 인공기가 휘날리고 있는 적함의 철판을 명중시켰다. 50분간 교전을 벌이던 적함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북으로 도주했다. 509정은 피격된 선수를 수리하기 위해 묵호로 귀항한 뒤 긴급수리를 마치고 교전을 벌였던 해역으로 다시 출동했다. 하지만 적은 이미 상륙한 후였다. 오후 5시 30분 509정은 해안선에 있던 상륙정 1척을 완전 격파하고 또 다른 발동선 1척을 노획해 묵호경비부에 인계하는 전과를 거뒀다. 이 전투를 계기로 대한민국 해군은 동·서·남해 제해권을 확보했으며, 이후 통영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 동·서해안 철수작전, 동·서·남해 해상봉쇄 및 소해작전 등 해상 주요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다. 정부는 해군육성과 확장에 전심전력을 경주하고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공헌한 해군총참모장 손원일 중장에게 1953년 4월 5일 금성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1953년 6월 해군총참모장(해군중장)으로 예편했고, 같은 해 8월 제5대 국방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국군의 날과 현충일 등을 제정했다. NM
 

ⓒ 뉴스메이커(http://www.newsmaker.or.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  

     
전체기사의견(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전체기사의견(0)
뉴스메이커About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우)110-999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1가 163 광화문오피시아빌딩 14층 뉴스메이커 | 전화 : 02-733-0006 | 팩스 : 02-733-0009
청소년보호책임자 : 안상호
뉴스메이커는 (주)뉴스메이커에서 발행하는 시사종합월간지로서 특정언론과는 전혀 무관한 완전한 자유 독립 언론입니다.
뉴스메이커를 통해 제공되는 모든 콘텐츠(기사 ·사진)는 무단 사용, 복사, 배포시 저작권법에 저해되며,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뉴스메이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newsmaker.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