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하고 은밀한 연애, 그러나 참혹한 그 이중적인 풍경

“또 다시 희망이라니. 손가락 헤아리는 세 살 아이처럼 1에서 12까지 세고 싶다는 것인가. 한 번만, 마지막으로 꼭 한 번만 더 헤아려보자.”(『연애, 하는 날』 ‘작가의 말’ 中)

▲ 최인석 작가는 희곡작가로 등단해 대한민국문학상, 백상예술상, 영희연극상 등을 수상했으며, 《소설문학》 장편소설 공모에 『구경꾼』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지난해 가을 계간 《문예중앙》의 새로운 시작과 함께 화제를 모으며 일 년간 연재된 최인석의 장편소설 『연애, 하는 날』이 출간되었다. 최인석 작가는 희곡작가로 등단해 대한민국문학상, 백상예술상, 영희연극상 등을 수상했으며, 《소설문학》 장편소설 공모에 『구경꾼』이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소설집 『혼돈을 향하여 한걸음』, 『구렁이들의 집』, 『목숨의 기억』 등이 있고, 장편소설 『내 마음에는 악어가 산다』, 『이상한 나라에서 온 스파이』, 『그대를 잃은 날부터』 등이 있다. 열 번째 장편소설을 발표하는 중견작가 최인석의 힘을 확인할 수 있는 『연애, 하는 날』은 매혹적이면서도 파멸적인 연애들이 꽃피고 스러져가는 참혹한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연애로 도피할 수밖에 없는, 연애 그 자체에 기댈 수밖에 없는, 연애로 인해 파멸할 수밖에 없는 인물들을 통해 오늘날의 익숙하면서도 낯선 삶의 구석구석을 포착해낸 리얼리즘 소설로 무언가를 가지기보단, 더 많이 잃어본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것을 해보는 여자와 애초에 사랑보다는 물질의 논리에 길들여진 남자, 그리고 그들을 얽고 있는 다중의 관계들 속에서 은밀한 연애가 꿈꾸게 하는 것, 맛보게 하는 것, 또 그것이 돌려주는 것, 남기는 것은 무엇인가를 냉정하게 묻고 있다.

Q. 이번에 새로 펴내는 소설이 1년간 계간지에 연재했던 건데, 연재할 때와 전작을 쓸 때하고 어느 쪽이 더 어렵나?
- 연재할 때가 더 어려운 거 같다. 계간지가 석 달에 한 번 나오니까 만만할 수도 있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산술적으로는… 그런데 한번 쓰고 나서 석 달이 지나고 나면 그 흐름이라거나 내면화되어 있던 소설 속 인물이라거나 정경이라거나 이런 게, 그러니까 호흡이 딱 끊겨버리는 거 같다. 다음 회 마감이 닥치면 또다시 그 호흡을 이어가기 위한 준비에만도 한참 시간이 걸리고 그렇더라.

Q. 최인석 소설 가운데 제일 악착스러운 작품이 뭐라고 생각하는가? 내 생각에는 「구렁이들의 집 」인 거 같다.
- 글쎄. 그걸 쓸 무렵이 조금 그랬다. 그 무렵이 「혼돈을 향하여 한 걸음」이라거나 「약속의 숲」이라거나, 그런 걸 쓸 때였으니까. 「구렁이들의 집 」의 시기는 이미 지나갔다. 누가 썼는지도 잊었다고 해야 할 거다. 내게는 무척 고통스럽던 시절이었다.

Q. 소설 제목이 연애 다음에 쉼표 찍고 하는 날 이던데  이에 대해 설명을 해준다면?
- 최인석 설명이라고 할 만한 것이 그다지 없다. 왜냐하면 지금도 그 제목이 맘에 썩 들지는 않는다. 원래는 제목을 ‘늙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하려고 했다. ‘연애, 열세 아해들의’라는 제목도 생각했고. 연애라는 것이 얼마나 고약할 수 있는 것인지 암시하는 제목인 것 같아서다. 그런데 주변에서 안 된다고 말려서 할 수 없이 연애 이야기니까…… 그냥 ‘연애’라고 할까 하다가, 그건 또 성에 안 차고 뭔가 부족한 거 같고. 그래서 앞에 ‘연애’ 놓고 뒤에는 앞의 연애를 야유하는 기분으로 ‘하는 날’을 붙였다.

▲ 《문예중앙》의 새로운 시작과 함께 화제를 모으며 일 년간 연재된 최인석의 장편소설 『연애, 하는 날』

Q. 소설 속 소제목들을 훑어보면 ‘이월의 방’, ‘집과 집’, ‘집들의 표정’, ‘펜트하우스’ 등 ‘집’들이 많이 끼어 있다. 소설 제목을 ‘집’이라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다. 왜 ‘집’들이 강조되고 있는가?
- 집이 물리적 공간이지만 그것은 건물을 말하는 것이고, 우리가 가정이라고 할 때의 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다. 가장 친밀하고 가장 편안하지만 또한 가장 끔찍스러운 지옥이 되어버릴 수도 있는 그런 관계 말이다. 집보다는 오피스텔에서 연애가 잘 되듯, 공간의 성격에 따라 연애의 성격도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작가는 공간을 각별히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집이란 그런 인간관계와 물리적 공간을 동시에 뜻한다고 해야겠다. 연애라는 것은 어찌 보면 기대하기로는 가장 은밀하고 가장 친밀한, 어쩌면 결혼보다 사회적 인지를 덜 필요로 하기 때문에 훨씬 더 은밀하고 사적인 인간관계라 할 수 있다. ‘그런 인간관계가 집이라는 것과 더불어 물질이나 물적 관계로 하여 어떻게 피폐하고 참혹한 지경이 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Q. 그런데 그 집들이 하나도 행복하지가 않다. 한국 사회의 각 계층을 보여주는 집들이 거의 다 나왔는데, 특히 집들 중 펜트하우스라고 이름 붙인 곳이 가장 불행한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두영이라는 인물과 그의 펜트하우스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 적과 도둑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뭐든 쌓아놓고 보는 것. 허영과 욕망이라 할 수도 있겠고. 그 펜트하우스는 사실 펜트하우스가 아니다. 허망한 욕망의, 진정 아무런 가치 없는, 심지어는 자신의 욕망마저도 아닌 거지. 그런 누추한 욕망의 하수구다. 그것이 두영에게는 펜트하우스다. 두영에게만이 아니다. 멋진 펜트하우스에서 살고 있거나, 그곳에서 살기를 꿈꾸는 이들 상당수에게도 그럴 거다.

Q. 이 소설에서 영화감독 강대일과 플래시몹을 하는 학생 주미, 두 사람의 예술가가 나온다. 하나의 예술론으로도 읽힐 수 있다고 보는데, 어떤가?
- 영화감독 대일이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무척 뜻밖이다. 주미가 예술가라는 말도 의외고. 그저 철딱서니 없는 아이를 그렸을 뿐이다. 어려운 환경에서 제 길 찾아가려 애쓰는… 대일이라는 자, 역할이 영화감독이라지만 난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영화에 대해 아는 것들이 좀 있어가지고 대일이 이야기가 길어졌을 뿐이다.

Q. 직접 감독을 한번 해보는 것은 어떤지?
- 그럴 인물이 못 된다. 사실 연극 연출을 해본 적이 있다. 희곡만 쓰다가 연출은 딱 한 번 한 적이 있는데, 그때 깨달았다. 배우들 통제하고, 그들과 소통하며 무대 만드는 일이 너무 힘들더군요. 아무리 사소한 역할을 하더라도 배우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예술가’지 않나. 그들의 의견을 다 들어주고 고집과 타협점을 찾아야 하고, 그런 일들이 내게는 너무 힘들었다. 어떤 때는 그들의 생각을 내가 통제하고 잡아끌고 내 확신을 휘두르며 가야 되는데, 그게 안 되더라.

Q. 소설 속의 연애들은 결국 무참한 종말을 맞는다. 그럼에도 희망적인 메시지가 있나?
-  나는 최선을 다해 희망을 찾아가는 중이다. 희망이라는 것이 저 바깥에, 어딘가에, 마치 조물주가 세상을 만들어내듯,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가 선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만들어내야 하는 것이다.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로 희망의 요소를 내 나름으로 담아냈다. 나는 수진이나 상곤이 같은 인물 가운데, 그들의 비참한 삶 가운데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수진이나 상곤이처럼 완전히 망가져버린 듯한 삶, 죽음으로 내몰리는 그들의 삶 가운데 뭔가 우리가 다시 들여다보아야 할 인간의, 인간관계의 싹이 있을 거다. 난 수진이나 상곤이 결코 패배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패배 가운데 사실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는다. 슬픔과 좌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내야 하는 삶, 감당해내야 하는 세계, 그런 자세.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난 시지프스나 프로메테우스 같은 존재를 본다.

Q. 마지막으로 소설가들이 비평가들에 대한 불만들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드는데……
- 많죠. 그 얘기를 꺼냈다가 내가 비평가들에게 욕을 얼마나 먹으려고? 나는 비평가들이 엉뚱한 이야기를 할 때, 그럴 때가 상당히 많은데 그럴 때 가장 안타깝다. 소설은 분명 비평가의 머릿속에 있는 지도와는 다른 것인데, 자기 머릿속 지도에 꿰맞추어 판단하고 이야기하려고만 할 때 그럴 때 정말 갑갑하다. 요즘 비평가들에게 가지게 되는 가장 큰 불만은 ‘왜 그렇게 글들을 안 쓰는가’다. 한때 그런 시절도 있었잖나? 계간지 몇 가지를 읽으면 당대 문학예술의 현실이라거나, 이놈의 세상의 생김생김이라거나, 그런 것을 비춰보고 현실을 이해하고 짐작할 수 있는 그런 힘이 있는 글을 만날 수 있었는데······. 하지만 요즘은 그런 글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늘의 문학을 조감하면서 그 안에서 작품 하나하나의 자리를 돌아보게 만들어주는 글들이 별로 없는 거 같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