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주의자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취임       1901년
남북전쟁 후 산업화가 본격 진행되면서 미국에는 새로운 기업이 넘쳐났고 기업가들은 이익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경쟁자를 쓰러뜨리고 승리한 기업에는 독점의 문이 열렸으며 기업가에는 부와 권력이 쥐어졌다. 바야흐로 무한경쟁의 시대이자 독점의 시대였다. 특히 록펠러의 독점기업들은 담합을 통해 멋대로 가격을 조작하고, 막강한 경제력으로 의회까지 매수해 입법과정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기업·정부의 유착관계는 윌리엄 매킨리가 독점기업들의 도움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1900년 절정을 이뤘다. 백악관은 거대기업의 일개 지점으로 전락하고 대통령은 거대 금융조직의 워싱턴지부 책임자처럼 비쳤다.
그러나 1901년 9월 매킨리가 무정부주의자에게 피살되고 시어도어 루스벨트(1858~1919) 부통령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미국에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개혁의 기수’ 루스벨트의 등장은 정경유착의 기업가·정치인들에게는 피하고 싶은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1901년 9월 제26대 대통령에 취임한 루스벨트는 곧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보수주의자들이 그토록 우려했던 혁신주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루스벨트는 철도에 대한 독점권을 행사해온 노던회사를 첫 제물로 삼아 사실상 잊혀졌던 ‘셔먼 반트러스트법’을 부활시켰다. 독점기업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재임기간 7년동안 43개의 독점기업을 제소한 루스벨트를 가리켜 기업가들은 ‘트러스트의 파괴자’라고 불렀다. 1904년 재선에 성공한 루스벨트는 철도회사의 부당행위와 국민건강에 해가 되는 식품·약품을 규제하는 법들을 잇따라 제정했고,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를 제소했다.
또한 러일전쟁을 종결지은 포츠머스 조약(1905년 9월)을 중재해 미국인 최초로 1906년 노벨상(평화상)을 수상했다. 1908년 윌리엄 태프트를 후계자로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시켰으나 태프트가 보수세력과 밀착하자 1912년 선거 때는 자신이 직접 출마해 태프트를 낙선시키는 복수전을 펼쳤다.
 
■대종교 창시 독립운동가 나철 사망         1916년       
대종교는 일제 치하 내내 전개된 항일 무장투쟁, 임시정부를 통한 외교투쟁,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문화투쟁의 중심에 있었다. 임시정부의 주요 인사는 물론 민족지도자들과 역사?국어학자들, 무장 독립운동가들 중 상당수가 대종교 신자였으리만큼 일제 하에서 대종교의 영향력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이 대종교를 중광(重光) 즉 부활시킨 이가 홍암 나철(1863~1916)이다.
나철은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1891년 문과에 급제하고 1895년 징세국장(현 국세청장)에 임명되었으나 을미사변으로 국모가 시해당하는 등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관직을 사직하고 구국운동에 뛰어들었다. 구국의 첫 행보는 ‘동양평화론’을 앞세운 민간외교였다. 1905년 6월 처음 방문한 일본 도쿄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특명전권대사로 조선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토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조선의 주권을 보장하고 동양평화를 위해 한중일 3국이 친선동맹을 맺을 것을 촉구했으나 회신이 없자 천황 궁성 앞에서 3일 동안 단식을 벌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분통해 하며 1906년 1월 귀국했다. 1906년 5월과 9월 두차례 일본을 더 방문했다가 외교투쟁의 한계를 깨닫고 돌아와 비밀결사 조직 ‘자신회’를 기반으로 을사5적 처단에 나섰다. 1907년 3월 25일 동시다발적으로 을사5적의 암살을 시도했으나 준비 부족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07년 7월 유배 10년형을 선고받아 전남 무안군 지도로 유배되었다가 고종의 특사조치로 4개월만에 풀려났다.
나철은 단군신앙의 중광을 본격적으로 모색했다. 그리고 1909년 1월 15일(음력) 밤 12시, 오기호, 최전, 유근, 정훈모, 이기 등 뜻을 같이 하는 수십 명의 동지들과 함께 서울 재동 취운정 아래 초가집 북벽에 ‘단군대황조신위’를 모시고 ‘단군교포명서’를 공표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단군교’를 중광했다. 나철이 교주에 해당하는 ‘도사교’에 취임한 가운데 그를 비롯 주요 동지들은 과거의 몰민족적 자아를 탈각하는 종교적 통과 의례의 하나로 자신들의 이름을 외자로 모두 개명했다. 나인영은 나철, 최동식은 최전, 김교헌은 김헌, 신규식은 신정, 조완구는 조량이 되었다. ‘창교’라 하지 않고 ‘중광’이라 한 것은 단군의 옛 가르침을 다시 펼치겠다는 각오이자 고려 때 원나라에 의해 말살되었던 왕검교를 700여년 만에 부활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일제가 단군교를 항일독립단체로 규정하자 나철은 일제의 탄압을 비껴갈 생각으로 1910년 8월 5일(음력) 단군교를 전래의 교명인 ‘대종교(大倧敎)’로 바꿨다. ‘대종’이란 밝고 큰 옛사람인 ‘한일’ 혹은 ‘단군’을 뜻한다. 그래도 일제가 대종교를 종교로 인정하지 않아 국내 포교활동이 어렵게 되자 1911년 7월 서울을 떠나 중국 화룡현 삼도구 청파호에 거점을 마련했다. 1914년 5월 13일에는 대종교 총본사를 아예 이곳으로 옮겨 만주항일투쟁의 근거지로 삼고 백두산을 중심으로 사도본사(四道本司)로 나누어 각각의 책임자를 임명했다. 동만주에서 연해주를 총괄하는 동도본사는 서일, 남만주에서 산해관까지 이르는 서도본사는 신규식과 이동녕, 북만주에서 만주리까지 총괄하는 북도본사는 이상설, 한반도 전역을 통괄하는 남도본사는 강우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대종교가 조선인 사이에 급속도로 번지자 중국 정부가 1914년 11월 해산령을 내렸다. 나철은 대종교를 종교로 인정받기 위해 1915년 1월 남도본사가 있는 서울로 돌아왔다. 1915년 10월 일제가 포교규칙을 공표해 종교 등록을 받을 때 나철 역시 ‘신교’라는 이름으로 등록 신청서를 냈으나 총독부는 다른 종교단체는 모두 등록을 받아 주면서도 대종교만은 받아 주지 않았다. 단군을 인정하면 동화정책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불법화시킨 것이다. 결국 남도본사가 1916년 강제 해산되자 나철은 단군의 마지막 행적을 따라 김두봉(한글학자) 등 6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구월산 삼성사로 들어갔다. 그리고 1916년 8월 보름날(양력 9월 12일) “오늘부터 3일간 절식수도에 들어갈 것이니 문을 열지 말라”며 방문을 봉하고는 대종교의 수행법인 조식법에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제1회 미스 아메리카 선발대회 개최     1921년
‘미스 유니버스’(1921년), ‘미스 월드’(1951년), ‘미스 인터내셔널’(1960년)은 세계 3대 미인대회로 꼽힌다. 그 중 ‘미스 유니버스’는 미인대회의 원조격으로 숱한 화제를 뿌리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21년 9월 7일 미 뉴저지주 애틀랜틱 시티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조그만 이벤트가 열렸다. 8명의 여성들이 해변가에서 ‘수영복 미인대회’를 연 것이다. 한 지방 신문사 간부가 노동절 연휴를 맞아 관광객을 끌어들일 목적으로 고안해낸 행사였다. 대회였던 만큼 순위를 가리지 않을 수 없었고 영예의 1위는 워싱턴 D.C. 대표로 출전한 16세의 마거릿 고먼양에 돌아갔다. 키 155cm, 몸무게 49kg, 가슴둘레 76cm, 허리둘레 63cm, 히프둘레 81cm의 자그마한 체구였다. ‘미스 아메리카’가 처음 탄생하는 순간이었고, 얼굴만이 아니라 몸매까지도 미인의 기준이 되는 새로운 시대의 개막이었다.
그러나 생소한 수영복 심사와 출전자들의 교양 미달로 급기야 1927년 대회가 중단되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대회는 결국 출전자들의 재능을 심사분야에 포함시키고서야 1935년 부활되었다.  대회가 점차 인기를 더해가자 주최측은 1952년 롱비치 해변에서 각국 미녀 29명을 초청한 제1회 ‘미스 유니버스’를 개최했다. 국내용인 ‘미스 아메리카’와 국제용인 ‘미스 유니버스’를 분리한 것이다. 1957년 5월 19일 개최된 제1회 ‘미스 코리아대회’도 실은 ‘미스 유니버스’에 출전하기 위한 한국대표를 선발하는 대회였다. 미인 대회가 인기를 끌수록 여권 운동가들의 반발도 거세져 1968년에는 대회장 밖에 양을 끌고 와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대회 참가자들이 온순하고 어리석은 양과도 같다”는 메시지였다.

■‘굴욕외교의 대명사’ 뮌헨회담      1938년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침공·합병한 히틀러가 다음 단계로 노린 것은 체코령 주데텐란트였다. 히틀러가 1938년 9월 초 주데텐란트를 요구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운명은 풍전등화에 놓였다. 주데텐란트에 독일계 주민 300만명이 거주하고 있긴 하지만 그 지역이 주요 공업지대였던 터라 체코로서는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체코가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한 가운데 히틀러는 자신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머뭇거렸다. 히틀러에게 주데텐란트를 넘겨주면 전쟁의 파국만은 피할 수 있다는 한 가닥 희망 때문이었다. 영국은 체코 때문에 전쟁에 휘말려서는 안된다고 계산했고, 프랑스 역시 전쟁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주데텐란트를 넘겨주는 것에 내심 찬성했다.
이런 상황에서 1938년 9월 15일 69세의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이 독일로 날아가 히틀러와 마주앉았으나 체임벌린이 회담에서 얻어낸 것은 “다시 회담할 때까지 군사행동을 취하지 않겠다”는 히틀러의 약속 뿐이었다. 체임벌린은 영국으로 돌아와 “그는 냉혹하고 고집투성이이지만 한번 약속을 하면 믿을 수 있는 사나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지인에게 말했다. 9월 18일 영국의 체임벌린과 프랑스의 달라디에 총리는 ‘체코가 히틀러의 제안을 수락하도록 한다’는 데 합의한 뒤 다음날 회담 결과를 체코에 전달했다. 체코 정부는 합의내용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영·불 양국은 “체코가 거부한다면 체코의 운명에 관심을 갖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결국 체코는 “자신들의 평화를 위해 우리를 희생시킨다”고 볼멘 소리만 하다가 9월 21일 영불안을 받아들였다. 힘없는 국가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고 약소국의 비애였다.
9월 22일 독일에서 가진 히틀러·체임벌린의 두번째 회동에서 히틀러는 “주데텐란트를 10월 1일까지 넘기라”는 전보다 더 강경한 조건을 제시했다. 영불이 최종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때 체코는 “10월 1일의 시한을 거부한다”며 9월 23일 군 총동원을 내렸다. 그래도 히틀러는 “10월 1일 주데텐란트를 손에 넣겠다”며 체코를 압박했고, 유럽 전역에는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영국의 체임벌린과 프랑스의 달라디에는 히틀러와 무솔리니와 마지막 담판을 짓기 위해 9월 29일 독일 뮌헨으로 달려갔다. 회담은 29일 낮 12시 45분에 시작되어 9월 30일 새벽1시가 조금 지나 끝났다. 결과는 체코의 주데텐란트를 독일로 양도한다는 ‘뮌헨협정’ 서명이었다. 히틀러의 요구를 거의 원안대로 수락한 협정 내용이 발표된 후 독일군은 주데텐란트에 무혈입성했다. 80만명의 체코인을 포함 380만명의 인구와 2만8500㎢의 영토, 그리고 체코 공업자원의 75%가 하룻밤 사이에 히틀러의 수중에 떨어진 것이다. 마지노선을 제외하고는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주데텐란트의 방위선도 붕괴되었다.
회담을 마친 후 체임벌린은 마치 항구적인 평화라도 보장받은 양 의기양양하게 영국으로 돌아와 뮌헨협정의 사본을 흔들어 보이며 “나는 이것이 우리 시대의 평화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자랑했다. 영국인들은 이런 체임벌린에게 ‘전쟁을 예방한 영웅’이라고 찬사를 쏟아냈다. 노벨평화상을 주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이듬해 3월 히틀러가 체코의 나머지 영토까지 점령하고 같은 해 9월 폴란드를 침공해 2차대전을 일으킴으로써 체임벌린은 ‘평화의 사도’에서 ‘굴욕외교의 대명사’로 전락했다. 뮌헨협정은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영국과 프랑스가 추구했던 유화정책의 비극적인 절정이었다. 체코를 나치의 이리떼들에게 던져줌으로써 서방은 기껏 세계대전에 대비할 수 있는 약간의 시간만 벌었다.
2차대전에서 살아남은 히틀러 측근들은 뮌헨협정이 성립되지 않았다면 히틀러가 10월 1일 체코를 침공했을 것이라는 데는 의견이 일치한다. 그러나 영불의 전쟁개입으로 그 전쟁에서 순식간에 패했을 것이라는 데도 의견을 같이한다. 결국 영불의 두 정상이 잠깐동안의 평화를 위해 히틀러에게 무장을 강화할 수 있는 시간과 자원을 제공해준 꼴이 된 것이다.

■히로히토 천황, 맥아더 사령관 방문       1945년
맥아더는 일본 주둔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부임하기 전 만해도 히로히토 천황을 전범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연합국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소련은 물론 호주까지 천황을 전범 처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호주는 태평양전쟁 당시 호주 포로들을 일괄 처형한 유일한 사람으로, 또한 수만 명의 전쟁 포로들을 학대한 장본인으로 천황을 지목했다. 미국에서도 ‘히로히토=전범’ 여론이 우세했다. 갖은 학대를 받았던 연합국 포로들은 천황에 진저리를 치고 있었고 중국의 분노는 더 이상 말할 것도 없었다.
맥아더의 생각에 변화의 조짐이 보인 것은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일본에 진주한 후였다. 일본의 각료들로부터 “천황이 그대로 자리를 지켜야 일본을 통치하는 게 더 쉬워질 것이다”, “천황은 일본 내 좌익혁명세력을 억제하는데 20개 사단의 힘을 갖고 있다”는 등의 보고를 받은 후부터 생각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맥아더가 히로히토를 직접 만날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차에 맥아더의 한 참모가 히로히토에게 맥아더를 방문할 것을 제안했다. 히로히토는 자신을 전범 처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연합국 내에서 높은 상황에서 맥아더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달라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전긍긍하다가 1945년 9월 27일 오전 10시 도쿄 미국대사관의 맥아더를 찾아갔다. “방문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는 맥아더의 첫 반응에 히로히토는 안도하면서도 맥아더가 시가를 권했을 때 손이 떨려 불을 붙이지 못할 정도로 여전히 긴장을 풀지 못했다.
잠시 후 히로히토는 “제가 책임을 모두 지기 위해 이렇게 왔습니다.”라며 생전 처음 ‘짐’이란 호칭 대신 ‘나’라는 단어를 썼다. 히로히토가 자신을 전쟁범죄자로 기소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할 것으로 예상했던 맥아더는 히로히토 자신이 전쟁수행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말을 듣고 감동했다. 비교적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35분간의 회의가 끝났을 때 히로히토의 얼굴에는 안도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날 두 사람은 사진을 찍었다. 맥아더는 황갈색 군복 상의에 넥타이도 매지 않은 채 양손을 뒷주머니에 찔러넣은 모습이었고 히로히토는 옆에서 초췌한 표정의 부동자세로 서있는 모습이었다. 히로히토의 작은 키는 맥아더의 어깨에도 못미쳤다. 일본 언론은 거대한 맥아더와 왜소한 히토히토의 사진에 질겁하여 보도를 거부했으나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명령에 의해 보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세상에 공개된 사진은 한동안 일본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나 곧 천황에 대한 연민과 동정으로 바뀌었다. 맥아더는 트루먼 미 대통령에게 “천황은 전 일본인을 묶는 구심점이며 천황을 전범으로 몰아 처형한다면 혼란과 무질서를 가져올 것”이라고 보고했다. 미 의회와 트루먼은 맥아더의 보고를 받아들여 “전범 체포작업은 지속적으로 진행한다. 그러나 천황을 해치는 어떠한 행위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미국의 대일본 정책을 수정·하달했다. 트루먼은 또한 일본으로 떠나는 조셉 키난 국제전범재판소의 수석 검사에게 “히로히토를 전범 대상에서 제외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천황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상황이 점차 호전되어가는 것을 알았는지 히로히토는 1946년 1월 1일 “짐은 현인신이 아니다”는 이른바 인간선언으로 허리를 더 낮췄고 그 덕에 88세까지 장수했다.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 ‘라쇼몽’ 베니스영화제 대상 수상    1951년
1940년대까지, 세계 영화계에 아시아는 없었고 문은 닫혀 있었다. 그 문을 열어젖힌 이가 구로사와 아키라(1910~1998)감독이다. 그는 일본에서 영화의 신이고 전설이다. 세계 영화계가 일본의 영화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1951년 9월 10일 베니스영화제에서 구로사와가 영화 ‘라쇼몽(羅生門)’으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고부터였다. 전후 숨죽여왔던 일본 영화는 그때부터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구로사와는 한 프랑스 평론가가 말했듯 “일본인 정신세계의 또 다른 왕”이었다.”
도쿄 사무라이 집안의 후손으로 태어나 화가를 꿈꾸었던 구로사와는 형의 자살과 누나의 병사를 겪은 뒤 26세에 영화계에 입문했다. 1943년 한 젊은이의 정신적 성장을 다룬 ‘스가타 산시로’로 영화계에 데뷔한 그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소설 ‘라쇼몽’과 ‘숲속에서’를 하나로 묶어 영화 ‘라쇼몽’을 만들었다. 영화가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 그는 세계적인 감독 반열에 올랐다. 그 후에도 ‘이키루’(1952년)로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을 수상하고, 세계최고의 전쟁서사시라는 격찬을 받은 ‘7인의 사무라이’(1954년)로 베니스영화제 은사자상을 받아 일본 영화의 예술성을 세계에 알렸다. 1980년엔 70세 나이에도 불구하고 ‘가케무샤’로 칸영화제 그랑프리까지 거머쥐어 식지 않는 예술혼을 불태웠다. ‘라쇼몽’은 1982년 베니스영화제 역대 대상 가운데 최고작품으로 선정되었고 그는 그해 세계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10대 감독에 당당히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처럼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지만 시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3년 동안 준비해온 20세기폭스사의 ‘도라! 도라! 도라!’ 촬영 도중 해임당하고 영화 ‘도데스카덴’이 흥행에 실패하자 1971년 자신의 목욕탕에서 자살을 기도했다. 일본적 소재를 즐겨 다루면서도 스타일과 기법은 서구적 방식을 중요시하는 그의 영화들은 프랑스 누벨바크 감독이나 프랜시스 코폴라, 조지 루카스, 스티븐 스필버그 등 세계적인 거장들에게 영향을 미쳐 그들은 구로사와를 기꺼이 스승으로 모신다.
‘라쇼몽’과 ‘7인의 사무라이’는 흔히 ‘시민 케인’ ‘모던 타임즈’와 나란히 영화사상 걸장 10편에 꼽히곤 한다. ‘일본 영화의 천황’ ‘20세기 일본 영화계의 셰익스피어’라는 찬사 속에서 30여 편의 대작을 만들며 한 시대를 풍미한 구로사와였지만 세월 앞에서만은 어쩔 수 없었다. 1998년 9월 6일, 향년 88세로 사망했을 때 스필버그 감독은 “우리의 스승이 눈을 감았다”며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출간     1962년
1958년 1월 레이첼 카슨(1907~1964)에게 편지가 도착했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정부가 살충제인 DDT를 대량 살포했는데 이 살충제 때문에 새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내용의 친구가 보낸 편지였다. 카슨은 그전부터 DDT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1945년 DDT의 폐해에 대한 글을 리더스 다이제스트 등 몇몇 잡지에 기고했으나 살충제 제조회사의 광고가 떨어질 것을 우려한 잡지사들의 거부로 실리지 않았었다. 카슨은 유방암과 십이지장궤양 등의 병마와 투병 중인데도 친구의 편지를 계기로 이후 4년 동안 DDT의 해독에 관한 자료 조사와 집필에 매달렸다.
레이첼 카슨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글쓰기에 재능이 있었던 그는 1925년 펜실베이니아 여자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했다가 동물학으로 전공을 바꿔 졸업했다. 1932년 존스홉킨스대 대학원에서 동물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에는 해양과학연구소의 해양생물학자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1936년부터는 미국 어업국 소속 공무원으로 해양에 관한 라디오 프로그램 시리즈를 쓰고 어류에 관한 보고서나 소책자를 작성했다. 1940년 어업국이 어류야생동물청으로 승격한 뒤에는 그곳에서 발간하는 모든 출판물에 대한 편집장으로 활동하며 ‘해풍 아래서’(1941년)와 ‘우리 주변의 바다’(1951년)를 출간했다. ‘우리 주변의 바다’는 기존의 과학도서와는 달리 해양과학적인 내용을 매혹적인 묘사로 연결시켜 마치 한 편의 아름다운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주어 32주간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고 86주 동안이나 베스트 순위에 오르며 카슨에게 명성과 부를 안겨주었다.
카슨은 1952년 공무원직을 사직하고 1955년 '바다의 가장자리'를 출판, 3권의 바다시리즈를 완성했다. 친구의 편지를 계기로 집필을 시작한 DDT 연구는 1962년에 완성되었다. 연구결과를 발췌한 내용이 ‘침묵의 봄’이라는 제목으로 언론에 처음 소개된 것은 그해 6월 16일자 뉴요커지(誌)였다. 2주동안 계속 연재된 기사에서 카슨은 ‘기적의 화학약품’으로 칭송되던 DDT, 제초제, 살균제가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며 과학적 근거와 통계수치, 실제의 사례들을 들어 살충제의 폐해를 낱낱이 까발렸다. 그러자 농약제조업체들이 들고 일어섰다. 카슨을 가리켜 “살충제보다 더 독한 여자”라고 흥분하는가하면 내용을 소개하는 신문·방송사에는 광고를 끊겠다고 협박했다. 농약회사가 “카슨의 글은 부정확하고 또 악의에 찬 것”이라고 출판금지를 요청했으나 ‘침묵의 봄’은 1962년 9월 27일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책의 서두에는 이렇게 씌여 있다. “어느 날 낯선 병이 이 지역을 뒤덮어버리더니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낯선 정적이 돌아왔다. 봄이 돌아왔건만 새들의 지저귐은 들을 수 없고 들판과 숲과 습지에는 오직 침묵만이 흘렀다”. 카슨은 살충제 등 각종 화학물질의 대량 사용을 근거로 ‘침묵의 봄’이 머지 않아 도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에게 ‘침묵의 봄’은 곧 지구의 멸망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카슨은 환경위험의 증거로 미시간주의 이스트랜싱시(市)가 느릅나무를 갉아먹는 딱정벌레를 박멸시키기 위해 DDT를 살포한 것을 예로 들었다. 벌레들이 가을에 DDT가 뿌려진 나뭇잎을 먹고 울새들이 이듬해 봄에 이 벌레들을 잡아먹고 나서 1주일도 안되어 이스트랜싱의 거의 모든 울새들이 죽었다는, 카슨의 경고는 당시 번창일로에 있던 화학회사들에게는 메가톤급 핵폭탄이 되었다.
관련 업계와 과학계는 발칵 뒤집어졌다. 거대 화학회사들은 살충제가 없으면 해충의 번성으로 인해 기아와 죽음을 부를 수 있다는 자료집을 무료 배포하고 일부 농학자들은 “살충제를 쓰지 않으면 수확량이 90%나 줄어들어 ‘침묵의 가을’을 맞게될 것”이라며 카슨을 맹렬하게 공격했다. 카슨은 “농작물을 갉아먹는 해충들을 퇴치하기 위해 균류, 박테리아 및 그 외의 곤충들과 같은 생물학적 수단을 사용할 것”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사실 카슨의 ‘침묵의 봄’이 발간되기 전에도 살충제 DDT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지적한 학자들의 논문과 신문기사들은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사람들의 가슴 속에 DDT의 사용을 금해야 한다는 생각이 확실하게 자리잡게 된 데에는 ‘침묵의 봄’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침묵의 봄’이 불러온 여파는 컸다. 1963년 5월 대통령과학자문위원회가 “정부는 국민에게 농약의 가치와 동시에 그 위험성에 대해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으며 1969년에는 국가환경보호법이 제정되고 미 환경보호청(EPA)이 발족되었다. 1970년 4월 22일에는 미국에 ‘지구의 날’이 제정되었다.

■KAL 007기 사할린 상공에서 격추        1983년
“KAL기는 조종사 과실로 항로를 이탈해 소련 영공을 침범함으로써 원인을 제공했고, 소련 전투기는 확인절차를 소홀히 한 채 성급히 격추했다.” KAL기 사고 후 10년이 지난 1993년 6월 14일, 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결론을 내린 사고원인이다. 하지만 사실을 확인해줄 사자들은 말이 없었다.
KAL 007편 보잉 747 점보여객기가 미국의 뉴욕을 떠나 앵커리지를 거쳐 캄차카 반도 상공에서 소련 방공 레이다망에 잡힌 것은 1983년 9월 1일 새벽 0시15분(이하 한국시간)이었다. 당시는 미 정찰기가 수도 없이 출몰하던 때였고 이 때문에 소련 군부의 신경은 늘 날카로워 있었다. 이날 007기가 캄차카 반도 상공으로 들어설 때도 미 공군의 RC-135 정찰기가 007기와 평행으로 날다가 귀환했다. 그 뒤 지상에서는 소련 전투기 수호이가 날아올랐다. “목표물은 점멸등을 깜빡거리고 있다.” 분명 전투기 조종사는 이렇게 보고했으나 지상 관제소는 경고발사를 지시했다. 전투기 조종사는 훗날 “KAL기를 향해 조명탄을 발사했으나 응답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죽은 자는 여전히 말이 없다.
비극은 계속되었다. 007기가 고도를 높이자 전투기 조종사는 007기가 도망하는 것으로 간주해 관제소에 보고했고 관제소는 다시 격추명령을 내렸다. 전투기가 발사한 두발의 미사일이 날개 쪽 엔진과 꼬리 부분에 명중했다. 새벽 3시25분30초였다. “목표물이 파괴되었다.” 조종사의 보고와 거의 동시에 007기 내 경보장치가 “삐… 삐… ”거리며 시끄럽게 울어댔고 곳곳에서 절규가 터져 나왔다. 한국어, 영어, 일어로 된 기내방송이 계속해서 숨가쁘게 터져 나왔다. 3시27분8초, “도쿄(관제탑) 나오라”는 007기 기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도쿄 관제탑에 전달되었고 잠시 후 도쿄 관제소가 007기를 호출했으나 더 이상의 응답이 없었다.
그 시각, 007기는 29명의 승무원을 포함 269명의 승객을 태운 채 차디찬 사할린 바다 속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