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온갖 생명체를 끌어안는 무한한 포용력과 장중한 자태로 그 이면적인 세계를 압축하여 표현한다.” 박기수 화백의 작품세계를 두고 평론가들이 일컫는 말이다. 실제의 자연과는 확연히 다른 조형적 해석에 의해 표현된 산으로 자신만의 색이 담긴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는 박기수 화백을 만났다.

▲ 박기수 화백

경희대 대학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박기수 화백은 이탈리아, 일본, 중국, 러시아, 오스트리아, 캐나다 등에서의 해외전과 이형회 대상수상전을 비롯, 수많은 국내외전에 초대 출품한 국내의 내로라하는 중진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국내외의 ‘명산’을 재해석해 표현
박기수 화백의 작업은 ‘오랜 세월 산을 향한 구도의 간절한 언어들’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품격과 진지함을 갖추고 있다. 때문에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 세계가 단순한 자연주의가 아닌 더 의미 깊은 조형의 관문을 열었다고 평가한다. 지난 30여 년 간 ‘산’이라는 주제로 다양한 작품을 선보여 왔던 박 화백. 그는 “생활처럼 몸에 밴 산행을 통해 장엄하고 넉넉한 그 품안에 아주 작은 생명체들을 남김없이 거두어들이는 산의 이면을 보면서 철학적인 성찰과 더불어 그림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고 말한다. 직접 산을 보고 느끼지 않으면 그림을 그리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는 박기수 화백. 때문에 국내외에 손꼽히는 명산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찾아간다. 그리고 우리나라, 또 세계 각국의 명산들은 그의 눈과 손을 통해 시각적인 이미지로서의 강렬한 힘의 표현, 즉 신체적인 힘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질감을 통해 생명의 기운, 산의 정기를 새롭게 재해석되어 표현된다. 줄곧 두터운 물감으로 일관하는 박 화백의 작업은 스스로 힘에 부칠 만큼 거칠고 강렬한 필치를 구사하면서 더욱 강렬해진다. 단지 물감을 두텁게 바르는 행위의 연속으로 이루어지는 작업을 통해 산의 윤곽은 간신히 드러난다. 그렇지만 그의 붓 터치는 보는 이로 하여금 매우 경쾌하게 만든다. 형태를 의식하지 않고 단지 물감을 듬뿍 찍어 바르는 단순한 행위의 연속이 자연스럽게 리듬감을 촉발하는 것이다. 때로는 크고 거칠게, 때로는 부드럽고 잔잔하게 표현되는 그의 붓 터치는 시기에 따라 또는 작업하는 순간의 흥취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게 완성된 산의 이미지는 심연을 모를 산의 깊이를 반영하며, 수천 년의 세월을 통해 형성되는 지층처럼 생명의 리듬이 겹쳐지면서 그림의 심도 또한 깊어진다.

▲ 금강산(만불상)

압축된 이미지가 지닌 조형의 마법을 펼치다
박기수 화백은 “저에게 있어 산은 창작충동을 부단히 자극하고 미적 감흥을 촉발시키는 등 작품세계를 지탱하는 풍부한 자양이다”고 스스로가 고백할 정도로 산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다. 그가 산행을 통해 ‘산 그림’에 빠져들게 된 것도 산이 그림으로서의 소재는 물론 제재로서 손색이 없는 변화무쌍한 형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계절에 따라 수시로 그 모습이 달라지는 산은 천변만화의 모양을 가지며 무궁무진한 소재를 제공한다. 이러한 산을 주제로 하여 박 화백이 단순히 눈에 보이는 사실의 재현에 그치지 않는 간단명료한 조형언어를 구사하며 산을 형용하는 것은 산행을 통해 깨달은 생명의 본질적인 문제를 그림으로 구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마르티에르 기법으로 부단히도 반복되는 두터운 붓 터치를 통해 그는 산의 깊이를 표현하며 대 자연의 생명감을 표현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평론가 신항섭은 박 화백의 작품에 대하여 “나무와 숲과 바위로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산의 외형을 희생시키는 대신에 그 이면적인 세계를 압축하여 표현한다……(중략) 표정보다는 역시 생명의 리듬에 무게를 둔다. 붓이 만들어내는 표현을 통해 그 이면에 자리하는 대자연의 생명감, 즉 맥박처럼 힘차게 요동하는 생명의 리듬을 포착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고 평하기도 했다. 특히 백두산을 포함하여 설경을 제재로 하는 산 풍경은 그 이미지가 더욱 명료해진다. 짙푸른 천지와 흰 눈, 그리고 산 모양을 수식하는 검은 윤곽선으로 요약되는 백두산 설경은 박 화백의 산 그림이 지향해온 조형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압축해낸 결과다. 전체적으로 보면 지극히 간결한 풍경임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느끼는 감동은 결코 말 한마디로 간단하게 정리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박 화백의 작품이 갖는 매력이다. 사실적인 이미지를 소거한, 압축된 이미지가 지닌 조형의 마법인 셈이다. 비록 강직하고 넓은 윤곽선만으로 산의 형태를 결정하고 있을 뿐이지만, 실제의 겨울 백두산의 이미지를 단호하게 표현해낸 것이다.

▲ 독도

모든 생명체의 존재성이 작품 속에 함축
“산이 있기에 산을 오르듯 저 역시 산을 그리다 보면 어느새 걸음이 산으로 향해 있습니다. 산은 저에게 유일한 안식처이며 즐거움이죠.” 박기수 화백의 산 그림은 구체적인 형태는 전혀 보이지 않고 추상적인 이미지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산’이라는 것은 그의 작품을 보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만큼 박 화백은 산 그림을 통해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그가 추구하는 세계가 무의식이나 자동기술방식과는 다른, 실재하는 존재에 대한 표명이라는 것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추상성이 강하지만 그 추상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는 것은 박 화백이 직접 산행을 통해 느낀 산의 실체에 대한 이해이자 소견이다. 구체적인 형태만 드러나지 않을 뿐 산을 구성하는 모든 생명체의 존재성은 그대로 그의 작품 속에 함축되어 나타난다.

최근 박기수 화백의 작품 세계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윤곽선은 보다 명료하게 드러내고 색채는 단순하게 처리함으로써 이전보다 한층 절제된 형상을 지향한다. 이는 곧 사유의 깊이, 의식의 침전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박 화백은 이제 신체적인 힘을 절제하고 감정을 조율함으로써 시각적인 자극을 뛰어넘는 내면의 깊이로 이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교나 기법에 치우치지 않고 자신의 감정 세계를 꾸준히 추구하고 있는 박기수 화백. 현장에 스스로 몸을 내던지며 그곳에 몰입하는 박기수 화백. 그는 “그림은 저의 생명이자 삶이다”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붓을 놓지 않고 국내는 물론 해외의 명산을 화폭에 담아 주옥같은 작품을 그려내겠다”고 강한 포부를 밝혔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