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만 작가는 시대를 읽고 분석해서 작품을 만드는 작가이다. 그래서 귀국 후 그린 몇몇 작품에서는 한국 사회의 분열과 갈등, 상실 등을 주제로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알고 있지만 회피하거나 부정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미지가 비극적이고 자기 폐쇄적일 수 있지만 작가가 의도하는 것은 도태되거나 표류하지 않는 인간 존엄성의 성취이다.

신선영 기자 ssy@

그날의 기록

▲ 추상표현주의 작가군인 잭슨폴록, 바넷뉴먼, 마크 로스코가 수학한 뉴욕 미술학생연맹(Art Student League of New York)과 홍익대학원을 졸업한 고성만 작가. 미국에서 아트 디렉터와 작가로 활동했던 그는 한국과 중국, 러시아, 미국 등 국내외 그룹전과 개인전을 가지며 존재와 정체성에 관한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지난 2014년 4월에 일어난 세월호 참사는 작가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연일 보도되는 참사 소식에 아연실색했고 그 배후의 문제에 대해서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참사 현장을 보면서 느꼈던 답답하고 복잡한 심정들이 작품으로 쏟아져 나왔듯이, 구원에 대한 열망과 안타까움이 <세월호>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세월호>의 배경인 팽목항 바다는 거리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진 깊고 검은 어둠의 세계이다. 시간이 멈춰진 듯 적막감이 감도는 먹빛 바다에 가라앉지도 떠오르지도 못한 채 부유해 있는 참사 희생자들을 하얗게 대조시켜서 심미적이고 상징적인 어둠 세계를 포착해 냈다. 이들을 화면에 정박시키고 있는 것은 식별 불가능할 정도로 흐릿하게 그려진 세월호이다. 언뜻 보면 닻이나 그물 같은 형태로 이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

“참사 현장을 보면서 느낀 고통과 슬픔, 분노와 환멸의 감정들은 상징이나 은유 없이는 표현이 어려웠다”는 작가의 말에서 그날의 바다가 건네는 시선이 무엇이었는지, 우리의 약속과 다짐은 무엇이었는지를 다시금 돌아볼 수 있다. 작품은 이렇게 오늘의 상황을 역설하며 비평의 여지를 열어두고 있다.

작가는 세월호 참사뿐만 아니라 천안함 피격, 제2연평해전, 연평도 포격 등 우리 사회를 뒤흔든 사건들에 대해서도 “세상에 변하지 말아야 가치들이 정치적으로 편집되고 왜곡돼서 사람들의 의식을 흐트러트리고 있다”고 말하며 “그 어떤 이념도 민족을 넘어설 수 없으며, 그 어떤 종파에 얽매여서 형평성을 잃거나 존엄의 가치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피력했다.

▲ 세월호, 162cm x 130cm, acrylic on canvas, 2014.

오는 4월 열리는 개인전(4월 11일~20일, 강남한전아트센터)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봄날은 간다>는 위안부 문제을 다룬 작품이다. 작가는 “당사자들의 의사를 배재한 채 이뤄진 한일 정부 간의 위안부 합의는 그들의 인격권을 무시하고 존엄과 명예의 가치를 훼손한 일”이라고 말하며 자신의 소회를 밀어 넣었다.

<봄날은 간다>는 총 5점의 한지작품이다. 어딘가 한두 군데씩 찢어지고 구겨진 치마폭 같은 얇은 이미지, 그 위로 멍울처럼 번진 연분홍과 상흔처럼 흘러내린 핏빛 자국이 처연함을 불러일으킨다. 작가는 그들의 삶을 반추해볼 수 있는 의미 있는 효과들을 통해 주체자(위안부)의 삶을 다시 화두에 올리고 생명과 죽음, 치유와 회복이라는 열망을 끌어내고 있다.

▲ 봄날은 간다, 162cm x 130cm x 5, 닥종이 한지 염료 on canvas, 2016.

기억 탐구 혹은 노마드(Nomad)의 추억
고성만 작가가 그린 도시는 풍경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가 걸어 다녔던 뉴욕의 거리를 재현한 작품 <Memory>와 <뉴욕의 밤>은 각기 다른 모양의 건물과 도로, 어두운 뒷골목의 거친 느낌이 선명한 색채로 전달돼서 보는 이의 감정을 증폭시킨다. 그리고 그 도시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붙였다 떼어내는 식으로 잔적을 남겨서 작품 형식도 한 단계 발전시켰다.

작가는 SNS 문화에 대해 “요즘 SNS에 사진을 많이 올리는데 사진 상으로는 모두들 행복하고 즐거워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들이 많다. 그런 사진들을 의심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본래의 순수한 기억마저도 미화 돼버린다”며 “추억이 아름다울 수만 없을뿐더러 꼭 아름다울 필요도 없는 것처럼, 불필요하게 현실을 왜곡하고 은폐하는 장치들을 걸러내서 제대로 된 지각 방식을 선보이는 게 현대 예술가가 할 일”이라고 설명했다.

▲ (왼쪽) 뉴욕의 밤, 162cm x 130cm, acrylic on canvas, 2015. (오른쪽) Memory, 162cm x 130cm, oil mixed media on canvas, 2015.

이렇게 현대의 관습화되고 일반화된 지각 방식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고유 세계를 만들려는 시도는 회화에서 잘 다루지 않는 재료들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작품 <Decreation>에는 작업실에 있는 이쑤시개, 커피가루, 휴지 등 폐기물들을 담아내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버린 물건들이 그의 삶에 새롭게 상정되도록 환원시켰다.

작가는 산업화의 단기적 성취감과 시대변화에 익숙해진 나머지 기존에 가치 있던 것들을 너무 쉽게 재단하고 버리는 게 아닌지 묻고 있는 듯하다. 거추장스럽거나 쓸모가 없어졌을지라도, 보다 넓은 의미에서 가치들을 포용하고 수용해야 할 책임이 결국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NM

▲ Decreation, 162cm x 130cm, acrylic mixed media on canvas,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