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언론인 김정형(‘역사속의 오늘’ 저자) gorome@hanmail.net

■ 헬렌 켈러 대학 졸업 …… 1904년

▲ 헬렌 켈러(왼쪽)과 애니 설리번

헬렌 켈러(1880∼1968)의 삶은 기적의 연속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헬렌의 삶은 장애를 장애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 의지와 용기의 산물이었다. 헬렌은 생후 6개월째에 “굿 모닝”을 말하고 돌날에는 뒤뚱뒤뚱하면서도 걷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던 건강한 아이였다. 그러나 생후 19개월째 때, 원인불명의 고열과 복통에 시달리더니 그후부터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들리지 않다보니 점차 입도 열리지 않았다.
부모는 시력과 청력의 회복은 불가능하겠지만 교육만은 가능하다고 믿고 맹아학교 졸업생 애니 설리번을 가정교사로 채용했다. 헬렌과 애니가 처음 만난 것은 헬렌이 7살 때였던 1897년 3월 3일의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다. 애니는 20살에 불과한 나이였지만 어려서 주정뱅이 아버지의 학대와 어머니·동생의 죽음 등 모진 아픔을 겪으면서 일찍 세상에 눈을 떴다. 그 자신도 한때는 눈이 보이지 않았으나 독지가의 후원 덕에 수술 후 시력을 되찾은 적이 있어 누구보다 헬렌의 처지를 잘 이해했다.
애니는 헬렌에게 당장 필요한 것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다’는 믿음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도착 다음날 애니는 인형을 건네주며 헬렌의 작은 손에 손가락으로 천천히 ‘d-o-l-l’이라고 써주었다. 애니는 손바닥 위에 새로운 철자를 계속 써주었다. 헬렌은 머지않아 간단한 물건 이름을 손바닥으로 지각하게 되었고, 일부 동사도 이해하게 되었다. 애니의 노력 덕에 헬렌은 한 달 만에 말과 사물의 관계를 깨닫게 되었고, 좋은 기억력 덕에 3개월 만에 300단어를 암기할 수 있었다. 간단한 문장을 쓰는 것도 가능해졌다. 헬렌은 맹아학교에서도 점자를 배우고, 상대방의 입술을 만져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 기술을 터득했으며 농아학교에서는 후두에 손가락을 대어  진동을 느끼는 훈련을 통해 말하는 법을 익혔다.
헬렌이 처음 세상에 꺼낸 말은 “It is warm today”였다. “귀가 들리지 않아 문장을 알아듣진 못했지만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며 자서전에 썼다. 1900년 헬렌은 하버드대의 자매학교인 래드클리프 여자대학에 입학했다. 헬렌이 공부하는 4년 내내 애니는 헬렌의 수업내용을 받아 적었다. 읽어야 할 책은 점자로 옮겨 주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헬렌이 래드클리프대를 졸업한 것은 1904년 6월 28일이었다.
대학졸업 후 헬렌은 농아와 맹인을 돕는데 평생을 바쳤다. 세계 각지를 돌며 장애자에게 희망과 용기와 자신감을 북돋아 주었다. 대학재학 중일 때부터 쓰기 시작한 저서도 ‘나의 삶’(1902), ‘헬렌 켈러의 비망록’(1938) 등 여러 권이나 되었다. 사람들은 장애인이면서도 뛰어난 작가이자 연사이고, 무대와 스크린에도 등장할 만큼 다재다능한 헬렌이 성녀(聖女)이기를 원했다. 헬렌이 자신들과는 다른 삶을 살기를 고대했다. 헬렌은 사람들의 이런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개인적 소망을 미뤄둔 채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마음 속은 언제나 남들처럼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평범한 여성의 소망으로 꿈틀거렸다. 애니에게도 헬렌은 삶의 의미이자 전부였다. 애니는 헬렌이 독립적으로 살기를 진심으로 희망하면서도 때로는 자기의 통제를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둘의 작별은 1936년 애니가 죽으면서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 원세개 사망 …… 1916년  

▲ 원세개

시골 향시에 두 번이나 떨어지고 건달들과 어울려 다니며 망나니 노릇을 하던 원세개(1859~1916)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조선이 있었다. 원세개가 조선 땅을 처음 밟은 것은 1882년 임오군란 때였다. 당시 그는 하급관료에 불과했으나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 출병한 이홍장과 조선 땅에서 인연을 맺은 덕에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원세개는 청의 군대를 끌여 들여 동학농민혁명을 제압한 뒤 조선에서 호시절을 보내다가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1주일 전 귀국함으로써, 12년동안 맺어온 조선과의 인연을 일단락 지었다. 귀국해서도 7000명 규모의 현대식 ‘신건 육군’ 지휘를 맡아 견고한 지위를 유지했다.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대부분의 군수뇌부들이 죽거나 몰락한 것도 원세개에게는 행운이었다. 1901년 11월 이홍장마저 죽어 그의 앞길에 이제 거칠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어 보였다. 그래도 서태후의 죽음만은 피하고 싶었다. 서태후가 죽으면 과거 그와 악연이 있는, 서태후의 조카인 광서제의 친정체제가 시작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광서제가 그를 보복할 것이 뻔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1908년 서태후가 죽기 하루 전 광서제가 먼저 죽은 것이다.
그래도 청나라 황족과 만주족 중신들은 무식쟁이 원세개를 인정하지 않아 원세개는 결국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은퇴해야 했다. 원세개는 천진에 몸을 숨기고 훗날을 도모했다. 행운은 계속되었다. 1912년 3월 손문 등 신해혁명 세력의 도움으로 임시대총통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독단과 전횡으로 오히려 혁명세력을 무력화시켰다. 곳곳에서 ‘토원(討袁)세개’ 운동과 독립선언이 잇따랐으나 원세개는 그들을 진압하며 1913년 10월 정식 대총통에 올랐다. 뒤이어 그가 꿈꾼 것은 황제 제도의 부활이었다.
1916년 1월 1일 마침내 황제 자리에까지 올라갔으나 이는 결국 ‘토원’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자충수가 되고 말았다. 다시 ‘토원’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원세개의 수족들까지 황제제도 취소를 요구하며 반발했다. 결국 3개월 만에 황제직을 포기했지만 만성피로와 요독증으로 1916년 6월 6일 눈을 감았다. 이후 중국은 군웅할거시대로 빠져들었다.

■ 자유시 사변 …… 1921년
1921년, 멀리 시베리아 동쪽 러시아령 ‘자유시’에서 수백명의 한인 무장 독립부대원들이 무참히 살해되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다. ‘자유시 사변’ 혹은 ‘흑하 참변’이라 불리는 대참사였다. 러시아혁명을 안착시키려는 볼셰비키 적군과 열강들의 지원을 받아 혁명을 저지하려는 러시아 백군 간의 내전이 사실상 적군의 승리로 끝나고, 백군을 지원해온 연합국 중 시베리아 동쪽에 눌러앉은 일본을 제외하고 모두 러시아를 떠난 뒤에 일어난 비극이었다.

▲ 자유시 사변

힘이 열세였던 탓에 일본을 쫒아내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나기만을 기다려야했던 소비에트 적군 정부는 시베리아 동쪽 지역에 ‘극동공화국’을 세워 일본군의 철수를 담당하게 했다. 당시 그 지역 내 ‘흑하 자유시’에는 수십여 개의 크고 작은 한인 무장부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개중에는 볼셰비키와 뜻을 같이하는 독립군도 있었고 일본군과 싸우기위해 일시적으로 볼셰비키와 연합한 독립군도 있었다. 1921년 1월에는 간도의 독립군들도 소련·만주 국경을 넘어 자유시 부근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으로 일본에 큰 피해를 입혔으나 일본군의 대대적인 토벌에 쫓겨 자유시 부근 밀산으로 피신해 온 김좌진, 홍범도, 지청천, 안무 등 쟁쟁한 장군들이 지휘하는 최강의 독립군 부대였다.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계열의 독립군 수천 명이 소·만 국경을 넘어 시베리아로 몰려오자 일본군이 러시아에 우리 독립군들의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불행히도 당시 독립군 내부에서는 주도권을 둘러싼 갈등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친(親) 볼셰비키 독립부대와 비(非) 볼셰비키 독립부대가 갈등하는 가운데 소비에트 정부가 세운 극동공화국이 비 볼셰비키 부대의 무장해제를 요구하자 독립군 내부에서 무력충돌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김좌진은 사태를 예견하고 부하들과 함께 미리 만주로 되돌아갔으나, 홍범도와 안무는 친 볼셰비키 독립부대 쪽으로 합류했다. 홍범도가 오늘날 친공(親共) 독립운동가로 분류되는 것도 이때의 선택 때문이다.
일본이 러시아를 더욱 강하게 압박하자 1921년 6월 28일, 러시아는 장갑차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코사크 기병과 친 볼셰비키 독립부대를 동원, 무장해제를 거부하는 우리 독립부대를 기습 공격했다. 270여명이 죽고 250여명이 실종되었으며 910여명이 포로로 잡혔다. 참변은 독립군의 항일의지를 무참히 꺾어놓았고 독립을 지원할 구세주로 기대했던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이미지를 바꿔놓았다.

■ 조 루이스, 세계헤비급 챔피언 획득 …… 1937년

▲ 조 루이스(오른쪽)와 맥스 슈멜링

1937년 6월 22일, 20세기 복싱사를 화려하게 장식할 새로운 세계헤비급 챔피언이 탄생했다. ‘갈색 폭격기’ 조 루이스(1914~1981)였다. 루이스는 8회 KO승으로 챔피언이 되었는데도 그다지 기뻐하지 않았다. 그가 진정으로 눕히고 싶었던 선수는 그가 챔피언에 오르기 전 그에게 유일하게 1패를 안겨준 전 챔피언 맥스 슈멜링이기 때문이었다. 루이스는 1년 전 6월 19일 뉴욕의 양키 스타디움에서 독일의 슈멜링에게 12회 KO패했었다. 연전연승을 달려온 루이스로서는 통한의 1패였다.
“슈멜링을 이길 때까지는 진정한 챔피언이 아니다”는 루이스의 바람대로 둘이 재격돌한 것은 1938년 6월 22일이었다. 루이스가 챔피언이 되고부터 정확히 1년 뒤였고 장소 역시 2년 전과 같은 곳이었다. 2차대전의 전운이 감돌고 있을 때, 둘의 시합은 단순한 복싱시합을 넘어 나치 대 미국의 자존심이 걸린 한판 승부였다. 권투를 유난히 좋아했던 히틀러는 슈멜링의 2년 전 승리를 “게르만 민족의 우수성을 전 세계에 알린 것”이라며 그를 독일의 영웅으로 선전해오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당시의 심각한 인종차별 속에서도 그 날만은 한마음으로 흑인인 루이스를 응원했다. 결과는 싱거웠다. 7만5000명 관중들의 절대적인 응원 속에서 루이스가 1회 공이 울리고 단 124초 만에 슈멜링을 링 바닥에 쓰러뜨린 것이다.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의 복서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루이스는 11년 8개월동안 25차례의 방어전을 성공시키며 당시로서는 세계헤비급 사상 최장수 챔피언으로 군림하다가 더 이상의 상대가 없어 1949년 3월 1일, 스스로 타이틀을 반납하고 챔피언에서 물러났다. 1951년 재기전에서 로키 마르시아노에게 패배한 뒤 71전 68승(54KO승) 3패의 대기록을 남기고 링을 완전히 떠났다.

■ 소련, 베를린 봉쇄 …… 1948년

▲ 1948년 베를린 시민들이 C-54 수송기가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에 착륙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1948년 6월 24일, 소련이 서독과 베를린을 잇는 육로를 봉쇄하는 바람에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공동 관리해온 서베를린이 자유세계로부터 고립되었다. 2차대전 후 독일은 미·영·불·소 4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으나 소련 점령지역 내에 있는 베를린 만은 공동관리 하에 있었다. 그러나 미·영·불 서방 3개국이 자신의 점령지역을 통합해 단일 경제공동체로 하고 베를린을 포함한 통합 전 지역에 새로운 통화인 ‘마르크화(貨)’를 유통시키려 하자 소련은 이를 동독 통화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베를린 봉쇄’로 맞섰다.
항공로를 제외한 베를린으로 이어지는 모든 육로와 철로, 수로를 봉쇄하고 식량수송까지 금지시키는 소련의 초강수에 미국은 정면대응으로 맞섰다. 미국이 250만 베를린 시민들을 돕기 위해 6월 26일부터 항공기를 이용한 식량·연료·의약품 등의 공수작전을 펼치자 소련은 7월 1일 베를린의 4개국 공동관리를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베를린의 독점적 지배권을 주장하는 맞불작전으로 나왔다.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공수는 예정대로 진행되었고 항공기가 3분마다 베를린으로 날아갔다. 수송회수는 약 20만여 회나 되었고, 공수물자는 약 232만t에 달했다.
그래도 봉쇄가 풀어지지 않자 식량은 배급제로 바뀌었고, 전력소비는 제한되었으며 공장도 하나둘 문을 닫았다. 어느덧 동독 주둔 소련군은 40개 사단으로 증가했고, 미군은 원폭 탑재기를 영국에 배치했다. 다행히 양측의 무력충돌 자제로 봉쇄는 322일만인 1949년 5월 12일에 해제되었지만 독일의 분단은 더욱 고착화되었다.

■ 이승만 대통령 반공포로 석방 전격 명령 …… 1953년
휴전회담이 늦어진 것은 전적으로 포로송환 문제 때문이었다. 중공군의 1951년 춘계공세 후 전선이 38선을 경계선으로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미국은 전쟁을 명예롭게 마무리할 생각을 했다. 공산측 역시 무리할 생각은 없어 양측은 협상을 모색했다.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제1차 휴전회담을 연 양측은 7월 26일 군사분계선 설정, 전투행위와 정전상태 감시기구 설치 등 5개 의제에 합의했으나 예상대로 포로송환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1951년 10월 포로송환문제가 처음으로 협상 테이블 의제에 올랐으나 회담 벽두부터 “휴전협정 조인 즉시 양측의 모든 포로들을 석방하자”는 북한의 주장에 밀려 더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하고 공전을 거듭했다.

▲ 반공포로 석방 - 6·25전쟁이 끝난 다음해인 1954년 1월 20일 반공포로 석방을 환영하는 현수막과 함께 환영 인파들이 서울역 앞 광장을 메우고 있다. ‘우리의 아들 동생 돌아온다’ ‘얼마나 고생하셨소!’ 등의 환영 문구가 눈길을 끈다

포로송환은 1949년의 제네바협정 제118조 ‘전쟁포로는 전쟁이 끝나면 지체없이 석방되고 송환되어야 한다’는 ‘자동송환원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엄밀히 말하면 선별 포로송환을 선호하는 유엔군 주장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북한이나 중국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 북한군과 중공군 포로를 억지로 송환하는 것도 인도주의에 어긋나 유엔군은 포로의 자발적 송환원칙을 고집했다. 유엔군 측은 포로의 개별의사를 존중한다는 자발적 송환원칙으로 도덕적 우위와 이념적 승리를 도모하려했고, 공산측은 포로 가운데 북한이나 중국으로의 귀환을 거부하는 자가 나올 경우 침략자를 격파하고 추방하여 남한을 해방시키겠다는 이른바 ‘정의의 전쟁’의 가치가 퇴색될 것을 우려했다.
양측은 1952년 5월 7일까지 모든 의제에는 합의했으나 포로송환문제만은 합의를 보지 못해 결국 1952년 10월 8일 무기한 휴회에 들어갔다. 그러나 미소 양국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난 새로운 사태전개가 양측을 다시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였다. 휴전을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1952년 11월)되고, 전쟁의 배후 주동자였던 스탈린이 사망(1953년 3월)함에 따라 양측에서 전쟁을 더 이상 지속할 필요성이 사라진 것이다. 이런 가운데 부상포로 교환협정이 4월 11일 먼저 체결되고 4월 20일부터 부상포로 교환이 이뤄지면서 포로교환협정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다. 1953년 5월 7일 공산측은 포로송환문제에 관한 8개항을 제시했다. 일종의 양보이기도 한 이 안에서 공산측은 “휴전협정 후 2개월 이내에 송환을 원하는 모든 포로를 송환하되, 송환반대 포로들은 중립국으로 이송하지 않고 한국 안에 잔류시키는데 동의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건이 있었다. 북한과 중공의 설득대표단을 비롯해 폴란드, 체코, 인도, 스위스, 스웨덴으로 구성된 5개 중립국 송환위원회가 한국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며 그들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처음에는 “한국인 포로들은 휴전과 동시에 북한이든 남한이든 스스로 결정한 자유를 보장한 채 개인자격으로 석방해야 한다”며 북한측의 제안을 거부하다가 5월 25일 최후통첩이라는 명목으로 “한국인 포로들도 중국인 포로와 마찬가지로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넘겨 운명을 결정하도록 하겠다”는 양보안을 내놓았다.
공산군 측이 유엔군의 5·25제안에 원칙적으로 동의하면서 포로송환문제는 해결의 가닥을 잡아나갔다. 6월 4일 양측은 송환을 원하는 포로는 휴전조인 후 2개월 내에 송환을 완료하고 잔류를 원하는 포로에 대해서는 90일간의 설득기간을 갖도록 한다는 내용에 합의했다. 또한 30일 이내에 송환거부 포로문제를 정치회담에서 처리하되 합의를 보지 못한 해당 포로는 민간인 신분으로 변경, 중립국 송환위원회에 의해 한국도 북한도 아닌 제3국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1953년 6월 8일, 유엔군 수석대표 해리스와 공산군 수석대표 남일이 마침내 포로송환협정에 조인함으로써 2년간을 끌어온 포로송환문제를 일단락 지었다. 포로송환 사실이 알려지자 휴전협상 자체를 맹렬히 반대해온 이승만 대통령과 국민들의 분노는 절정에 달했다. 유엔군과 공산군이 정한 송환위원회가 친공적인데다 반공포로들이 6개월 동안이나 이들의 설득공작을 받아야했기 때문이다.
당시 포로수용소는 북으로 돌아가기를 원하는 골수 공산주의자 포로들이 수용소를 장악하고 있었다. 친공 포로들이 그들을 반대하는 포로를 학대하거나 죽이기까지 하자 유엔군사령부가 이들을 분리·수용했다. 이에 따라 북한 출신포로 9만명 중 40%, 남한 출신 포로 5만명 중 50%, 중공군 포로 2만명 중 75%가 반공포로로 분류되어 부산, 마산, 광주, 논산, 대구, 영천, 부평 등 7개 지역에 분산 수용되고 북쪽으로 돌아가겠다는 친공 포로는 계속 거제도에 남겨두었다. 반공포로 수용소는 대부분 한국군이 경비를 맡고 있었다.
이승만이 반공포로 석방을 처음 구상한 것은 1953년 초였다. 이승만은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을 불러 “반공포로들을 자유롭게 하고 싶다”는 자신의 의견을 넌지시 전했다. 원용덕은 반공포로 석방안을 재가 받아 차근차근 진행시켰다. 그리고 6월 18일 새벽2시, 북쪽으로의 송환을 반대하는 반공포로들이 수용되어 있던 7개 포로수용소에서 2만6930명의 반공포로들이 국군 헌병의 보호를 받으며 포로수용소 철조망을 뚫고 대탈출을 감행했다. 이승만은 오전11시 거대한 미국을 상대로 감행한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엄청난 도박이 자신의 지시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대내외에 공표했다. 세계는 이승만 대통령의 이 대담한 조치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미군이 탱크와 헬기까지 동원했지만 주민들이 풀려난 반공포로들에게 옷과 침식을 제공하며 돕는 데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3만5400여명의 반공포로들 가운데 자유를 찾은 포로가 2만6930명이나 되었으나 미군이 경비하고 있던 수용소에서는 경비병의 발포로 61명이 사망하고 116명이 부상했다. 8293여명은 탈출에 실패해 다시 철조망 신세를 져야했다. 반공포로 석방뉴스는 면도를 하고 있던 처칠로 하여금 휴전회담을 깨는 것이 되지 않을까 하여 얼굴에 생채기를 낼 정도로 세계를 놀라게 했던 쾌거였다.

■ 김기수 한국 복싱 사상 첫 세계챔피언 등극 …… 1966년

▲ 세계챔피언이 확정되자 김기수가 기뻐하고 있다

15라운드가 끝나고 발표된 점수는 1대1이었다. 한국인 부심은 72-69로 김기수가, 이탈리아 부심은 68-72로 챔피언 니노 벤베누티가 우세하다고 판정했다. 곧 승패를 가를 미국 주심의 채점이 발표되었다. 심판이 “벤베누티 68…”이라고 발표하는 순간 장충체육관을 가득 메운 8000여명의 관중석에서는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이겼다”는 반응이었다. 뒤이어 김기수의 점수가 발표되었다. “김기수 칠시입…”하는 순간 장내는 함성의 도가니였다. TV로 그 순간을 지켜보던 전국의 모든 국민들도 함성을 터뜨렸다.  1966년 6월25일 밤 10시20분, 우리나라 프로복싱 사상 최초의 세계챔피언은 이렇게 탄생했다. 김기수(1941~1997)는 이로써 6년 전 자신에게 통한의 1패를 안겨주었던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노티를 2대1 판정승으로 멋지게 설욕하고 WBA 주니어미들급 세계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찼다.
김기수는 함남 북청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1958년 도쿄아시안게임 웰터급에서 우승하면서 복서로서의 이름을 날렸다. 승승장구하며 ‘동방불패’로 불리던 김기수에게 아마추어 전적 유일의 1패를 안겨준 것은 1960년의 로마올림픽에서 만난 벤베누티였다. 8강전에서 패한 김기수는 칩거에 들어갔고 결국 1962년 아마추어 전적 87승 1패를 뒤로한 채 프로세계로 뛰어들었다. 1965년 동양챔피언까지 꿰찬 김기수는 당시 세계챔피언 벤베누티를 목표로 삼았다. 김기수도 무패(34승2무)의 복서였지만 벤베누티 역시 무패(64전승)를 자랑했던 터라 박빙의 게임이 예상되었다. 그러나 1인당 GNP가 200∼250달러에 불과했던 시절에 한국복싱계의 역량이나 경제력으로 세계타이틀전을 유치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대전료 5만5000달러를 구하지 못해 동분서주하고 있을 무렵 박정희 대통령의 호출이 있었다. “자신있느냐”는 물음에 “자신있다”고 대답하는 순간 경기는 성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부에서 개런티를 지불하기로 한, 사상유례가 없는 경기가 시작된 것은 1966년 6월 25일 억수같이 쏟아붓던 여름 비가 잠시 그친 밤 9시18분이었다.
김기수의 승리는 단지 그가 세계챔피언이 되었다는 사실에 있지 않았다. 당시 우리 수준으로는 도저히 도달 불가능한 아득한 경지로 여겨졌던 ‘세계최강’이나 ‘세계최고’를 경험함으로써 우리도 언제든 이길 수 있고 도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전국민에게 심어준 것이야 말로 김기수의 승리가 가져다 준 진정한 선물이었다. 김기수는 6개월 간격으로 미국 선수를 상대로 2차례의 방어에 성공한 뒤 1968년 5월 5만5000달러의 개런티를 받고 3차 방어전을 위해 벤베누티의 나라 이탈리아로 날아갔다가 산드로 마징기에 판정패했다. 프로 입문 최초의 패배였다. 이후에도 김기수는 권투를 계속했으나 1969년 5월 프로전적 49전 45승(16KO) 2무 2패를 기록한 채 조용히 글러브를 벗었다.

■ 뉴욕타임스 ‘펜타곤 페이퍼’ 공개 파문 …… 1971년

▲ 펜타곤 페이퍼의 주역 엘스버그

“북베트남의 어뢰정이 먼저 미국 구축함을 공격해 전쟁을 촉발시킨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게 사실이 아니라니…”. “보복으로 미국이 북베트남에 대량의 폭탄을 떨어뜨린 것도 사실은 오래전부터 계획된 것이었다니…”. 1971년 6월 13일자 뉴욕타임스를 펼쳐 든 미국인들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1945년부터 1968년까지 23년간 미국 대통령들의 기만과 속임수의 실상을 그대로 까발린 이날 기사의 1면 제목은 ‘펜타곤 페이퍼로 본 미국의 군사개입 확대과정 30년’이었다. 6면에 걸친 이 엄청난 고발은 대니얼 엘스버그라는 군사전문가의 고뇌와 용기가 없었다면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어야 했다.
1959년 하버드대 박사로 랜드연구소에 들어가 전쟁분석가가 된 엘스버그는 1961년부터 7년간 베트남전쟁을 지휘한 맥나마라 국방장관 아래서 일을 하게 되었고, 1965년부터 2년간은 베트남에 근무하면서 뛰어난 전쟁 전문가로 이름을 날렸다. 1967년에는 맥나마라의 요청으로 지난 20여년간 베트남에서의 미국의 의사결정에 관한 1급 비밀을 한데 모아 ‘맥나마라 보고서’, 즉 ‘펜타곤 보고서’를 만드는 작업에 투입되었다. 이 과정에서 베트남전에 대한 잘못된 사실을 알게 된 그는 그동안의 환상과 오판에서 깨어나 47권 7100쪽에 달하는 보고서 복사본을 1969년 풀브라이트 상원의원에게 전달했다. 풀브라이트가 미적미적하자 뉴욕타임스의 닐 시한 기자에게 다시 복사본을 전달했다. 평생을 감옥에서 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닐 시한이 3개월간 보고서를 검토하고 분석한 뒤 쓴 것이 바로 6월 13일자 뉴욕타임스 기사였다. 이를 불쾌하게 생각한 닉슨 행정부는 보도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법원이 이 신청을 받아들여 10회로 계획되었던 연재가 중단된 가운데 국가기밀과 언론보도의 상관관계에 대한 논란이 일었다. 재판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고 엘스버그는 12가지 죄목으로 115년 형을 선고받을 위기에 처했다. 닉슨의 측근은 엘스버그의 집을 도청하고 병원진료 기록을 빼내는 등 그를 인격적으로 파멸시키려는 공작을 폈다.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으나 이 때의 도덕적 무감각은 1년 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발전되어 닉슨의 몰락을 가져왔다. 미 연방대법원은 1971년 6월 30일, 6 대 3의 평결로 언론자유의 손을 들어주어 명분 없는 베트남전의 종식을 재촉했다.

■ 한국계 日 가수 미소라 히바리 사망 …… 1989년

▲ 미소라 히바리

1989년 6월 24일 새벽, 일본 ‘가요계의 여왕’ 미소라 히바리(1937~1989)가 간암으로 눈을 감으면서 일본 열도가 슬픔에 잠겼다. 애도행렬은 줄을 이었고 매스컴은 연일 특집을 쏟아내며 그의 육성과 어록을 전했다. 팬들은 히로히토 천황이 죽고 5개월 만에 있은 그의 죽음에 “정말 히로히토 시대는 끝났다”며 울먹였고, 한 평론가는 “미소라는 전후를 상징하는 대명사였다”며 심경을 토로했다.
살아생전 미소라는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가수’였고 ‘일본주식회사의 사가(社歌)를 불러온 특별한 여인’이었다. 죽기 몇 년 전에서야 한국계였음을 밝힌 미소라는 ‘아름다운 하늘(美空)의 종달새(雲雀)’라는 예명으로, 1945년 12월 여덟 살 어린 나이로 데뷔했다. 어려서부터 노래에 남다른 소질을 보인 미소라는 뛰어난 외모와 놀라운 가창력으로 엔카는 물론 재즈와 맘보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일본인으로부터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다. 한번 듣기만 하면 모든 노래를 따라 부를 수 있었던 미소라라고 해서 슬럼프가 없지는 않았다. 1970년대 들어 인기가 떨어지고 말년에는 만성간염까지 걸려 사실상 가수로서의 수명이 다하는 듯했다.
그러나 1988년 5만명이 운집한 도쿄돔에서 눈물의 부활 콘서트를 가져 재기에 성공했고 그것이 가수로서의 마지막 대형무대였다. 그가 남긴 노래만도 1500여곡을 헤아렸고 음반 판매량도 4000만장이나 되었다. 그의 노래가 일본인의 가슴을 파고들었던 것은 패전 후 황폐해진 국토와 그 잿더미 속에서 고달픈 생을 살아야 했던 일본인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었기 때문이다. 전후의 일본인들은 늘 라디오와 영화에 넘쳐나는 그의 노래를 들으며 고통의 터널을 지날 수 있었다. 그는 만인의 연인이었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