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한반도의 77배에 해당하는 면적을 지니고 있으며, 그 넓은 영토에 직접 국경선을 접하고 있는 나라만도 15개나 되는 국가이다. 동·서양을 막론한 다양한 인접국들 사이에서 이 광대한 영토를 지켜내기 위해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강력한 군사력 보유를 선호해 왔다. 그 결과 구소련 시절 한 때 미국과 견줄 만큼 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때로 우주선 발사와 같은 방위산업 경쟁에서 앞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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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영옥 |
그러나 페레스트로이카를 통해 구소련이 붕괴되고 새로운 사회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러시아의 군사력은 많은 변화를 거쳐야만 했다. 국가 경제는 바닥을 모르고 곤두박질쳤고, 인플레이션은 세계 대공황 시절 보다 높이 치솟았다. 이로 인해 급격한 국방예산 감소와 병력 감축이 이루어졌고, 320만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제대군인이 페레스트로이카 전후로 양산되었다. 군인연금은 고사하고 현역 군인들의 월급조차 몇 개월씩 밀려있는 최악의 상태가 반복되곤 했다. 이제 러시아는 아무래도 다시 예전의 군사강국으로서의 위상을 되찾기는 어려울 것만 같았다.
한편 최근 러시아는 에너지 수출 확대에 힘입은 경제적 안정과 함께 놀라운 속도로 군사력을 재정비하고 있으며, 다시금 예전의 군사강국으로서의 면모를 빠르게 되찾아 가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의 경제적 안정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경제규모와 비교해 본다면 아직 큰 격차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도저히 회생 불가능할 것처럼 추락했던 러시아의 군에 이러한 생기를 불어넣고 있는 것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러시아와 구소련이 동일하게 유지해 오고 있는 다양한 보훈정책의 활용과 무관하지 않다. 역사적으로 러시아 사회 속에서 군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큰 것이었다. 러시아 최초의 근대적 군대와 무적의 해군함대를 건설했던 표트르 1세 시기부터 러시아는 강력한 군사력 유지를 목표로 군인에 대한 사회적 지원에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러시아는 정책적으로 군사교육을 강화시켰고, 이것은 문화·예술의 영역까지 확대된 매우 높은 수준이 되었다. 때문에 러시아 제국의 장교는 강인한 육체에 뛰어난 지능을 지니고 있으며,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매너를 갖춘 멋진 신사로 인식되어 모든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소련 시기에 들어서면서 지난 러시아 제국의 장교가 누렸던 사회적 존경과 국가적 차원의 사회보장이 모든 일반병사에게 확대되어졌다. 특히 ‘위대한 조국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제 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에 대한 전 국민적인 존경과 국가의 지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독특한 것이었다.
지금도 러시아의 거리, 학교, 행정구역, 기념관, 박물관등과 같은 공공기관에 전쟁에 참여해 영웅칭호를 받은 인물들의 이름을 붙인 것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거리나 공공기관의 명칭이라고 하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늘 사용하는 빈번한 언어 중 하나이다. 그러므로 구소련을 포함한 현재의 러시아인들은 이들 군인명의 거리와 건물 명칭을 통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전쟁’, ‘조국수호’, ‘조국을 위한 헌신과 희생’, ‘용감함’, ‘애국심’과 같은 의미와 가치들을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게 된다. 결과적으로 국가가 의도하는 국가 안보 차원의 국민의식통합과 군인의 위상 증가 및 군에 대한 전 국민적 신뢰와 관심과 존경이라는 중요한 정치적 목표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효과를 얻게 된다.
소련의 어느 지역을 가나 볼 수 있었던 제 2차 세계대전 참전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추념의 불’은 유명하다. 이것은 지하에 가스관을 설치해 1년 내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들 전사자를 추모하는 불꽃이 타오르도록 만들어진 기념물로서 소련 각 도시 곳곳에 설치되었다. 그 중에서 모스크바 크레믈린 궁 대통령 집무실 바로 가까운 곳에 있는 ‘추념의 불’은 관광객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찾는 상징적인 장소이다. 이곳은 모스크바의 신혼부부가 결혼식을 마치고 예복을 입은 채로 바로 달려와 꽃을 헌화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소련식 결혼예식전통이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다. 또한 결혼 기념사진을 탱크나 장갑차를 배경으로 촬영하는 것이 유행되었던 시기가 있을 만큼 소련 사회에 있어 군과 관련된 모든 것은 선호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애국심과 전우애가 중요 주제로 등장하는 구소련의 문학, 노래, 영화와 같은 예술 작품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한 때 한국에서 매우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드라마 <모래시계>의 배경음악으로 우리 귀에 익숙한 노래가 <백학>이라는 소련 대중가요이다. 이 곡은 제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가 지은 시를 가사로 한 것으로 당시 소련에서도 크게 히트했었다. 현재에도 러시아에는 음악 앨범 판매점에 <전쟁 노래 모음>이라는 부스가 따로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또한 우리로서는 생소하기 까지 한 군인을 주제로 한 발레, 오페라 작품도 쉽게 찾을 수 있고 군사 아카데미 소속 전용 극장도 존재한다. 이는 군인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실질적인 경제적 특혜 몇 가지에 머무르지 않고, 의식, 의례, 기념물, 문화·예술 등이 지니는 상징성을 적극 활용해 매우 세련되었으며,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어 자연스럽게 사회적 관심을 집중시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 러시아에도 이와 같은 특성은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페레스트로이카라는 총체적인 체제전환의 과정에서 발생한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러시아 정부는 군인에 대한 사회적 지원을 제한하지 않았다. 대통령을 포함한 총리와 국방부 장관이 수시로 군인의 처우 개선에 대해 공식석상에서 언급하였고, 또한 실지로 계속되는 인플레이션에 대응할 수 있도록 군인의 월급과 연금을 지속적으로 인상시켜오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필수적인 법 개정과 같은 번거로움은 문제가 되지 않았고, 관료주의의 특성이 강한 러시아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모든 군인 처우 관련 행정업무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이는 군인의 사기진작이 군사력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그동안의 역사를 통해 러시아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취할 수 있는 태도인 것이다.
최근 한국의 한 러시아 사회 연구소에서 실시한 여론 조사 결과, 자신을 애국자라고 생각하는 러시아인이 무려 73.3%나 되었으며, ‘승전기념일’과 같은 국경일 행사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정도는 과반수에 해당하는 59.5%로 나타났다. 더욱이 설문 대상자가 30~40대의 젊은 층이었다는 점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러시아는 페레스트로이카라는 거대한 파도를 지나오면서 아직까지도 국가의 모든 기능이 정상화되었다고 보기에는 요원한 상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민족 국가 러시아가 민족차원의 이해관계를 초월해 전 국민적 안보의식의 통합과 군사력 회복을 성공적으로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특히 현대 러시아 사회에서 보여지는 젊은 세대의 애국심 표명과 군에 대한 관심 증가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우리가 최근 들어 더욱 확대된 한반도 긴장상황을 맞이하고 있고, 또 이것이 의미하는 사태의 심각성에 비해 우리 국민의 안보의식이 현저하게 낮다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러시아 제국, 구소련, 현대 러시아를 통틀어 일관되게 나타나는 군인에 대한 우대, 적극적이고 다양한 보훈정책, 그리고 이를 통해 나타나는 전 국민적인 관심이 결과적으로 군사강국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배경이 되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특히 페레스트로이카와 같은 총체적인 체제변환 과정과 그로 인한 정치적, 경제적 혼란의 과정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군사력 면에서 강국의 면모를 회복하고 있는 과정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도록 만든다. 즉 반드시 경제적 부담이 큰 실질적 지원이 아니더라도 그 외 다른 많은 방법으로 군인의 명예와 자부심을 높여주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또한 그것이 군의 사기진작에 있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고, 실질적인 군사력 강화와 국민의 의식통합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알게 해준다. 뿐만 아니라 북한의 군사문화에 대한 이해와 그것을 통한 우리의 대응방법 다각화 구상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공산주의 종주국으로서 구소련의 보훈정책과 이를 계승하고 있는 러시아의 군 관련 상황에 대한 연구가 더욱 활성화되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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