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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 역사칼럼 백년의 기록, 백년의 교훈 <20世紀의 5月>

저널리스트 김정형(‘역사속의 오늘’ 저자)

2011년 05월 02일 (월) 10:53:02

김정형

gorome@hanmail.net

■ 이한응 주영 서리공사, 런던에서 자결 1905


이한응

이한응(1874~1905)이 관립 육영공원에서 2년간 공부한 후 초대 영국·이탈리아 공사 민영돈을 따라 영국 땅을 밟은 것은 1901년이었다. 직함은 영·이탈리아 주차 공사관 3등 참사관이었고 공관은 런던 트래보비어로(路) 4번지에 있었다. 국제정세의 급변으로 민영돈 공사가 1904년 초 귀국함에 따라 이한응이 서리공사로 대영 교섭을 책임졌다. 이한응은 1904년 1월 13일 영국 외무성을 방문, 한반도 정세분석에 관한 10페이지의 서한과 메모를 전달하는 것으로 공사업무를 시작했다. 그는 서한에서 영국 정부가 한반도 문제에 주목해 줄 것과 한국의 독립과 주권 그리고 영토보존 보장 등 5개항을 영국 정부가 보장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약소국의 대표였고 영국 정부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국내에서는 1904년 2월 러일전쟁 발발 후 ‘상호간의 승인없이 제3국과 이 조약에 위배되는 조약을 맺을 수 없다’고 명시된 한일의정서가 강제 조인되었다. 이로써 한국의 외교관계는 반신불수가 되었으나 이한응은 포기하지 않고 약소국의 1인 공관장으로 고독한 투쟁을 전개했다. 기회가 생길 때마다 영국 외무성에 글을 써 보내거나 면담을 요청했지만 언제나 돌아오는 건 냉담한 거절 뿐이었다.
러일전쟁의 전세가 일본으로 기울자 일본은 1904년 8월 22일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 재정과 외교를 사실상 빼앗는 이른바 ‘고문정치’를 시작했다. 나라는 이제 허울 뿐이었다. 이한응의 외교활동도 일제에 모두 노출된 데다 본국과 연결해 줄 외교파트너도 없었다. 더구나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는 유럽의 우리 공사들을 즉각 소환하도록 고종에 압력을 가하는 한편 영국 외무성에도 “이한응은 미친 사람”이라는 중상을 서슴지 않았다.
어느덧 공관은 ‘고도(孤島)’가 되었고, 이한응은 그 고도에서 울분을 삭혔다. 약소국 외교관의 무력감과 굴욕, 여기에 절망까지 더해져 이한응이 택할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1905년 4월부터 시름시름 앓던 이한응은 4월 18일 조국의 동포와 부인 등 가족 앞으로 유서를 써놓고는 마지막을 준비했다. 그리고 5월 12일 음독 자결함으로써 약소국의 비애를 죽음으로 항변했다. ‘…아 나라는 장차 폐허가 되고 민족은 남의 종이 되리로다. 구차히 산들 그 욕됨이 자심할지니 한시바삐 죽어서 잊음만 같지 못하리라….’ 치욕의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6개월 전, 첫 순국자는 이렇게 목숨을 끊었다.

■ 중국의 5·4운동 1919년
1차대전이 끝나자 중국도 연합국의 일원으로 파리강화회의(1919.1)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1917년에 대독(對獨) 참전을 선포했던 터라 중국인들의 기대는 컸다.


1919년 5·4운동 당시 시위 모습

대표단은 윌슨 미국 대통령이 천명한 ‘자결과 영토보존의 원칙’을 들어, 패전국 독일이 점령했다가 1차대전의 혼란한 틈을 타 일본이 차지하고 있는 산동성을 되돌려줄 것과 1915년 5월 원세개가 일본과 체결했던 ‘21개조 요구’를 무효화시킬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 대표단은 1918년 9월 중국의 단기서 군벌 정권이 일본과 체결한 비밀협정을 폭로하며 “산동문제는 연합국의 문제가 아니라 중·일간의 문제”라고 강변했다. 영국·프랑스·이탈리아 등의 연합국도 일본측의 주장이 문서상으로 증거가 분명한 데다 이미 1917년 2월 ‘산동에 대한 일본의 권리를 지지한다’고 약속한 바 있어 4월 21일의 회의에서는 일본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사실이 언론을 통해 중국에 알려지면서 중국인들의 분노가 일거에 폭발했다. 이권과 주권을 빼앗아가려는 제국주의 열강에 대한 분노였고, 외세와 결탁해 권력을 유지하려는 군벌 정부에 대한 경고였다. 1919년 5월 4일 오후1시, 북경의 천안문광장에 운집한 5000여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21개조 폐지, 강화조약 조인거부, 산동성 권익 회복, 청도 반환 등을 외쳤다. ‘5·4운동’의 봉화가 타오른 것이다. 학생들은 외국 공관들이 몰려있는 동교민항쪽으로 전진하며 시위를 벌였다. 군경이 이를 저지하자 곧 친일 매국노 조여림의 집으로 몰려갔다. 조여림은 원세개가 21개조 요구를 받아들일 때 외교차장으로 내각의 친일행적을 주도했던 친일인물이었다.
흥분한 시위대는 조여림이 도망가고 없자 마침 그곳에 있던 친일파 인사 장종상을 구타하고 조여림의 집에 불을 질렀다. 이 과정에서 30여명의 학생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북경 시내에 알려지자 이튿날부터는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북경 시내를 뒤흔들었다. 4년 전 일본이 원세개에게 21개조의 요구를 했던 굴욕의 날 5월 7일의 날이 밝자 북경에는 일본 상품 배척집회가 열리고 데모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일본 도쿄에서도 수십명의 중국 유학생들이 시위를 벌이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거나 부상을 입었다.
중국 정부는 항의 여론에 굴복해 체포학생 전원을 석방하면서도 강화조약을 그대로 조인하겠다는 입장만은 굽히지 않았다. 이같은 정부 방침에 격분한 학생들은 총동맹 수업거부, 일본 상품 배척, 국산품 장려 운동을 더욱 확산시켰다. 시위가 더욱 격해지고 6월 3일과 4일 이틀동안 1000여명의 학생들이 체포되자 노동자·시민들까지 시위에 가담했다. 중국의 주요 시가지가 휴업에 들어간 가운데 특히 중국 경제의 중심지 상해에서는 수업거부(罷課), 상인철시(罷市), 노동자파업(罷工) 등 이른바 ‘3파(罷) 투쟁’이 전개되었다.
결국 군벌정부는 6월 10일 조여림·장종상·육종여 등 3명의 친일파 관료를 파면하고 파리강화회의 조약에 조인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정부가 마침내 손을 든 것이다. 6월 28일 정부는 약속대로 베르사유 강화조약의 조인을 거부했으나 그런다고 일본에 대한 열강의 지지가 철회되지는 않았다.
7월 22일 학생들의 시위종결 선언으로 운동은 사실상 멈췄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지식인들은 그들의 주장이 광범위한 대중적 동조를 얻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고, 처음으로 대중의 힘을 실감할 수 있었다. 중국 공산당의 창당 준비가 빨라졌고 손문도 신삼민주의를 새롭게 제창했다. 5·4운동은 중국 현대사의 시발점이 되었던 중국 최대의 반제국주의운동이었고 사회변혁운동이었다.

■ ‘샤넬 No.5’ 첫 발매 1924년


샤넬

가브리엘 샤넬(1883~1971)과 그의 파트너 조향사(調香師)가 80가지가 넘는 꽃향기에 화학합성 엑기스 알데히드를 섞어 만든 최초의 인공향수 ‘샤넬 No.5’를 세상에 처음 선보인 것은 1924년 5월 5일이었다. 조향사가 번호 1∼5, 20∼24가 적힌 10개의 샘플을 내놓고 샤넬이 ‘5’를 선택함으로써 향수 이름은 ‘샤넬 No.5’가 되었다. 샤넬이 평소 행운을 가져다 준다고 믿어온 숫자가 ‘5’이다보니 향수 이름에도 발매를 시작한 날에도 ‘5’자가 붙여졌다.
‘샤넬 No.5’는 아무 장식없는 투명한 크리스탈병 디자인으로도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단순한 형태에 이름까지 기계적인 느낌을 주다보니 너무 난폭하고 남성적이라는 악평도 쏟아졌지만 지금도 전세계에서 30초마다 한개가 팔려나가는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버나드 쇼가 “당대에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두 명의 여성”으로 퀴리부인과 함께 꼽았던 20세기 패션 혁명가 가브리엘 샤넬의 본업은 디자이너였다. 단순하면서 실용적이고, 편안하면서 우아함을 잃지 않는 스타일은 샤넬이 추구해온 패션철학이었다. 샤넬은 여성의 허리를 옥죄던 코르셋을 벗기고, 재킷과 핸드백에는 주머니와 어깨끈을 달아주었다. 그런 점에서 그녀가 20세기 여성에게 남긴 것은 패션이 아니라 ‘자유’였다. 모조 보석을 귀부인의 목에 걸게 하고 장례식에서나 쓰는 검정옷을 처음으로 일상화시킨 것도 그의 공로였다.
부와 명예를 쥔 샤넬이었지만 성장기는 고단했고 인생의 절정기는 고독했다. 어머니는 어려서 폐병으로 죽었고 아버지는 그를 고아원으로 내버렸다. 샤넬이 사회에 첫 발을 내딘 것은 20살 되던 해였다. 낮에는 보조 양재사로 꿈을 키우고 밤에는 뮤직홀에서 노래를 불렀다. 애칭 ‘코코’도 이때 그가 즐겨부른 노래 ‘코코를 아시나요’에서 나왔다.
1909년 파리에 처음 모자가게를 열어 디자이너의 꿈을 열었고 1915년에 의상실을 개업해 꿈을 실현시켰다. 소설가 앙드레 말로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 세기에 프랑스에서는 세 이름만 남을 것이다. 드골·피카소·샤넬”.

■ 나치 선전상 괴벨스, 가족과 동반자살 1945년


괴벨스

히틀러를 만나기 전까지 요제프 괴벨스(1897~1945)는 나치주의자도 반유태주의자도 아니었다. 차라리 민족주의적 열정에 사로잡힌 사회주의자에 가까웠다. 그러나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독일문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22년 6월 히틀러를 처음 만나 그에게 빠져들면서 히틀러의 사람으로 빠르게 변신했다. 히틀러를 총통으로 만들기 위해 선전·선동은 물론 여론조작으로 대중을 나치즘으로 끌어들였다.
1933년 1월 마침내 권력을 장악한 히틀러가 괴벨스를 내각 선전상 겸 제3제국 문화원장에 임명함으로써 둘의 2인 3각 경기는 본 궤도에 올랐다. 괴벨스는 “누구든지 감옥에 보낼 수 있다”고 호언하며 시대의 총아 라디오를 이용, 선전 전문가로서의 동물적 후각을 발동했다. 영화에도 손을 뻗쳐 대중들을 속절없이 전체주의의 늪에 빠져들게 했다. 초기에 괴벨스는 교조주의보다는 효용성을, 원칙보다는 편의를 우선했으나 극단적인 나치주의자들의 압력에 굴복, 왜곡과 과장을 일삼았다.
2차대전에서 승승장구하던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와 아프리카에서 패배, 전세가 역전되었을 때도 괴벨스는 ‘선전의 대가’로 진면목을 발휘했다. 신문과 라디오를 이용한 선전활동을 강화하고, 나치 간부들이 지하벙커와 요새로 숨어들어도 그만은 대중 앞에 직접 나서는 용기를 보였다. 그때 보여준 의연한 모습은 부정적이었던 그의 이미지를 크게 개선시켰으나 바야흐로 전쟁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1945년 5월 1일 베를린이 포위된 가운데 아내와 6명의 자녀를 먼저 권총으로 죽인 괴벨스는 자신마저 자살함으로써 히틀러의 영원한 심복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 종군 사진기자 로버트 카파 지뢰 밟고 사망 1954년


로버트카파

1932년 11월,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패해 유럽을 떠돌고 있던 레온 트로츠키가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대중연설회를 할 예정이었다. 사진통신사 ‘데포트’에는 마침 모든 사진기자가 취재를 나가 트로츠키의 강연을 취재할 마땅한 사진기자가 없었다. 그래서 보낸 인물이 19세의 사진보조원이었다. 보조원은 헝가리에서 태어난 유태인으로, 좌익학생운동을 하다가 1년 전 헝가리에서 추방된 후 베를린에서 데포트의 암실보조로 일하고 있었다. 보조원은 연설에 몰입하고 있는 트로츠키와 열광하는 청중들의 모습을 부지런히 사진기에 담았고, 사진은 슈피겔지에 실렸다. 이 사진 한 장 덕에 정식 사진기자로 채용된 애송이의 이름은 앙드레 프리드먼(1913~1954)이었다.
프리드먼은 이렇게 사진기자가 되었으나 1933년 1월 히틀러가 집권하는 바람에 베를린은 유태인인 그가 있을 곳이 못되었다. 이후 빈과 부다페스트 등 유럽을 떠돌다 파리로 흘러들어갔다. 생활은 늘 궁핍했다. 아무리 멋진 사진을 찍어도 파리의 편집장들은 헝가리 출신 떠돌이 유태인 기자의 사진에 제값을 쳐주지 않았다. 프리드먼은 꾀를 내 미국 출신의 ‘로버트 카파’라는 가공의 인물을 만들어냈다. 대리인을 내세워 자신의 사진을 ‘미국의 저명한 사진가 로버트 카파의 작품’이라고 소개하면서부터 사진값은 두 배로 뛰었다. ‘20세기 최고의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이후 카파는 스페인내전을 비롯 중일전쟁, 2차대전의 북아프리카 전투, 노르망디 상륙작전, 인도차이나 전쟁에 이르기까지 전쟁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카파의 이름을 널리 알려준 첫 전쟁터는 스페인 내전이었다. 인민전선 측의 사진기자로 종군했던 카파는 1936년 9월 코르도바 전선에서 취재하던 중 인민전선 병사가 참호에서 뛰쳐나와 돌격하는 순간 머리에 총을 맞고 뒤로 쓰러지는 찰나의 장면을 카메라에 잡았다. ‘병사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사진이 미국의 라이프지에 실리자 “가장 위대한 전쟁사진”, “게르니카와 견줄 만한 힘을 가진 사진”이라는 극찬이 쏟아졌다. 20세기의 전쟁기록 사진 중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 한 장의 사진으로 카파는 일약 최고의 전쟁 사진기자로 이름을 굳혔다. 1938년에는 중일전쟁 취재를 위해 6개월간 중국 대륙을 누비며 일본군의 만행과 잔학상을 세계에 알렸다.


로버트 카파가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촬영한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카파의 존재가 확실히 부각된 것은 1944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었다. 카파는 해변에 상륙하는 미군 부대와 함께 주정(舟艇)에서 뛰어내려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에서도 필사적으로 셔터를 눌렀다. 그 역사적인 순간을 담은 필름은 곧바로 런던에 보내졌으나 흥분한 암실조수가 현상된 필름을 말리다 과열로 망쳐버리는 바람에 100여장의 사진 중 겨우 10여장만 건질수 있었다. 게다가 피사체까지 흔들렸다. 정상적인 경우라면 폐기되어야 했으나 라이프지는 과감히 게재를 결정했다. 이 덕에 사진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대명사가 되었다. 상륙작전의 긴박감을 살린다며 라이프지가 붙인 사진설명은 “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였다.


로버트 카파가 1936년 스페인내전에서 촬영한 ‘병사의 죽음’

1947년 카파는 카르티에 브레송, 데이비드 세이무어 등과 함께 보도사진 통신사인 ‘매그넘’을 설립, 몇 년간 매그넘사 대표로 일했다. 그러던 중 1954년 인도차이나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다시 인도차이나전쟁에 뛰어들었다. 친구들이 만류했을 때 카파는 “삶과 죽음의 확률이 반반이라면 나는 낙하산을 타고 뛰어내려 사진을 찍겠네”라는 말을 남기고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1954년 5월 24일, 전장터에서 지뢰를 밟고 폭사, 종군기자의 전설이 되었다. 카파가 후배들에게 남기고 간 말은 이랬다.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 멀리서 찍었기 때문이다”.

■ 미 FDA, 경구 피임약 승인 1960년

1960년 5월 9일, 인류사에 새로운 이정표가 세워졌다. 미국 FDA(식품의약국)가 산아제한용 먹는 피임약 ‘에노비드 10’을 정식으로 승인한 것이다. 이로써 여성들은 임신의 공포로부터 벗어나 여성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설계할 수 있게 되었고, 자손을 퍼뜨리라는 신의 ‘거대한 섭리’는 인간에 의해 무력화되었다.
피임약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임신을 촉진하는 연구의 부산물로 탄생했다. 1940년대 중반부터 세계 생화학자들은 사람의 특정한 분비선에서 생산되는 미량의 필수물질인 스테로이드 호르몬이라는 화학물질을 연구했다. 당시 스테로이드에 대해서는 그 실체가 어느정도 파악되어 있었다. 즉 스테로이드는 남여의 생식체계를 관장하는 성호르몬 계통과 신체의 신진대사를 조절하는 부신피질 계통으로 분류되고, 성호르몬은 남성호르몬인 안드로겐과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 그리고 황체호르몬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황체호르몬 중 대표적인 것이 임신호르몬인 프로게스테론이다.
생화학자들은 호르몬의 특성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의문을 제기했다. 프로게스테론이 임신에 필요한 호르몬이라면 프로게스테론을 계속 주사할 경우 자연유산을 막는데 즉 임신을 촉진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연구결과는 “도움이 된다”였다. 문제는 프로게스테론이 암말의 오줌, 황소의 고환, 암퇘지의 난소로부터 추출되기 때문에 그 양이 극히 제한적이라는데 있었다. 합성이 어려운 탓에 가격도 1그램당 100달러나 될 정도로 비쌌다. 생화학자들의 연구는 풍부하고 저렴한 프로게스테론의 개발로 모아졌다. 이 연구의 선두주자는 사포제닌이라는 식물성 물질을 프로게스테론으로 전환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을 개발한 러셀 마커라는 괴팍한 천재였다. 그는 약 400종의 식물을 검사하면서 사포제닌이 풍부한 식물자원을 구하는 연구를 계속했다. 그 결과 남부 멕시코의 밀림에서 이 요구조건에 맞는 야생 고구마를 발견했고 이 고구마를 통해 다량의 프로게스테론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생식 생물학자 그레고리 핀커스는 프로게스테론을 가지고 피임 촉진이 아니라 피임효과 실험을 했다. 핀커스는 1930년대에 이미 야생 토끼의 난세포를 체외수정시켜 ‘프랑케슈타인을 만드는 박사’라는 비난을 받으며 하버드대학에서 쫓겨났던 인물이다. 핀커스의 재정 후원자는 시카고 제약회사 G.D.썰사였다. 핀커스 연구팀이 연구에 매진하고 있던 어느날 합성 황체호르몬의 일부가 우연히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과 유사한 물질에 오염되었고, 곧 이 두 물질이 합쳐져 임신을 저지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썰사는 즉각 10mg의 프로게스테론과 100∼150mcg의 에스트로겐을 혼합한 합성물질 노어시노드렐을 만들어냈다. 핀커스는 1956년 푸에르토리코와 하이티 여성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벌였다.
1959년 말까지 1200명의 부인을 상대로 임상실험한 결과 노어시노드렐이 피임약으로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이 실험을 토대로 출시된 것이 ‘에노비드’다. 시판과 함께 구토, 가슴통증 등의 부작용과, 심지어는 심장마비와 뇌졸중을 일으킨다는 보고가 잇따랐으나 매일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복용하기만 하면 90％ 이상의 피임율을 기록함으로써 여성들에게는 대환영을 받았다.

■ 오키나와 27년 만에 일본에 반환 1972년


오키나와 반환-1972년 5월 15일 도쿄 무도관에서 개최된 오키나와 반환 기념식전에서 문서를 교환하는 애그뉴 미 부통령과 사토 일본 총리. 히로히토 천황 부부가 이를 지켜보고 있다

오키나와는 한국·중국·일본·동남아를 연결해 온 해상무역 중심지로, 12세기 말부터는 ‘류큐 왕국’이라는 독립국가로 존재했다. 이 오키나와가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은 가고시마 영주가 이곳을 복속한 1609년이었다. 1872년 왕국이 해체되고 1879년 오키나와현으로 정식 편입되었지만 1000km나 떨어진 일본 본토로부터는 언제나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그렇고 그런 존재 취급을 받았다. 종전을 앞둔 1945년 4월부터 3개월동안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는 버려진 섬의 위상을 단적으로 일깨워주었다. 이 전투에서 미군 1만5000명, 일본 본토의 정규군 6만6000명이 목숨을 잃었으나 오키나와 주민들은 15만명이나 희생되었다. 이처럼 많은 주민들이 죽음으로 내몰린 것은 미군의 본토 진격을 하루라도 늦추기 위해 오키나와 주민들을 총알받이로 내세운 일본 군부의 ‘옥쇄작전’ 때문이었다.
패전 후에도 일본은 오키나와를 미국과의 흥정대상으로 삼아 오키나와 주민들의 반발을 불렀다. 일본은 오키나와의 전략전 가치에 주목한 미국이 1949년부터 오키나와에 미군기지를 건설할 때도 눈감아주었고, 1951년 9월 미일안보조약을 체결할 때도 본토는 군정에서 벗어나 독립하는 대신 오키나와는 미국의 신탁통치 상태 그대로 두게 했다. 이후 오키나와 주민들은 본토 여행을 하려면 신분증명서를 지참해야 했다.
미군은 1953년 4월 오키나와에서 이미 수용하고 있는 토지를 소유자와의 계약없이 단독으로 사용할 수 있는 토지수용령을 발동했다. 이런 식으로 수용한 토지가 오키나와 땅의 13%를 넘었다. 1954년 3월 미군이 차지료 16년 6개월분을 일괄지불한다고 발표했을 때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주민들은 “일괄지불 반대” “신규토지수용 반대”를 외치며 본격적으로 반대투쟁을 벌였다. 게다가 1955년 9월 미군 병사에 의한 6세 어린이 폭행살해사건을 위시한 미군 범죄까지 계속되면서 주민들의 분노가 층층히 쌓였다.
1960년대 들어 오키나와 주민들의 조국복귀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1964년 11월에 발족한 사토 에이사쿠 내각은 오키나와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 미국에 오키나와의 반환을 요구했다. 1965년 8월엔 사토 총리가 전후 현역 총리로는 처음으로 오키나와를 방문, 오키나와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베트남전 개입으로 후유증을 앓고 있는 미국 역시 오키나와 문제를 마냥 외면할 수 없어, 오키나와를 일본에 돌려주되 오키나와 기지는 그대로 유지하고 일본에는 새로운 역할을 부담시켜 대아시아 정책을 재정비하는 것에 목표를 두었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파업을 일으켜 양국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1968년 11월 19일엔 베트남 폭격을 위해 오키나와의 가데나 기지로부터 발진한 B-52기 폭격기가 핵무기저장소 부근에 추락, 폭발하는 사고가 일어나 주민들을 경악시켰다. 다행히 핵무기의 폭발까지는 이르지 않았지만 주민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을 던져주었다. 1969년 2월 5만5000여명의 주민들이 가데나 기지에 모여 항의하는 등 점차 강도를 높여나가자 미국은 오키나와 주민들의 조국복귀 요구나 일본의 국민감정을 무시하고는 오키나와 기지 사용마저 문제가 될 것을 우려, 반환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오키나와 반환협정은 1971년 6월 17일에 조인되고 중의원과 참의원의 승인을 거쳐 확정되었다. 그리고 1972년 5월 15일 0시, 사이렌과 기적소리가 일본 오키나와 전역에 울려 퍼졌다. 27년만의 새로운 출발이었다.

■ 뮤지컬 ‘캣츠’ 런던서 개막 1981년


981년 캣츠-매킨토시(왼쪽)와 웨버

흔히 뮤지컬 ‘캣츠’와 ‘오페라의 유령’ ‘레 미제라블’ ‘미스 사이공’을 한데 묶어 20세기 후반의 ‘4대 뮤지컬’이라 부른다. 이 가운데 맏형격인 ‘캣츠’는 개막 전날까지도 흥행을 자신하지 못했다. 연출가 트레버 넌이 훗날 ‘레 미제라블’ ‘선셋 블루바드’ 등의 대작들을 잇따라 성공시켜 능력을 인정받긴 했지만 ‘캣츠’ 초연 당시만 해도 상업적인 뮤지컬을 한번도 만들어본 적이 없고, ‘캣츠’가 공연될 극장도 지난 10년동안 한번도 성공작을 낸 적이 없어 운이 나쁜 극장으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양이들의 독특한 캐릭터와 다양한 삶의 모습을 인간사회에 빗댄 T. S. 엘리엇의 우화시집(지혜로운 고양이가 되기 위한 지침서ㆍ1939)을 원작으로 삼다보니 시적이고 사색적인 대사가 재미를 가로막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캣츠’에는 작곡가 앤드류 로이드 웨버(1948~ )와 제작자 카메론 매킨토시(1946~ )가 있었다. 웨버는 23세 때 이미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를 작곡해 세계 뮤지컬계에 혜성과 같이 등장하고, ‘캣츠’ 이후에도 ‘오페라의 유령’ ‘에비타’ 등을 작곡해 ‘뮤지컬계의 황제’로 불렸다. 그는 블록버스터 영화처럼 뮤지컬에 거대한 스펙타클을 도입하고 대중의 취향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뮤지컬계의 귀재였다.
매킨토시는 ‘캣츠’ 이후에도 ‘레 미제라블’ ‘미스 사이공’ ‘오페라의 유령’ 등 제작하는 뮤지컬마다 크게 히트시키며 세계 뮤지컬계를 쥐락펴락하는 ‘뮤지컬계의 미다스 손’으로 군림했다. 4대 뮤지컬 외에도 ‘마이 페어 레이디’ 등 100여편의 작품을 제작했으며 이 성공에 힘입어 런던의 공연1번지 웨스트엔드에 7개의 극장을 소유하고 있는 극장 재벌이 되었다.
이렇듯 머지 않아 뮤지컬계의 거인이 될 두 사람이 손을 잡았으니 결과는 낙관적이었다. ‘캣츠’가 처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81년 5월 11일 ‘런던의 브로드웨이’로 일컬어지는 웨스트엔드의 뉴런던 극장이었다. 현대무용과 발레를 넘나드는 춤, 객석을 뛰어다니며 무대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고양이들, 장르가 혼합된 음악 등 고전 뮤지컬에서는 볼 수 없는 생소한 모습에 관객들은 놀라워했다. 게다가 근육의 움직임이 그대로 드러나는 타이트한 의상, 발걸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날렵한 움직임, ‘메모리'로 대표되는 서정적인 음악, 여기에 동화같은 무대와 조명 등이 어우러져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웨버가 작곡한 감미롭고 애잔한 선율의 ‘메모리’는 전 세계인의 애창곡이 되어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등 유명 가수들에 의해 전세계에서 180여차례나 레코딩되었다. 이후 폐허같은 창고를 재현한 스펙터클한 무대, 실제 고양이를 빼닮은 듯한 생생한 안무에 힘입어 런던을 찾는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거쳐야할 필수코스가 되었다. 다음 수순은 미국의 브로드웨이 진출이었다. ‘캣츠’가 그랬고 이후에 나올 ‘오페라의 유령’ ‘레 미제라블’ ‘미스 사이공’이 그랬다. ‘캣츠’의 열기는 1982년 10월 7일 브로드웨이 윈터 가든 극장으로 건너가서도 식을 줄 몰랐다. 2000년 9월 10일 브로드웨이에서 막을 내릴 때까지 ‘캣츠’는 18년간 7485회나 상연된 최장수 뮤지컬이 되었다. 런던 웨스트엔드에서는 개막 후 정확히 21년째가 되는 2002년 5월 11일 8949회로 막을 내려 세계 뮤지컬사를 새롭게 썼다. 브로드웨이 최장수 기록은 2006년 1월 9일 7486회 공연기록을 세운 ‘오페라의 유령’에 의해 깨졌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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