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 만국박람회 개막        1900년
20세기의 개벽을 알리는 첫 전령사는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였다. 그것은 신세기를 맞아 인류가 이뤄낸 과학의 발전과 진보, 그리고 미래에 대한 전망을 실제 눈으로 확인하고 만끽하도록 한 당대 인류 문명의 총결산이었다. 그해에 개막한 파리의 지하철 시대, 사상 두 번째로 파리에서 열린 올림픽도 박람회 행사의 일환일 뿐이었다.

▲ 파리박람회 당시 모습

파리박람회는 1900년 4월 14일 에펠탑 인근 상드마르스 공원에서 개막했다. 박람회장에는 세계 40개국의 국가관이 세워졌고 11월 12일 폐막 때까지 5086만명의 사람들이 박람회장을 방문했다. 밤거리를 밝힌 1만개의 전등은 20세기가 전기의 시대임을 알려주었으며 19세기 말에 만개하고 세기의 문턱을 넘어선 ‘아르누보’ 예술도 곳곳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아르누보 양식을 채택한 진열관들은 곡선과 화려한 색채를 조화시킨 건축미를 뽐냈으며 최신의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구조는 견고함을 자랑했다. 파리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알렉상드르 3세 다리도 박람회에 맞춰 건설되었다. 고강도의 절삭기 등 기계류 역시 신세기가 대량 생산시대임을 예고했다.
박람회는 기술·과학의 성취만큼이나 미술의 진보를 확인시켜준 대형 이벤트였다. 박람회를 위해 건립된, 홀 길이 200m, 너비 55m나 되는 대형미술관 ‘그팔레’에서는 1889년부터 1900년까지의 10여년을 총망라한 ‘프랑스 미술의 10년전’과 더불어 19세기 100년간 미술의 성과를 종합하는 ‘프랑스 미술의 100년전’이 열렸다. 5000여점이 출품된 이 미술기획전은 사실상 미술박람회나 다름없었다. 당시 아방가르드로 취급되던 드가, 마네, 모네, 피사로, 르누아르, 세잔 등의 그림도 관람객들에게 미술사의 새로운 변화를 실감케 했다. 19세의 스페인 청년 피카소는 1900년 10월 파리의 오르세역에 도착, 전시 그림들을 마음껏 감상하면서 세계 미술 조류를 눈과 머리와 가슴에 담았다. 일본은 미술관 전시에 참여한 유일한 동양국가였다. 일본이 전통회화와 근대 서양화를 대거 전시하자 서구인들은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동안 그들을 매혹시킨 일본의 미술품은 대부분이 섬세한 공예품이었기 때문이었다.
인류 최초의 박람회가 개막된 것은 1851년의 영국이었다. 세계 25개국이 참가하고 1851년 5월 1일 개막한 박람회의 정식 명칭은 ‘만국산업생산품 대박람회’였다. 참가국은 자국의 산업적 현주소를 홍보할 목적으로 참가하긴 했지만 산업혁명을 성공시킨 영국의 진보와 번영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한 목적도 컸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 영국은 박람회를 통해 앞선 기술을 마음껏 과시했다. 박람회는 영국이 ‘세계의 공장’임을 확인시켜주었다. 특히 상상을 초월한 수정궁 모습에 참가국은 물론 영국인들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4500t의 강철 구조물 위에 30만장의 유리를 씌운 폭 142m, 너비 560m의 전시장을 건설, 건축공법의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개막식을 마친 그날 저녁 일기에 “영국 역사상 가장 성대하고 또한 아름답고 영예로웠던 날”이라고 적었다. 영국 정부는 5개월이 넘는 박람회 기간 동안 600만명이 입장한 것에 한껏 고무되었다. 당시 영국 전체 인구는 2100만명이었다.
이후 박람회는 전 세계에서 경쟁적으로 열렸고 그때마다 자국의 기술문명을 상징하는 새로운 전시물이 설치되었다. 1878년 미국 필라델피아 박람회에서는 전화기와 축음기, 냉장고가 일반에 처음 소개되었고,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는 프랑스의 상징이 된 에펠탑 건설로 유명했다. 1900년의 파리박람회에서는 지하철과 토키영화가, 1939년 뉴욕엑스포에서는 나일론과 플라스틱, TV 등이 전시되었다. 1970년 오사카엑스포에서는 신간선 초고속열차를 등장시켜 일본의 기술력을 과시했다.

■ 마르셀 뒤샹, 앙데팡당전에 ‘변기’ 출품        1917년

▲ 뒤상의 ‘샘’

1917년 4월 10일 뉴욕에서 열린 독립미술가협회의 첫 전시회 즉 ‘앙데팡당전’은  6달러만 내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젊고 패기만만한 독립작가들의 축제의 장이었다. 그런데 그 전시장 칸막이 뒤에 한 작품이 볼썽사납게 거의 방치된 채 놓여 있었다. 마르셀 뒤샹(1887~1968)의 ‘샘(fountain)’이라는 작품이었다.
전시회가 열리기 전 뒤샹은 변기 제조업자 리처드 머트의 이름에서 딴 ‘R.Mutt(얼간이) 1917’라고 사인을 한 남성용 소변기를 들고 와 주최측에 전시를 요구했다. 분명 무심사 전시가 원칙이었는데도 전시위원회 측은 전시여부를 놓고 갑론을박했다. 결국 위원회가 변기를 작품으로 보지 않고 예술을 모독하는 비속한 물건으로 결정함에 따라 ‘샘’은 전시기간 내내 푸대접을 받아야 했다. 뒤샹은 전시가 끝난 후 한 잡지를 통해 ‘미국인에게 보내는 공개장’이란 제목의 글을 통해 그들의 무지를 질타했다.  “미국의 문화라는 것이 변기와 교량밖에 없지 않느냐”고.
뒤샹의 작품이 거부된 것은 이번만이 아니었다. 5년 전 파리의 앙데팡당전에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라는 그림을 출품했을 때도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었다. ‘누드’는 이듬해 뉴욕에서 전시되었을 때 관객들이 그의 작품을 보기위해 장사진을 칠 정도로 가장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같은 작품을 놓고 악평과 호평이 교차하는 것에 충격을 받은 뒤샹은 이후 사실상 그림그리기를 중단하고 새로운 미술양식에 몰두했다. 현대미술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으로 평가받고 있는 ‘레디메이드(Ready Made·기성품)’였다.
그는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기성품 즉 ‘레디메이드’를 예술에 끌어들여 일상용품과 예술작품의 경계를 허물었다. 뒤샹의 대표적인 ‘레디메이드’ 즉 전시회에 출품된 ‘변기’가 함축한 것은 ‘예술은 더 이상 어떤 대상을 손으로 재현하는 테크닉이 아니다’는 메시지였다. ‘제작’으로만이 아니라 작가의 ‘선택’만으로도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뒤샹의 의도는 이전 사고에 대한 도발이었고 회화의 관습에 대한 조롱이었다.

■ ‘대한민국’ 국호 제정             1919년

▲ ‘대한민국’국호의 산파 신석우

1919년 4월 11일에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회의가 특히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가 결정되었다는데 있다. 그날 회의에서 ‘대한민국’ 국호를 처음 제안한 사람은 신석우(1894~1953)였다. 그는 나중에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사를 인수, 이상재를 사장에 추대하고 자신은 부사장으로 물러나 있으면서 조선일보를 민족지로 키우는데 힘썼던 인물이다.
‘대한민국’ 국호가 논의에 붙여졌으나 논란이 적지 않았다. 여운형이 “대한이란 말은 조선왕조 말엽 잠깐 쓰다가 망한 이름이니 부활시킬 필요가 없다”며 반대하고 나서자 신석우는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며 맞받아쳤다. 결국 표결에 붙여진 끝에 ‘대한민국’이 정식 국호로 채택되었다. ‘대한민국’에서 ‘민국’은 중국의 신해혁명 이후 불리기 시작한 ‘중화민국’에서 영향을 받았다.
‘대한’이란 국호는 1897년 고종이 중국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국임을 강조하기 위해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면서 처음 등장했으나 1910년 8월 일제의 합병조약에 따라 사용이 금지되었다. 일제는 통감부 칙령으로 ‘대한제국의 국호를 고쳐 지금부터 조선이라 칭한다’고 발표하고, 가쓰라 일본 총리가 천황의 재가를 받아 ‘대한’ 사용을 금지시켰다. 일제 강점기에 실체없는 국가의 이름으로 중국 땅에서만 불려오던 ‘대한민국’이 제 이름을 다시 찾은 것은 1948년 제헌의회가 구성된 뒤였다.
1948년 7월 1일 제21차 제헌국회 본회의장. 제헌의원들이 헌법기초위원회가 제출한 헌법을 심사하고 있었다. 먼저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조항부터 심의에 들어갔다. 이에 앞서 5월 31일 열린 국회 개원식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국호로 사용함에 따라 ‘대한민국’은 이미 제헌의원들 간에 대세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참석자들은 이념적 성향에 따라 ‘조선’ ‘고려’ 등 여러 이름을 후보로 올렸다. ‘대한’을 국호로 사용하자는 측은 망국 직전까지 사용했던 국호(대한제국)이니 광복의 의미가 있고, 3·1운동 이후에도 사용된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여기에 이승만이 “국호 명칭으로 문제를 일으키지 말자”고 요청하자 위원들이 재청·삼청으로 원안을 통과시키려 했다. 그때 조봉암 의원이 “대한민국이란 명칭은 천만부당하다”며 제동을 걸고 나섰다. 결국 의회는 거수 표결에 들어가, 재석 188명에 찬성 163명, 반대 2명으로 통과시켰다. 한민족의 새 역사를 열어나갈 신생국의 국호가 ‘대한민국’으로 확정되는 순간이었다.

■ 영친왕 정략결혼            1920년

▲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고종(1852~1919)에게는 9남 4녀의 자녀가 있었다. 이중 성장해서 혼인까지 한 아들은 순종(1874~1926), 의친왕(1877~1955) 이강, 영친왕(1897~1979) 이은 이렇게 세명 뿐이었다. 순종은 명성황후, 의친왕은 상궁 덕수 장씨, 영친왕은 후궁 순빈 엄씨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들 3명은 이복형제들이었다.
순종은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때문에 1907년 순종이 즉위하면서 이은이 황태제로 책봉되었다. 20세나 나이가 많은 이강을 제치고 이은이 황태제가 된 것은 명성황후 사후 엄비가 최고 서열이었기 때문이다. 이강의 생모 장상궁이 이미 죽은 뒤이기도 했지만 살아있다 해도 상궁출신인 데다 이은의 생모 엄비만큼 눈치가 빠르거나 처신에 능하지 못해 이강이 후계자로 오르지는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엄비는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2년 후 이은을 낳아 명성황후로부터 직접적인 박해를 받지는 않았으나 장상궁은 명성황후가 살아있을 때 순종보다 불과 세살어린 이강을 낳아 잠재적인 경쟁자로 여긴 명성황후로부터 모진 박해를 받았다. 장상궁은 아들과 함께 궁밖으로 쫓겨났다가 혹독한 박해를 받아 10여년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강은 명성황후 생존시에는 명성황후로부터 박해를 받더니 명성황후 사후 이은이 태어났을 때는 엄비의 눈총을 받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고독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이은은 1900년 영친왕에 봉해지고 1907년 순종의 즉위에 맞춰 황태제로 책봉되었다. 1907년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10세의 어린 나이에 강제로 일본에 건너간 것은 파란만장과 시련의 시작이었다. 당시 고종은 영친왕의 일본행을 반대했으나 “해마다 여름방학이 되면 한국으로 보내겠다”는 이토의 약속을 믿고 영친왕의 일본행을 허락했다. 물론 끝까지 반대했다 한들 일본행을 막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실상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영친왕은 생모가 죽은 뒤 5년만인 1916년 조선 땅을 밟을 수 있었다.
1910년 한일합방과 함께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순종도 폐위되어 이왕으로 격하됨에 따라 일본에 있던 영친왕도 황태제로부터 왕세제로 격하되었다. 영친왕은 일본 황족학교인 학습원을 거쳐 1917년 일본 육사를 졸업, 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으로 변모했고 자연스럽게 일본 황실의 일원이 되었다. 1920년 4월 28일에는 일본 황족 나시모토 노미야의 장녀 나시모토 마사코(方子)와 도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일제가 황실규정을 고쳐가면서까지 둘의 결혼을 추진한 것은 양국간 잡혼을 통한 내선융합 정책 때문이었다. 영친왕의 결혼식이 있던 그날, 서울에서는 한 여인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영친왕이 일본으로 가기 전인 1904년 영친왕의 비로 간택되었으나 일제의 회유와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1918년에 강제파혼당한 민갑완이라는 여인이었다. 민씨는 ‘왕세자의 약혼녀’로 정절을 지키다가 영친왕이 서거(1970년)하기 전 못다 이룬 사랑의 한을 품고 1968년 2월 가난과 병마에 시달리다 쓸쓸히 부산에서 생을 마쳤다.
영친왕의 정략 결혼은 1920년 3월 창간 직후의 조선일보에도 불똥이 튀었다. 결혼식 당일자 조선일보는 영친왕의 결혼소식과 함께 민씨의 강제파혼 전말을 소개했는데 이 기사가 조선총독부 눈에 거슬려 압수되었던 것이다. 창간 50여일만에 이뤄진, 일제 치하 조선일보 최초의 압수기사였다.
1926년 순종의 승하 후 영친왕은 형식상으로 왕위를 계승해 이왕으로 불리웠으나 일본의 반대로 귀국하지는 못하고 일본에 체류했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사이에는 두 아들이 있었다. 큰아들 진은 1921년 영친왕의 두 번째 고국방문 때 변사하고, 1931년에 태어난 둘째아들 구는 19세에 미국 MIT대에 유학갔다가 그 곳에서 만난 우크라이나 태생의 미국 여성 줄리아와 결혼했으나 자녀는 없었다. 2005년 이구가 일본에서 사망함으로써 조선 왕실의 적통도 끊어졌다. 이방자 여사는 생전에 “가족 네명의 혈통이 저마다 다른 기구함을 뼈저리게 느꼈다”며 비운의 가족사를 회고했다.

■ 독일군, 게르니카 폭격          1937년
1937년 4월 26일 오후4시30분, 독일 공군 ‘콘돌 군단’의 무차별 폭격으로 스페인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에 재앙이 내렸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에 위치한 고도(古都)로 분리 독립을 원하는 바스크족에게는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게르니카의 참극은 스페인 내전 때 프란시스코 프랑코에 반대하고 공화파에 속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이날, 프랑코를 지지하는 독일군은 전투기의 성능도 시험할 겸 그들이 자랑하는 ‘하인켈 3’와 ‘콩커스’ 52기를 43대나 게르니카 상공에 띄웠다. 4시간 동안이나 계속된 폭격으로 마을의 70%가 쑥대밭이 되었고 7000여명의 주민 중 16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장날이라 북적거렸던 중앙광장에도 폭탄이 떨어졌고 도망가는 부녀자나 노인들에게도 기총 사격이 가해졌다. 사건이 국제사회의 공분을 불러 일으키자 프랑코측은 한때 “공화파의 자작극”이라며 발뺌했으나 곧 독일군의 공습이었음이 판명되었다.

▲ 피카소 작 ‘게르니카’

이 사건이 지금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피카소(1881~1973)가 그린 ‘게르니카’ 때문이다. 당시 스페인 공화파 정부로부터 파리 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에 걸릴 대형 벽화를 의뢰받아 고민하고 있던 피카소가 ‘게르니카의 학살’ 소식을 접한 것은 폭격이 있고 이틀이 지난 뒤였다. 조국 스페인을 떠나 파리에 머무르고 있던 피카소는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몸을 떨었고 곧 깊은 슬픔에 잠겼다. 피카소가 붓을 들고 미친 듯이 그려 나간 그림 ‘게르니카’는 6월 4일 완성되었다. 그림을 본 사람들은 ‘전쟁과 폭력을 고발한 20세기 묵시록적 작품’ ‘학정에 대한 저항과 화해의 상징’이라는 찬사를 쏟아냈다. 검은 색 바탕의 대형 캔버스(7.82m x 3.51m)에는 고통과 분노, 절규와 죽음이 가득했다. 화려한 색채를 즐겨 사용했던 평소와 달리 흑?백을 주조로 한 단순배색과 기하학적 구도로 전쟁의 비극을 더욱 강하게 부각시켰다. 2차대전 중 미국으로 건너간 ‘게르니카’는 “스페인에 민주주의가 찾아왔을 때 돌려주라”는 피카소의 유언에 따라 1981년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 장훈, 일본 프로야구 데뷔      1959년

▲ 도에이 시절 앳된 모습의 장훈

일본의 프로야구 개막전이 열린 1959년 4월 10일, 고교를 갓 졸업하고 프로야구단 ‘도에이’에 입단한 열아홉살의 장훈(1940~ )이 6번 타자로 타석에 섰다. 고교 졸업과 동시에 프로야구단 1군에 진출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데다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대우가 극심하던 때라 큰 부담을 안고 타석에 선 장훈의 표정엔 긴장하는 빛이 역력했다. 세살 때 불장난하다 다친 오른손을 일본인 의사가 치료 거부만 하지 않았던들, 이로인해 오른손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붙지만 않았던들 장훈은 투수로 그 자리에 섰는지 모른다. 더구나 그는 5살 때 오사카에서 피폭까지 당해 늘 죽음의 그림자가 그를 따라다녔다.
고교시절 왕정치와 고교 야구계를 양분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뛰어난 활약을 보인 장훈이었지만 프로야구의 벽은 역시 높았다. 개막전 첫 상대인 한큐 브레이브즈의 선발투수가 던진 공 3개에 3진을 당한 것이다. 수비에서도 외야플라이를 머리 위로 넘기는 결정적인 실수까지 범했다. 결과는 교체였다. 그날 밤 장훈은 밤새도록 배팅훈련을 하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2군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초조감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튿날, 상대투수는 전년도 성적 14승 4패라는 발군의 성적을 기록한 ‘한큐’의 아키모토였다. 그러나 데뷔 두번째 타석에 선 장훈의 눈에 공이 선명하게 들어왔고 장훈은 좌중간 2루타를 날렸다. 데뷔 첫 안타였고 일본 프로야구 최다안타 기록인 3085안타의 시작이었다. 다음 타석은 우측담장을 넘기는 홈런, 역시 23년간 기록했던 504개 홈런의 첫 출발이었다. 4타수 3안타가 그날의 기록이었지만 장훈은 세 번째 안타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데뷔 첫 해 장훈은 신인왕을 수상했다. 1982년 41세로 은퇴할 때까지 그가 기록한 7차례의 ‘수위타자’는 3085개의 안타와 함께 지금까지 일본 프로야구에서 깨지지 않는 대기록으로 남아있다.

■ 세계여자농구대회 준우승           1967년

▲ 세계여자농구

1967년 4월 15일, 세계 11개국이 참가한 제5회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가 체코에서 개막되어 8일간의 열전에 돌입했다. 한국으로서는 공산권 국가에서 개최된 국제대회의 첫 출전이었다. 남북간의 긴장이 고조될 때였던 탓에 한국 선수단은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대회에 임했다. 게다가 북한의 공관원들이 우리 선수들이 묶는 호텔방에 북한 체제를 찬양하는 선전물을 매일 집어넣고 선수들이 화장실에 갈 때도 따라다니며 괴롭혀 선수들의 정신상태는 극도로 예민해 있었다. 급기야 이에 항의하던 한국선수단 단장이 대회 중반에 추방당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예선전 같은 B조에 속한 쿠바의 갑작스런 불참이었다.
한국팀의 평균신장 168cm는 평균 신장이 190cm나 되는 동유럽팀에 비하면 절대적으로 열세였다. 그러나 우리 선수들은 탄탄한 기본기와 두뇌플레이로 예선전 두 경기에서 이탈리아를 76대 56으로, 전년도 준우승팀 체코를 67대 66의 근소한 차로 이기고 결승리그에 진출했다. 6개국이 진출한 결승리그에서도 동구의 강호 동독과 일본을 연달아 격파하자, 결승리그에 진출한 것만으로도 만족해 하고 있던 국민들이 서서히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 대회를 2연패하고 평균신장이 25cm나 큰 소련에게는 역시 역부족이었다. 결국 81대 60으로 패했다. 그럼에도 4월 22일 마지막 상대인 유고를 제물로 삼아 종합전적 4승 1패로 준우승을 거머쥘 수 있었다. 한국 구기종목 사상 첫 세계대회 은메달이었고, 전국민을 열광시키고 세계를 놀라게 한 쾌거였다. 박신자 선수는 우승팀 최고 스타에게 주는 관례를 깨고 세계대회 출전사상 첫 최우수선수상(MVP)를 수상했고, 김추자 선수는 미기상을 받았다.
5월 7일 선수단이 귀국하자 한국 스포츠 사상 처음으로 김포공항에서부터 서울운동장까지 20km에 걸쳐 환영 카퍼레이드가 펼쳐졌다.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환영회에는 3만여명의 인파가 모여 준우승을 축하해주었다. 박 선수는 이때의 활약을 인정받아 세계여자농구 사상 최고 선수·지도자 26명 가운데 동양인으로는 유일하게 선정되어 1999년 미국 여자농구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 소련 체르노빌 원전 화재      1986년

▲ 체르노빌 원전사고

1986년 4월 26일, 그린피스가 “20세기 역사에서 전쟁을 제외한 가장 큰 재앙의 날”로 규정한 대형 참극이 구소련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에서 일어났다. 사고 당시 체르노빌 원전 단지 안에는 1~4호기 운전요원과 5~6호기 건설작업자 등 400여명이 근무하고 있었고 4호기에서는 터빈발전기의 관성운전시험을 실시하고 있었다. 비극은 새벽 1시24분 쯤 4호기 운전요원이 원자로를 멈추기 위해 긴급정지 버튼을 누르는 순간 연이어 터진 두 번의 폭발과 함께 시작되었다. 원자로 내부에 있던 냉각수가 열로 인해 발생한 ‘증기압에 의한 폭발’이 먼저 일어나고 수초 후 원자로 냉각수와 흑연감속재가 혼합되어 화학반응을 일으킨 두 번째 폭발이 일어났다.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보다 수십 수백배나 규모가 큰 대폭발이었다.
폭발로 인해 하늘로 치솟은 불기둥과 함께 강력한 철강·콘크리트 지붕이 날아가고 원자로에 있던 대량의 방사성 물질이 대기로 퍼져나갔다. 뜨거운 핵연료 파편들은 인근 건물의 지붕로 날아가 곳곳에 화재를 일으켰다. 소방요원들은 상황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도 모르고 불을 끄는 데만 여념이 없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다가간 죽음의 그림자였다. 구토증세와 불쾌감을 호소하던 대원들은 병원에서 숨졌고 살아있는 대원도 살아있는 게 아니었다.
주민들은 새벽잠을 깨고서야 간밤에 원전 4호기에서 폭발사고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으나 소련 정부의 별다른 발표가 없어 일상생활을 계속했다. 그날은 너무도 맑은 토요일이었다. 주민들이 16건이나 되는 야외결혼식을 치르고 유원지에서 유쾌한 하루를 보내는 동안 방사성 물질은 소리없이 주민들 몸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4월 27일 대기 중에서 평소보다 높은 방사능을 검출한 스웨덴과 노르웨이, 핀란드가 이 사실을 공표하자 소련 정부도 더 이상 사고사실을 숨길수 없어 4월 28일 “체르노빌 원전에서 작은 사고가 발생했으나 큰 사고가 아니니 동요하지 말라”며 “31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곧 주민대피방송이 시작되어 5월 3일까지 사고지점 반경 10km 이내 주민들이 서둘러 대피하고 5월 7일까지 반경 30km 이내의 주민들이 거주지를 떠났으나 이미 주민 대부분이 방사능에 노출된 뒤였다. 소련 최고 권력자들은 사고발생 직후 친지들에게 전화나 전보로 긴급 대피를 권유한 것으로 훗날 알려져 소련 상층부의 도덕적 타락상을 여실히 드러냈다. 사고 원자로에 대한 소화작업은 계속되었다. 대규모 방사능 누출은 헬리콥터가 상공에서 납과 모래 등을 투하하고 인접한 3호 노(爐)에 구멍을 뚫어 질소를 투입한 5월 6일에서야 멈췄다. 6월에 노의 봉인작업이 시작되었고 11월에 콘크리트로 단단히 봉한 석관작업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소련 정부가 상황 파악과 대책에 미적미적하는 사이, 희생자와 피해 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그런데도 소련 정부의 은폐와 주민의 이동으로 정확한 집계는 지금까지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서방 세계의 조사도 과장과 축소하는 곳이 많아 수백명에서 수만명까지 큰 차이를 보이고 있어 정확한 집계를 어렵게 하고 있다.
세계보건기구 산하 국제암연구센터는 앞으로 수십년동안 1만6000명이 사망할 것이라고 예측했으나 환경단체들은 “터무니 없는 수치”라며 “10만명 이상의 암 사망자가 추가로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방사선에 노출된 사람도 1995년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등 3개국에서만 900만명의 주민들이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보고 최소 80만명이 피폭 우려자로 분류되었다.
이처럼 피해가 커진 것은 소련 정부의 비밀주의와 무사안일주의, 군사우선주의, 관료주의가 부른 늑장대처 때문이었다. 체르노빌 사고는 소련 시민들로 하여금 체제에 대한 불신과 반체제 지향성을 품게 했다. 비밀주의에 의한 정보의 결여, 관료주의로 인한 늑장 대처, 의료기술의 후진성과 의약품 부족 등이 봇물터지듯 소련 언론에 고발되었다. 여기에 공산당 지배 하의 뒤틀린 모습과 특권층의 횡포 등까지 차례로 폭로됨으로써 그때까지 서서히 진행되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의 속도가 한층 빨라지는 결과를 낳았다. 지금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원전사고의 후유증으로 갑상선 기능부전과 백혈병, 암 등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어 체르노빌 사고는 오랫동안 현재 진행형으로 남을 예정이다. 체르노빌 원전은 2000년 12월15일 영구 폐쇄되었다.

■ 독일 적군파 해산           1998년

▲ 독일 적군파의 마인호프

1960년대 말 학생운동의 쇠퇴 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적응을 거부한 소수의 급진 좌파들이 ‘독일 적군파(RAF)’를 결성했다. 창설의 주역 안드레아스 바더와 울리케 마인호프는 베트남 반전운동, 이란 팔레비왕의 독일방문 반대 등의 시위를 하면서 알게 되었다.
마인호프는 함부르크 좌익계 잡지에서 활약했던 여성 저널리스트였고 바더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직업운동가였다. 마인호프는 바더가 1968년 프랑크푸르트 백화점 방화로 교도소에 수감되자 면회를 가장, 바더를 탈출시킴으로써 더욱 유명해졌다. 그래서 1970년 5월 14일에 일어난 이 날을 독일 적군파의 탄생일로 삼는 사람들도 있다. 두 사람은 1976년에 검거되어 마인호프는 그해 5월 감옥에서 목을 매 자살했고, 바더는 루프트한자 여객기 피랍이 실패로 돌아간 1977년 10월 18일 감옥에서 권총으로 목숨을 끊었다. 두 사람의 이름을 따 ‘바더·마인호프 그룹’으로도 불린 ‘독일 적군파’는 반국가·반자본주의·반제국주의를 표방하며 폭탄테러, 요인암살, 독일 내 미군기지 폭파 등 각종 범행을 저지르며 테러단체로 악명을 떨쳤다.
특히 이들은 1977년을 테러리즘의 피로 물들게 했다. 검찰총장 암살(4월 7일)을 시작으로 드레스너 폰트 은행장을 사살(7월 30일)하고 슐라이어 독일경영자연맹 회장을 납치(9월 5일)했다. 슐라이어는 나중에 프랑스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루프트한자 사건 후 적군파는 잠시 숨을 죽이는 듯했으나 1989년 독일 지멘스사 경영자의 승용차를 폭파해 죽게 하고 1991년 4월에는 동독 산업민영화 책임자 로베더를 암살함으로써 건재를 과시했다. 로베더는 공식적으로 확인된 적군파의 마지막 테러 희생자였다.
1998년 4월 20일 독일 본의 로이터통신에 한통의 성명이 날아들었다. “적군파의 과업을 오늘로 종료한다.” 시대의 탕아 독일 적군파가 해산된 것이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