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고의 발명은 ‘문자’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를 두고 인류학자들은 문자가 사용되고 기록물이 등장하는 시점부터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로 구분하고 있으며, 우리 민족을 예로 들면 문자나 회화, 기호 등을 동물의 뼈나 바위 등에 새김질한 원시시대의 유물이나 각종 암각화를 비롯하여 고려시대 초조나 팔만대장경을 비롯한 목판 대장경,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의 책판, 조선시대 사서삼경이나 의서, 각종 문집이나 김정희의 대동여지도 등  우리 민족은 서각에 관한 깊고 찬란한 역사와  다양한 목판의 유물들과 함께하고 있다.

차성경 기자 biblecar@

서각이란 무엇인가?
많은 시간과 세밀한 기술, 고도의 집중력, 높은 완성도가 요구되는 대장경 경판이나 책판각 등 목판 인쇄술의 발달은 금속활자나 컴퓨터, 스마트폰 등이 발명되기 이전에 다양한 지식의 습득과 함께 인류의 기록 유산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으며, 각종 목공 공구의 발달과 함께 화려한 건축술의 발달도 가능케 했으며 거시적으로 보면 전 근대 산업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이렇듯 오랜 역사와 전통, 인류 문화의 발달사와 궤를 함께해온 서각은 현대에 들어와서는 단순히 기록물을 만들기 위한 목적이 아닌 하나의 예술장르로 승화되고 있다. 나무 판재에 전통적인 각법으로 칼과 끌등 연장을 사용하여 새김질하고 칠을 하여 완성하는 전통서각과,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여 추상적이고 조형적인 미적 감각을 활용하여  제작하는 현대서각으로 구분되어 많은 동호인들이 각처에서 나름데로 작업에 임하고 있다. 
 
서각의 매력에 흠뻑 빠지다.

▲ 김기철 선생

1983년부터 서울시 지방행정직 공무원으로 공직 생활을 하며 취미로 서예를 배우던 김기철 씨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서각은 서예의 평면 작업을 벗어나 3차원적인 입체 조형의 세계를 보여주며, 그를 문화적 충격으로 인도했다. 전통과 고전이 살아 숨 쉬는 서각예술에 매료된 그는 1987년도에 전통서각가인 석촌 김상철 선생에게 입문하여 전통서각의 이론과 실기를 터득하였다 한다. 그리고 우리 선조들이 남긴 귀한 서적의 대부분이  목판각(인쇄를 목적으로 글자를 뒤집어 붙이고 새긴 판)인 것에 주목하고 나름대로 판각에 대한 자료를 준비하고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그의 목판각 제작에 대한 희망과 열정은 우연한 기회에 크게 심화되게 되었는데, 1991년도 그의 고교 은사이며 당시 원광대학교 서예과 교수로 부임한 서예가이자 한학자인 근원 김양동 선생의 문하인 근묵회에서 한문 서예를 익히면서부터다. 근원 선생은 그에게 서예에 대한 재능보다 서각을 잘할 수 있는 잠재력이 크다는 것을 간파하고, 전통적인 목판각의 배자 및 판각의 방법, 인출 과정 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다. 그 후로 그는 목판각에 대한 안목과 각법이 일취월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근원 김양동 선생에게 수학한 지 10년 후인 2001년도에 그는 해인사로 가서 우리나라 최초로 대장경 경판을 새기는 각수로 근무한 바 있다.
 
목판의 실용성과  가치
요즈음은 각종 인쇄용 기계들이 컴퓨터와 스마트 기능이 탑재되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그 과정도 신속 정확해졌으나, 불과 백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지식을 습득하는 도구로 목판을 인출한 서적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목판각을 구시대의 유물 정도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목판각은 실용성은 없어졌을지 몰라도 다른 한편으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가령 우리나라의 찬란한 불교 문화유산인  해인사의 팔만대장경 경판을 실용적인 관점으로만 본다면 보다 큰 의미를 찾을 수 없으나, 그것을 만들 당시에 몽골과의 전쟁 중인 최악의 상황에서 깊은 불심과 호국의 정신으로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최고의 경판을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기철 각수는 해인사에서 5년 동안의  계약기간이 끝나고 예전에 살던 서울로 돌아가지 않고 해인사에서 가까운 시골 마을에 정착해 살면서 오늘도 대장경 판각에 대한 연구 및 일반 서각작업에 대해 몰두하고 있다. 그의 말로는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고려시대에 초조대장경이 만들어진 지  천년이란 세월이 흘렀고, 그동안 우리 민족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명품 서각 작품을 각수들의 손으로 만들어 왔는데, 나 또한 역사에 길이 남을 좋은 작품을 만드는 것이 인생의 목표다”고 한다. 각수 김기철 선생은 국내 최초로 해인사에서 대장경 판각 작업을 한 독특한 경력으로 국내 방송 3사 및 경인방송에서 제작한 팔만대장경 관련 다큐멘터리에 출연하였고 일본의 NHK 및 우리나라 문화재청에서 주관한 국가지정 중요 전적문화재 원문DB 구축사업에 참여했으며, 전통 서각의 활성화를 위해서 토, 일요일 무료 강좌 및 각종 판각 체험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좋은 인연으로 거듭난 삶
모든 예술가에 있어서 그가 만든 작품이 어떤 사람이 소장하고 있으며  또한 현재 어느 곳에 소장되어 있느냐에 관한 대답은 매우 중요한 물음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성헌 김기철 각수는 이미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한 예술가이다. 그가 해인사에서 5년 동안  판각작업을 하던 당시 주지스님은 해인사를 찾은 각국의 대통령이나 국내외의 대단히 유명한 사람들에게 그가 만든 목판 대장경을 선물하곤 했는데 그 수가 70판은 된다고 한다. 예를 들면 당시 브라질, 터키, 폴란드 대통령과  티벳왕사인 링린포체, 미국의 버클리대 박물관과 시카고대학, 일본 교토의 불교대학, 우리 나라의 문화재청 등 아주 다양한 소장처를 가지고 있다. 또한 그가 만든 작은 작품 하나라도 그와의 좋은 인연으로 인하여 만들어지게 되었다면 그 인연을 지속시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는 각수 김기철, 그가 살고 있는 작은 시골마을의 도랑에 흐르는 물처럼, 노자가 주장한 ‘도법자연’의 말을 실천하며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삶이 어쩌면 물질 만능주의가 팽배해진 요즘 현실에서 우리들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