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곤 작가의 ‘시간의 기억’은 얼핏 보면 단순한 것 같지만 보면 볼수록 신비한 표정을 담고 있다. 장지의 수용력으로 만든 은은한 색면에 윤회를 상징하는 의미심장한 소재들을 오방색의 안료와 금니로 표출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고 있으면 오랜 시간의 결을 간직한 벽화를 대면하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작가는 이러한 형식을 통해 우리를 심오한 상징세계로 끌어들이고 있다.

신선영 기자 ssy@

지난 6월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이형곤 작가의 개인전 「시간의 기억」전이 열렸다. 작가는 ‘시간의 기억’이라는 명제를 통해서 그 속에 깃든 사람과 자연의 도리를 밝히고 있다. 이는 윤회사상이라는 시간의 질서에 순응하는 순환론적 인식에 가깝지만, 그 본질은 작품을 미래에 위치시켜 놓는 진화론적 관점에 맞닿아 있다.

▲ 이형곤 작가

선사상으로 바라본 윤회
우선 「시간의 기억」 전은 명상의 풍경이라는 수식을 부여해야 할 것 같다. 작가는 먼저 인터뷰에 앞서 “이번 전시의 주제이자 작품명이기도 한 ‘시간의 기억’은 역사와 문화를 관통하는 인간 본질에 관한 것이다. 삶과 죽음의 윤회사상을 토대로 인간사의 기나긴 시간 여정을 작품에 담아내고자 했다”고 전했다.

또 “이러한 윤회사상은 광의적으로 동양사상이라고 불리는 선사상(禪思想)과 일맥상통한다. 세포 하나하나를 깨우고, 찰나의 순간마저 영원에 이르게 하는 선사상의 명상과 수양과정이 작품 방식에도 깃들어 있다”고 설명했다. 작가는 이러한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연구하고 차용함으로써 작품 이면에 형식을 확보했다.

▲ 시간의 기억 13. 작가는“‘시간의 기억’은 역사와 문화를 관통하는 인간 본질에 관한 것이다. 삶과 죽음의 윤회사상을 토대로 인간사의 기나긴 시간 여정을 작품에 담아내고자 했다”고 전했다.

정신세계와 그것에 대한 믿음
작품은 그림이기 이전에 작가의 작업 과정을 기록하는 화면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품에는 작가가 나름대로 모색한 흔적들이 남아있다.

‘시간의 기억’은 장지에 안료를 두껍게 침윤시킨 뒤, 사포와 물기를 뺀 수건으로 안료를 닦아내는 작업으로 완성됐다. 작가는 “안료의 거친 입자를 수 없이 쓸어내며 색감의 미세한 부분까지 연출해 냈다. 전반적으로 은은하면서도 그윽한 깊이를 더하기 위해 원하는 색감이 나올 때까지 닦아내길 반복했다”고 작업 과정을 설명했다. 이는 작가의 자기 수양이자, 자신의 관념을 작품에 일치시키는 사의(寫意)에 해당하는 과정이다.

여기에 윤회사상을 상징하는 꽃, 수레바퀴, 신전기둥, 진시황, 천부경과 같은 자연적이고 역사적인 소재를 색감의 층위 위에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로써 과거의 것도, 온전히 현재의 것만도 아닌 것들이 마치 오래된 벽화에서 발원된 이미지처럼 새로운 사유의 시간을 열어 보였다. 그렇게 관객들을 명상의 세계로 인도했다.

▲ 시간의 기억 2. ‘시간의 기억’은 장지에 안료를 두껍게 침윤시킨 뒤, 사포와 물기를 뺀 수건으로 안료를 닦아내는 작업으로 완성됐다. 이는 작가의 자기 수양이자, 자신의 관념을 작품에 일치시키는 사의(寫意)에 해당하는 과정이다.

작가는 이 세계에 대해 “윤회의 과정에서 지금 현재, 지금 이곳의 ‘실존’을 찾는 것은 패러독스의 미학이다. 이러한 필연적 패러독스는 우리가 다양한 경험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체화한 ‘정-반-합(正反合)’의 과정이자, 더 나은 ‘합(合)’으로 나아가는 씨앗이 된다.

시간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성찰과 탐구를 시각적이면서 물질적인 화폭에 담고자하는 시도가 패러독스일 수 있으나 작가적 노력으로 합의 씨앗에 양분을 더해 나가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작가는 자연의 윤회를 통해 생명 순환의 근거를 마련하고, 굴곡진 인간의 삶을 은유적으로 승화시켜 안식과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있는 기운을 화면에 나타내고자 했다.

▲ 시간의 기억 6. 작가는 “‘시간의 기억’에서 윤회의 의미와 요소들을 한 화면에 중첩하고 융화시켜서 정반합의 과정을 만들어 냈다. 여기서 합은 혁신이자, 변화무상한 ‘진화의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혁신은 현재 진행형의 미학
작가의 그림은 보는 이에 따라 서양화로 보기도 하지만 동양의 사상과 재료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동양화의 미감에 가깝다. 하지만 작가는 “서양교육체계의 교육환경과 동양문화의 사상이 녹아있는 융합 시대에 이러한 구분은 무의미하고 덧없는 것”이라며

“동양의 고유한 사상과 기법이 이번 작품을 이해하는 기본적이 단서임은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동양적 회화를 고집한 결과가 아니다. 작가는 유행 사조나 경향에 편승하지 않고 마음속에 있는 것을 인식하고 탐색하는 작업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작가는 “‘시간의 기억’에서 윤회의 의미와 요소들을 한 화면에 중첩하고 융화시켜서 정반합의 과정을 만들어 냈다. 여기서 합은 혁신이자, 변화무상한 ‘진화의 과정’이다. 혁신은 전통적이고 통상적인 사고의 틀을 깨는 용기를 수반해야 한다”며

앞으로도 작품의 본질에 충실하면서도 자신의 프레임에 갇히지 않기 위한 투쟁과 화해의 지난한 연속을 이어나갈 것”이라고 포부를 전했다. ‘시간의 기억’은 생각의 확장성과 깊이를 다지는 전초작업으로서 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맞을 터이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