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보일드 멜로’란 이런 것이다!

불치병으로 인한 비운의 순애보로 눈물 흘리거나, 평생 단 한번뿐일 첫사랑의 아련함에 가슴 설레거나, 얽히고설킨 치정으로 엇갈리는 음모와 복수를 선보였던 한국의 멜로 영화.  그 어디에도 <무뢰한>은 속하지 않는다.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두 사람, 형사와 범인의 여자라는 양극에 서 있는 남녀가 살인사건을 통해 만난다는 강렬한 설정 속에 <무뢰한>은 목표와 달리 서로에게 마음이 흔들리고, 그로 인해 상처를 주고받는 두 남녀를 따라가며 과연 이 감정을 사랑이라 불러도 좋을지 관객에게 되묻는다.

신세영 기자 ssy@

제 68회 칸 국제영화제 시상식에서 비경쟁부문 ‘주목할 만한 시선’ 섹션에 공식 초청된 <무뢰한>이 5월 13일 CGV왕십리에서 언론시사회를 성황리에 마쳤다. 국내 언론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진행된 이번 언론시사회에는 전도연, 김남길, 오승욱 감독이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영화 <무뢰한>은 진심을 숨긴 형사와 거짓이라도 믿고 싶은 살인자의 여자, 두 남녀의 피할 수 없는 감정을 전도연과 김남길의 만남으로 그려낸 하드보일드 멜로. 극중 사랑한다는 대사는 한 번도 나오지 않지만,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무뢰한’의 사랑을 보여주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킬리만자로> 이후 15년 만에 메가폰을 잡은 오승욱 감독은 “드디어 오늘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뢰한>은 거칠고 투박하고 끔찍한 세상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는 하나도 없는 수많은 캐릭터들 속에서 남녀 주인공이 종잇장처럼 얇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보여주는 얘기다”라고 설명했다. 5월 27일 개봉.

강렬한 첫 만남 김남길 전도연, 또 한 번의 파격 변신
<무뢰한>은 제목부터 거칠고 센 남자 냄새가 떠돈다. 예의 없고 폭력적인 ‘불한당’을 연상시키는 <무뢰한>은 그러나 사랑 영화다. 여심을 자극하는 선 고운 미남 배우인줄로만 알았던 김남길에게서 <무뢰한>은 수컷 냄새 가득한 비정한 남자를 끌어냈다. 인간의 원초적인 면을 가감 없이 들여다보는 오승욱 감독 특유의 하드보일드한 스타일은 <무뢰한>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 김남길은 무심한 듯 냉철하게 범인을 육박해 들어가는 무정한 형사와 미세한 동요로 정체불명의 감정을 살짝살짝 드러내는 복합적인 내면의 풍경을 공감가게 묘사한다. 전도연은 <무뢰한>에서 또 한 번, 표정의 아주 작은 변화만으로 드라마의 흐름을 바꾸는 감정의 스펙터클로, 반드시 대형 스크린으로 그녀를 만나야 할 이유를 실감하게 만든다. 사람을 죽이고 도망간 애인을 기다리며 술로 절망을 푸는 여자, 밑바닥 인생의 남루함만 남았을 것 같은 혜경은 전도연을 만나 절망과 퇴폐, 그리고 순수와 강단이 공존하는 입체적인 인물로 생생하게 살아났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다가 자기 자신조차도 알 수 없는 감정을 겪으며 조금씩 표정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김남길의 ‘정재곤’과 그런 그의 접근에 흔들리며 출구 없는 일상에서 숨 쉴 구멍을 찾은 듯 보이는 전도연의 ‘김혜경’은 미사여구의 수식을 생략한 사랑이란 감정을 거칠고 리얼한 타협 없는 하드보일드 스타일로 생생하게 전달한다. 특히, 전도연은 영화 <무뢰한>으로 벌써 네 번째 칸 입성을 알렸다. 2007년 <밀양>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칸의 여왕’의 탄생을 알렸던 그녀는 2010년 <하녀>로 경쟁 부문에, 지난해에는 심사위원 자격으로 칸을 찾은 바 있다.

# 살인자의 여자 김혜경 役, 전도연
<접속>, <해피 엔드>, <피도 눈물도 없이>, <스캔들>, <밀양>, <하녀>. 전도연은 한국 여성 캐릭터의 역사를 새로 쓰는 동시에 한국 영화의 영역을 한 뼘씩 확장시켰다. 무모하게 느껴질 정도로 새로운 캐릭터의 영역에 두려움 없이 발을 들여 놓았던 전도연은 여배우의 전유물이라 할 정통 로맨스부터 치정극, 사극, 판타지 멜로, 휴먼 드라마, 느와르까지. 더 이상의 새로운 모습이 남아있을 것 같지 않을 만큼 영화마다 강렬한 변신을 선보여 왔다. 그리고 이미 수 없이 다양한 캐릭터를 실감나게 선 보였던 전도연은 인물의 상황과 정서, 감정을 극대화하는 특유의 섬세한 표현력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기시감도 없는 <무뢰한>의 김혜경으로 또 한 번 신세계를 선보인다.

Q. 김혜경을 어떤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연기했는지 궁금하다.
-  <무뢰한>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가장 큰 매력은 하드보일드 안에 있는 멜로라고 생각했다. 사실 시나리오 상에서는 김혜경이라는 인물이 사랑이나 혹은 살아가는 것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는 여자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저는 그들 속에서 꿈을 가지고 있는 여자를 좀 표현하고 싶었다. 그 안에서, 그 와중에 또 사랑을 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고 싶었고, 그런 부분을 감독님한테 가장 많이 얘기했다. 처음부터 김혜경을 알고 시작한 건 아니다. 촬영을 하면서 (김혜경을) 알아가면서 이 여자는 꿈도 있고, 희망도 있고, 사랑을 꿈꾸는 여자라는 것을 촬영 알았던 것 같다.

Q. 네 번째 칸 입성에 대한 소감은 어떤지?
- 칸에 가게 된 것을 진심으로 영광스럽고, 감사하다. 그곳에서 받을 자극과 다시 겸허한 마음으로 돌아올 자신에 대해 설레기도 한다.

Q.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무엇인가?
- 특별히 어느 장면이 아니라 극중 대사에서 “상처 위에 또 상처, 더러운 기억 위에 또 더러운 기억”이라고 한다. 김혜경과 정재곤이 ‘상처 위에 또 상처, 더러운 기억 위에 또 더러운 기억을 얻고서 다시 또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아팠다.

Q. 수많은 남자 배우들과 호흡을 맞춰왔는데 김남길과의 호흡은 어땠는지, 함께 연기하면서 에피소드가 있다면?
- 좋은 배우들은 나만이 아니라 상대방이 빛이 나야 나도 빛이 난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김남길 역시 그걸 잘 아는 현명한 배우다. 김남길은 현장에서 봤을 때 애교도 많고 아이 같아서 걱정했다. 시나리오 상의 정재곤과 김남길이 매치가 잘 안됐다. 근데 현장에서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하면서 촬영할 때는 집중을 하더라. 그런 다양한 모습을 많이 보여줬다. 에피소드는 특별한 건 없지만 김남길이라는 배우 때문에 촬영 시작부터 끝까지 웃으면서 촬영할 수 있었다.

Q. 범죄자에게 계속 이용을 당하면서도 계속 사랑을 하는 여자, 그리고 또 다른 남자에게 끌리는 여자의 심리를 어떻게 이해하려고 했나?
- 말 바늘도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굉장히 냉정하고 많은 상처들로 인해서 더 이상 아픔을 느끼지 못할 것 같은 차가운 여자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만약에 ‘사랑을 믿지 않고 저 남자한테 제가 이용을 당한다’라고 했으면 그런 행동들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김혜경이라는 여자가 겉모습과는 다르게 누군가에게 안주하고 싶어 하는 여린 여자라고 생각했다. 스스로도 설 수 있지만 그런 것을 생각 하지 못하고 사랑과 함께 앞으로의 삶이나 미래를 꿈꾸는 여자라고 느꼈다.

# 형사 정재곤 役, 김남길
<무뢰한>에서 우리가 알던 김남길을 찾기는 어렵다.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괴로워하는 순정남도, 사랑하는 여인의 곁을 과묵하게 지키던 로맨틱 가이의 모습도 8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의 코믹한 산적의 모습과도 전혀 다른 비정한 형사 ‘정재곤’만 있을 뿐이다. 범인을 잡는다는 목표 외에 어떤 감정도 가져 본 적이 없는 한 남자. 범죄 현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형사 정재곤의 뒷모습에서 시작되는 영화 <무뢰한>은 사건 해결을 위해 범인의 여자를 지켜보다가 자기도 알 수 없는 감정을 발견하고 미세하게 흔들리는 그 남자의 내면을 따라간다.

Q. 영화를 처음으로 본 소감은?
- 사실 얼떨떨하고 다른 영화들보다 많이 떨렸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을 굉장히 영광스럽게 생각한다. 앞으로 계속 배우 생활을 하면서 필모그래피가 잘 쌓여야겠지만, 배우 인생에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좋은 작품이었다.

Q.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무엇인가?
- 개인적으로는 전도연과 서로의 감정에 대해 확인을 하면서 “나랑 같이 살면 안 될까? 그거 진심이야?”, “그걸 믿냐?”라고 말하는 장면이 굉장히 좋았던 것 같다. 앞서 밑바닥까지도 김혜경이 사랑을 갈망하는 캐릭터라는 것에 대해서 얘기했다. 정재곤도 마찬가지로 사랑이 서툰 남자이기도 한데, 서툰 것도 어떻게 보면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Q. 대사가 아닌 눈빛만으로 진실과 거짓을 표현해야 했는데, 감정적으로 힘들지 않았나?
- 예전에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남자 영화나 형사의 캐릭터가 나온다고 하면 범죄자 보다 더 범죄자스럽고 더 우악스러운 캐릭터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는 ‘더 섬세하게 표현을 하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데뷔 초기에는 개인적으로 트라우마나 아픔이 있는 캐릭터를 좋아해서 그런 역할을 많이 했었는데, 무거우면 무거운 대로 뭔가를 표현하려고 더 애를 썼었다. 촬영 할 때는 뭔가를 억지로 표현하려고 하지 않았다. 상황이 주어졌으니 그 흐름에 맞춰서 감정대로 편안하게 따라가려고 노력했다. 전도연 덕분에 편안하게 연기했다.

Q. 마지막으로 <무뢰한>은 어떤 영화인가?
- 하드보일드 멜로라는 것 때문에 너무 무겁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영화다. 사랑에 상처 받은 사람들, 사랑을 하고 싶은 사람들, 지나온 사랑으로 내 정체성을 돌아볼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