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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4년 04월 12일 (금) 01:19:04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유일한은 자신의 경영 철학 그대로 실천한 참 기업인이면서 독립운동가


유한양행이 지난 3월 15일 열린 정기 주주총회에서 회장직 신설을 골자로 하는 안건을 상정, 참석 의결권의 95% 찬성으로 정관 변경안을 의결했다. 이에 따라 회장과 부회장을 선임할 수 있는 조항이 28년 만에 생겼다. 유한양행은 1926년 창립 이래 창업주인 고 유일한과 그의 최측근인 연만희 고문만이 회장으로 재임했다. 유일한 박사의 손녀 유일링 이사는 주종 참석 후, “할아버지 정신이 중요하다”며 “분리 경영을 내세운 창업주의 이념에 이번 회장직 신설이 어긋난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유일한의 삶과 유한양행의 변천사를 알아본다.

▲ 유일한 회장 시절 모습

9살에 부모 없이 미국으로 떠나

유일한(1895~1971)이 생전에 밝힌 경영 철학은 이랬다.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 봉사한다. ▲정직·성실하고 양심적인 인재를 양성·배출한다. ▲회사를 키워 일자리를 만들고 정직하게 납세한다. ▲남은 것은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한다. 실제로 유일한은 자신이 정한 경영 철학을 모두 실천하고 76세로 눈을 감았다.
유일한은 평남 평양에서 9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북 예천에서 태어난 부친(유기연)이 조선팔도를 다니며 장사를 하다가 평양 정착 후 평양 출신의 여성과 결혼하면서 평양은 유일한의 고향이 되었다. 유일한이 태어나기 한 해 전(1894년), 캐나다 출신의 윌리엄 제임스 홀이 평양에서 의료선교 활동을 했다. 부친은 제임스 홀에게 치료를 받으면서 기독교를 접하고 숭실학교를 설립한 미국 선교사 사무엘 마펫에게는 세례를 받았다. 부친은 아내 이름(김확실)을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복으로 여긴다’는 뜻의 김기복으로 바꿀 정도로 기독교에 독실했다. 부친은 기독교를 통해 서양 문물과 미국의 실상을 접하고 민족 지도자들의 평양 강연을 들으며 조국의 현실과 개화사상에 눈을 떴다.
유일한이 집에서 50㎞ 떨어진 양잠학교를 다닐 무렵이던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터져 한반도가 전쟁터가 되었다. 부친은 국권이 일본으로 넘어가기 전, 아들을 미국으로 보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 즈음 대한제국 순회공사 박장현이 멕시코로 부임해 가는 중에 미국에 들를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그 편에 아들을 맡겼다. 박장현은 자신의 조카 박용만과 유일한 그리고 장차 독립운동가가 될 정한경 등을 포함해 10여 명의 아이들과 청년을 인솔해 1904년 말 서울을 떠났다. 9살 소년 유일한은 21년 뒤에야 만나게 될 부모의 품을 떠나 미국행 배에 올랐다. 
유일한은 박장현의 도움 덕에 1905년 2월 도착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초등학교에 다녔다. 고국을 떠날 때 아버지가 주신 돈을 배에서 잃어버려 어린 나이에 식당 종업원, 신문배달, 구두 닦기 등을 했다. 그러다가 14살이던 1909년, 박장현의 주선으로 네브래스카주 커니로 이주해 미국인 독신 자매 집에서 생활했다. 신앙심 깊은 자매는 유일한에게 영어와 기독교를 가르쳤다. 유일한의 미국 정착에 가장 큰 도움을 준 이는 박장현이지만 유일한보다 14살 많은 박용만(1881~1928)도 못지않은 도움을 주었다.

美 ‘한인소년병학교’에서 군사훈련 받아

▲ 소년 시절의 유일한

박용만은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숙부인 박장현의 보살핌을 받았다. 서울의 관립일본어학교와 일본의 중학교 과정을 거쳐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정치과에서 공부했다. 일본 유학 시절, 박장현의 소개로 일본에 망명 중인 박영효 등을 만나 ‘활빈당’과 관련을 맺었는데, 이 일로 1901년 3월 귀국할 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인 1904년 6월 보안회에서 일본에 대한 황무지 개척권 반대운동을 벌였을 때 박용만도 참여했다가 2차 옥살이를 했다. 이때 감옥에서 만난 이승만·정순만과 의형제를 맺어 후일 3인의 이름 끝자인 ‘만’을 따 이른바 ‘3만’으로 불렸다.
박용만은 미국에서 로스앤젤레스의 링컨고를 거쳐 1908년 네브래스카주립대에 편입했다. 그의 꿈은 항일 독립군을 양성하는 무관학교 설립이었다. 그 결과물이 1909년 6월 네브래스카주 커니 농장에 세워진 ‘한인소년병학교’다. 학교는 1910년 4월 헤이스팅스 대학 교내로 옮겨졌다. 헤이스팅스 대학은 소년병학교를 받아들이는 대신 조건을 걸었다. 대학이 기숙사 시설과 취사도구 등을 무료로 제공하고, 한국인들이 일할 수 있는 농장을 제공하는 대신 학생들이 성경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인소년병학교에 처음 입교한 학생 중 가장 어린 학생은 14살의 유일한이었다. 군사학교는 여름 방학에만 열렸기 때문에 유일한은 방학 때 소년병학교에 들어가 군사훈련을 받았다. 소년병학교는 박용만이 1912년 11월 신한민보 주필로 초빙되어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고 일본 총영사관이 소년병학교의 편의를 제공한 헤이스팅스 대학에 항의하면서 1914년 여름 6년 만에 막을 내렸다.
유일한은 1912년 헤이스팅스 고교에 진학했다. 공부도 잘했지만 운동에도 소질이 있었다. 특히 미식축구에 푹 빠져 헤이스팅스 고교 대표 선수로 뛰었다. 공부와 운동과 일을 병행하던 어느 날 신문 배달 보급소에서 이름을 타자로 치다가 영어 이름에서 실수로 ‘g’ 자를 빠뜨려 ‘Il Han(일한)’을 치게 되었다. 사실 유일한의 본명은 ‘일형’이었으나 미국인들이 ‘일형’ 발음을 어렵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편의상 ‘Il Hang(일항)’으로 자신을 소개했는데 ‘Hang(항)’에서 ‘g’ 자를 빠드려 ‘Han(한)’이 된 것이다. 일한은 ‘g’자를 넣으려다가 ‘일한’이 대한제국을 뜻하는 이름이 될 수도 있고, 세계 제1의 대한제국이라는 의미도 있다고 생각해 ‘일한(一韓)’ 그대로 두기로 했다. ‘일한’ 이름은 그렇게 생겨났다.
유일한이 고교를 졸업할 무렵 부친이 “집안이 어려우니 귀국해 집안을 도우며 나라를 위한 일들을 찾아보자”고 편지를 보내왔다. 대학 진학을 모색하던 유일한은 상담 선생님의 보증 덕에 은행에서 100달러를 빌려 부친에게 송금했다. 부친은 1910년 한일 합방 후 식구들을 데리고 중국 북간도로 이주해 살고 있었다. 당시 100달러는 일한이 한국에서 몇 해를 열심히 벌어야 하는 큰돈이었다. 자금 압박을 받던 부친은 100달러로 북간도에 대평원을 사들여 하루아침에 대지주가 되었다.

미국에서 숙주나물 사업으로 큰돈 벌어

유일한은 부친에게 송금한 100달러를 갚기 위해 1915년 고교 졸업 후 멀리 디트로이트의 에디슨 변전소에 취직했다. 다행히 1년 만에 100달러와 대학 등록금이 모아져 1916년 미시간 주 앤아버에 위치한 미시간대 상과에 입학했다. 당시 디트로이트와 앤 아버에는 중국인들이 많이 살았다. 대륙 횡단 철도 부설 공사 노동자로 미국에 왔다가 그대로 눌러앉은 중국인들이었다. 유일한이 사랑의 감정을 느낀, 같은 미시건 대학에 재학 중인 호미리(胡美利)도 중국인이었다. 다만 그녀는 노동자의 딸이 아니라 미국 서부 철도 건설회사 중역의 딸이었다. 유일한은 중국의 향취가 배어 있는 비단·손수건·부채·찻잔·쟁반 등을 디트로이트 도매점에서 구입해 보부상처럼 갖고 다니며 앤아버의 중국인들에게 팔아 큰돈을 벌었다.
한편 1919년 한국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나자 미국에서도 4월 14일부터 4월 16일까지 한인 대표 150여 명이 필라델피아의 한 극장에 모여 제1회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했다. 서재필을 비롯 이승만, 조병옥, 임병직, 정한경 등이 참석한 대회에 유일한도 당당히 대표로 참여해 대회 결의문 초안과 민주공화국의 기본 원리를 담은 건국의 청사진을 작성하는 데 힘을 보태고 결의문을 150여 명의 대표 앞에서 낭독했다.
유일한은 1920년 대학을 졸업한 후 미시건 중앙철도의 회계사로 취직했다가 뉴욕의 제너럴 일렉트릭(GE) 회사로 직장을 옮겨 글로벌 경영 실무를 익혔다. 호미리는 미시간대를 졸업하고 동북부의 코넬대 의과대학으로 진학했다. 유일한은 회사 일을 하면서도 새로운 사업을 구상했다. 유일한이 착안한 사업 아이템은 중국인들이 즐겨 먹는 만두에 필수적으로 들어가는 숙주나물이었다. 문제는 숙주나물의 신선도 유지와 재고 유지였다. 
유일한은 고심 끝에 숙주나물 통조림에서 해결책을 찾았다. 1922년 GE를 퇴사해 미국인 대학 동창과 숙주나물을 판매하는 ‘라초이 식품회사’를 차렸다. 미국의 곡창지대인 오하이오주 등에서 숙주나물의 원료인 녹두를 대량으로 구입해 숙주나물을 재배하고 통조림을 만들어 큰 성공을 거뒀다. 그 후 판매 품목을 넓혀 콩나물과 간장 등 동아시아 식품들도 통조림으로 제조해 팔았다. 자신감이 생기자 1924년 서재필·정한경 등과 함께 한국·중국·러시아 등의 토산품을 취급하는 ‘뉴일한(New Il Han)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사장과 부사장인 서재필과 정한경도 일부 출자했지만 최대주주는 유일한이었다.
유일한은 코넬대에서 동양 여성 최초로 소아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한 호미리와 1925년 결혼식을 올렸다. 같은 해 중국 상하이에 들러 녹두를 대량 구입하는 계약을 체결하고 북간도로 가 평양에서 그곳으로 이주한 부모님을 21년 만에 뵙고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동생들을 만나 혈육의 정을 나눴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니 서울 세브란스 의전의 에비슨 박사가 유일한은 연희전문학교 상과 교수로, 아내 호미리는 세브란스 의전 소아과 과장으로 초빙하는 편지가 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으로 돌아가 사업을 해볼까 구상하고 있던 유일한은 아내와 상의 끝에 귀국을 결심했다. 
유일한은 라초이식품회사의 지분을 정리한 25만 달러로 다량의 의약품들을 구입해 1927년 3월 귀국선에 몸을 실었다. 서재필은 고국으로 떠나는 유일한에게 버드나무가 그려진 목각품을 선물하며 “자네 성이 버들 류(柳)이니 버드나무처럼 무성하게 잘 자라기를 바란다”며 격려했다. 이 버드나무 목각품은 장차 ‘버들표 유한양행’ 로고가 된다. 

종업원이 1,000명이나 될 정도로 사세 확장

▲ 개업도 하기 전에 광고한 유한양행 표어(조선일보 1927년 10월 5일자)

유일한은 1927년 12월 10일 서울 종로 2가에 ‘유한양행’ 상호의 가게를 열었다. 아내는 같은 건물 2층에 소아과를 개원해 의료 활동을 펼쳤다. 유한양행은 의약품을 주로 팔았으나 점차 영역을 넓혀나갔다. 화장지, 생리대, 아이보리 비누, 치약 등 위생용품과 화장품, 껌, 초콜릿 등도 수입해서 팔고 농촌에서 필요로 하는 농기구·염료도 수입·판매했다. 국내 제약업체들이 ‘신비의 명약’ ‘만병통치약’이라고 허위 과대광고를 일삼고 있을 때 유한양행은 효능을 명시하고 의사 아내 호미리와 책임 약제사의 이름, 회사 전화번호까지 싣는 등 파격적인 광고로 눈길을 끌었다. 1928년에는 영문으로 쓴 ‘한국에서 내 소년 시절(When I was a boy in Korea)’을 발간해 미국인들에게 한국의 의상, 음식, 주택, 결혼, 명절놀이 등 풍물을 소개했다. 유한양행은 판매망이 확충되자 10여 개 미국의 유명 제약회사들과 거래를 체결했다. 가정도 안정되어 1929년 10월 첫아이 재라를, 1935년 6월 첫 아들 ‘일선’을 낳았다. 
유일한은 1933년 자체 개발상품 1호인 ‘안티푸라민’을 선보여 유한양행의 성장을 견인했다. 안티푸라민은 안티(anti)에 ‘불태우다, 염증을 일으키다’는 뜻의 인플레임(inflame)을 합친 이름이다. 유한양행은 사세가 더욱 확장되어 YMCA 건물을 거쳐 1932년 매입한 신문로 언덕 160평의 대지에 2층 양옥 건물을 지었다. 1934년에는 거래처 다변화를 위해 유럽 각국을 둘러보았다. 독일에서는 게르하르트 도마크 박사가 1932년 항균효과를 발견한 프론토질을 동양 최초로 도입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프론토질은 염증 치료제로 효능이 좋아 당시만 해도 기적의 약으로 불렸다. 유한양행은 ‘GU 사이드’라는 브랜드로 팔았다. 약은 불티나게 팔려 유한양행 신화 창조의 일등 공신이 되었다. 유한양행은 여세를 몰아 네오톤 토닉(결핵 치료제), 안도린(피부병 치료제), 헤노톨(구충제) 등도 소량씩 생산·판매했다. 매출 급증으로 중국, 베트남, 대만 등 해외 출장소 직원까지 모두 합치니 1930년대에 이미 종업원이 1,000여 명이나 되었다. 
유한양행은 1936년 6월 20일 주식회사 유한양행을 발족시켰다. 유일한은 기업은 종업원의 것임을 분명히 하기 위해 유한양행 종업원들에게도 액면가 10% 정도의 가격으로 주식을 골고루 분배했다. 국내 기업 최초로 종업원 주주제를 시행한 셈이다. 당시 한국 상황에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1936년 8월, 경기도 부천군 소사면 심곡리 25번지 2만여 평의 땅을 사서 공장을 지었다.
유일한은 1938년 4월, 로스앤젤레스에 유한양행 출장소를 차린다는 명목으로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 체류 기간이 길어져 1941년 3월 일본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국적을 취득했다. 1941년 12월 발발한 태평양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서울의 유한양행 회사가 곤경에 빠졌다. 유일한이 없는 사이에 일본 총독부가 누명을 씌워, 유한양행 직원을 20여 일간 가두기도 했다. 그래도 별 성과가 없자, 세무사찰이라는 전가의 보도를 휘둘렀다. 결국 유한양행은 생존을 위해 유일한을 사장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유일한의 동생을 2대 사장으로 앉히는 자구책을 마련했다. 1943년 8월에는 유한양행의 ‘양행(洋行)’이 적성적인 표시라는 소리를 들어 회사 이름을 유한제약공업주식회사로 바꿨다.

유일한, 美 OSS ‘냅코 작전’에도 가담

유일한은 1942년 미국에서 미 정보기관 OSS의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동했다. 중국 담당 고문은 몇 년 전 노벨문학상을 받은 소설 ‘대지’의 작가 펄 벅 여사가 맡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두 사람은 오랫동안 친교를 맺었다. 펄 벅이 1967년 부천 심곡동에 ‘소사 희망원’을 개원할 때 유일한이 1만여 평의 대지를 무상으로 기증한 것도 이런 인연이 작용했다. 펄 벅은 한국을 배경으로 하고 유일한을 모델로 한 ‘살아있는 갈대’라는 작품을 1963년 발표했다. 소설 주인공 이름도 일한이었다. ‘살아 있는 갈대’는 미 언론으로부터 “‘대지’ 이래 최고 걸작”, “펄 벅이 한국에 보내는 애정의 선물”이라는 평을 들으며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부문에까지 올랐다.
유일한은 재미 독립운동가들과 힘을 합쳐 로스앤젤레스에 한인 국방경비대 ‘맹호군’을 편성, 1942년 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인준을 받았다. 유일한은 또한 재미 한인을 선발해 특수공작 훈련을 시킨 다음, 한국과 일본에 침투시켜 적 후방을 교란하는 미군 전략정보처(OSS)의 ‘냅코 작전’에도 가담했다. 작전은 미주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도 동원해 동시에 진행할 계획이었다. 유일한은 1945년 1월 냅코 작전의 요원으로 선발되어 2월 OSS 훈련소에서 침투 작전명령을 기다렸으나 일제의 항복으로 실행되지 못했다.
유일한은 해방 후인 1946년 7월, 8년 만에 귀국했다. 아내 호미리는 돌아오지 않고 미국에서 자녀들과 살았다. 해방 후 대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을 맡았다가 그해 12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전에 미국 초등학교 동창이면서 헤이스팅스 한인소년병학교 동기인 구영숙을 사장에 앉혔다. 설립자의 인척 관계가 아닌 사람을 사장으로 임명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구영숙은 미국에서 에모리 대학을 졸업하고 의학박사가 되어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로 근무 중이었다. 유한양행 사장을 지낸 후에는 초대 보건부 장관으로 활동했다.

▲ 1946년 귀국 후 유일한 가족. 왼쪽부터 유일한, 맏딸 유재라, 아들 유일선, 아내 호미리

유일한이 미국에 있을 때이던 1948년 8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내각을 구성하면서 유일한에게 초대 상공부 장관을 맡아 달라고 전갈을 보냈다. 그러나 유일한은 사업에만 충실하겠다는 뜻을 전하며 완곡하게 사양했다. 사실 유일한은 이승만의 정치 노선에 동조할 수 없었다. 미국 시절 이승만이 박용만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대립은 대일 항전 방식을 둘러싼 양측의 입장에서 비롯되었다. 박용만은 군사력을 양성해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자고 주장한 반면 이승만은 일본에 무력으로 대항해 봐야 승산이 없다며 외교적 수단과 교육을 내세웠다. 이 과정에서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박용만은 1919년 중국 상해에서 통합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에 임명되었을 때 이승만 임시정부 대통령과는 함께 일을 못하겠다며 취임을 거부하고 반이승만 운동을 전개했다. 

교육 사업은 필생의 목표

6·25 전쟁 발발로 늦어진 유일한의 귀국은 1953년 7월 이뤄졌다. 유일한의 경영 원칙 중에는 세무사찰이 들어와도 걸릴 게 없는 투명한 경영과 정직한 세금 납부도 있었다. 유일한이 시험대에 오른 것은 1959년 자유당 이승만 정권 때였다. 자유당 정부가 유한양행에 3억 환의 정치자금을 은밀히 요구했으나 유일한은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자 강도 높은 세무사찰이 들어왔다. 유한양행 직원들이 “이러다가 3억 환보다 더 큰돈을 빼앗길 것 같다”며 “차라리 정치자금을 주자”고 건의했으나 유일한은 단호했다. 결국 세무 당국이 유한양행에 6,000만 환 탈세 혐의를 씌워 검찰에 고소하고 사장에게는 구속영장을 청구했으나 법원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구속영장 신청을 기각했다. 그러자 경찰이 나서 유한양행의 일부 직원을 가두고 두들겨 패는 것으로 분풀이를 했다. 유한양행은 1962년 11월 1일 한국 제약업계 최초로 주식을 상장하면서 사원지주제를 도입했다. 유한양행의 주식 상장은 민간 기업체로는 두 번째이고 국영 기업체까지 합해서 다섯 번째였다.
유일한의 큰딸 재라는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미군 장교와 결혼했으나 아이도 없이 몇 년 만에 사별했다. 국내로 들어와 주한미군 군속으로 근무하며 줄곧 혼자 살았다. 유일한 아들은 중국 여성과 결혼했다. 며느리는 중국에서도 유명한 국민당 쉐웨(薛岳) 장군의 딸이었다. 그러니까 유일한의 사돈인 쉐웨 장군은 초공(剿共·공산당 토벌) 작전에서도 뛰어났지만 중일전쟁에서도 큰 활약을 펼쳐 중국인들 사이에 ‘전신(戰神)’으로 불렸다. 흥미로운 것은 쉐웨 장군이 유일한과 똑같이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는 것이다. 중일전쟁 때 생포한 포로들 중에 일본에 강제 징집된 한국인들을 풀어준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유일한은 회사가 안정적인 성장세를 유지하자 필생의 목표인 교육 사업을 추진했다. 첫 작업은 고려공과 기술학원 설립이었다. 본격적인 교육사업은 재단법인 ‘유한학원’(1963년)과 ‘유한공고’(1964년)를 설립하면서 이뤄졌다. 이후 유한학원은 1977년 유한공전을 설립하고 1979년 유한공업전문대학으로 개편했으며 1998년 유한대학으로 교육 사업을 확장했다.

전 재산 사회 환원에 국민 감동

유일한은 회사에 재직하던 외아들과 조카에게 회사를 그만두게 하고 1969년 10월 일반 직원 출신의 부사장에게 대표이사 회장직을 물려주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50년 가까이 일궈온 자신의 기업을 혈연·인척 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물려준 것은 당시에는 큰 화제였다. 주위에서 이유를 물었을 때 유일한이 “내가 죽고 나면 그들로 인해 파벌이 조성되고, 그렇게 되면 공정하게 회사가 운영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일화가 전해온다.
전 국민이 유일한에게 또다시 감동한 것은 1971년 3월 11일 운명한 유일한의 유언장이 공개되었을 때였다. 오늘날 유일한이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된 것은 그가 남긴 유언장에서 비롯되었다. 아들과 딸, 심지어 아내에게도 한 푼 남기지 않고 10살짜리 손녀 유일링에게만 대학까지의 학자금으로 1만 달러를 물려줄 뿐 전 재산을 사회에 내놓는다는 유일한의 유언장이 공개되자 한국 사회가 신선한 충격에 휩싸였다. 당시는 정치 비자금, 탈세, 세습 경영이 당연시되던 1970년대였다. 아들 일선에게는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라”며 유산을 남기지 않았고, 딸 재라에게는 유한공고 안에 있는 자신의 묘소와 주변 땅 5000 평을 물려줄 테니 그 땅을 유한동산으로 꾸며달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엄마 호미리의 노후를 잘 돌봐달라고 딸에게 부탁했다. 아내에게도 재산을 물려주지 않았다.
자신의 소유 주식 14만여 주는 전부 ‘한국 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했다. 유일한은 생전에도 유한재단에 주식 9만 6000여주, 연세대에 4만여 주를 기증했었다. 유언에 따라 23만 7000여 주를 소유하게 된 신탁기금은 나중에 유한재단으로 발전해 유한양행의 최대 주주가 되었다. 유일한은 유한공고와 유한양행 사우공제회에도 주식을 기증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로써 유일한은 “기업은 나라와 민족의 것이다. 한평생 검소하게 살고 남은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는 평소 자신의 뜻을 그대로 실천했다. 이런 그를 기념해 2005년 경기 부천시가 유한대학 앞 6㎞ 구간에 ‘유일한로’를 조성했다. 기업인의 공을 기려 길에 이름을 붙인 것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의 호에서 딴 울산의 ‘아산로’에 이어 두 번째였다. 1991년 63세로 타계한 딸 재라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비롯해 전 재산 205억 원을 유한재단에 기부하고 빈 몸, 빈 마음으로 세상을 떠나 대를 이은 감동을 국민에게 선물했다. 대한민국이 유일한에게 준 마지막 선물은 뒤늦게 독립운동 활동 이력이 밝혀져 1995년 대한민국 정부가 추서한 건국훈장 독립장이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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