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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형의 100년의 기록 100년의 교훈
2024년 03월 07일 (목) 09:18:26 김정형 webmaster@newsmaker.or.kr

더글러스 맥아더… 1950년 대한민국 일등무공훈장 1호 수훈자

유엔군이 1950년 9월 15일 감행한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을 수복하자 9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이    ‘수도 환도식’에서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에게 대한민국 일등무공훈장(현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그런데 당시는 전시 중이고 무공훈장이 제작되기 전이라 실제 훈장은 주지 못하고 훈장 증서와 대체 훈장    (건국공로훈장)만 주고 향후 무공훈장 실물이 제작되면 전달하기로 했다. 우리 정부는 1951년 5월 무공훈장 실물을 제작했으나 어찌 된 영문인지 맥아더에게 실물 훈장이 전달되지 않았다. 우리 정부는 이 사실을 70여년 동안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 알고 부랴부랴 훈장 실물을 제작해 74년 만인 2024년 1월 26일 맥아더 대신 미국 버지니아주 노퍽시에 있는 맥아더 기념관에서 노퍽 시장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전달했다.

20세기 아시아에서 맥아더만큼 중요한 외국인은 없어

더글러스 맥아더(1880~1964)는 미국의 수많은 군인 중에서도 최고 엘리트였고 각종 최연소 기록의 주인공이었다. 개교 이래 웨스트포인트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하고, 필리핀 점령군 사령관을 지낸 아버지 아서 맥아더의 후광까지 더해져 사단장, 웨스트포인트 교장, 육군 참모총장이 될 때마다 최연소 기록을 갈아치웠다. 미 최고 훈장인 은성무공훈장을 7차례나 받았으며 미 육군 역사상 4명밖에 없는 5성 장군의 영예까지 안은 당대 최고의 군인이었다. 이런 화려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군사전략가로는 실패한 군인”, “오만과 허풍, 현란한 언사로 일관한 정치군인”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다. 1944년 10월 20일 필리핀 레이테섬 상륙작전 때 바닷물에 바짓가랑이를 적시며 상륙하는 사진도 맥아더의 섬세한 연출 장면이었던 것처럼 맥아더의 진짜 탁월한 능력은 패배마저 승리로 포장할 줄 아는 홍보 능력이라고 빈정대는 목소리까지 있다. 6.25 때 중공군의 개입을 예상하지 못해 미군이 막대한 피해를 보게 되었다는 비판도 반 (反) 맥아더 측의 단골 메뉴 중 하나다. 그러나 공과가 어떻든 20세기 아시아 역사를 장식한 여러 외국인 가운데 맥아더만큼 비중 있고 중심에 선 인물은 없었다. 맥아더와 아시아의 첫 인연은 필리핀에서 시작되었다. 현역에서 은퇴한 뒤 필리핀의 군사고문으로 있을 때 태평양전쟁이 터져 태평양지역 사령관으로 복귀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필리핀을 방어하지 못해 명성보다는 오명을 얻었다. 그런데도 1945년 8월 종전 후 일본의 2,000년 가까운 역사에서 유일한 외국인 통치자가 되었다. 민주당 소속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종전 후 공화당의 협조를 구해야 하는 정치적 필요성 때문에 태평양전쟁의 조연이면서도 국민에게 인기가 많은 맥아더를 주연 격인 일본 점령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맥아더는 태평양전쟁 종전 후 일본의 항복문서를 받아내는 장면만으로도 영웅 대접을 받았다. 맥아더가 참석한 일본의 항복 조인식은 1945년 9월 2일 도쿄 만에 정박하고 있는 미국의 초대형 군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열렸다. 항복문서에 서명한 일본 측 대표는 1932년 4월 상해 주재 총영사 시절 상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오른쪽 다리를 잃은 전 외무장관 시게미쓰 마모루였다. 맥아더가 지켜보는 가운데 이뤄진 그의 서명으로 태평양전쟁은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히로히토 천황의 전범 처벌은 반대

▲ 1945년 9월 27일 히로히토 천황이 도쿄 미국 대사관의 맥아더를 찾아갔을 때 모습.

태평양전쟁이 아시아의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는데도 종전 후 히로히토 천황은 전쟁 책임을 외면하고 반성도 하지 않았다. 천황은 일본이 항복을 선언한 1945년 8월 15일 815자의 ‘대동아전쟁 종결 조서 선언문’에서부터 “미.영 2개국에 선전포고를 한 것은 실로 제국의 자존과 동아시아의 안정을 간절히 바라는 데서 나온 것이며 타국의 주권을 배격하고 영토를 침략하는 행위는 본디 짐의 뜻이 아니었다.”며 자기변명으로 일관했다. 일본 내각도 이런 천황을 옹호했다. 당시 총리는 천황 대신 ‘일억 총 참회론’을 펼쳤다. 그러나 천황은 명목상의 존재, 소극적인 방관자, 문서에 황실 고무도장이나 찍는 무기력한 인물이 아니었다. 1932년 1월 관동군의 만주 침략을 자위전쟁이라고 옹호하는 칙어를 내리고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도발하며 미국과 영국에 전쟁을 선포하는 선전 조서에 서명한 것도 천황이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일본인들의 바람과 달리 모든 연합국 정부의 입장은 천황을 전범으로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인 사이에도 히로히토를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히로히토를 전쟁범죄자로 기소해야 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이 미 상원에 제출되기도 했다. 1945년 9월 일본 주둔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부임한 맥아더 역시 히로히토 천황을 전범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데는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던 중 맥아더의 생각에 변화가 생겨 연합국을 당혹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일본의 각료들로부터 “천황이 그대로 자리를 지켜야 일본을 통치하는 게 더 쉬워질 것”, “천황은 일본 내 좌익혁명 세력을 억제하는 데 20개 사단의 힘을 갖고 있다”는 등의 보고를 받은 후 생각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1945년 9월 27일 히로히토가 긴장한 모습으로 도쿄 미국 대사관의 맥아더를 찾아갔을 때 맥아더는 과거 메이지 천황 때 필리핀 주둔 사령관이던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왔을 때의 기억 중 일부를 꺼내는 것으로 히로히토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잠시 후 히로히토가 "내가 책임을 모두 지기 위해 이렇게 왔습니다"라며 생전 처음 ‘짐’이란 호칭 대신 ‘나’라는 단어를 썼다. 비교적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35분간의 회의가 끝났을 때 히로히토의 얼굴에는 안도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두 사람은 대사관의 거실에서 나란히 선 채 사진을 찍었다. 맥아더는 황갈색 군복 상의에 넥타이도 매지 않은 채 양손을 뒷주머니에 찔러 넣은 모습이었고 히로히토는 모닝코트와 줄무늬 바지를 입고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채 초췌한 표정으로 차렷 자세를 취했다. 히로히토의 작은 키는 맥아더의 어깨에도 못 미쳤다. 일본 언론은 거대한 맥아더와 왜소한 히토히토의 사진에 질겁, 사진 게재를 거부했으나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명령에 따라 보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세상에 공개된 사진은 일본 국민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맥아더는 히로히토를 만난 후 보고서에 이렇게 적었다. “히로히토는 전쟁을 시작할 수도, 끝낼 수도 없던 완벽한 꼭두각시에 불과한 인물이다. 그를 기소하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는다. 전쟁의 시작도 내각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고 종전도 내각이 결정했다.” 상황이 점차 호전되어가는 것을 알았는지 히로히토는 1946년 1월 1일 “짐은 현인신(現人神)이 아니다”라는 이른바 인간 선언으로 허리를 더 낮췄다. 맥아더가 1946년 1월 미 정부에 보내는 전보에서 천황 불기소 방침을 보고하자 미 의회와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트루먼은 일본으로 떠나는 조지프 키넌 도쿄 국제전범재판소의 수석검사에게 “히로히토를 전범 대상에서 제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천황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미 정부의 이런 돌변과 달리 1946년 5월에 개정된 국제전범재판소의 윌리엄 웹 재판장(호주)을 비롯한 각국의 조사담당관들은 여전히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기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도 키넌 검사는 미 정부의 뜻을 받들어 히로히토를 기소하지 않았다. 결국 재판은 철저하게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맥아더는 히로히토의 처벌을 막는 수호신 역을 자처했고, 키넌 검사는 재판 도중 히로히토의 관련성이 부각될 때마다 질문을 생략하거나 히로히토의 면책을 위해 전범들의 증언을 조작하는 방식으로 미 정부의 뜻에 따랐다. 덕분에 히로히토는 1948년 11월까지 열린 도쿄 전범재판에 끝내 기소되지 않았고 이후 88세까지 장수했다.

“승리 외에 다른 것은 없다” 38선 북진 명령 내려

맥아더는 5년 후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전쟁을 이끌었다. 당초 트루먼은 맥아더를 유엔군 총사령관에 임명하는 것을 꺼렸다. 하지만 맥아더가 한국과 가까운 일본에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1950년 7월 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유엔의 깃발 아래 미국이 통솔하는 통합사령부 설치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하고 7월 8일 트루먼이 유엔 결의에 따라 맥아더를 유엔군 총사령관에 임명함으로써 맥아더는 한국군은 물론 한국에 파견된 16개국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런데 유엔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을 때 맥아더의 가슴속에는 2년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선거에 대한 꿈이 꿈틀거렸다. 맥아더는 2년 전 공화당 대통령 예비선거에 명함을 내밀었다가 겨우 11명의 선거인단만을 확보하고 꿈을 접었었다.1950년 9월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을 계기로 유엔군의 우세가 점쳐졌을 때 트루먼은 “38선 이북을 넘지 말고 전전(戰前) 상태를 회복하면 된다”는 입장을 분명히 맥아더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의 여세를 몰아 38선을 넘어 한반도 북쪽 끝까지 진격하길 원했다. 맥아더의 결정에 따라 10월 1일 국군이 동부전선의 38선을 돌파한 뒤 빠른 속도로 북진을 시작하고, 맥아더의 미 8군 역시 10월 9일 서부전선의 38선을 넘어 북진에 나섰다. 하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과 중국의 개입을 우려해 10월 15일 태평양상의 웨이크 섬에서 맥아더를 만나 의견을 조율했다. 맥아더는 트루먼에게 “전쟁은 이긴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중공군이 참전하더라도 5만~6만 명에 불과하고 공군도 없다”며 호언장담했다. 그러나 양자 회담 후인 10월 19일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 파죽지세로 남하하고 1951년 1월 초 서울까지 중공군에 내주는 등 전황이 급변하면서 맥아더와 트루먼 사이에 갈등이 불거졌다. 그런데도 맥아더는 여전히 중국과의 대대적인 한 판을 꿈꾸며 확전을 요구했고 트루먼은 3차 대전으로 확전 될지도 모르는 위험한 도박을 꺼렸다. 이런 상황에서 트루먼은 전쟁 전 상태를 회복한다는 당초의 전쟁 목표가 달성된 것으로 보고 3월 20일 사실상 휴전 의사를 밝힌 성명서를 유럽 동맹국에 전달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3월 24일 이른바 ‘도쿄 대반란’으로 트루먼의 평화 협상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승리 외에 다른 것은 없다”며 공개적으로 38선 북진 명령을 내린 것이다. 트루먼은 화가 치밀었으나 다행히 1.4후퇴에 밀리던 유엔군이 다시 서울을 탈환하고 뒤이어 38선 이북으로 공산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면서 갈등이 수면 아래로 잠복했다. 그 무렵 트루먼을 정말 진노하게 하는 일이 일어났다. 도쿄 대반란이 있기 전인 1951년 2월 12일 공화당 하원의원 조지프 마틴이 “대통령은 전쟁에서 승리하겠다는 목표도 없이 수많은 미국의 젊은 군인을 죽인 살인자”라는 연설을 한 후 맥아더에게 의견을 묻는 서한을 보냈는데 맥아더가 소신대로 보낸 답신이 4월 5일 공개된 것이다. 맥아더는 서신에서 트루먼 행정부의 6.25전쟁 정책을 비판했다. 이는 대통령에 대한 명백하고도 공개적인 도전이었다. 트루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4월 11일 맥아더의 해임을 전격 발표했다. 명예로운 은퇴의 기회조차 주기 싫어 자진사퇴가 아닌 파면 형식의 해임이었다. 그러나 미국인들에게 맥아더는 영원한 전쟁 영웅이었다. 트루먼의 백악관 우편실에 항의 편지가 쇄도하고 갤럽 여론조사는 69%가 맥아더를 지지했다. 하지만 이미 해임된 맥아더는 그를 진정으로 사랑한 일본 국민들과 공식적인 작별 인사도 없이 연도에 선 25만 명의 환영을 받으며 4월 16일 일본을 떠났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맥아더와 트루먼의 전쟁 2라운드는 미국에서 펼쳐졌다. 4월 19일 미 상하양원합동회의에서 행한 고별 연설로 맥아더는 다시 한번 전 미국인을 사로잡았다. 34분에 걸친 연설에 의원들은 30회의 박수로 화답했다. “금세기로 넘어오기 전 제가 군문에 들어섰을 때…그 병영에서 가장 즐겨 부르던 군가의 후렴 구절을 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그 노래의 노병처럼, 저는 이제 군인의 삶을 마감하고 다만 사라져갈 뿐입니다.”라는 내용의 연설을 마치고 통로를 지날 때 한 하원의원은 “우리가 오늘 여기에서 들은 것은 직접 현신하신 하나님의 육성”이라고 외쳤다. 뉴욕의 환영 퍼레이드에는 750만 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떠나는 영웅에게 아낌없는 갈채를 보냈다. 맥아더는 1951년 내내 전국을 순회하며 대중을 상대로 연설을 했다. 사실상 트루먼에 대한 정치적 공격이자 1년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예비선거를 의식한 연설이었다. 매카시즘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던 분위기 덕에 맥아더는 공산주의와 결연히 맞서 싸우다 희생된 영웅으로 부각되었다. 정치인들은 유행처럼 트루먼에게 욕설을 퍼부어댔다. 그러나 5월의 상원 청문회를 통해 맥아더의 일부 전략적 오류들이 드러났는데도 자신의 실수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고집불통으로 인식되고, 이에 실망한 여론이 서서히 등을 돌리면서 인기가 차츰 시들해졌다. 여기에 1930년대 맥아더가 육군참모총장일 때 보좌관이면서 2차대전의 영웅인 아이젠하워 장군의 대통령선거 출마로 맥아더의 입지도 좁아졌다. 결국 72세의 노병은 자신의 시대가 지나가고 있음을 받아들여야 했고 영웅은 그렇게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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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플레밍, ‘기적의 약’ 페니실린 발견

국내에서 기존 항생제가 듣지 않는 내성균에 감염되어 사망한 환자가 2017년 37명에서 2022년 539명이 돼 5년간 14배로 증가한 것으로 집계되었다. 항생제는 세균을 죽이거나 증식을 억제하는 약이다. 최초의 항생제인 ‘페니실린’이 1928년 발견되고, 2차대전기 대량생산이 이뤄지면서 인류는 단순한 세균 감염으로 목숨을 잃는 일을 크게 줄였다. 그전까지는 가벼운 상처를 입어도 세균이 번지면 사망하곤 했다. 현재 나온 항생제는 17종에 이른다. 그런데 항생제를 남용하면서 내성을 가진 세균들이 등장했고 여기에 감염되면 기존 항생제가 듣지 않아 사망까지 연결되는 것이다.

20세기 인간이 만들어낸 약 가운데 으뜸

알렉산더 플레밍(1881~1955)이 여름휴가를 마치고 자신이 근무하는 영국의 세인트 메리병원 연구실로 돌아온 것은 1928년 9월 3일이었다. 그런데 그의 눈에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목격되었다. 실험실 책상 위에 쌓아둔 포도상구균 배양 접시에 휴가를 떠날 때는 없던 푸른곰팡이가 자라고 있었는데 푸른곰팡이 주변의 포도상구균이 말라 죽어 있었던 것이다. 훗날 밝혀지지만 푸른곰팡이는 곰팡이의 알레르기 치료법을 연구하고 있던 바로 아래층 실험실에서 바람을 타고 위층 플레밍의 연구실로 날아온 것이다. 플레밍은 이 불가사의한 곰팡이의 정체 규명에 나섰다. 곰팡이를 배양해 새로운 액체 배지(미생물이나 동식물의 조직을 배양하기 위하여 배양체가 필요로 하는 영양물질을 주성분으로 하고, 다시 특수한 목적을 위한 물질을 넣어 혼합한 것)에 옮기고 1주일이 지나 배양액을 희석한 뒤 배양액에 포도상구균을 넣었다. 그러자 포도상구균의 발육이 억제되는 놀라운 현상이 벌어졌다. 이를 통해 곰팡이에서 나오는 어떤 물질이 살아 있는 세균을 파괴하는 강력한 항균 작용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플레밍은 그 곰팡이가 페니실륨 속(屬)에 속한다는 것에 착안해 곰팡이가 생산하는 물질을 ‘페니실린’이라고 명명했다. 계속된 연구와 실험을 통해 페니실륨 속에 속하는 곰팡이 중 페니실륨 노타툼을 비롯한 몇 종류만이 페니실린을 생산하고 나머지는 페니실린을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또한 페니실린이 폐렴, 매독, 임질, 디프테리아, 성홍열을 일으키는 세균에도 항균 작용을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람의 백혈구와 세포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고 수백 배로 희석해도 효능에 큰 변화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20세기 인간이 만들어낸 약 가운데 으뜸이자 의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 평가받고 있는 페니실린의 존재가 마침내 드러난 것이다. 이 위대한 업적의 주인공인 플레밍은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다. 13세에 영국의 런던으로 이주해 고교를 졸업하고 런던의 세인트 메리병원 의과대에 입학했다. 1906년 졸업 후에는 세인트 메리병원에서 의사 겸 연구자로 근무하다가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 부르고뉴 근처 병원에서 감염으로 죽어가는 군인들을 지켜보면서 치료제가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소독법이 민간병원에서는 상당히 효과적이지만 전장에서는 별 소용이 없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플레밍은 일련의 실험을 통해 죽은 조직을 제거하고 상처를 무균 식염수로 씻어내면 감염을 최소화하고 감염증과 싸우는 백혈구를 대량으로 생성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 연구 덕에 많은 장병이 목숨과 팔다리를 구했다. 플레밍은 1918년 전쟁이 끝나고 다시 런던으로 돌아와 세균에 감염된 환자들을 위한 항균 물질을 찾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혔다. 그러던 중 1921년 어느 날 그의 콧물 한 방울이 황색 세균으로 가득찬 배양접시에 떨어졌는데 콧물이 떨어진 부분만 세균이 깨끗이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보고 콧물 속 무엇인가가 항균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0여 년 지나서야 ‘기적의 약’으로 인정받아

▲ 알렉산더 플레밍.

플레밍은 그 분비물 중의 활성 물질이 공기를 매개로 침입하는 세균을 막아주는 인체의 자연 방어 기능의 일부라는 결론을 내리고 콧물에 함유되어 있는 그 물질을 ‘라이소자임’이라고 명명했다. 그리스어로 녹인다는 의미의 ‘라이소’와 효소를 의미하는 ‘엔자임’의 어미를 딴 것이다. 그후 플레밍은 콧물은 물론 눈물, 침, 고름, 달걀 흰자 등에도 라이소자임이 들어 있는 것을 밝혀냈다. 하지만 라이소자임은 인간에게 무해한 박테리아는 죽이면서도 질병을 야기하는 박테리아는 죽이지 못했다. 더구나 플레밍은 병리학자나 생화학자가 아니었기에 라이소자임을 추출하거나 작용 메커니즘을 규명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로부터 6년 뒤 페니실린의 존재를 밝혀냈으니 행운의 연속이었다. 이 때문에 플레밍의 연구 성과를 두고 “행운과 우연의 모자이크”라며 빈정대는 사람도 있었으나 플레밍은 “나는 페니실린을 발명하지 않았다. 자연이 만들었고 난 단지 우연히 그것을 발견했을 뿐이다. 단 하나 내가 남보다 나았던 까닭은 그런 현상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세균학자로 대상을 추적한 데 있다”라고 여유 있게 응수했다. 플레밍은 페니실린을 발견한 후 농도와 시간에 따른 항균력을 측정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항균력이 강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약해졌다. 이것은 페니실린의 상업화에 심각한 장애물이었다. 더 큰 문제는 불순물이 없는 페니실린을 좀처럼 정제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플레밍은 1929년 2월 런던의학 연구모임에서 페니실린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고 1929년 5월 영국 실험병리학회지에 페니실린에 관한 논문을 게재했다. 그러나 그의 논문에 관심을 보인 연구자는 없었다. 곰팡이 배양액이 항균력을 나타낸다는 사실이 이미 여러 차례 보고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연구자들이 궁금했던 것은 세균을 죽이기 위해 몸에 다른 세균을 넣어도 되는 건지, 그게 효과가 있는 건지 여부였다. 이 사실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플레밍의 연구에 환호할 수 없었던 것이다.

플레밍 역시 계속된 시도에도 불구하고 페니실린을 정제하는 데 실패했다. 결국 플레밍의 발견은 한동안 잊혔다. 페니실린이 ‘기적의 약’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은 10년도 더 지나서였다. 호주 출신의 옥스퍼드대 병리학자 하워드 플로리와 독일 태생의 유대계 생물학자 언스트 체인이 1940년 3월 불순하긴 하지만 극소량의 페니실린을 분리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플로리와 체인은 1940년 5월 감염된 쥐를 대상으로 한 실험이 성공하자 1940년 8월 첫 논문을 발표하고 1941년 2월 첫 임상 실험에서 효능을 증명해 보였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플로리와 체인은 플레밍과 함께 1945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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